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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감히 내 딸을 건드렸다고 (61/77)


61화. 감히 내 딸을 건드렸다고
2023.06.30.


오늘도 나는 아네사 황녀와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녹음 마도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려 내 몸을 뒤진 다음,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화풀이로 뺨을 꼬집는 건 다반사였다.


“아가, 많이 아프니?”

“아니.”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면 황녀는 도끼눈을 뜨고 낮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울면서 말 잘 듣겠다고, 도와 달라고 해 봐. 그러면 내가 나락까지는 안 가게 도와주지.”

“싫어요.”

그녀는 비꼬듯이 웃으며 다시 내게 손을 댔다.


“가짜 딸 주제에, 아직 주제를 모르는구나. 그럼 조금 더 할까?”

일단 나는 내내 참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꼬집고 나면 뺨에다 성수를 부어 버렸다.

내 뺨이 맞은 것처럼 부풀어 오르거나 흉이 지면 안 되니까. 증거가 될 만한 일들은 모두 없애 버리는 모양새였다.


‘그래, 솔직히 별일 아니야. 참을 만해.’

아네사 황녀의 의도가 뭔지, 그리고 그녀가 정확히 어떤 행동을 할지를 서서히 묵묵히 받아들여야 했다.

저 여자는 나를 영악하기만 한 ‘꼬마’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저렇게 방심하게 둬야 하고, 갑자기 급발진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내 몸보다는 우리 아빠가 더 소중해. 저 사람이 나를 이용해서 우리 아빠한테 무슨 짓을 할 수도 있어.’

그래서 나는 그녀의 태도를 묵묵히 인내했다.

오늘도 나와 그녀는 작은 응접실 안에서 함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네사 황녀는 가짜 딸 타령을 하며 내게 자기가 지닌 정보를 아낌없이 뿌리고 있었다.


“네가 가짜 딸이라는 거, 이제 좀 알 것 같니? 소문은 들었어?”

“당신이 냈지, 소문?”

“오, 바보인 줄 알았더니 그 정도는 짐작을 하는구나. 내가 좀 손을 써 봤는데, 마음에 들어? 그 소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시엔?”

“웅. 나 가짜 딸인가 봐.”

내가 공연히 시무룩한 체하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어미가 죽기 전 너를 웬 오두막에서 구해 왔다는 소문도 있지. 진짜 딸은 병원에서 바꿔치기 되었다는 말도 있고 말이야.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어. 그러니 진짜 딸만 구하면, 넌 끝나는 거지.”

그녀가 말한 건 델피아에게 전해 들은 바 그대로였다.

따로 더 특별한 말은 없었다.


‘이 여자도 더 이상의 정보가 없는 건가?’

이제 이 짓도 그만할 때가 왔나,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침묵했다.

내가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듯,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저 긴 손톱으로 내 얼굴에 생채기를 낼 차례였다.

내가 그녀의 의도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아네사 황녀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대뜸 손찌검을 했다. 그 다음에는 생채기가 난 뺨에 성수를 내동댕이치듯 부어서 치료하고 떠나곤 했다.

오늘도 그런 일을 하려는 듯, 아네사 황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그녀는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다음 나를 향해 속삭였다.


“시엔 님, 어떻게 그런 무서운 말을 하세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내내 내 욕을 하던 사람이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이러는 걸까.


“아무리 제가 새엄마가 되는 게 싫으셔도 그렇지…….”

황녀는 아름다운 눈망울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갑자기 이러는 건……. 이건…… 주말 드라마 같은 곳에서 나오는……!’

 

 
드라마틱한 상황에 내가 손에 땀을 쥐었을 때였다.

토독, 톡. 도독.

빠른 발걸음 소리가 문간에서 들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까지도 귓가를 쨍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클라이막스에 다다랐다고 생각했는지, 아네사 황녀가 연극적으로 소리쳤다.


“저를 이렇게까지 괴롭히시면, 저도 힘들어요! 다른, 분들께서는 저를 좋아해 주시는데……. 아무리 계모라고 생각하신다지만, 정도는 지켜 주세요!”

“우, 웅?”

“저에게 계모라고 매번 욕설을 하시는 것도, 차, 참았는데!”

마침내 문을 드르륵, 하고 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바깥에는 시녀들과 루켈라 공작부인, 레온하르트, 그리고 델피아가 있었다.

아네사 황녀는 처연하게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며 눈매를 내려뜨렸다.


“저는……. 다섯 살짜리의 말에 사, 상처받지 않아요.”

누가 봐도 상처받은 표정으로, 아네사 황녀가 중얼거렸다.


“시엔 님께서, 제 마음을 이렇게 내다 버리듯이 행동하셔도요.”

나는 그녀의 명연기를 감상했다.

저 모습을 보면 누구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마음이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저 천사 같은 모습 속에 들어 있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아네사 황녀는 이 저택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평판을 쌓아 올려 왔으니까.

저 여자가 순간적으로 품에 숨긴 저 마도구 비슷한 것도, 아마 세뇌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아네사 황녀는 자기의 연기에 사람들이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네사 황녀가 간과한 게 있었다.

이 사람들은…….


“X랄하네, 이씨.”

……내 편이다.

델피아 언니의 ‘X랄하네, 이씨’라는 말이 응접실 안에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아네사 황녀를 속이기 위해 지금까지 거의 모든 가문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었던 일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


‘멍청한 아네사 황녀님.’

내게 손찌검을 해도 그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으니, 아네사 황녀는 내가 미르모드 가문의 천덕꾸러기인 줄 알았을 것이다.

내가 가짜 딸이라는 소문을 내도 그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으니 자신의 작전이 먹혔을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며 다음 작전을 시행한 것이었다.


“……X랄, 이라고요?”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아네사 황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나는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방금 뭐라고……하셨어요?”

“X랄이라고 했는데.”

델피아의 과격한 발언에 황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도 하지. 지금까지 황녀가 델피아에게 어지간히 공을 들였어야 말이다.

죄다 자기편으로 넘어왔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델피아 같은 사람은 저에게 잘하는 사람한테는 흥미가 없었다. 오직 자기가 꽂힌 사람에게만 잘해 주는 타입이었지.


“왜, 더 욕해 줘?”

델피아의 말에 황녀의 안색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게다가 황녀의 기대와는 사뭇 달리, 사람들은 나를 참 좋아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나를 좋아하다니 그건 조금 당혹스럽기는 했다.


‘그러니까 황녀님 너보다 내가 훨씬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이거야.’

황녀 같은 사람들은 그렇다.

다들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간관계를 구성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짠 판에 놀아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세리나 아네사는, 위대한 제국의 황녀니까.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 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아니, 평소에는 옳았을지라도 오늘은 아니었다.

아네사 황녀가 당황해하는 모습을 냉랭하게 바라보던 루켈라 공작부인이 우아하게 입을 열었다.


“물러나라, 델피아. 황녀, 우리 꿀빵이가 그럴 리가 있나. 오해한 거겠지.”

“시엔 님의 과격한 모습을 보고, 저도 놀랐어요.”

아직 상황 파악이 정확히 안 되는 건지, 다시 나를 음해하려 드는 모습이 우스웠다.

아네사 황녀가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할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 말은, 황녀 그대가 뭔 개수작을 벌이는 건가. 라는 뜻이었는데.”

물론 말의 내용은 다정하지 않았지만.


‘고상한 할머니가 개수작이라는…… 델피아 언니가 주로 사용하는 화법을 사용해 버린 걸 보면……. 엄청 화난 것 같은데, 무서운데!’

할머니의 모습에 당황한 황녀가 몸을 일으키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무리 이곳이 미르모드일지언정 저는 황녀인데, 그런 표현을 쓰시다니요.”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말한다 한들 이 자리에는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 사람 하나 없었다.

델피아가 비죽거리며 웃었다.


“개처럼 빌빌대더니, 그냥 개 같은 소리를 진짜인 것처럼 꾸며 내는 인간이었네? 우리 아기를 모함했잖아, 네가. 그런데 인간적인 대우를 바라?”

아네사 황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나를 노려 보았다. 그러자 레온하르트가 저벅저벅 걸어와 내 옆에 섰다. 마치 나를 지킬 기사라도 된다는 듯이.


“그러게요, 황녀 전하께서 무언가 잘못한 게 있는 거겠죠?”

이 자리의 모두가 그녀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터.

자신의 연기가 먹히지 않자, 황녀는 이게 아니라는 듯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과거에는 항상 이런 식으로 사람을 매도해 왔을 테니까.’

아네사 황녀의 연기가 조금 허술해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황녀였고, 천사 같은 이미지니까. 유독 주변의 사람들이 황녀를 음해한다는 루머를 퍼뜨려 놓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누가 뭐래도,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내 사람들이었다.

델피아 언니가 열 받는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터프하게 말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뭘 멀뚱히 서 있어? 황녀? 꺼지라고.”

……아니, 그냥 터프가 아니었다.

델피아 언니는 욕설과 동시에 주먹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 주인이 그럴 리 없거든? 열받게 하지 말고 꺼져.”

황녀는 나를 그저, 조용히 괴롭힘만 당하는 어린아이인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르모드 사람들을 손쉽게 구워삶았다고 착각도 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녀는 차오르는 배신감과 허탈함으로 몸을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레온하르트가 놀랍도록 침착하게 델피아를 바라보았다.


“델피아 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의 급격하게 가라앉은 텐션을 볼 수 있었다.


“아, 왜! 넌 화도 안 나? 저게 지금 음해하잖아!”

델피아 언니가 은빛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 댔다. 그러자 레온하르트는 제 손에 쥐고 있던 독약을 들어 올렸다.


“제가 희생하죠. 한 번에 보내겠습니다.”

……아니, 고작 연기했다고 사람 죽이려는 거야?!

사람을 죽이려 들다니, 역시 악역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황궁과 미르모드 가문 사이에 커다란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미르모드 가문이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내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의 사람들은 그까짓 건 아무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결국 이 상황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조그마한 손으로 짝짝, 박수를 쳤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한데 모인 순간 나는 입을 열어 말했다.


“나가세요, 세리나 아네사 황녀님.”

“……하! 다들…… 제정신이 아니네요.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원래 제 성정상 …… 이런 식의 음해를 많이 받고는 했어요. 이 아이에게 잘해 주었는데, 이렇게 저를 모독할 줄은…….”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놀라운 연기력에 절로 박수가 나올 뻔했다.

나는 처연한 낯을 한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 역시 나를 핏줄 터진 눈으로 응시하기 시작했다.


“시엔 님, 어쩜 이러실 수가-.”

“이미 다 드러났고, 여기 황녀님 편 한 명도 없어요. 그러니까…….”

나는 처연한 연기를 하다가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황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읊조렸다.


“내 사람들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꺼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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