소설리스트

35화 루시우스에 관한 르네브의 후회 (35/148)


#35화 루시우스에 관한 르네브의 후회
2023.05.05.


“황궁에서 티 파티를?”

“네, 솔티의 왕녀님께서 바슈케르의 귀족들에게 티 파티 초대장을 돌린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르네브는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앰버가 초콜릿이 듬뿍 박힌 쿠키를 한 입 먹고는 말했다.

“지금 귀족들 사이엔 왕녀님의 티 파티 초대장을 구하려고 난리인가 봐요.”

무도회 이후 황궁에서 열린 파티는 따로 없었다.

바슈케르 황궁에 이카르 외의 황족은 없었고, 이카르는 딱히 파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황궁에 오려면 에시카의 초대장이 절실할 터였다.

‘조만간 뵐 거라더니.’

르네브는 아까 레이첼이 했던 말의 의미를 이제 이해했다.

그렇다는 건 에시카가 레이첼에게는 티 파티 초대장을 보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앰버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키어넨이 서랍을 뒤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왜 없지.”

“키어넨, 솔티 왕녀의 티 파티 초대장을 찾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요.”

한참 초대장을 모아 놓은 서랍을 뒤적거리던 키어넨이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레이디,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나한텐 티 파티 초대장을 보내지 않을 테니까요.”

르네브가 태연히 말하자, 앰버가 물었다.

“왕녀님께선 최근에 친분을 쌓은 분들만 티 파티에 초대할 생각인 걸까요?”

키어넨이 퉁명스럽게 앰버의 말을 받았다.

“솔티의 왕녀님께선 속이 무척 좁으신가 봐요. 지난번 다이닝 룸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꿍해 계신 건지.”

“예? 다이닝 룸에서 무슨 일 있었나요?”

앰버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키어넨이 제 일처럼 분해하며 다이닝 룸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왕녀님께서 신분 격차를 논하며 레이디를 무시하려 들었거든요.”

그러자 앰버가 눈을 희번덕 뜨며 말했다.

“어머, 세상에! 어디 자그마한 왕국과 파라디움 대제국을 비교하는 거예요. 수치도 모르고…….”

“다행히 레이디께서 시원하게 한 방 날려 드렸죠.”

키어넨이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앰버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 설마…… 왕녀님께 손을 올린 건 아니시죠?”

앰버의 말에 르네브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에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레이디처럼 고상한 분께서 교양 없이 사람을 때릴 리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키어넨이 얼른 르네브를 감싸고 돌았다.

“그, 그럼요…….”

간단히 대꾸한 앰버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조용히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왜냐면 앰버는 과거 르네브가 사람을 때리는 걸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흠씬.

***

물론 르네브가 미쳤다고 아무 이유 없이, 죄 없는 사람을 때린 건 아니다.

르네브가 어릴 적 세이렌 후작과 패트릭은 평소 서부 국경 지역에서 지내다 건국제에 맞춰 그녀가 머무는 다운타운의 후작 저에 돌아오곤 했다.

이때다 싶은 귀족들이 두 사람을 초대하려 들었고, 몇 번 사교 모임에 다녀온 패트릭은 좀이 쑤신다며 기사들을 불러 모아 연무장에서 대련했다.

르네브는 그들을 몰래 훔쳐보며 따라 하곤 했었다.

호신술을 익혀 두면 언젠가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때마침 세이렌 후작 저에 놀러 온 루시우스에게 그걸 들킨 적이 있었다.

루시우스는 혼자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르네브를 놀려 댔고, 발끈한 르네브는 루시우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황족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법이 있긴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당시 루시우스는 몸집이 자그마했고, 르네브는 빠른 2차 성징을 겪어 루시우스보다 한 뼘쯤 더 키가 컸다.

그 덕에 몸싸움으로 루시우스를 이겨 먹을 수 있었다.

당시 앰버는 옆에서 그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그날 이후 앰버가 묘하게 더 충성스러워졌지.’

물론 르네브와 루시우스 둘 다 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이후에 큰 사달도 없었고.

‘자존심 강한 루시우스 성격에 황비에게 고자질하는 건 내키지 않아서였겠지.’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르네브의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어린이 몸에 빙의해서 그런지, 정신도 조금 미숙했던 시기의 흑역사였다.

그리고 르네브는 이제 와 그때 일을 후회했다.

루시우스를 훨씬 더 두들겨 패 줬어야 했는데, 하고.

***

무심히 마차 창 너머를 응시하던 루시우스의 시야에 화려한 저택이 들어왔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세이렌 후작 저의 전경을 응시하던 루시우스는 생각에 잠겼다.

어린 날의 루시우스는 세이렌 후작 저에 자주 들렀었다.

지금 와선 그것이 일찌감치 르네브와의 사이를 돈독히 해 두려는 어머니의 계획 중 하나였다는 걸 알지만, 그때는 이유도 몰랐다.

그저 저곳에 가면, 제 또래의 재미난 여자아이와 놀 수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건국제를 맞아 서부 변경에서 세이렌의 부자가 돌아오면 후작에겐 검을 배웠고, 소후작에겐 전장의 무용담 따위를 전해 듣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마냥 천진하게.

‘세이렌 후작은 눈치채고 있었겠지.’

애지중지 아끼는 하나뿐인 아들을 주인 없는 후작 저에 자주 걸음 하게 만든 어미의 목적을.

그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이렌 부자는 이따금 저를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고는 했었다.

특히 르네브가 저에게 친근하게 굴 때면 더더욱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었다.

세이렌 가는 황제에게 충성했고, 그렇다는 건 황후를 지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정부들과 차별성을 두듯 제 어미는 황비라 칭해졌고, 저는 황자에 봉해졌어도 그들 부자의 눈에는 루시우스가 정부의 자식과 다름없었을 테다.

‘어쩌면 그런 시선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군.’

한 번은 부러 세이렌 부자의 앞에서 르네브에게 친근하게 군 적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도끼눈을 뜨고 루시우스를 노려봤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자 전하.’

정중한 어투였지만, 꺼지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런 후작에게 르네브는 핀잔을 줬었다.

‘오늘은 황자 전하와 인형 놀이를 하기로 했단 말이에요. 아버지, 그러니까 황자 전하를 돌려보내지 마세요.’

르네브는 세이렌 후작에게 되받아쳤고, 그는 하나뿐인 딸의 말에 꼼짝도 못했다.

물론 또래보다 조숙했던 르네브는 인형 놀이 따윈 하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서부에서 따로 지냈던 세이렌 후작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다음 해의 건국제 때는 선물이랍시고, 온갖 인형들을 마차 한가득 채워 왔던 걸 보면 말이다.

시야에서 세이렌 후작 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루시우스는 줄곧 풀리지 않던 의문을 상기했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르네브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게…….’

루시우스는 처음 세이렌 후작의 손을 잡고 황궁을 방문했던 날의 작은 르네브와, 사춘기를 거쳐 숙녀가 된 오늘날의 르네브를 떠올렸다.

처음엔 정부의 자식이라며 자신을 비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르네브가 어느 순간 변했다.

마치 속 알맹이가 완전히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그때부터 르네브는 루시우스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보여 왔다.

자신에게 조건 없이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어 주던 사람이 르네브 외에 또 있었나.

‘아니지. 정말로 그 애정에 조건이 없었을까?’

루시우스는 문득 든 제 생각에 자조적으로 웃었다.

르네브의 애정 또한 조건이 있었다.

바로 루시우스의 마음을 얻는 것.

‘모름지기 여자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똑같답니다. 완전히 마음을 얻었다고 판단하면 더는 황자 전하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절대로 세이렌 후작 영애에게 마음을 열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어린 루시우스는 어머니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래서 르네브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 결과가 어찌 되었나.

루시우스는 피식 코웃음 쳤다.

한 번은 1황자와 친근해 보이는 르네브를 보고 부아가 치민 적이 있었다.

그래서 부러 트레이더 백작 영애와 친한 척 굴었고, 급기야 기사들의 훈련을 훔쳐보며 몰래 따라 하는 르네브를 비웃어 줬다.
그리고 그녀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평소에도 르네브는 조용한 것 같으면서도 기가 센 편이었지만, 그날은 정말이지…….

화나면 심하게 욱하는 르네브의 새로운 일면에 놀라면서도, 이후 그녀의 앞에서 은근히 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 건 맞았다.

얼굴에 난 상처가 완전히 아물 때까지 루시우스는 어머니를 피해 다녀야 했다.

르네브가 제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왈가닥이라는 사실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다면, 더는 세이렌 후작 저에 놀러 가지 못했을 테니까.

루시우스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 마차가 멈췄다.

세이렌 후작을 제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없게 된 지금, 황제가 되려면 스스로 힘을 키워야 했다.

그래야 어머니의 간섭 없이 르네브에게 황후의 관을 씌울 수 있으므로.

루시우스는 얼굴 반절과 눈까지 가리는 가면을 쓰고, 후드를 뒤집어써서 눈에 띄는 금발을 가렸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

살롱에서의 만남 이후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과 에시카는 부쩍 가까워졌다.

서로 다른 속내를 품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녀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르네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처음 자신의 살롱으로 초대한 귀빈은 르네브였다.

르네브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초대를 정중히 거절했고, 그녀의 다음 타깃은 에시카가 되었다.

때마침 황궁의 소식통에게서 들려온 소문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와 솔티의 왕녀가 함께 정원을 거니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여럿이라고 합니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젊은 황제가 뒤늦게 이성에 눈을 뜬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질 다음 순서는 부인을 맞이하는 것일 테고.

바슈케르에서 황후는 황제 다음가는 서열이고, 황후가 등장한다면 사교계의 서열 또한 바뀔 가능성이 컸다.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현 바슈케르 사교계의 여왕벌이었고, 차기 황후의 존재는 그녀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만약 차기 황후가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을 적대시하기라도 하는 날엔, 그녀의 화려한 사교계 생활도 끝이니까.

그 때문에 다소 귀찮은 솔티 왕녀의 티 파티 준비를 직접 나서서 돕고 있는 참이었다.

“라이나의 왕녀님과 베니스탄의 소공작님 자리는 이곳으로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왕녀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양피지 위를 검지로 쿡 찍으며 에시카의 의견을 물었다.

양피지에는 티 파티 당일의 테이블 배치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녀가 가리킨 곳은 중앙 테이블과 가까운 자리였다.

“음…… 괜찮을 것 같네요.”

에시카는 잠시 고심하는 척하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선 하녀를 쳐다봤다.

하녀가 들고 있던 양피지에 두 사람의 이름을 빠르게 적어 넣었다.

“그럼 이 자리는 말이죠…….”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은 다음 초대객 자리 배정에 대해 말했고, 에시카는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냥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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