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누가 뭐래도 시엔이가 아빠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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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누가 뭐래도 시엔이가 아빠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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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누가 뭐래도 시엔이가 아빠 딸
2023.07.04.
황녀는 감히 자신에게 ‘꺼지라’고 말한 것에 대해 몹시 분노한 눈치였으나, 이미 미르모드 가문 사람들이 나를 엄호하듯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다.
황녀는 이를 갈다가 도망치듯 몸을 일으켰다. 자리를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여간에,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나는 떠나는 아네사 황녀와, 열 받아서 욕을 마구 지껄이는 델피아 언니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아네사 황녀는 이대로 끝낼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다시 돌아올 텐데 어떻게 돌아올지가 관건이었다.
‘분명 이 모든 일은 아네사 황녀의 독단이 아닐 거야.’
기나긴 시간 동안,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깨달았다.
그녀는 분명히 생각이 짧은 타입이었다.
이 모든 일을 설계한 배후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배후에 있는 게 누구지?’
대체 이 사태를 만들어 낸 흑막은 누구일까.
나는 으득, 이를 갈며 생각에 잠겼다.
***
세리나 아네사 황녀는 이제 더 이상 미르모드 저택에 드나들지 못했다.
혼담이 오가던 것 역시도 흐지부지되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황녀는 황궁에 꽁꽁 숨어 있었다.
물론 델피아 언니는 내가 그녀를 말리기 전까지 나오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로 부술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오래 황궁에 처박혀 있는 건 예상치 못했다.
이게 황녀, 아니 황녀의 배후에 있는 흑막이 던진 거미줄의 끝이 아닐 텐데, 분위기가 지나치게 잔잔했다.
나는 턱을 괸 채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상담을 도와줄 어른은 한 명 있지.’
바로 성기사, 테드였다.
그리고 그는 요즘 아빠를 따라 황궁에 들락거리며 내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었다.
“테드.”
그는 진중한 어조로 나를 향해 대답했다.
“존명.”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따를 것이라는 의도가 담긴 선량한 눈동자.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요즘 황궁의 소문을 들은 게 있어?”
“황녀 전하에 대한 소문은 없습니다. 그저 칩거 중이시라는 것밖에는…….”
나는 고개를 기우뚱 기울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렇다 이거지…….”
대체 황녀의 꿍꿍이가 뭘까.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황궁을 둘러싼 소문 같은 건 따로 없어?”
어쩌면 여기, 아주 작은 단서라도 있을지 모른다.
그때 테드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요즘 궁정백, 요테르 백작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합니다.”
궁정백, 요테르 백작?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말에 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요테르 백작이라면 내 상단의 라이벌이잖아!”
“네, 그렇죠. 하하. 요즘은 상단 업무에 주력하는 대신, 주로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들어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더군요.”
그때 레온하르트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핀잔을 주었다.
“참나, 봉사 활동은 무슨!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서는, 잡스러운 검사는 다 하는 놈이잖아.”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잡스러운 검사’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잡스러운 검사라니, 그게 뭐야?”
“아…… 그게.”
테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 했지만 레온하르트가 먼저였다.
“지난번에 저 꼬맹이 애시드가 했던 신성력 검사에도 요테르 백작의 자본이 들어갔단 얘기가 있어. 뭐……. 최근 들어서는, 귀족 사생아들 친자 검사 같은 것도 하던데? 요테르 백작은 진짜 별거 다 하는 놈이거든.”
“아, 네. 맞습니다. 요테르 백작이 요즘 귀족들을 위한 친자 검사도 주관하겠다 난리더군요. 물밑에서는 은근히 인기가 좋답니다.”
‘친자 검사라…….’
나는 턱을 짚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계속 ‘진짜 딸, 가짜 딸’을 운운하던 아네사 황녀. 그리고 황태자의 측근인 요테르 백작이 벌이고 있다는 친자 검사 사업까지.
“아……. 알겠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실마리가 서서히 잡히고 있었다.
그 여자가 계속 나를 두고 ‘가짜 딸’이라고 했던 이유.
그리고 황태자 휘하의 상단에서 주관한다는 친자 검사까지.
나는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오늘 이 자리에는 나를 지켜 준다는 식으로 등장한, 레온하르트와 애시드가 와 있었다.
나는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자수를 뜨는 애시드, 맞은편에서 가면을 쓰고 등을 기댄 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중인 레온하르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만간 아빠와 쏙 닮은 어린이가 한 명 올 거예요.”
“네, 네?”
“무슨 소리야, 밤톨.”
“갑자기…… 말씀이십니까?”
뜬구름 잡는 듯한 말투에 다들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나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 아빠 딸이 올 거야.”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우리 아빠 딸이라고 주장하는, 어쩌면 ‘진짜 딸’이 될 수도 있는 아이가 올 것이었다.
내 말에 레온하르트는 얌전히 쥐고 있던 물병을 떨어트렸다. 물병이 떨어지면서 데구르르 바닥으로 굴러갔다. 나는 그 물병을 빤히 보면서 낮게 웃었다.
“무슨 소리야? 마티어스 님의 딸은 너잖아!”
“움…… 아마 걔네는 나보구 가짜라구 할 것 같아.”
앞뒤 상황 설명 없는 담담한 말에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걸 어떻게…… 알…… 아니, 설마 예언 능력까지 있는 건가.”
“……대충?”
“대단하군……. 그럼 그 딸이라는 녀석을 쳐부술 계략도 있는 거겠지.”
나는 믿음과 신뢰가 가득 담긴 레온하르트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미래에 최고 악당이 될 아이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그의 곁에 있던 조그만 힐러, 애시드가 내 옷깃을 조심스럽게 움켜쥐며 속살거렸다.
“진짜 딸이요? 그럼, 그 일 때문에 시엔 님이 사, 상처받으시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 하나하나에 상처받기에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은걸!
“괜찮아.”
난 언제나 역경을 디뎌 왔다.
세리나 아네사 황녀는 새로운 역경일 뿐이다.
그리고 역경이 나타날 때마다, 나는 패배하지 않고 온전히 맞서서 강해졌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사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를 이미 생각해 두기는 했다.
그렇지만 딱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있었다.
‘만약에 자기가 ‘진짜 딸’이라고 주장하는 애가 나타나면, 아빠는…….’
아빠는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자기 핏줄이라는 말에 눈이 멀 수도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아빠가 ‘진짜 딸’에게 마음을 준다면…….
‘분명히 상처받겠지.’
내게는 무엇보다, 아빠가 상처받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
그때, 잠시 성 바깥으로 순찰을 나갔던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아네사 황녀에 대해 보고받은 뒤였다.
본래라면 시엔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했겠지만, 그가 시엔의 곁에 대놓고 붙여 놓은 ‘무해한 척하는 악당들’은 이미 시엔의 흉계에 넘어가 마티어스에게 그 어떤 일도 보고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드러날 일은 결국 수면 위로 드러나는 법.
마티어스는 시엔의 곁에 붙어 있던 제 측근들과, 힐러인 애시드를 불러 자초지종을 들었다.
시엔의 얼굴에 난 자그마한 흠집은 성수로 가린다지만, 힐러는 이미 한 번 났던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시엔을 괴롭혔다고.”
“예, 맞습니다.”
“감히 내 딸에게 흉터를 내고, 아닌 척했다…….”
“네. 시엔 님께서는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고요.”
물론 시엔은 앙금을 품고 나중에 두 배로 갚아 줄 계략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마티어스는 한숨을 내쉬듯이 속삭였다.
“내 딸은 이렇게나 착해서……. 그런 쓰레기 같은 여자에게도 관용을 베푸는군.”
설마 착하게 교육시켰던 게 탈이라도 난 걸까.
지금이라도 조금 나쁘게 교육시켜야 하나.
마티어스는 아팠을 시엔의 뺨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턱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세게.
측근은 ‘지금껏 지켜본 바 시엔 님이 착하다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하려다가 급하게 입을 막았다.
딸 한정 팔불출인 마티어스 앞에서 시엔에 대해 살짝이라도 잘못 말했다간 바로 좌천행이니까.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던 순간.
아네사 황녀에 대한 보고 자료를 검토한 다음, 마티어스는 마른세수를 했다.
일반인과 엮일 생각 없이 딸과 함께 둘이 알콩달콩 좀 살아 보려는데 방해를 한다면.
어쩌겠는가.
“황궁 안에서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 모양인데…….”
감히 내 딸한테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있다면.
“거기서 더 선 넘으면, 죽여도 무죄 아닌가?”
아니, 이미 선은 넘은 걸지도.
그는 아네사 황녀의 보고 자료를 손으로 구기며 생각했다.
감히 내 딸을 건드렸다고.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서 황궁에 숨어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잘 죽였다는 소문이 날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비서관이 급히 읍소했다.
“마티어스 님! 아네사 황녀님이 마지막 방문이라 여겨 달라며 찾아오셨습니다. 중요한 일이라고요.”
안 그래도 어떻게 씹어 먹을지 고민하고 있던 차, 먹잇감이 호랑이 굴에 제발로 기어들어 왔다.
마티어스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
때는 아네사 황녀가 ‘마지막으로’ 미르모드 가문에 방문하기 직전으로 돌아간다.
‘미르모드 가문의 살기는 진짜였어. 시엔 미르모드가 대체 뭐길래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제 오라버니인 황태자가 죽은 듯한 분위기의 황녀궁으로 찾아오기 전까지, 아네사 황녀는 입술과 손톱을 연신 깨물며 고민했다.
“시엔 미르모드는 어땠어, 아네사?”
“…….”
황태자는 그녀가 실패했음을 아는 표정이었다. 아네사는 공연한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기 있는 걸 보면 알잖아. 실패했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평온하고 태연한 표정이었다.
아네사가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실패했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시엔 미르모드를 구슬렸어야 했다고.”
“그렇게 하면?”
“걔 환심을 산 다음, 가문에 입성해서 마티어스 미르모드와 결혼했어야 했어. 그다음에 쫓아내도 늦지 않았는데 괜히 조급해졌나…….”
사실 아네사는 시엔 미르모드의 뒤통수를 칠 계획이었다.
모두가 그 아이를 어느 정도는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까. 꼬셔 둔 다음 가문에 입성해서 쫓아낼 계략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을 만류한 건 눈앞의 황태자였다.
결국 그가 말한 대로 했지만 계획은 실패했다.
이제 마티어스는 더 이상 혼담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듯 보였던 루켈라 공작 부인과 델피아 미르모드가 자꾸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마티어스 미르모드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
“그러려면 시엔 미르모드가 사라져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