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암, 근 손실은 안 되지
(22/148)
22화 암, 근 손실은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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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암, 근 손실은 안 되지
2023.04.22.
르네브는 짧은 고민 끝에 적절한 변명거릴 찾아냈다.
“밖에 오래 있었더니, 조금 으슬으슬하고 춥네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폐하. 저는 이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르네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카르가 돌연 제복 재킷을 벗었다.
“……?”
그러고는 르네브의 어깨에 재킷을 둘러 줬다.
“영애는 확실히 손이 많이 가는군.”
그의 돌발 행동에 르네브는 심히 당황했다. 그건 벨케인 소공작도 마찬가지였던지,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폐하?”
“내 친히 영애를 침실까지 에스코트하지. 그대는 바슈케르의 귀한 손님이니까.”
이카르가 앞장서라는 듯 르네브에게 살짝 턱짓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
드한과 베인은 나무 뒤에 숨어서 황궁으로 걸음을 옮기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한. 폐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들었어?”
“아니. 멀어서 잘 안 들리던데.”
“네 생각에는 무슨 대화가 오고 간 것 같아?”
베인의 물음에 드한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내 추측은 이래.”
베인이 오만하게 턱을 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영애. 벨케인 소공작이 몰래 양국 간에 동맹이라도 맺자고 하던가?”
대충 폐하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오해이십니다. 폐하.”
이번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렌 공작 영애의 흉내인 모양이었다.
드한은 그런 베인을 조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베인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이실직고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야. 영애. 벨케인 소공작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제법 흥이 올랐는지, 이번에는 베인이 산뜻한 표정으로 청량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폐하, 오해이십니다. 저와 세이렌 후작 영애는 단지 친목을 다지려는 목적으로 대화를 나눴을 뿐입니다.”
“그만해.”
드한이 더는 못 봐 주겠다는 듯, 베인의 얼굴을 밀쳤다.
“아, 씨!”
베인이 험악한 표정으로 미간을 모으는데, 뒤편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실례합니다. 드한 경과 베인 경.”
베인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태연히 말했다.
“라이나의 왕녀님이시군요.”
반면 드한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창피한 행동은 베인이 했건만, 부끄러움은 드한의 몫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나던 중에 굉장히 즐거워 보이시기에, 말을 한번 걸어 봤어요.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나 보죠?”
“왕녀님께 말씀드릴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닌지라……. 그것보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드한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
르네브는 황궁 복도를 걸으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오른편에는 이카르가, 왼편엔 벨케인 소공작이 함께 걷고 있었다.
“저어, 침실까지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침실 문 앞까지 따라온 두 남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르네브는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으려 했다. 그러자 이카르가 르네브의 어깨를 살포시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세탁해서 돌려주도록.”
“…….”
잠시 할 말을 잃고 르네브는 눈만 끔뻑였다.
‘지금 내가 입어서 더러워졌으니, 세탁해서 돌려 달라 이건가?’
저절로 르네브의 미간이 모였다.
하지만 금방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 완벽한 남자에게 결벽증은 제법 잘 어울리는 정신 질환이라고.
황궁에서 별별 사람들을 다 겪어 봤던 르네브다.
결벽증 정도야. 뭐, 귀여운 수준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바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꼭!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폐하.”
르네브의 대답에 이카르의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반면,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벨케인 소공작의 반듯한 미간에 실금이 잡혔다.
“그럼.”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이카르가 여전히 자리를 뜰 생각 없어 보이는 벨케인 소공작에게 말했다.
“아, 소공작. 마침 그대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깐 시간 괜찮은가?”
“……예, 폐하.”
르네브에게 아쉬운 눈인사를 건넨 벨케인 소공작이 이카르의 뒤를 따랐다.
점점 멀어지는 두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르네브는 침실로 들어갔다.
청소 중이었는지 양모 먼지떨이를 들고 서 있던 키어넨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레이디. 외출은 즐거우셨나요?”
키어넨이 눈치 빠르게 챙겨 온 슬리퍼를 소파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키어넨.”
르네브는 새 구두에 혹사당한 발을 편안한 슬리퍼에 꿰어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어넨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건, 남성용 재킷인가요?”
“폐하께서 빌려주셨어요.”
짤막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키어넨의 눈이 흡사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폐하…… 께서요?”
그녀의 반응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르네브가 반문했다.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키어넨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인 르네브는 키어넨에게 재킷을 건넸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특정 단어를 강조하면서.
“세탁 부탁할게요. 아, 주 깨끗하게.”
“아…… 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머뭇거린 키어넨이 재킷을 받아 들고는 침실을 나갔다.
르네브는 조금 전 키어넨의 반응 잠시 곱씹었다.
그러다 이내 창가 앞 소파에 앉아 외출 전까지 읽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
“저, 폐하?”
이카르를 따라 한참 복도를 걷던 벨케인 소공작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제야 이카르가 무심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뭔가?”
“저와 하시려던 말씀이 무엇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벨케인 소공작이 산뜻한 표정으로 물었다.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카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 건이라면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만 가 보도록.”
허망하게 벌어졌던 벨케인 소공작의 입이 곧 다물어졌다.
“……예, 그러시죠.”
꾸벅 허리를 숙이고 돌아서는 벨케인 소공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카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때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던 드한이 서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폐하, 회의 때 나왔던 안건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폐하?”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드한이 고개를 들고 이카르를 쳐다봤다.
그런데 이카르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드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지어 미간이 살짝 모여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가 폐하께 뭔가 실수라도…….”
드한이 자세를 바로 하고 오늘 있던 일들을 빠르게 돌이켜 보는데, 이카르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야. 계속해.”
“예? 예.”
드한은 최근 들어 보이는 폐하의 이상 행동을 곱씹었다.
시선이 느껴져서 쳐다보면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거나, 전에 없이 감정 변화가 들쭉날쭉한 점 같은 것 말이다.
바로 지금처럼.
“얼마 전 폐하께서 발견하신 나트하임 온천 지역의 마법석 채굴 건 말입니다.”
직전까지 불쾌해 보이던 이카르의 표정이 이번에는 나른하게 풀어졌다.
“……?”
***
벽 한쪽 면을 그득 채운 드레스들을 쭉 훑어보던 르네브는 연한 장밋빛 드레스를 가리켰다.
“오늘은 이걸로 할게요.”
“그럼 어울릴 구두로 이건 어떠세요?”
키어넨이 여러 켤레의 구두 중, 발등 스트랩이 있는 메리 제인 구두를 가리켰다.
발등이 훤히 드러나는 새 구두로 혹사당한 르네브의 발을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좋아요.”
르네브가 결정을 끝마치자, 키어넨이 환기를 위해 조금 열어 뒀던 창문을 닫았다.
“오늘은 바깥바람이 차네요.”
오늘 르네브가 고른 드레스는 평소 입는 것보다 소재가 조금 두꺼웠다.
다행이었다.
드레스로 갈아입고 콘솔 앞에 앉자, 키어넨이 브러시로 르네브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거울 속으로 긴 은발을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질하는 키어넨의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데, 거울로 시선을 맞추며 키어넨이 말했다.
“이제 향유를 바를게요.”
키어넨이 살짝 비켜나자, 거울 속에 투사된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소파 위엔 남성용 재킷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향유를 들고 콘솔 앞으로 돌아온 키어넨이 르네브의 시선을 읽고는 말했다.
“바람이 불어서 그런지 재킷이 빨리 말랐더라고요.”
르네브는 키어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깨끗하게 세탁했겠죠?”
“물론이에요.”
크게 고개를 끄덕인 키어넨이 덧붙였다.
“언제나 폐하의 의복 세탁을 담당하는 하녀에게 맡겼거든요.”
“잘했어요.”
르네브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 키어넨의 센스는 뛰어났다.
칭찬받은 게 기쁜지 키어넨의 얼굴에도 미소가 깃들었다.
“이제 다 됐어요. 레이디.”
마지막으로 모발 끝에만 향유를 조금 바른 키어넨이 말했다.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하는 르네브에게 키어넨이 물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도서관에요.”
르네브는 테이블 위의 책 한 권을 챙겼다.
그리고 한쪽 팔에는 이카르의 재킷을 걸쳐 들었다.
***
서걱서걱.
커다란 깃펜이 서류 위를 빠르게 스치며 유려한 필체를 뽐냈다.
이카르의 왼손은 서명을 마친 서류를 빠르게 종이 산 위에 쌓았고, 오른손은 서류의 여백에 새로운 서명을 적어 넣는 데 여념이 없었다.
똑똑.
들려온 노크 소리에도 이카르의 양손은 마치 기계와 같이 빠른 속도로 서류 작업을 이어 나갔다.
“뭔가.”
“폐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누구.”
“파라디움 제국의 세이렌 후작 영애십니다.”
바삐 오가던 이카르의 양손이 우뚝 멈추자, 깃펜 아래로 동그란 잉크 웅덩이가 생겨났다.
“세이렌 후작 영애라고? 틀림없나?”
“예! 폐하. 틀림없습니다.”
“곧 간다고 전하게.”
“알겠습니다.”
이카르는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고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집무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황실 기사들이 이카르에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영애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길고 곧은 이카르의 두 다리가 빠르게 응접실로 향했다.
천장 높이의 큰 창 아래, 소파에 앉은 르네브의 뒷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르네브가 이카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카르의 시선이 그녀가 들고 있는 재킷에 닿았다.
“그걸 돌려주러 왔나 보군.”
“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깨끗하게 세탁도 했어요.”
르네브는 그에게 다가가 재킷을 내밀었다.
마침 셔츠 차림이었던 이카르가 건네받은 재킷에 팔을 꿰어 넣었다. 그러고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가지.”
“네? 어딜 간다는 말씀이신지요?”
“단백질 보충하러.”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잠시 내려다본 르네브는 곧 이카르의 단단한 몸을 훑었다.
그러곤 결심한 듯 걸음을 내디뎠다.
‘암, 근 손실은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