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전남편과 정부의 다정한 기억 대신 (23/148)


#23화 전남편과 정부의 다정한 기억 대신
2023.04.23.


“폐하, 원래 점심을 이렇게 늦은 시간에 드세요?”

“오늘은 오전 일이 조금 늦어졌군.”

“아…….”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이카르의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이기는 했다. 물론 약간 나른해진 눈매 때문인지 퇴폐미가 한층 짙어졌지만.

“들지.”

“네, 폐하.”

르네브는 여전히 테이블 다리 부러지도록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조금 놀랐다.

지난번 이카르와 식사했을 때는 그녀가 처음 바슈케르로 왔을 때였다.

처음으로 대접하는 거라 음식 준비를 많이 한 줄 알았는데.

“그런데 폐하.”

“뭐지?”

우아한 손놀림으로 두꺼운 스테이크를 썰던 이카르가 시선을 들어 르네브를 쳐다봤다.

“항상 이렇게 많이 드세요?”

무슨 문제 있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이카르가 입속으로 큼지막한 고깃덩이를 밀어 넣었다.

도톰한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잘도 씹는다. 고기를 완전히 씹어 삼킨 이카르가 말했다.

“영애는 새 모이만큼 먹더군.”

르네브는 구운 연어를 포크로 쿡 찍으며 대답했다.

“평범한 식사량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파라디움에서는 다들 그렇게 적게 먹나?”

르네브는 파라디움 사람들의 식사량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전남편과의 식사 자리가 떠올랐다.

루시우스는 미식가였다.

대체로 귀족들의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루시우스는 단연코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같이 산 십여 년간, 갈아 치운 요리장만 수십에 이르렀고 대부분의 경우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는 법이 없었다.

음식이 짜다, 달다, 싱겁다 하면서 잘 먹고 있는 르네브의 입맛도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영애? 무슨 생각하는 거지?”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이카르가 다른 곳으로 흐른 르네브의 의식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글쎄요. 파라디움의 다른 분들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게는 이곳 음식이 제법 입에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면 여러모로 곤란할 테니.”

이카르가 로스트비프 접시를 르네브의 접시로 놓아 주며 그렇게 말했다.

겉은 바짝, 속은 살짝 익힌 먹음직스러운 고기 조각의 자태를 내려다보던 르네브는 일순 파고드는 과거의 일을 잠시 곱씹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저녁은 함께 들자고 하셨는데, 어쩌시겠어요?’

그때 르네브는 조금의 기대를 품고 부부 전용 다이닝 룸으로 향했었다.

유산하고 힘든 시기를 겪는 그녀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건네려나 보다, 하며.

그러나 기대는 곧 절망이 되어 돌아왔다.

부부 전용 다이닝 룸에는 미혼의 영애가 앉아 있었고, 새로 들일 정부라며 르네브에게 소개를 한 것이다.

기함하는 르네브에게 루시우스는 메마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었다.

‘이미 말을 전해 들은 것으로 알아. 황후도 지금 국제 관계가 민감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이.

‘이럴 때일수록 후계가 필요해. 내 아이를 낳아 줄 여자이니 잘 대해 주길 바라.’

배신감으로 치를 떠는 르네브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눴었다.

‘에시카, 왜 그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나?’

‘음……. 고기에서 잡내가 조금 나는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제가 비위가 조금 약해서.’

심지어 르네브가 겨우겨우 입에 한 조각 밀어 넣었던 로스트 비프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듣고 보니 그렇군. 시종. 당장 테이블에서 이 음식을 치우게. 이걸 만든 요리사도 해고하도록.’

한번 과거를 떠올리자, 좋지 않은 기억들이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르네브는 입속에 넣은 로스트 비프를 씹는 것에 집중했다.

부드러운 육질과 씹을 때마다 배어나는 고소한 육즙.

르네브가 조금 전투적으로 고기를 씹어 삼킬 때였다.

이카르가 풋,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르네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카르를 쳐다봤다.

“다람쥐처럼 잘도 먹는군.”

나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르네브를 빤히 보며 이카르가 말을 이었다.

“이 음식이 영애의 입에 잘 맞는 것 같으니, 더 가져오도록.”

르네브는 이미 배가 부르다고 말하려 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반달처럼 눈을 접어 웃는 이카르의 얼굴을 처음 봤기 때문일까?

어쩐지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그렇고, 황궁 무도회에서 그대가 입을 드레스는 이쪽에서 준비하기로 했어. 오후에 재봉사가 찾아갈 거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대답은?”

로스트비프를 막 입에 넣었던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카르의 잘생긴 미간에 미약한 실금이 드리웠다.

“파트너가 돼 달라고 말했을 텐데,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조금 초조해 보이는 이카르를 보며 르네브는 부러 느리게 입안의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그러다 실시간으로 깊게 패는 이카르의 미간을 보고 얼른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좋아요. 이번 무도회에 제 파트너가 돼 주세요. 폐하.”

르네브는 아픈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덧씌웠다.

앞으로 로스트비프를 먹을 때는 이카르의 미소를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남편과 정부의 다정한 모습이 아니라.

“좋아. 그대의 요청을 수락하지.”

그제야 이카르의 입매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

이카르와 식사하고 화원으로 돌아가는 복도에서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과 맞닥뜨렸다.

눈이 마주치자, 벨케인 소공작이 반가워하며 바로 말을 걸어왔다.

“식사 시간에 보이지 않으시던데, 식사를 거르신 건 아니시겠죠?”

귀빈들과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한 건 아니지만, 다이닝 룸에서 계속 함께 먹었으니 걱정한 모양이었다.

“그럼요. 오늘은 다른 곳에서 식사했어요.”

“다른 곳이라, 오늘은 혼자 드시고 싶으셨나 봅니다.”

“돌려 드릴 것도 있고 해서 폐하께 갔는데 마침 폐하께서도 식전이시더라고요.”

“……그러셨군요.”

원래도 살짝 내려가 있는 벨케인 소공작의 눈꼬리가 조금 더 쳐졌다.

“혹시 제가 방금 소공작님의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르네브가 조심스럽게 묻자, 벨케인 소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식후 차는 드셨습니까?”

“아뇨. 아직.”

르네브의 대답에 벨케인 소공작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언제 기분이 가라앉았었느냐는 듯, 풀어지는 속도가 거의 5G에 가까웠다.

“잘됐습니다. 그럼 저와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좋아요.”

황궁 무도회 파트너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하니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오늘은 날이 흐리군요. 실내에서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복도 창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벨케인 소공작이 말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 하늘이 어두웠다.

르네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다이닝 룸 옆에 딸린 작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는 내내 두 사람 사이에는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벨케인 소공작은 확실히 언변이 좋았다. 그렇다고 혼자서 대화 지분의 전부를 차지하는 수다쟁이도 아니었다.

르네브의 관심사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대화를 이끌어가는 쪽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재봉사가 도착할 시간이 가까워져 버렸다.

이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르네브가 파트너 이야기를 꺼내려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벨케인 소공작이 먼저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황궁 무도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잘하고 계십니까?”

“폐하께서 재봉사를 보내 주시기로 하셨어요.”

“제게도 재봉사를 보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귀빈들을 살뜰히 잘 챙기시는 모양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티 없이 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표정을 보자, 조금 더 거절의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해야 할 말에는 때가 있다는 걸 이전 삶으로 깨달았기에, 르네브는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저……. 이번 무도회는 벨케인 소공작과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벨케인 소공작이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느릿하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반응은 예상 밖에 산뜻했다.

“왠지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르네브는 벨케인 소공작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만약 르네브가 이카르의 제안을 거절하고 벨케인 소공작과 황궁 무도회에 참석한다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까?

얼마 전 산책로에서 이카르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자신과 벨케인 소공작에게 불쾌감을 드러냈었다.

그가 화원의 귀빈들끼리 과한 친목을 다지는 걸 원치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당에 벨케인 소공작과 나란히 황궁 무도회에 입장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괜히 이카르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없는 거다.

“제가 영애께 공연히 부담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뒷덜미를 만지며 둘 사이에 감돌던 어색한 침묵을 깼다.

“그렇지 않아요. 제안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한걸요.”

비록 거절하게 됐지만,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그도, 이카르도 황궁 무도회 파트너 제안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정작 곤란했을 사람은 르네브였으니까.

그리고 먼저 제안하는 것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잘 알기에 르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벨케인 소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조금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걱정이요?”

“네, 제가 바슈케르의 귀족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네?”

르네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벨케인 소공작은 친화적인 성격이었고, 화원의 귀빈 중에서도 새로운 사람과 사귀는 데 가장 능통했다.

그런 그가 저런 말을 하다니.

“영애께서 어떤 말씀을 하고 싶어 하실지 알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사교성이 좋다는 말도 많이 들었으니까요.”

“네, 정말 뜻밖이네요.”

“이래 봬도 쑥스러움이 많은 성격입니다. 영애께 먼저 다가간 것도 용기를 냈던 거였고요.”

그 말이 진실이라고 입증이라도 하듯 벨케인 소공작의 새하얀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조금의 동질감이 올라왔다.

책 속에 들어오기 전의 르네브는 다소 사교성이 떨어지는 편에 속했다.

그런 그녀가 황후가 된 뒤에는 하루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을 상대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일이 시련과도 같았다.

하지만 루시우스에게 좋은 아내이자, 파트너가 되고 싶은 마음에 르네브는 온 힘을 다했다.

사교계에서 존경받는 귀부인을 초청해 대외 사교술을 배우고, 자신을 갈고닦았었다.

그래서 벨케인 소공작의 말이 이해가 갔다.

“저도 그래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간다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영애께서도 그러십니까?”

벨케인 소공작이 전혀 예상도 못 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저도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데 능숙한 편이 못 돼서요.”

서로 비슷한 면을 발견한 게 기쁜지, 침울해 보이던 벨케인 소공작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했다.

그가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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