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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어가 과거를 숨김-348화 (348/489)

◈ 348화. 가혹한 그대

좌중에 심각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래서 우린 좋아해야 돼, 슬퍼해야 돼?”

스칼의 뜬금없는 발언에 시선이 집중된다.

“너는 눈치가 없는 거냐, 아니면 해보자는 거냐?”

조금 전, 다른 누구도 아닌 하르콘을 만나고 왔던 이들이었다.

마법으로도 현대 의학으로도 하르콘의 상실한 두 다리를 완벽히 대신할 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하르콘이 더는 전장에 설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남태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런데 뭘 좋아해?”

히사기가 심상치 않은 기류 사이에 끼어들었다.

“별다른 접점이 없다고 해도 스칼 씨가 하르콘 님의 부상을 달가워할 이유는 없으리라 믿겠습니다. 그저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것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스칼 씨?”

“하.”

혼자만 다른 생각이라니.

그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태민은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귀를 열었다.

그랬더니.

“……어라?”

어째서 스칼이 그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가 됐다.

“유낙서스가 남긴 전리품,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드래곤 하트니까. 총대장님의 말씀처럼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을 여는 데엔 부족함이 없겠지. 머지않아 어떤 플레이어든 자유롭게 아르카나 대륙에 드나들 수 있게 될 거야.”

스칼이 핵심을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따낸 선발대 심사 가산점은?”

“……!!!”

말 그대로 사투 끝에 얻어냈던 선발대 가산점이었다. 그런데 호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따낸 선발대 가산점이 의미가 없어진다는 뜻이었다.

쳇, 레오니가 주먹을 쥔다.

“어쩐지 호락호락하게 칭찬을 받았다 싶었더니.”

“야씨, 너 부정 타는 말하지 마라.”

“부정은 개뿔이.”

레오니가 아는 바로는 가산점을 받은 건 자신들과 하르콘밖에 없었다. 그분께서 그토록 좋아하는 대의로 보나, 긍지적으로 보나, 자신들이 손해를 감수하는 게 깔끔해 보였다.

이미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마쳤던 모양.

스칼이 낙담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선발대로 뽑힌다면 가장 먼저 『용기사의 제단』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플레이어들이 아르카나 대륙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게 된다고? 별별 방해꾼들이 많아진다는 거 아냐.”

“누가 널 방해한다는 건데?”

“넌 모르겠지. 정점의 기분을.”

“……지금은 내가 공식 랭킹 1위인데?”

“고작 하루로 뭘 알겠어? 정점의 기분을.”

“아니, 이게 근데.”

빠득!

남태민은 주먹을 쥐었다.

이 자식, 혼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만.

“진짜 같은 성전 연합군만 아니었어도 너는.”

스칼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는 정말로 대단했다. 하지만 덕분에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게 된 거대 연합의 길드 마스터들이었다.

“하여튼, 이 긍지도 없는 게…….”

“긍지가 뭔데, 남태민.”

“긍지를 설명하려는 것부터가 긍지가 없는 거야.”

“반박 못 하면 긍지로 얼버무리지, 또?”

“……근데, 왜 갑자기 나한테 시비냐? 스칼이 문제라니까?”

남태민과 레오니.

두 사람이 서로의 정강이를 걷어차기 직전이었다.

침묵을 지키던 히사기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생각이 달라? 너 설마, 치사하게 고자질하려고……!”

“제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되물은 히사기의 시선은 어째서인가.

황금 궁전의 창밖을 향해 있었다.

히사기가 나아가서 창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뭐, 뭐야?”

퍼덕퍼덕!

하늘을 나는 양피지.

그 양피지가 각자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네 사람이 각각 손에 잡히고 나서야 얌전해진 양피지를 바라봤다.

그야말로 『마법』이었다.

발신인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양피지의 금박이 아주 그냥 화려한 게…….

“……총대장님이 보내신 거야.”

호열이 보내온 편지가 확실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네 사람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편지를 읽어나가던 네 사람의 표정이 곧.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기쁜 소식이었다.

“이것도 가산점 덕분이겠지……?”

그렇다.

선발대 가산점은 무효가 되지 않았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마탑의 포탈이 활성화되기 이전, 선발대로 뽑힌 자신들에게 먼저 아르카나 대륙을 밟아볼 기회가 주어졌으니까.

다만 그 시기가 문제였다.

레오니가 헛것을 봤나 싶어 눈가를 비빈다.

그러나 바뀌는 건 없었다.

레오니가 어이가 없다는 중얼거린다.

“오늘 오후 6시, 마탑 최상층에서 출발이라고?”

시간을 확인하니, 현재 시각 오후 5시 45분.

……그럼, 남은 시간이 고작 15분?!

정신을 차린 이들이 서둘러 황금 궁전을 내달렸다.

“무슨 일정이 이렇게 빡빡……. 아니, 가혹해?!”

*

숙련 마법사부터는 마탑에 개인실을 제공받게 된다. 수석부터 시작한 호열을 제외하면, 플레이어로서는 최초로 숙련 마법사가 된 제시 하인네스였다.

덕분에 제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탑주의 추모가 끝날 때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엄밀하게 따지자면.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혼자가 아니었지만.

슥슥─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는 듯한 손길.

제시가 매만지고 있는 건 고깔모자였다.

그런 고깔모자가 말했다.

-내 팔자가 박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탑주의 목소리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용보다 못한 내 팔자가.

탑주가 죽음을 확신한 이유는 하나였다.

드래곤 브레스를 몇 번씩 받아내느라, 마법사에겐 또 하나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는 마력이 바닥이 났었으니까. 마력 탈진도 모자라 고갈 상태가 되어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졌었으니까.

금단의 마법.

최후에는 혼백 분리 마법을 발현할 여력도, 그러할 의지도 없던 탑주였다. 오만한 마법사답지 않게 겸허하게 최후를 맞이하려고 했단 말이다.

그런데.

-그자가 하지도 않는 짓을 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이 수석.

그가 나타났다.

그래, 나타난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지 않아도 남길 말이 있었으니까.

-……아니, 그런 ‘유언’을 뱉은 나의 잘못인가?

분명 유언이 그 성질머리를 부추긴 게 확실했다. 난데없이 재킷을 벗어서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육체를 고이 감싸놓고는 이 수석은 그렇게 말했다.

-“그대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재킷에서 온기가 느껴지더니, 별안간 정신을 잃고, 차려보니 지금이었다.

수명이 다한 본래의 육체로는 앞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무의식중에 혼백 분리 마법을 발현한 덕분에 정신은 온전히 고깔모자로 복귀하게 되었단 뜻이었다.

고깔모자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심정?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하는군, 이 수석.

참으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마탑 역사상, 최악의 탑주로 기록되어도 할 말이 없는 자신이었다. 그래도 최악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목숨을 바쳐 나름대로 마지막 명예회복은 성공했다고 생각했거늘.

-이렇게 살아남다니. 자네가 부럽군, 세니오스.

그것도 모자라서는.

하나뿐인 제자라는 녀석은.

자신을 여전히 고양이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스승님, 이젠 골골대지 않으시네요.”

-너도 이 수석과 똑같구나.

“그건 칭찬이겠죠?”

-제발 그 뻔뻔함만큼은 닮지 말거라.

탑주는 히히 웃는 제시를 보며 생각했다.

내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

그대가.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나의 사명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이 수석? 애초에 나는 사명을 가질 만큼 책임감이 투철한 마법사가 아니거늘.

탑주가 중얼거렸다.

-……하찮은 소원이라면 또 모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자신의 소원을 이 수석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우연의 일치겠지. 그러니까 탑주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머금은 채 투덜댈 뿐이었다.

-역시 그대는 죄가 많아, 이 수석.

“어라. 스승님, 방금 웃으셨죠?”

-내가 내 장례식에 웃는 미친 작자로 보이느냐?

“에이, 거짓말.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는데.”

-갈수록 쓸데없는 것만 배우는구나.

아니, 정정하겠다.

죄가 많은 걸 넘어서.

그대는 가혹하기 짝이 없군.

*

가혹했다.

“잘못된 길이었다는 거냐?”

이호열.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은 대가는.

류오쥔춘에게서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한 얼굴은 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고, 오직 모니터와 『잔혹한 계약의 성배』를 번갈아가며 들여다보던 눈은 초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어딜 가도 네 이야기뿐이구나.”

류오쥔춘은 작게 읊조렸다.

“……그럴만하다.”

극염룡, 유낙서스.

레벨 3,500.

업데이트 내역을 통해서 확인한 정보.

이호열은 그러한 유낙서스를 압도했다.

하지만 류오쥔춘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이호열이 드래곤을 몇 마리나 사냥했어도 그 결과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내가 너였다면 마땅히 죽였을 테니까. 나의 위대함을 세상에 널리 퍼트릴 수 있다면, 군주인 나를 위해 죽어야 하는 게 신하된 자들의 도리니까.”

흑암룡이라 불리며 드래곤들 위에 군림하는 이호열이었다.

그러한 이호열이 죽으라고 명하면 죽어야 하는 게 드래곤일 터.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이호열이 같잖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단언했으리라.

그러나.

“…….”

찰랑찰랑.

잔혹한 계약의 성배를 통해서 천하통일 길드원, 신하이자 장기 말의 시야로 모든 걸 목격했다. 아르카나 대륙을 뒤덮었던 이호열의 전심전력을.

모니터에서 개소리가 흘러나온다.

이호열의 레벨 추정치는 최소 수천이다.

레벨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미 플레이어로서 최고점에 도달했다…….

“같잖은 지랄이야.”

전력이라고?

아니, 이호열의 전력은 고작 저 정도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류오쥔춘의 마음은 유낙서스가 쓰러졌을 때 꺾이지 않았다. 유낙서스의 드래곤 하트를 통해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하는 길을 열겠다.

그 발언이 류오쥔춘을 무너트린 것이었다.

“드래곤 하트를 그렇게 허비하겠다고?”

폭군의 관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엄청난 전리품을 고작……?”

류오쥔춘은 알고 있다. 이호열에겐 이미 아르카나 대륙에 진입할 수 있는 접속기가 있으며 자신과 다르게 현실로 복귀하는 방법도 존재한다는 걸.

그래서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저 하찮은 것들을 위해 낭비하겠단 말이냐?”

이호열.

그의 수준과 비교하면 벌레만도 못한 존재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게. 자신의 상식으로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윽.

류오쥔춘의 시선이 7개의 접속기를 향했다. 아르카나 대륙으로 통하는 포탈 앞에서 접속기는 더 이상 무가치한 구시대의 고물에 불과했다.

류오쥔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가. 나의 판단이 틀렸나.”

처음으로 내뱉는 인정이었다.

빠득─

아니, 인정이 아니다.

강자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숙이고 마는 굴복이었다.

류오쥔춘은 입술을 짓이겨 물고는 말을 이었다.

“감히 너를 거스르려한 게 잘못이었다.”

거악, 칠최종 질투 사건 이후로.

자신과 이호열.

조국과 대한민국은 완전히 척을 지고 말았다.

이제 와서 얼굴마담인 주석을 갈아치우고 뒤늦게 AAU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해도 이호열, 그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세계는 더 이상 얄팍한 속임수에 속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샤이닝, 거대 연합……. 놈들보다 못한 쓰레기들이 단체로 아르카나 대륙으로 향할 때 나는 저 고물을 바라보고 있는 게 고작이란 말인가……?”

그로 인해 벌어지게 될 격차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호열을 따라잡기는커녕 유낙서스 레이드를 통해 뒤바뀌게 된 플레이어 랭킹이. 자신에게 붙여진 3위라는 그 굴욕적인 숫자가. 확고히 되거나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건 죽어도 용납할 수 없다.”

빠드득!

류오쥔춘이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성배를 바라봤다. 성배는 여전히 유일한 생존자, 용성락의 시야를 비추고 있었다. 류오쥔춘은 읊조렸다.

“이호열,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절망케 된다면.”

너를 바라보지 않으면 그만이다.

출렁─

류오쥔춘이 성배를 쥐었다.

가득 찬 성배 밑바닥에서 눈알이 굴러다니는 감각이 그대로 손을 타고 전해져온다. 그러나 류오쥔춘은 개의치 않았다. 그대로 성배를 입술로 가져다 댔다.

꿀꺽.

으그적.

꿀꺽.

류오쥔춘이 그대로 성배를 말끔하게 비워냈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타인에게 굴복하는 게.

죽는 것보다 수치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더는 웅크리고 있지 않겠다는.

핏물을 머금은 입술이 열린다.

“접속기의 가동을 준비해라. 본좌가 대륙으로 진입하겠다.”

“……!!!”

“또한 오성(五星)을 호출하라.”

“오, 오성이라 하시면?”

“초신성의 다섯 별. 진정한 나의 수족을 소집하란 뜻이다.”

*

가넷 홀.

“이, 이호열 수석님……?”

다짜고짜 가넷 홀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느냐 묻는 듯한 마법부여학 선임, 키코 아르민의 얼굴이다. 이유가 달리 뭐 있겠어. 제안을 하려고 왔지.

“오늘 저녁 일정은 괜찮은가.”

“……네, 네? 저요? 제 저녁 일정이요?!”

“그렇다.”

“네, 넵! 저는 괜찮은데요!”

가넷 홀, 마법부여학파 숙련 마법사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그 이유야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봐도 개수작 같지 않았냐, 방금 대사?

‘근데, 그럴 리가.’

원흉은 역시나 사서 오해를 사는 그랑펠식 화법 때문이었으니. 나는 오해가 착각되고, 착각이 소문이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나와 함께 아르카나 대륙으로 가줄 수 있겠나, 키코.”

“……아르카나 대륙을요? 오늘 저녁, 지금이요?”

“그렇다.”

현대 의학으로도 마법으로도 고칠 수 없다.

그렇다면 다른 [『기이』]의 조합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어? 그렇다. 나는 하르콘의 다리를 대신할 의족을 드워프의 기술력과 마탑의 마법 제련에서 찾아볼 생각이었다.

‘거기에다가 겸사겸사.’

[드래곤 하트]에 이어 유낙서스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

[드래곤 스킨]의 제련도 부탁해야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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