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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조금 특별한 선물 (29/148)


#29화 조금 특별한 선물
2023.04.29.


완결 후 한참이 지나 스핀오프 격의 방대한 외전이 나왔는데 내용은 매우 엉뚱하게도 에시카와 루시우스를 주로 다루지 않았다.

말 그대로 if.

소모성 조연이었던 이카르가 죽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그래서 읽다가 말았지.’

엉뚱한 전개에 흐린 눈을 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멀리서 바슈케르 황궁 안에서 걸어오는 이카르를 보자마자, 그녀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이카르다!’

그는 키만 멀쑥하니 큰 게 아니라, 검술로 다져진 근육질 몸을 가졌다.

거기다 팔다리가 길쭉하고 비율도 매우 좋았다.

어디 그뿐인가.

단정한 입매 하며 두툼하면서도 날카로운 콧날, 쌍꺼풀 없이도 크고 시원한 눈매는 환상의 조합을 자랑했다.

금욕적으로 보이면서도 묘하게 색스러운 분위기가 공존했다. 그야말로 완벽에 완벽을 기한 신의 조형물임이 틀림없었다.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천년의 분노가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근데 정말 이해가 안 되네.’

그녀는 남주라면 무릇 흑발에 적안이 옳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서브남이야말로 금발의 벽안이 잘 어울린다고.

그런데 이 책의 남자 주인공인 루시우스는 서브남의 전형을 따랐다.

찬란한 금발과 시리도록 푸른 벽안.

‘무릇 남주라면 흑발에 적안이 국룰이지. if 외전 최고.’

조연의 이야기라며 외전은 보지도 않았던 과거는 이제 완전히 잊은 채, 만족스럽게 눈매를 휘어 웃으며 에시카는 날 듯이 이카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 폐하!”

***

침실로 돌아온 르네브는 소파에 등허리를 편히 기대앉아 조금 전의 기시감에 대해 생각했다.

‘최근에 생긴 상처는 아닌 것 같았는데.’

흰 얼굴과 대비되는 툭 불거진 손마디는 왕녀의 손이라기보다는 하녀의 것에 가까웠다.

“레이디, 차 드세요.”

그때 키어넨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꽃차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키어넨.”

“뭘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앰버만큼 레이디께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죠.”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키어넨은 충분히 내게 도움이 되고 있어요.”

르네브의 칭찬에 키어넨이 수줍게 입술을 말아 물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부끄러운지 맞잡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꽤 귀여웠다.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던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키어넨의 손은 조금 건조해 보일지언정 거칠지는 않았다.

“키어넨, 이전에는 황궁에서 무슨 일을 했어요?”

“레이디를 모시기 전까지는 세탁 일을 주로 했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전에 키어넨은 이카르의 재킷을 신속하고도 깨끗하게 세탁해 온 적이 있었다.

“아…….”

낮게 탄성을 내뱉은 르네브의 시선이 키어넨의 손에 머물렀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키어넨이 얼굴을 붉히며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레이디의 손에 비하면 많이 거칠고 못난 손이죠. 날이 따뜻할 때는 그나마 나은데, 추울 때는 찬물로 세탁해야 했거든요.”

르네브는 서랍에서 꺼낸 고급 향유 병을 키어넨에게 건넸다.

“매일매일 꼼꼼히 발라요.”

“레이디, 이렇게 귀한 걸 받아도 될까요?”

“그럼요. 그리고 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멋지다고 생각해요.”

키어넨은 거친 자신의 손을 창피해하는 모양이었지만, 르네브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직업병도 가지게 된 것이다.

멋져……!

키어넨이 조금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레이디의 시중을 들면서 향유 사용이 잦아서 그런지 전보다는 손이 정말 부드러워졌어요.”

키어넨의 말대로였다.

그럼에도 최근의 상처만 사라졌을 뿐, 그녀의 손에는 과거 고된 노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에시카의 손과 닮아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이전과 달라진 에시카의 등장 시기부터 그녀의 신분까지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무엇보다 그에 따른 대비책이 필요했다.

회귀 전처럼 원작과 같은 전개로 흘러간다면 르네브를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니까.

과거엔 에시카와 자신 사이에 루시우스가 끼어 있었다.

카엘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에시카는 르네브에게 장애물이었다.

마찬가지로 에시카 또한 자신의 아이를 지키고, 루시우스의 총애를 잃지 않으려면 르네브가 방해되었을 것이다.

해서 에시카는 전심전력으로 르네브를 실각시키고자 부단히 애썼다.

‘나중에 가서는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았지.’

세이렌 후작가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는 르네브와 달리 에시카에게 믿을 것이라곤 루시우스의 총애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에시카와 르네브 사이엔 경쟁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엔 에시카가 왕녀라는 높은 신분까지 얻었다.

그럼에도 제게 보인 에시카의 고압적인 태도가 조금 신경 쓰였다.

르네브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데, 시종이 찾아왔다.

“폐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

시종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접실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르네브는 다시 한번 시종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전에도 이카르의 말을 전하러 왔던 시종이 맞는데.’

때아닌 에시카의 등장으로 최근 르네브는 긴장 상태였다. 불안해진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환한 대낮의 황궁엔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키어넨도 시종의 얼굴을 봤으니, 무슨 일이 생기거든…….

르네브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선룸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라미드 모양의 선룸에는 꽃들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우뚝 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르네브는 긴장의 끈을 놓았다.

자신을 부른 사람이 이카르라는 사실만으로 왜 안심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폐하, 모셔 왔습니다.”

시종이 이카르에게 보고했고, 그제야 그가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은 나른하게 풀려 있었고, 분위기 또한 온화했다.

“금방 왔군.”

이카르가 눈짓을 보내자, 시종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나조차 잊고 지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름대로 관리가 잘돼 있더군.”

선룸 안으로 한 걸음 내딛자, 달콤하면서도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르네브는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셨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이 저 멀리 달아나 버린 것처럼 상쾌했다.

자연히 르네브의 얼굴에 미소가 깃들었다.

“표정을 보니, 이곳이 마음에 드나 보군.”

“네, 정말 아름다워요.”

삭막할 것까지는 없지만, 사실 바슈케르 황궁은 다소 건조한 느낌을 풍겼다.

실리를 중히 여기는 이카르의 성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필요한 것만 딱 갖춰 놓은 느낌이 강했다.

르네브는 그 이유가 황후의 부재 때문이라 생각했었다.

“선대 황후께서 종종 시간을 보내시던 곳이지.”

“선대 황후라 하시면…….”

르네브는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이카르의 가족 관계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다.

“내 어머니시지.”

이카르가 속눈썹을 내리깐 채로 잠시 침묵했다. 어딘지 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걸까?’

감히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물어도 좋을지 조금 망설여졌다.

르네브가 입술만 달싹이는데, 금세 표정을 갈무리한 이카르가 손에 든 걸 내밀었다.

작은 벨벳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

작은 벨벳 상자 안에는 반투명한 꽃 모양 보석이 들어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곧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거 혹시 마법석인가요?”

“맞아. 나트하임 지역에서 채굴한 마법석을 세공한 것이라고 하더군.”

“예쁘네요. 그런데 꽃 모양으로 세공한 건 누구 생각이었나요?”

르네브는 절대로 이카르 머릿속에서 나온 의견이 아닐 거라 확신하며 물었다.

“영애, 정말 섭섭하군.”

이카르가 코웃음 쳤다.

“설마, 폐하께서 꽃 모양으로 만들라고 지시를 내리신 건……?”

“……당연히 아니지.”

이카르가 단호히 선을 그었다.

원작의 루시우스가 예쁘게 세공한 마법석을 에시카에게 선물했던 일을 잠시 떠올렸던 르네브는 곧 고개를 주억거렸다.

르네브는 꽃 모양으로 마법석을 세공하기로 한 게 드한이나 베인, 또는 다른 누군가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 여겼다.

이카르일 리가 없겠지.

처음 채굴한 마법석은 기념할 용도로 보관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단지 그런 이유일 뿐 꽃 모양은 큰 의미가 없는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 나트하임 지역과 관련된 소문이 돌지 않고 있었다.

르네브는 이카르가 나트하임에서 새로 발견된 마법석을 외부에 알릴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굳이 있는지도 몰랐던 선룸으로 자신을 몰래 부른 것일 테고.

꽃 모양의 마법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르네브는 옅게 미소 지었다.

싱그럽게 피어난 꽃들 속에 파묻혀 있자니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가 한결 풀어지는 것 같았다.

“잘 간직할게요. 감사합니다, 폐하.”

용건은 이걸로 끝이라 판단한 르네브가 몸을 돌리려는데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목을 붙잡았다.

“……?”

아프지 않게 살짝 그러쥔 정도였지만, 맞닿은 피부로 이카르의 열기가 전해져 왔다.

르네브는 제 손목을 쥔 이카르의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었다.

“폐하, 제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귀빈실 공사가 며칠 내로 끝날 거라더군. 슬슬 이사 준비를 하도록.”

“공사가 벌써 끝났나요?”

“왜? 화원이 꽤 마음에 들었나? 영애가 원한다면 지금처럼 화원에 계속 머물 수 있게 조치하지.”

이카르가 짓궂게 웃었다.

거리상 화원은 황제의 침실과 가까웠고, 새로 지은 귀빈실은 그보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르네브가 계속 화원에서 지내고 싶다고 말하면 이카르와 떨어지기 싫어해서라고 오해할 수도 있었다.

“하루빨리 귀빈실이 완공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르네브는 선을 그으며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제야 이카르가 르네브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영애는 여행 좋아하나?”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르네브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여행이요?”

“그래.”

무언가에 대한 호불호를 가지려면 그에 관한 경험이 필요하다.

르네브는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따로 여행해 본 적이 없었다.

“글쎄요. 여행 가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바슈케르로 올 때를 여행이라 친다면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네요.”

그건 왜 물어보느냐고 되물으려는데 생각에 잠긴 듯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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