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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새로운 (19/148)


#19화 새로운
2023.04.19.


이카르의 적안이 곱게 휘어진다.

때마침 열린 창으로 불어온 바람이 이카르의 앞머리를 살살 흔들었다.

바람결에 흐트러진 앞머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그가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그러고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두근.

순간, 갑자기 르네브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녀는 자신이 음식을 씹던 것도 멈춘 채로 이카르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아까 마신 게 화이트 와인이었나?’

잔을 들어 향을 맡아 본 르네브는 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잔을 싹 비웠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권하는 이카르와 함께 르네브는 정원을 거닐었다.

조금 쌀쌀한 감이 있었지만, 추위에 떨 정도는 아니었다.

황궁 정원의 풍경은 낮과 달라 보는 맛이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세워 둔 가로등에는 색색의 보석이 장식돼 있었고, 새어 나오는 영롱한 불빛이 지면을 비췄다.

르네브는 루비로 장식된 가로등과 바닥에 내리깔린 붉은빛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가로등에 보석 장식을 한 건 누구 생각이에요?”

“선대 황제의 취미.”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오팔로 장식된 가로등의 불빛이 길을 비췄다.

“선대 황제께서는 꽤나 로맨티시스트셨나 보네요.”

“이쪽 산책로가 제법 영애의 마음에 든 모양이지?”

“조금 과한 감이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예쁘네요.”

르네브는 저 앞에 보이는 보랏빛 가로등을 바라보다 이카르가 보낸 드레스를 떠올렸다.

“아 참. 보내 주신 드레스 감사해요.”

“먼 타국까지 귀빈을 모셔 왔으니, 극진한 예우는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귀빈이라…….

르네브는 별빛들이 총총히 수놓은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인질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듣고 보니, 폐하께서 하신 말씀도 일리가 있네요.”

“또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하도록.”

이어진 이카르의 말에 바로 한 가지가 떠올랐다.

지금 그녀가 가장 바라는 것은 루시우스의 몰락이었다. 그가 나락으로 떨어지면 황비 또한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루시우스와 접점이 없는 에시카가 화를 면한다는 건 분하지만.

“원하는 게 있긴 한 모양이군.”

이카르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리며 르네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르네브는 투어멀린으로 장식된 가로등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동시에 걸음을 멈춘 이카르가 나른한 표정으로 르네브를 쳐다봤다.

“대단한 요구라도 할 모양인데.”

“폐하께서는 3년 뒤에, 그러니까 평화 협정이 종료되고 나면, 파라디움을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요?”

조금 전까지 편안하게 느껴지던 이카르의 붉은 눈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에게 전쟁광, 살인귀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 걸 다시금 실감했다.

“글쎄.”

짤막한 대답을 내놓은 이카르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군.”

르네브는 이카르의 너른 등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카르는 어떠한 협박도 위협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형형한 그의 붉은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선을 넘지 말라고.

르네브는 조금 전 이카르의 눈빛을 머릿속에 똑똑히 새겼다.

***

집무실로 돌아온 이카르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서류를 보던 드한과 베인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이카르의 모습에 베인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페하? 괜찮으십니까?”

잠시 시선을 떨어뜨렸던 이카르가 낮게 읊조렸다.

“세이렌 후작 영애에 대한 조사는 아직 멀었나?”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드한이 서류를 들고 일어서자, 이카르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폐하께서 말씀하셨던 특징들을 취합해 보니, 저희가 찾는 장소는 세이렌 후작령과 맞닿은 국경 지역이 맞았습니다.”

드한이 지도 위 바슈케르와 파라디움의 국경선 부근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팔아 버린 모양이지만, 영토 시비가 발발하기 전까지 세이렌 후작가의 별장이 이 부근에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한가?”

“예, 폐하. 그 지역 토박이들 몇을 불러 교차 검증도 마쳤다고 합니다.”

“그렇군. 그 일대에 다른 귀족은?”

“세이렌 후작가의 봉신 가문 중 몇이 그 근처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들도 조사해 볼까요?”

“그렇게 해.”

이카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창가로 다가간 베인이 휘슬을 불었다.

곧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날아온 새 한 마리가 창가에 내려앉았다.

***

‘조심하지 않으면 이전 삶보다 단명할 수도 있겠는데?’

콘솔 앞에 앉은 르네브는 시선을 떨어뜨린 채 생각했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또다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원작에선 루시우스를 폭군으로 서술했고, 그녀가 겪은 이전 삶에서도 실제로 그랬다.

르네브가 어릴 때부터 잘 보살펴 주자, 원작보다는 그 정도가 덜해지기는 했지만.

실수를 저지른 시종이나, 귀족에게 가차 없는 건 변하지 않았었다. 그녀에게도 그랬고.

그런데 겪어 보니 이카르는 더했다.

루시우스는 더러우니 잘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이카르는 날을 세우면 꼼짝없이 먹혀 버릴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으으, 그만 생각하자.’

또다시 오한이 일 것 같아 르네브는 몸서리쳤다.

“레이디, 벽난로에 장작을 조금 더 넣을까요?”

르네브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던 키어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두려움에 떨었던 걸 추위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 줄래요?”

르네브는 사양하지 않았다.

으슬으슬 추운 것을 봐선 백혈구들이 오늘따라 힘을 못 쓰는 것 같긴 했다.

“감기 기운이 있으시면, 식사는 침실로 가져올까요?”

벽난로 속에 장작을 던져 넣은 키어넨이 부지깽이로 그 안을 휘적거리며 물었다.

“…….”

잠시 고민한 르네브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 티타임을 가지는 도중에 먼저 자리를 떴던 것이 미안했는지, 레이첼 왕녀가 식사를 권했기 때문이다.

“다이닝 룸에서 먹는 게 좋겠어요.”

“그러시다면…….”

문 쪽으로 향하던 키어넨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빠르게 옆방으로 향하는 키어넨의 뒷모습을 보며 르네브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어넨이 크림색 레이스 숄을 들고 돌아왔다.

“혹시 모르니까요.”

헤헤 웃는 키어넨에게 르네브도 마주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얇은 숄만으로 안심이 안 됐는지, 키어넨은 기어이 실크 장갑까지 챙겨 왔다.

***

“죄, 죄송합니다!”

다이닝 룸으로 향하던 중 대리석 바닥에 넙죽 엎으려 몸을 덜덜 떠는 하녀의 모습이 보였다.

주변엔 청소 용품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녀 앞엔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하…….”

한숨을 거하게 내쉰 남자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했다. 밀려오는 분노를 억누르는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의 금발 머리에서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이걸로 몸을 닦으시겠어요?”

르네브는 두르고 있던 숄을 남자에게 건넸다.

“크림색 숄이라, 세탁해도 다시 사용하실 수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구정물을 뒤집어썼으니, 단단히 화가 날 만도 하다.

하지만 남자는 매우 신사적이게도 르네브의 숄을 걱정했다.

“그럼요. 그것보다 감기 걸리기 전에 어서 몸을 닦으시는 편이 좋겠어요.”

“그렇다면 감사히 사용하겠습니다.”

숄을 받아 든 남자가 흐르는 물기를 닦으며 곁에선 하인에게 낮게 말했다.

“네게는 합당한 벌을 내리겠다.”

“예, 예. 물론입니다! 소공작 각하.”

싸늘한 시선으로 하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다.

르네브는 바닥에 웅크린 채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하녀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하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르네브가 고개를 끄덕이자, 눈물 젖은 뺨을 닦으며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이 정도로 그친 게 천만다행이에요. 귀족 분께서 참지 않으셨다면…….”

그녀의 말이 맞았다.

곁에 있던 하인이 남자를 소공작이라 불렀으니, 하녀와 그의 신분엔 극명한 차가 있다.

남자가 너그러운 성정이 아니었다면 하녀는 거꾸로 매달려서 매질을 당해도 저항하지 못할 거다.

그럼에도 쫄딱 젖어 떨고 있는 그녀가 르네브 눈에 밟혔다.

“그만 일어나요. 감기 걸리겠어요.”

르네브는 하녀에게 손을 뻗었다.

더러워진 제 손 때문인지, 하녀가 차마 르네브의 손을 잡지 못하고 쳐다만 보자, 키어넨이 나서서 그녀를 부축했다.

“가, 감사합니다. 레이디.”

“감기 걸리기 전에 어서 몸을 닦아요.”

르네브는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네고는 다이닝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다이닝 룸에는 라이나의 왕녀, 레이첼이 먼저 와서 르네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르네브를 발견한 레이첼이 싱긋 웃었다.

마주 미소 지으며 레이첼의 맞은편으로 향하던 르네브는 한 사람분의 식기가 더 준비된 걸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또 누가 오시기로 했나요?”

“아, 베니스탄의 벨케인 소공작님을 초대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영애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네요.”

“괜찮아요.”

이참에 타국의 이방인들끼리 두루두루 친분을 쌓아 둬서 나쁠 게 없었으므로 르네브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식전 수프가 준비되었음에도 베니스탄의 벨케인 소공작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레이첼이 식어 가는 수프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하녀가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벨케인 소공작 각하께서 말씀 전하라 하셨습니다. 청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오늘은 함께 식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레이첼이 미간을 모았다.

“갑작스럽게 문제가 생겼다고만 하셨습니다.”

레이첼이 옅게 한숨을 쉬고는 하녀에게 그만 가 보라고 손짓했다.

“저와 단둘이 하는 식사는 별로 신가요? 저는 왕녀님과 단둘이 식사하는 것도 좋은데.”

르네브의 말에 모였던 레이첼의 미간이 쫙 펴졌다.

말 한마디에 레이첼이 금세 기분을 풀었기에, 두 사람은 오붓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오후의 태양은 따사로웠고, 반듯하게 정돈된 풍경은 아름다웠다.

식사가 끝나고 하녀들이 내온 차는 향긋했다. 3단 트레이에 가지런히 플레이팅 된 디저트들은 보기도 예뻤고, 먹음직스러웠다.

“못 오신다더니, 저기 오시네요.”

레이첼의 시선을 따라 르네브는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남성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장신의 청년은 금세 테이블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르네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까 봤던 그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르네브의 얼굴을 알아본 듯 청년의 푸른 눈도 커졌다.

“이렇게 또 뵙는군요. 베니스탄에서 온 벨케인 소공작입니다.”

벨케인 소공작이 르네브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다행히 감기에 걸리진 않으신 것 같네요.”

르네브의 대답에 벨케인 소공작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친절하신 레이디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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