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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동행할 파트너 한 명 구하기가 이리도 어렵다 (20/148)


#20화 동행할 파트너 한 명 구하기가 이리도 어렵다
2023.04.20.


“그런 상황이라면 저 같았어도 난처했을 테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레이첼이 끼어들었다.

“저어. 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

레이첼의 물음에 벨케인 소공작이 아까의 소동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모처럼 식사 자리에 초대해 주셨는데,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직접 찾아뵙고 사과드리려 했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의 진정성 있는 사과에 레이첼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는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유학 또는 초청이라는 명분을 띠고는 있으나, 볼모와 다름없는 자신들의 현실을 희화화하는 대화도 곁들여졌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즈음이었다.

“곧 귀빈들을 위한 황궁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라던데, 파트너를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레이첼의 말에 벨케인 소공작은 턱을 감아쥐고 먼 산으로 시선을 옮겼고, 르네브도 사선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

두 사람과 헤어진 뒤 르네브는 황궁 정원을 걸으며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복기했다.

황궁 무도회에 참석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르네브의 자유에 달려 있다.

역시 침실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사교 활동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파라디움에서 온 영애가 방구석 은둔자라는 소문이 돌게 해서 가족들을 걱정시킬 게 아니라면 말이다.

‘어쩐다.’

파라디움에서는 가족 동반 참석이면 됐었다. 따로 파트너를 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루시우스가 황후인 르네브 대신, 에시카를 파트너도 대동했던 때조차도.

세이렌가 두 남자가 없는 지금으로선 참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동행할 파트너 한 명 구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난감하네.”

르네브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을 때였다.

“무엇이?”

별안간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흠칫 놀랐지만, 르네브는 침착하게 고개를 들었다.

“폐하, 언제 오셨어요?”

“정신 사납게 같은 곳을 배회하는 은색 머리통이 보이기에 내려와 봤다만.”

이카르가 오만하게 턱을 든 채로 말했다.

르네브는 황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폐하의 집무실에서 이쪽이 내려다보이나요?”

“물론. 아주 잘 보이지.”

이카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무실이 있는 방향을 손수 가리켰다.

르네브가 서성이던 위치와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나, 집무실 창가에서 충분히 보일 만한 거리였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앞으로는 황궁 서쪽 혹은 동쪽 정원을 배회하도록 할게요.”

르네브의 말에 이카르가 바로 반문했다.

“굳이?”

“폐하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건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니까요.”

“조금 더 어지럽혀도 괜찮은데.”

이카르가 작게 중얼거렸다.

르네브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말을 돌렸다.

“귀빈들과 바슈케르 귀족들 간의 친목도 다질 겸 곧 황궁에서 무도회를 열 예정이야.”

“그 이야기라면, 레이첼 왕녀님께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고민하는 중이기도 하고요.”

“이미 들었군. 그렇다면 길게 말할 필요 없겠지. 무도회 날 내가 그대를 에스코트하지.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린 이카르의 표정이 묘하게 거만했다. 보통 저러면 재수 없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카르에게는 몸에 꼭 맞는 맞춤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잘 어울렸다.

그 반반하고, 위풍당당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르네브는 고민을 시작했다.

마땅히 파트너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은 맞으나, 선뜻 내민 손을 잡기에는 걸리는 게 있었다.

“영애, 어째서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이카르에게서 초조한 기운이 감돌았다.

단단한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는 긴 손가락이라거나, 울렁이는 남성적인 목젖이라거나.

언제나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자신만만해 보이던 남자라 그런가?

이번만큼은 조금 귀여워 보였다. 그래서 웃음이 났다.

“어째서 그대가 웃는지 도무지 모르겠군.”

르네브가 쿡쿡 웃기만 하자,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솔직하게 폐하께 조금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권유해 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을까요?”

“…….”

이카르가 르네브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 냉정해 보여서, 르네브는 순간 무도회에 함께 가겠다고 대답해 버릴 뻔했다.

그러나 이내 이카르가 내놓은 말에 조금 안도했다.

“그렇게 하도록.”

***

집무실로 돌아가는 이카르의 발걸음은 상당히 무거웠다. 반듯한 미간에도 옅은 실금이 드리웠다.

거절한 건 아니지만, 바로 수락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한마디로 이건 이카르의 예상을 대단히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가 집무실에서도 어두운 기운을 내뿜자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낸 드한이 기민하게 이카르의 심기를 포착하고 물었다.

“폐하, 언짢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내가? 그렇게 보이나?”

서류가 잔뜩 쌓인 책상에 앉은 이카르가 드한을 쳐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러자 베인이 드한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예. 폐하. 매우 언짢아 보이십니다.”

이카르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채로 팔짱을 꼈다.

그의 잘생긴 미간 사이에 주름이 깊어졌다. 덩달아 드한과 베인의 미간 사이에도 세 줄의 주름이 잡혔다.

폐하의 불편한 심기의 원인을 추측해 보던 드한은 번뜩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평화 협약을 맺은 국가 중에서 바슈케르에 병력을 파견했음을.

“폐하! 파라디움, 솔티, 베니스탄, 라이나 중 어디입니까?”

베인 역시 드한과 같은 생각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제게 군 통솔권을 주십시오. 금방 해결해 보이겠습니다.”

성급한 결론 끝에 베인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이카르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오늘 세이렌 후작 영애와 벨케인 소공작이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지?”

자세히는 아니지만, 귀빈들의 행적은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다.

“예?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난데없이 두 사람의 이름이 거론되자, 베인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베니스탄에서 벨케인 소공작의 평소 행실이 어떠했는지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네, 폐하! 당장 조사하겠습니다.”

베인과 드한이 동시에 입을 모았다.

***

르네브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커다란 창가 앞 기다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내실 온도는 어떠신가요?”

세탁물을 맡기러 밖에 다녀온 키어넨이 조용히 물었다.

“딱 좋아요.”

르네브가 옅게 미소 짓자, 키어넨이 뺨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레이디.”

“그럴게요. 수고해요.”

르네브의 독서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키어넨이 소리 죽여 문을 열었다.

“어?”

그리고 곧 조금 놀란 듯한 키어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브는 고개를 들고 문쪽을 바라봤다.

키어넨의 머리 위로 비죽 튀어나온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시, 실례합니다.”

키어넨이 빠르게 옆으로 물러나자, 베이지색 재킷에 흰색 크라바트를 단정히 맨 벨케인 소공작의 모습이 온전히 눈에 들어왔다.

“벨케인 소공작 각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듯 벨케인 소공작이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저, 그게. 마침 노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릴 거라곤 예상 못 했습니다.”

“아, 놀라셨겠네요.”

르네브는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워 넣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벨케인 소공작의 방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르네브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싱긋 웃으며 침실 문을 닫았다. 키어넨이 빛과 같이 빠른 속도로 옆방에서 구두 한 켤레를 챙겨 왔다.

르네브는 신고 있던 폭신한 슬리퍼를 벗고 앞코가 조금 뾰족한 구두로 갈아 신었다.

침실을 나서자, 복도에는 벨케인 소공작이 멀뚱히 서 있었다.

“독서 중이셨나 본데, 공연히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눈이 피로해서 잠깐 쉬려던 참이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미소 지었다. 르네브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럼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할까요?”

“좋습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그 모습에 르네브는 잠시 순하고 사람 좋아하는 리트리버를 떠올려 버렸다.

사람을 두고 개를 떠올리다니?

아니 될 말이다. 르네브는 얼른 머릿속 이미지를 지우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벨케인 소공작에 대한 조사 보고서입니다.”

드한이 건넨 서류로 이카르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베니스탄 왕가의 방계로 아버지는 벨케인 공작, 어머니는 베니스탄의 왕녀…….」

꽤 상세하고 방대한 분량을 단숨에 읽어 내린 이카르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경직된 상태로 뻣뻣하게 서 있던 드한이 서류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보고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베니스탄에는 좋은 남자가 아주 적은 모양이군.”

그렇게 말한 이카르가 서류의 한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벨케인 소공작은 현재 베니스탄 미혼 영애들의 1등 신랑감으로 손꼽히고 있다.」

드한은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폐하께서 왜 저 대목에 집중하시는 거지?’

그도 그럴 것이. 조사할 당시 지우는 게 좋을지 잠깐 망설였던 문구였다.

드한의 침묵이 길어지자, 조용히 제자리에서 서류 작업을 이어 나가던 베인이 끼어들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베니스탄에는 섬세하고, 세심한 성격의 남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략 베니스탄의 남자들은 여성을 존중하고, 아끼며 여심을 잘 안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드한의 고개가 살포시 기울었다. 폐하께서는 베니스탄에 좋은 남자가 적다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베인의 말을 해석하자면, 전부 베니스탄 남자들의 칭찬이 아닌가.

“하지만 호리호리한 체격에 호탕하지 못한 성격은 좋은 남자의 조건이 아니지요. 그런 이유로, 베니스탄에 좋은 남자가 아주 적다는 폐하의 말씀은 지당하십니다.”

말을 끝마친 베인이 당당한 표정으로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베니스탄과 달리 바슈케르의 남자들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우월하다며 뻐기는 표정이었다.

베인의 말에 잠시 심란한 표정을 지었던 이카르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폐하, 그러고 보면 이 부분이 몹시 수상하지 않으십니까?”

이카르의 옆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던 베인이 서류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베니스탄 왕녀의 나이가 너무 어려 먼 길 떠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벨케인 소공작은 자신이 왕녀를 대신해 바슈케르로 가겠다고 자원했다.」

“무엇이?”

“베니스탄 왕녀의 나이는 9세입니다.”

“그렇지.”

이카르가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와 저, 그리고 드한은 6세에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산속에 던져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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