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아빠는 시엔만 있으면 되는데 (58/77)


58화. 아빠는 시엔만 있으면 되는데
2023.06.20.



 
시엔을 만나고 난 뒤, 마티어스는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저택으로 향하면서, 그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란 상당히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사내를 보며 말했다.


“자네도 아이를 키운다고 했었지.”

“아, 예.”

“그대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 시엔이 좀 성숙한 편인가?”

그간 마티어스를 보좌하며 상당히 많은 일을 겪기는 했대도, 부관은 살짝 당황했다. 특히 그가 시엔에게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애착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부관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 평범한 어린아이 같으십니다. 사랑스러우시고요.”

“무슨.”

마티어스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부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우리 딸은 특별해. 세상에서 제일.”

“……네?”

마티어스의 시선을 받은 부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우뚱했다.


“햇살처럼 따뜻하고, 어딜 보나 평범하고는 거리가 멀지.”

냉랭한 표정으로 팔불출 같은 말을 한 다음, 마티어스는 곧장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자신이 거주하는 미르모드의 서쪽 저택 앞에 황녀의 마차가 당도한 것을 보았던 것이다.


“천천히 따라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저택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제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한 황녀의 용건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황녀와 단둘이 마주 앉은 자리.

모락모락 김이 오른 차가 식을 때까지 응접실을 지키고 앉아 있던 황녀는, 마티어스를 보자마자 아름다운 눈웃음을 쳤다.

어떤 남자나 사르르 녹을 듯한 눈웃음이었지만 마티어스는 목석처럼 단단했다.


“세리나 황녀 전하께서 미르모드에 어떤 볼일이 있으신지.”

“아…… 이렇게 바로 본론인 건가요?”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는 마티어스를 보면서도 황녀는 당황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아마 마티어스 미르모드의 성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찾아온 것이리라.

그녀는 식은 찻잔을 아래로 내려놓은 다음 정갈하게 선언했다.


“혼담을 넣을 생각이에요.”

“누구에게.”

“제가, 당신에게요. 우리 둘의 결합을 요청하려 해요.”

마티어스의 안색에는 호기심이나 흥미 따위도 일절 없었다.

그는 예리한 시선으로 황녀를 해부하듯 응시했다.


“갑작스럽군.”

“혼담을 조만간 직접 넣을 거예요. 공식적으로요.”

“나한테는 아주 좋은 일이야. 황제 폐하라는 날개가 생기는 거니까, 하지만.”

황녀는 그럴 만하다는 듯이 그린 듯한 눈웃음을 지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자 대외적으로는 황제의 사랑을 받는다는 평가.

사교계의 꽃이라는 이미지까지……. 여러모로 그녀의 평판은 최상이었다.

하지만, 마티어스는 권태로운 낯으로 마저 입을 열었다.


“아마도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여자인 당신이 내게 청혼하는 건 수지타산에 안 맞는데.”

“수지타산이라 함은?”

“나는 아이가 있어. 게다가 과거는 어둡기 짝이 없지. 게다가 당신을 그리 아껴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황가와 미르모드 간의 적대 관계 탓에, 결혼을 하게 되면 꽤나 마음고생을 할 텐데.”

“…….”

“이런 혼인을 먼저 요청한다는 건, 누가 봐도 당신에게 물밑 속셈이 있다는 걸 알 만하지 않겠나.”

지금의 마티어스 미르모드는 이제 아주 잘 알았다.

달아 보이는 음식에 덫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에게는 지켜야 할 딸이 있지 않은가.

제 딸의 어머니가 생기는 일이기도 하니, 조금 더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결혼을 하려 하는 건지, 이제 날 설득해야 할 것 같은데. 어때?”

저 황녀가, 자신의 목줄을 잡아채려고 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도.

그러니 구태여 무언가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황태자 전하께서 황가와 미르모드 간의 결합을 원하세요.”

마티어스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유려하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결혼 상대자는 마티어스 님, 당신이 아니라면 저보다 열 살은 많은 늙은이, 혹은 제국 바깥의 왕자들이죠. 그런 건 원하지 않거든요.”

마티어스는 가만히 황녀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받아치는 황녀의 눈빛은 제법 단아하고 단정했다.

그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지만, 그녀는 객관적으로 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다.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아니라 혼담을 내거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로.


“혹시 혼담으로 나 같은 짐승 새끼에게 목줄이라도 채우려는 거라면.”

“아, 레이디에게 그런 말은 실례예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다음, 마티어스는 말했다.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군.”

황녀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그럼, 저는 정식으로 가문에 혼담을 요청하겠어요.”

악셀 미르모드는 당분간 마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

이제 마티어스의 적은 황가가 될 것이다.


“어디 한번, 해 봐.”

그는 싸늘한 낯으로 황녀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황가의 속셈이 무엇인지.

마티어스, 그 역시도 서서히 알아볼 생각이었다.

***

그렇게 아빠를 보내고 이력서를 확인하면서도 도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대체 황녀의 속셈이 뭐지!’

안 그래도 어린이의 몸이라서 정신력이 자주 흐트러지는데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기고 나니 두 배로 집중이 안 됐다.

그 탓에 오늘은 특출난 인재를 뽑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면접을 성심성의껏 진행한 다음,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시녀 언니들의 품에 안겨 한달음에 집으로 귀환하는 길. 시녀 언니들은 내가 너무 대견하고 멋지다면서 땅에 발바닥도 못 딛게 했다. 안 힘들어? 라고 하니까 아령 하나보다 안 무겁다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내 몸무게가 아령 하나보다 못 하다니……’

쓸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 나는 우연히 우리 저택에 놀러 온 레온하르트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하나 전달받게 되었다.

황녀가 우리 아빠에게 찾아온 이유를 말이다.

혼담을 넣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진짜냐고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해맑게 밤톨, 넌 알지? 라고 물어봤지만…… 나는 정신적으로 약간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황녀가 내 새엄마가 될 수도 있다고?’

악셀 미르모드에게 향했던 혼담이 아빠에게로 들어왔다.

이것이 청신호가 될지 적신호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건…… 적신호에 가깝겠지.’

생각해 보면 아빠에게 새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황제가 직접 혼담을 얘기한다면, 제아무리 미르모드라도 독단적으로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실, 특히 적통 황녀와의 결합은 누가 봐도 이상적인 일이니까.

특히 미르모드를 잡아먹을 듯이 굴었던 황궁과의 결합이라니.

이렇게 된다면 미르모드는, 정말로 대적할 바 없는 힘을 지니게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빠가 독단적으로 거절한다면 어떨까.

원로원이나 공작가의 가신들이 일제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정치적인 입장보다도 아빠의 상황이 더 중요했다.

그러고 보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한테 아빠는 그냥 사랑하는 시골 농사꾼 아빠였으니까.


‘우리 아빠는 평생 혼자 살아도 되는 걸까.’

아빠는 나와 달리 부인을 가지고 싶어 할 수도 있었다.

아빠에게도 아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아빠 보러 가야겠어!”

 

***

아네사 황녀는 성녀 멜로디아의 절친한 친구이자 천사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내가 악역에 빙의한 이상, 아네사 황녀가 내게도 ‘천사’ 같은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게다가 어떤 나비효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원작과 달리 악셀이 아니라 아빠에게 혼담을 넣는다지 않는가.

나는 아빠 침실 문을 쾅 열고, 의자에 앉아 있는 아빠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품에 쏙 안겼다. 폭신 말랑한 몸이 아니라 딱딱한 근육이 얼굴에 쿵, 하고 닿아 왔다.


“무슨 일이야?”

머리에 혹 날 거 같은 내 마음도 모르는 아빠는 행복한 목소리로 달게 물었다.


“우리 엄청 오래오래 행복하자.”

“응? 무슨 일 있었어?”

“별일은 아니고…….”

나는 아빠를 올려다보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빠. 결혼할 거야?”

아빠를 향해 걸어오면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나도 이제 아기가 아니라 어엿한 열 살이었다. 아빠에게도 연인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나이였다.


‘괜찮은 사람이라면 새엄마가 되어도 돼.’

저 한 마디에, 아빠도 내가 지금 돌고 있는 황녀와의 혼담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빠는 당연하다는 듯이 조용히 말했다.


“몰라. 관심 없어. 아빠는 시엔만 있으면 되는데?”

나는 고개를 팍 하고 들어서 아빠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이들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말처럼, 나는 웬만한 어른들이 내 앞에서 거짓을 말하는 건 다 보였다.

그런데 말이다.

아빠가 내게 보여 준, 그 눈동자에는 거짓 한 점 들어 있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정말?”

“응. 아빠는 시엔이 최우선이야. 시엔밖에 없어, 아빠한테는.”

아빠의 눈동자가 절실하게 보였다. 마치 아빠 인생의 전부가 나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됐다. 아빠에게도 새엄마든, 뭐든. 나 말고도 좋아하는 게 있어야 했다. 그래야 아주 만약에 내가 잘못되더라도, 아빠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빠는 내가 없는 미래 따위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 눈치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빠 삶의 이유가 시엔인데.”

그 말은, 듣기에는 참 달콤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의 뜻은, 만약에 내가 나중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나는 조그만 유치를 꾹 깨물어 맞대며 진지하게 말했다. 앞니가 흔들려서 아팠지만, 그래도 엄격하게 말해야 했다.


“그러면 안 돼.”

“응?”

“아빠가 시엔만큼 좋아하는 거, 시엔이가 차근차근 찾아 주께!”

사랑하는 사람의 삶의 이유가 나밖에 없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니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아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시엔은 어때? 시엔은,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음, 엄마가 가지고 싶냐면…….


“새엄마는 생각 안 해 봤어.”

새엄마가 가지고 싶다, 같은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그냥 애초에 엄마에 대해서 크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한테는 아빠만 있으면 돼!’ 하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빈자리를 준 것도 아니고. 그 어떤 빈틈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언제나 나한테 잘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사실, 새 가족이 생기는 게 무섭기도 해.’

환생 전의 기억 속 엄마는 무서운 존재였다.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위협할 때면 나는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러니까 나한테도 아빠만 있으면 되기는 했다. 만약 아빠가 괜찮다면.


“시엔이는 아빠만 있으면 최고로 좋아!”

그렇게 말한 순간 나는 새엄마를 받아들인다는 건, 우리에게는 조금 머나먼 일의 이야기일 것 같다……라고 막연한 생각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