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열 살이 되었습니다
(57/77)
57화. 열 살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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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열 살이 되었습니다
2023.06.16.
그렇게 오 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엔은 열 살이 되었지만, 그녀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몇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시엔이 키워 낸 상단이 굴지의 상단으로 자랐다는 것 정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신체에 적용되었던 환생자 패널티가 거의 없어졌어!’
남들보다 혀 짧은 말투에 상대적으로 조그만 체구를 지닌 다섯 살짜리는 이제 없었다.
지금의 시엔은 어엿하게 잘 자란 열 살처럼 보였다.
***
시엔 미르모드 상단 지부로 사용하게 된 소담한 2층 건물 안.
‘내가 오 년 만에 미르모드 상단을 굴지의 상단으로 키워 냈다, 이거야!’
어린이가 된 나는 다리를 꼰 채로 면접관 테이블 중앙에 앉았다.
물론 아직 열 살이라 젖살이 포동한 탓에 오동통한 다리를 제대로 꼬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열심히 이력서를 확인해 보았다.
‘이력서가 엄청 많이 와서 검토하는 것도 힘들다!’
과거 시엔-미르모드 상단의 문제점이 해결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여름 장맛비처럼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법사들의 러브콜에 행복한 비명을 질렀었다.
오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훌륭하게 자란 ‘시엔 상단’은, 악당 가문을 제패할 우리 아빠를 위한 캐시카우로 착실하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힛, 나 조금 사장님 같아!’
다행히 내 양옆에는 후견인이 되어 준 귀부인들이 주르륵 앉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테이블 위에는 각 마법사들의 이력서가 놓여 있었다.
그뿐이랴? 나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담긴 신문 기사 역시 스크랩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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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최후의 어린이 상단, ‘시엔 미르모드 상단’ 창립자 시엔 미르모드는 대체 누구?
[1면] ‘시엔 미르모드 상단’ 벌써 후견인 10명……. 대륙 제패하나?
[속보] 시엔 미르모드는 누구?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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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인들이 기사 자료를 보내 준 모양이었다.
‘이 바보 같은 신전 사람들.’
이제 사람들은 과거의 나보다는 지금의 ‘승리한’ 나를 더 잘 기억할 것이다.
당연히 승리할 것이라고 예감한 경기보다, 역전승한 경기가 더 잘 기억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물론, 라이벌 상단은 있었다.
바로 황태자의 최측근인 요테르 백작이 설립한 요테 상단이었다.
요즘 묘하게 내 상단 아이템과 겹치는 물건을 팔고 있길래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다.
“아기님, 면접 시간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는데, 이력서 검토 안 하세요?”
“다 했어! 그리고 나 이제 아기님 아니라니까.”
“넵, 아기 사장님.”
아기 사장님이라는 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나를 꽤 귀여워하는 눈빛이라 봐준다!
“휴우…….”
“아, 그리고 이번에 요테르 백작이 아주 대단한 물건을 만들고 있다던데요. 들으셨어요?”
“그래? 확실히 궁금하네.”
나와 나이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지만, 사실상 라이벌인 요테르 백작.
그가 어떤 꿍꿍이를 지니고 있을지 궁금하긴 하고, 또 알아보기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아암, 하고 하품을 했다.
최근 들어 머리를 너무 써서 그런지 요즘 매일 꾸벅꾸벅 졸아 버리고 있었다.
나는 휴식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산책 조금 하구 올게!”
***
산책하러 가는 길.
산책이라고 해도 조그만 어린이의 몸으로는 오래 걸을 수가 없는 법. 그래서 나는 건물 앞의 조그만 정원을 몇 바퀴 돌고 있었다.
따뜻한 햇살을 맞고 나니 오히려 잠이 오려 했지만…….
그때, 건물의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보여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빠!”
바로 우리 아빠였다.
드디어 아빠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우리 딸.”
아빠의 표정이 조금 무시무시한 것 같다……?!
“상단 일 그만두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는 거야.”
나는 아빠를 보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멋진 사장님 포스를 보여 주려고 가슴을 딱, 내밀려 했는데, 아빠가 내 옷깃을 잡아서 순간 허우적거렸다.
‘아빠 때문에 사장다운 포스가 안 나잖아!’
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아빠를 바라보면서 강조했다.
“뭘 힘들어! 오 년이나 했는데에!”
그러자 아빠가 나직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진짜 천재가 맞나 봐, 내 딸은.”
“그럼!”
살짝 반신반의 한 것 같아 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는 내 말을 믿고 넘어가 줄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빠라면 그래야 했다.
아빠가 나에게 항상 강조하는 게 딸과 아빠 간의 신뢰 관계니까.
“알았어. 오늘은 바닷가재 먹자. 아빠가 직접 요리해 줄게. 특별한 날이니까. 우리 딸이 사장님이 되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오래 흐르다니……. 아빠는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네.”
행복해서 눈물이 난다니. 역시 아빠는 마음이 여렸다.
나는 아빠의 발갛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바라보며 의젓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힛! 알았어! 가재 좋아!”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빠표 요리는 확실히 믿고 먹을 만하지!’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황궁 기사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건물 안으로 빠르게 들어선 것은.
“마티어스 님.”
“……무슨 일이지?”
“황녀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황녀라면…… 미래에 악셀 미르모드의 부인이 되는 여자였다.
황태자의 여동생이자, 『멜로디아의 생애』에서는 성녀 멜로디아의 친구 역할이기도 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갑자기 황궁 사람이 미르모드에 나타난 이유가 뭐지?’
심지어 ‘그’ 악셀 미르모드조차도 마계 근처에서 무려 5년간이나 지지부진한 내전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도는 터였다.
미르모드를 위협하는 악당들 따위는 기억 저편에 잊혀진 채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황녀가 여기서 등장한다는 건, 또다시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는 의미였다.
황궁과 신전은 한 패고, 미르모드와 적대 관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난 오 년 간 미르모드 가문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었다.
황태자의 측근인 요테르 백작 같은 조무래기만 제외하면 딱히 나를 방해하지도 않아서, 그 덕분에 훌륭하게 상단을 키워 냈었는데 말이지.
의아한 마음으로 고개를 갸웃하는데, 아빠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반문했다.
“그래서?”
“……황녀 전하께서 오셨는데……요. 꼭 마티어스 님을 뵈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기다리라고 해. 약속을 잡고 온 게 아니라면.”
나는 아빠와 아빠의 부관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느낌이 쎄했다.
“……아빠?”
나는 금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뭔가 이상한 말투를 보이고 있었다.
우리 아빠가 아닌 것 같은 말투였다. 마치 사악하고 싸늘한, 악당이 된 것만 같은 말투 말이다!
‘아빠가 악당 말투 쓴다……!’
최근 5년간 나는 아빠의 수상쩍은 행적을 눈 부릅뜨고 구경하고 있었다.
아빠는 점점 더 이 악역 가문에 동화되어, 조금씩 악당 말투에 맛들린 듯했다.
‘역시, 5년간의 성과가 아예 없었던 건 아냐! 아주 바람직해!’
지난 기간 동안, 아빠에게 예절 트레이닝을 받아 가며 얼마나 오래 괴로워했던가! 내가 흡족한 낯으로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아빠의 표정이 알래스카 펭귄이 타고 다니는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아니, 아니. 아니…….”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아빠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약하게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 주시지요. 아직 식사를 못 해 시장하니, 빠르게 식사를 하고 뵙겠습니다. 가자, 시엔.”
부관의 표정이 허망해진 게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수많은 이력서를 읽느라 과부하에 걸린 내 두뇌로 부관까지 신경 쓰기는 힘들었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
“……그래도 돼?”
“그럼, 선한 분이셔서 기다려 주실 거야.”
‘선한 분, 아닌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아빠가 나의 손을 꼭 잡고 끌고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지금은 다시 아무리 들어도 정중하고 순박한 호구 아빠의 말투 그대로였으니까.
하지만 아빠의 의아한 말투 때문에 고민했던 것도 잠시였다.
황녀가 아빠에게 찾아왔다니.
그 말은 조금 이상했다. 왜냐하면 황녀는 악셀 미르모드와 정략혼을 하게 될 예정인 여자였기 때문이다.
“그 사람, 왜 아빠한테 찾아왔지?”
“글쎄. 좋은 일 하려고 오시는 거 아닐까.”
아빠는 또 태평했다.
‘그렇지만 아빠와 달리, 나는 태평할 수 없지.’
나는 아빠를 올려다보며 옷깃을 꾹 잡았다.
“아빠.”
“응?”
“나 황녀님 보고 싶어!”
아빠가 나를 향해 나직하게 반문했다.
“……으응?”
나는 무해한 어린이인 척 배시시 웃었다. 새하얀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물론 ‘황녀의 꿍꿍이를 밝혀야 한다’는 아주 까만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엄청나게 궈여워 보이겠지?
“안 돼.”
……아빠는 아주 단호했다.
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체 황녀가 왜 우리 아빠한테 갑자기 찾아왔는지, 찾아와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 궁금한데! 그래야 혹시 모를 풍파를 막을 수 있는데!
“진짜로 안 돼……?”
내가 속상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아빠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시엔, 궁금해?”
“웅!”
그렇게까지 말하고, 나는 할 말을 또 떠올려 보았다.
진심으로 아빠를 설득하고 싶었다. 나랑 같이 황녀를 만나러 가자고 말이다.
하지만…….
황녀는 멜로디아랑 절친한 친구였다.
멜로디아는 미르모드 가문을 아주 싫어했다.
그렇지만 고작해야 열 살짜리 꼬맹이가 제국의 권력 다툼에 대해 아는 것은 누가 봐도 수상쩍었다. 그러니, 아빠한테 대놓고 황녀가 아빠에게 나쁜 짓을 할까 봐 걱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빠는 안절부절못하는 내 볼을 설탕 한 꼬집 잡듯이 살짝 꼬집더니 달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설명해 줄게.”
물론, 아빠도 어른이니까 비즈니스가 따로 있기는 할 터였다.
황녀와의 만남에 나를 따로 달랑달랑 데려갈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내가 아무리 인생 2회차지만 어른은 어른이고, 아이는 아이라는 거 잘 아니까.
다른 아빠였다면 어땠을까. 왜 어른들이 하는 일에 따라오려 하냐며 호통이라도 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 마음 약한 아빠는 내가 침묵하는 게 못내 마음 쓰였는지 다정하게 또 얼렀다.
“우리 딸, 아빠가 금방 갔다 오고, 솜사탕도 사 주면서 말해 줄게.”
“……웅, 알겠어!”
다른 방법으로 알아볼 수도 있는 거니까.
나는 여전히 내 볼을 꼬집고 있는 아빠의 손을 말랑말랑하고 쪼그만 손으로 꼬옥 잡으면서 말했다.
“잘 다녀와!”
이번만큼은 아빠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믿어 주기로 결심했다.
“응, 시엔.”
아빠도 어른이니까 말이다.
나는 아빠의 굳은살 가득한 손을 꼭 잡으면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나도 이제 마법사를 고용하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