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멜리타가 원하는 디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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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멜리타가 원하는 디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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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멜리타가 원하는 디저트
2023.05.04.
어린 시절을 곱씹자, 자연스럽게 루시우스의 자그맣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루시우스는 제법 귀여웠다.
이다음에 커서 르네브를 배신할 거라는 원작 내용이 믿기지 않을 만큼이나.
“그랬나?”
르네브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무심코 과거 이야기를 피하려는 기색을 내비친 모양이었다.
키어넨이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앰버는 참 대단하네요.”
“뭐가요?”
구겔호프를 연신 입에 밀어 넣는 앰버에게 키어넨이 물었다.
“폐하의 전속 요리장에게서 디저트를 받아 온 것 말이에요. 솔직히 전 백작님께서 앰버를 골탕 먹이려는 줄 알았거든요.”
“그거 말이죠? 후…….”
앰버가 아저씨처럼 거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잠깐 사이에 다사다난했던 고난에 대해 줄줄 읊었다.
***
“세이렌 후작 영애는 매우 건강하세요.”
멜리타가 깔끔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소견을 내놓았다.
“웨버링 백작, 그게 다인가?”
이카르가 미간을 모으자, 옅게 한숨을 내쉰 멜리타가 덧붙였다.
“신체적으로는 그렇다는 뜻이에요.”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히 말해.”
이카르의 표정이 조금 더 험악해졌다.
“조금 마르신 것 외에 신체적으로는 특별한 점이 없어 보였거든요. 그렇다면 정신적인 문제가 신체로 나타났다고 볼 수밖에요.”
“세이렌 후작 영애의 정신에 이상이 있다는 뜻인가?”
의자 팔걸이에 턱을 괸 이카르의 미간이 더욱 깊이 패자, 멜리타가 서둘러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에요. 그리고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정신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의사는 아직 없죠. 그건 바슈케르뿐 아니라, 대륙 어디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래서, 치료 방법이 없다?”
이카르의 직언에 멜리타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다음에는 같은 증상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는 것이 최고겠지만, 행여나 영애께서 같은 증상을 호소하시거든 그때의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게 말씀해 주세요.”
“…….”
이카르가 불쾌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멜리타를 쳐다보자, 그녀는 답지 않게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해결 방법을 확실히 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없으면 찾아.”
이카르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고, 멜리타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멜리타가 이내 입을 뗐다.
“그래서 말인데요. 폐하. 이번 기회에 정신 질환을 연구하는 기관을 만드는 게 어떨까요?”
이카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해. 드한에게 말해 두지.”
이전 전쟁으로 후유증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얼마간은 평화롭겠지만, 평화 협정이 종료되면 그들은 다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전쟁은 끝날 것이다. 평화가 찾아온 다음 병사들의 후유증은 황제인 이카르가 짊어져야 할 몫이고.
그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이카르도 전부터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다.
비단 자신만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던 멜리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 불면은 요즘 어떠세요?”
“웨버링 백작, 볼일 끝났으면 그만 나가 보도록.”
“필요하실 것 같아서 일단은 챙겨 왔어요…….”
멜리타는 가방에서 꺼낸 종이봉투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이카르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달칵.
작게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방음에 특별히 신경 쓴 내부는 주변 소음 하나 없이 고요했다.
천천히 생각을 이어 나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카르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봉투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는 평소 깊이 잠들지 못했다.
추격자를 피해 쪽잠을 자던 어린 시절과 여러 나라를 떠돌며 암살 및 용병 생활을 했던 과거가 원인이었다.
언제나 쪽잠을 자며 간신히 생을 연명하던 이카르는 몇 달 전 동굴에서 난생처음 단잠을 잤다.
시린 새벽 공기에도 품에 쏙 들어오는 온기는 따뜻했다.
코끝에 부드럽게 감기던 체향은 너무 달아서 적국에 잠입하는 내내 날 서 있던 이카르의 신경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는 듯했다.
잠시 동굴에서의 일을 곱씹던 이카르는 이내 비밀 통로와 황궁 무도회 때를 돌이켜 보았다.
르네브의 증상은 황궁 무도회 때는 가짜 왕녀의 등장에 반응을 보였었고, 비밀 통로에서는 무엇이 원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공통점이 없어.’
이카르는 고개를 젖히고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다시 온천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귀 끝에 열감이 몰렸다.
이카르는 얼른 그 기억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파라디움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파라디움의 황제 몰래 적국에 숨어든 상황이었기에, 오래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해서 이카르는 빠른 결정을 내릴 필요를 느꼈다.
파라디움 황제는 황녀 대신 르네브를 바슈케르로 보내는 것에 동의했을지 몰라도, 이카르까지 동의한 건 아니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르네브에게 황녀와 견줄 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또 그 속에 숨은 꿍꿍이는 없는지 파악해야 했다.
평소라면 세이렌 후작 영애와 그녀의 뒷배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일에 이카르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신속하게 상황 파악을 끝마쳐야 했고, 애석하게도 그런 일에 가장 특화된 능력을 갖춘 사람은 황제인 이카르 자신이었다.
그 탓에 세이렌 후작 저에 숨어들었다가 파라디움의 황자가 강제로 르네브에게 입 맞추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왜인지 심기가 불편해졌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던 이카르는 돌연 불쾌해진 자신의 기분에 의문을 품었다.
파라디움의 황자가 르네브에게 한 짓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누구라도 그 광경을 목격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테니까.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까지 더러운 기분이 드는지 의문이었다.
***
르네브는 커다란 욕실에 가득 찬 뿌연 수증기와 대형 욕조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와……!”
귀빈실의 여러 공간 중 이 대형 욕조가 단연코 최고로 마음에 들었다.
파라디움엔 제대로 된 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팔팔 끓인 뜨거운 물과 찬물을 욕조에 가득 부어 온도를 맞췄는데 그 중노동은 하녀들의 몫이었다.
좁은 욕조만 채워도 족히 양동이 수십 통의 물이 필요했고, 목욕 한 번 하려면 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물론 르네브의 시간이 아닌, 하녀들의 시간이.
현대의 수도 시설에 익숙했던 르네브는 그녀들의 고된 노동이 항상 고마우면서도 미안했었다.
그런데 바슈케르의 새로 지은 귀빈실에는 제대로 된 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던 거다.
‘바슈케르의 수로 시설을 배워서 파라디움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르네브는 그런 생각을 하며 뜨거운 물속에 턱까지 담갔다.
자연히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또 배워 갈 만한 게 뭐가 있을까?’
르네브는 하녀들이 엎드려서 걸레로 직접 바닥을 닦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기분을 느꼈었다.
‘밀대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는데.’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런가?
왜 이제야 좋은 방법을 떠올린 건가 싶을 만큼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편의를 위한 용품들이 또 뭐가 있으려나…….’
계속해서 생산적인 것들이 떠올랐다.
르네브는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명목상이라고는 해도 유학을 온 것이니, 바슈케르의 선진 문물 및 문화를 배워서 파라디움에 전파하고 싶었다.
이제는 황후가 아니지만, 여전히 파라디움 제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문제 쪽으로 생각이 옮겨 가는 것을 깨닫고 르네브는 자조했다.
“아가씨, 아가씨?”
르네브는 문득 어깨를 조심스레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앰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욕실에 너무 오래 계셔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어서 들어와 봤어요.”
“아, 깜빡 졸았나 보네. 걱정시켰구나, 미안.”
“처소 이동 때문에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앰버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거품 낸 솔로 르네브의 팔을 문질렀다.
너무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솔질에 기분이 좋아졌다.
르네브는 은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와 물거품을 바라보다 작게 난 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덧 바슈케르와 베니스탄을 가르는 산맥은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들어 있었다.
‘시간 참 빠르네.’
파라디움을 떠나 바슈케르에 온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었다니. 하지만 파라디움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아직 2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
갓 구운 빵과 버섯 수프로 간단히 식사를 마친 르네브는 산책을 할 겸 외출을 나섰다.
귀빈실을 막 빠져나왔을 때 마침 그 앞을 지나던 레이첼이 르네브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영애!”
황궁 무도회 이후 레이첼과는 쭉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레이첼은 반가운 얼굴로 르네브를 대했다. 르네브도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왕녀님, 오랜만에 봬요.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뭐, 이런저런 일들이 있긴 했죠. 지금 대화 나누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 조만간 식사라도 함께하면서 대화 좀 나눌까요?”
“좋아요.”
“아,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뵙겠네요.”
‘응? 조만간 뵙는다니?’
르네브가 의문을 품었을 때 레이첼의 하녀가 채근했다.
“왕녀님, 어서요…….”
“알겠으니 재촉하지 말렴. 그럼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미간을 살짝 찌푸린 레이첼이 손을 흔들며 빠르게 멀어졌다.
오늘도 초대받은 사교 모임에 가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생기 넘치는 레이첼의 모습에 르네브는 잠시나마 과거의 즐거웠던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황자비가 되어 처음 파라디움 황궁에서 살게 됐을 땐 앞으로 좋은 일만 가득할 거란 근거 없는 믿음으로 가득 찼었다.
당시 루시우스는 황위와 거리가 먼 황자였고, 르네브 또한 황위 쟁탈이라는 태풍의 눈에서 멀게 느꼈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시우스가 황좌에 욕심을 드러냈고, 르네브는 킹 메이커 역할을 나서서 했다.
그러던 중 1황자의 원인 모를 병사에 이어 2황자의 실각은 신이 루시우스를 돕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루시우스의 황위 계승권은 한순간에 1위로 올라섰으니까.
‘응?’
기억을 더듬던 르네브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이번엔 회귀 전과 달리 1황자의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만약 2황자의 실각 소식마저 회귀 전보다 앞당겨진다면 어떻게 될까?
루시우스의 황위 등극 또한 앞당겨질 것이다.
루시우스가 황제가 되고, 평화 협정 종료에 맞춰 파라디움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막연한 불안이 올라왔다.
르네브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 잡념을 몰아냈다.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해 가며 지금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레이디?”
키어넨이 의아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르네브는 부러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키어넨이 르네브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네요. 하늘이 맑아요.”
무리 지어 두둥실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다급한 앰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앰버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