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분노하는 황비 (30/148)


#30화 분노하는 황비
2023.04.30.


“여행 가 본 적이 없다, 라…….”

집무실로 향하며 이카르는 조금 전 르네브의 말을 작게 곱씹었다.

분명 황궁 무도회에서 가짜 왕녀의 등장으로 르네브는 동요했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누구보다 그녀의 가까이에 있던 이카르는 똑똑히 보았다.

왕녀에게 품은 르네브의 명백한 적의를.

귀빈실 공사가 끝나기 전까지 르네브와 솔티의 왕녀 두 사람은 함께 화원에 머물러야 했다.

불가피하게 얼굴 마주칠 일도 생길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카르는 서둘러 두 사람의 관계를 조사했다.

‘솔티의 왕녀님과 세이렌 후작 영애 두 분 사이의 접점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드한의 보고에 의하면 둘은 이전까지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다.

솔티의 왕녀 아드리아는 솔티 왕국을 벗어난 적이 없었고, 그건 진짜 왕녀 대리로 바슈케르에 와 있는 가짜 왕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이렌 후작 영애 역시 바슈케르로 오기 전까지 파라디움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9년 전, 세이렌 후작과 그의 가족이 국경 근처 별장에 머무른 정황 증거를 발견했지만, 르네브 본인은 그곳에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정말로 그곳에 가 본 적이 없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그도 아니면…….

이카르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서류를 들여다보던 드한이 벌떡 일어났다.

“다녀오셨습니까, 폐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에게 드한이 물었다.

“영애께서 좋아하셨습니까?”

이카르는 조금 전 선룸에서 마법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르네브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땠더라, 좋아했던가?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묘하게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폐하께서 그렇게 로맨틱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 뭡니까?”

베인이 동의를 구하듯 드한을 쳐다봤다.

드한은 곤란한 듯 베인의 시선을 피했다.

이카르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웬만해선 이카르의 심기를 기민하게 눈치챌 베인이었으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는 오늘따라 눈치가 없었다.

“폐하께서 르네브 꽃 모양으로 마법석 세공을 요청하셨다죠?”

처음 채굴한 마법석은 팔지 않는다.

한참 잘나가던 프라이슨 자작가가 몰락한 뒤에 생겨난 일종의 미신이었다.

과거 프라이슨 자작이 소유한 땅에서 많은 양의 마법석이 발견됐다.

마르지 않는 샘이라 여겼던 토지에서 더는 마법석이 나오지 않게 되자마자, 프라이슨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채권자들의 입을 통해 프라이슨 자작 저에서 마법석은커녕, 마법석 부스러기도 찾을 수 없더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마법석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마법석만 믿고 흥청망청 돈을 쓰다간 언젠가 망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하던 행위였으나, 어느 순간 미신처럼 돼 버렸다.

하지만 이제껏 이카르는 처음 채굴한 마법석을 보관하는 행위가 어리석다 여겼다.

하지만 드한의 한마디가 이카르의 마음을 움직였다.

‘보기 좋게 세공하면 꽤 그럴듯한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만.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말을 듣고 어떤 모양으로 마법석을 세공할지 고민하던 이카르의 눈에 마침 르네브와 이름이 같은 르네브 꽃이 눈에 띈 것도 참으로 공교롭긴 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히죽이는 베인에게 이카르는 낮게 경고했다.

“베인, 서류 업무만 해서 몸이 아주 편한 모양이지? 오늘 업무가 끝나면 연무장으로 따라오도록.”

그제야 베인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예, 폐하…….”

드한은 까불다가 혼날 줄 알았다는 듯 베인을 쳐다보고는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여느 때처럼 깃펜 서걱거리는 소리와 양피지 부딪히는 소리만이 적막한 황제의 집무실을 채웠다.

***

꼼꼼히 닫힌 짙푸른 커튼이 오후의 태양을 차단했으나, 화려한 샹들리에가 내부를 환히 밝혔다.

황비의 비밀 공간의 벽면에는 큼지막한 초상화 두 개가 걸려 있었다.

왼편에는 금빛 의자에 앉은 현 황제가, 오른편에는 장성한 루시우스가 그려져 있었다.

파라디움의 황비 넬리아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그레이트 홀 가장 안쪽의 금빛 의자에 앉은 제 아들의 모습을 덧그렸다.

넬리아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앤드니 백작 부인의 보고를 듣자마자, 그녀의 붉은 입매가 비틀렸다.

“1황자가 황궁 정원에 산책을 나설 정도로 건강을 회복한 모양입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1황자는 침실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지 않았다.

외부엔 계절성 독감에 걸려 휴식 중이라고 했으나, 넬리아는 1황자의 병세가 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것도.

축배를 들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넬리아에게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1황자 전하께서 최근 슈트루델을 찾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갑자기 입맛이 바뀐 것이라고 치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슈트루델은 1황자가 다년간 꾸준히 즐기던 디저트였다.

그 속에 넣은 오피움은 매우 소량이었지만 중독성이 강했고, 끊겠다고 마음먹더라도 순전히 의지만으로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돌연 찾지 않다니?

장기간에 걸친 1황자 암살 계획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간 것만은 확실했다.

이는 넬리아를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넬리아는 올라온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들고 있던 찻잔을 내던졌다.

쨍강.

날아간 찻잔이 벽면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음을 자아냈다.

그에 그치지 않고, 넬리아는 앤드니 백작 부인 몫의 찻잔과 티 포트, 화병까지 모조리 집어던졌다.

더는 깨뜨릴 것이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앤드니 백작 부인이 차분히 말했다.

“황비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리 쉽게 중독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 잠깐은 참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방심했을 때가 제일 무서운 법이니까.”

그사이 냉정을 되찾은 넬리아가 소파에 등을 기대앉자, 앤드니 백작 부인이 설렁줄을 당겨 하녀를 불렀다.

하녀들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바닥과 테이블을 정리했다.

금세 말끔히 정리된 테이블 위에 새로운 티 포트와 찻잔이 놓였다.

우아하게 찻물로 타는 목을 축인 넬리아는 앤드니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처리는 확실히 했겠지?”

“그럼요. 뒤늦게 황후 쪽에서 단서를 찾으려 든다 해도 아무 증거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언제나 앤드니 백작 부인의 일 처리는 확실히 믿음직스러웠다.

황후에게 덜미를 잡힐 일은 없을 것이었다.

“당분간은 황후의 경계가 심할 테니 1황자는 내버려 두는 편이 좋을 테고…….”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루시우스가?”

뜬금없는 아들의 방문 소식에 의아한 표정이 되었던 넬리아는 이내 앤드니 백작 부인을 쳐다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들은 앤드니 백작 부인이 숨겨진 문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넬리아도 응접실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우리 황자님.”

넬리아가 루시우스를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몇 번 토닥였다.

“차는?”

넬리아가 금테를 두른 백색 티 포트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마셨습니다.”

아들의 무뚝뚝한 대꾸에 조금 섭섭했지만, 넬리아는 그러려니 하며 티 포트를 내려놓았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로 이 어미를 찾아왔나요?”

“최근 바슈케르에서 황궁 무도회가 있었다던데,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럼요. 물론 들었습니다.”

넬리아는 바슈케르에 심어 놓은 밀정에게 전달받은 내용을 덧붙였다.

“바슈케르의 황제가 세이렌 가의 여식과 함께 황궁 무도회에 참석했다죠?”

루시우스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넬리아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세이렌 가의 여식이 현재 머무는 곳은 화원이라더군요.”

가만히만 있었어도 파라디움의 차기 황후 자리를 손에 쥐었을 텐데.

‘멍청하긴.’

유학을 빙자했으나, 그녀는 인질 신세였다.

상황이 급변해 양국 간에 전쟁이라도 발발한다면 바슈케르의 황제는 가장 먼저 세이렌 후작 영애의 목숨으로 파라디움을 압박할 것이다.

국가를 버리고 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딸의 숭고한 희생을 뒤로하고 제국에 헌신할 것인지.

세이렌 후작의 선택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딸이 화원에 머문다는 것은 그들 가문에 절대로 명예롭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유학 기간을 잘 견디고 파라디움으로 무사히 돌아온다 해도 좋은 혼처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그런 마당에 감히 황제가 될 제 아들의 짝이 된다는 게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굳이 자신을 찾아와 세이렌 후작 영애의 소식을 묻는 아들을 보니 넬리아는 조금 불안해졌다.

“루시우스, 우리 황자님. 큰일을 하려면 지나간 일은 빨리 잊는 편이 좋습니다.”

루시우스를 다독이며 넬리아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곧 황제 폐하의 탄신일이 돌아오는군요.”

그렇게 황비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뒤 루시우스는 응접실을 나섰다.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앤드니 백작 부인이 루시우스를 발견하곤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에게 잠깐 시선을 준 루시우스는 곧바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곤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화원이라니. 어째서 르네브를 그런 곳에?’

바슈케르 황제가 불러들인 귀빈 중 가장 국력이 강한 곳은 파라디움이 맞긴 했다.

그러니 보여 주기 식으로 르네브를 파트너로 삼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화원이 어떤 곳인가?

선대 바슈케르 황제들의 정부가 머물던 곳이다.

루시우스는 바슈케르 황제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르네브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텐데…….

***

그 권세를 대변하듯 바슈케르에서도 손꼽히는 뒤렌부르크 후작가의 대저택.

에시카가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살롱에 들어서려 하자, 입구에 선 젊은 시종이 물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에시카는 들고 있던 초대장을 그에게 건넸다.

뚜렷한 뒤렌부르크 후작가의 인장을 확인한 시종이 에시카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왕녀님.”

에시카는 우아하게 고개만 살짝 까딱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살롱 안은 먼저 온 손님들로 가득했다.

에시카가 벽에 걸린 미술품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화려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다가왔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왕녀님.”

가벼운 인사말에 이어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에시카를 향한 경탄의 말들을 쏟아 냈다.

에시카도 예법에 맞춰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과하지 않게 칭찬했다.

에시카의 칭찬이 만족스러웠는지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분은 솔티에서 오신 아드리아 왕녀님이세요.”

뒤렌부르크 후작 부인이 살롱에 초대된 다른 귀족들에게 에시카를 소개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녀님.”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녀님.”

여성 귀족들은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취했고, 남성 귀족들은 에시카의 손등에 입을 맞춰 존경을 표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긴장으로 살짝 손을 떨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귀까지 붉혀 가며 에시카의 미모를 훔쳐봤다.

귀부인과 영애들도 지지 않고, 에시카의 미모를 칭찬하기 바빴다.

‘이 맛에, 사교 모임을 찾는 거지.’

원래 그녀의 신분이었다면, 얼굴 한 번 볼 기회조차 없었을 고위 귀족들이다.

그런 그들이 제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습에 에시카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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