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꼬마 가장 시엔 님
(24/77)
24화. 꼬마 가장 시엔 님
(24/77)
24화. 꼬마 가장 시엔 님
2023.02.21.
안전이 최우선이니 의심의 끈을 놓지 않고 이 순박해 보이는 아저씨들을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어쩌면, 이 험상궂은 아저씨들까지 내가 지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늘도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그래……. 귀여운 거 좋아하네, 다들…….”
그렇게 나는, 우리 미르모드 가문, 로체른 백작이 된 아빠의 친구들까지 다 거둬 먹이는 꼬마 가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괜찮다.
‘내가 아주 강력하다는 것을 오늘의 사냥을 통해 증명했으니까.’
긴 한숨을 내쉬며, 내가 입을 열었다.
“조아. 다음 사냥 대회에서는 더 멋진 걸 가져다 조.”
“솔새 같은 거면 될까, 시엔?”
“아니. 사자나 드래곤! 더 열심히 잡아 와.”
허튼소리였다.
토끼나 잡고, 마수가 있으면 도망치기나 하던 키만 멀대같이 큰 순수한 아저씨들이 드래곤이니 사자니 하는 것들을 데려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면 경각심이라도 갖겠지.’
아까 나를 보면서 눈물을 훌쩍거리던, 눈에 스크래치가 날 정도로 험상궂게 생겼지만 마음이 여린 아저씨가 큰 소리로 말했다.
“사자나 드래곤이요? 오, 그건 제 전문-.”
“아, 시끄럽네.”
어떤 아저씨가 말하려는 걸 단칼에 막은 아빠가 내 찐빵 같은 볼을 꾹 눌렀다.
그리고 앞접시에 고기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시엔, 많이 먹어. 그래야 키 크지. 사자나 드래곤 같은 무서운 건 생각도 하면 안 돼, 응?”
‘아무래도 아빠는 나를 너무 얕보는 거 같아.’
또래보다 더 작은 키에 웅얼거리는 말투. 다섯 살보다 더 조그매 보이는 인상.
사실 흑막이 되기엔 많이 부족한 외적 양상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내 전력을 인정했다.
그리고 전투적으로 왼손에 포크, 오른손에 나이프를 들고 말했다.
“웅! 일단 머글게!”
아빠의 말대로 나는 열심히 토끼 앞다리 구이를 뜯어 먹었다.
내가 열심히 먹는 모습을 보던 아저씨들이 연신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거칠고 흉악하게 뼈째로 고기를 뜯어 먹었다. 와구와구, 앞니를 드러내고 아까 아저씨의 흉포한 표정을 흉내 내면서!
물론, 딱 옥수수 알만 한 유치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그리고 접시 위에 뼈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어느덧 테이블 위는 유쾌한 분위기였다.
아까 세작이 침입했던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는 듯이.
‘그러고 보니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해 줘야겠는데. 아빠가 너무 모든 사람들을 쉽게 믿는 것 같으니까.’
“아, 맞다. 아까, 아빠 없을 때 세작이가 왔다?”
이제 막 달아오르려던, 시끄럽게 떠드는 듯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랬어? 어쩐지, 소리가 났었어.”
“웅, 무서어하지 마. 내가 쫓아냈지.”
나는 아티팩트에 대해 말하려다가 입술을 물었다. 아빠는 내가 할머니한테 마도구를 받은 걸 모르고, 당분간은 비밀로 할 생각이었다. 나는 환히 웃으며 내 등 뒤에 있는 시녀 언니의 옷깃을 꾹 잡아챘다.
“웅, 아니. 시엔이가 아니라 시녀 언니들이 내쫓아 줬지.”
내 말을 들은 아빠는 무표정하게, 말이 없었다.
나는 새하얀 고양이 앞발 같은 조그만 손을 들어 아빠를 토닥토닥해 줬다. ‘세작’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부터 어쩐지 아빠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무서운 모양이었다.
하긴 이제 막 백작이 된 연약한 아빠한테 세작의 습격이라는 건, 엄청 공포스러운 일이겠지.
나는 근엄하게 말했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 많아. 그니까 사람 넘 믿지 마로라.”
그래도 얼어붙은 분위기는 나아지지 않았다.
대신 아빠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시엔.”
식사를 하다 말고 벌떡 일어서 내 옆으로 다가온 아빠는 내 어깨를 꼭 끌어안고 방금 전 내가 했던 것처럼 토닥토닥 두드려 줬다.
“많이 무서웠지?”
잔뜩 피를 내고 떠나면서 날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세작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는 우쭐한 얼굴로 소리쳤다.
“아아니, 하나도. 아빠, 잘 드러 바.”
“응?”
“우린 지금 비상사태라구. 여기는 아주 무시무시한 가문이란 마리야.”
“하하……. 어떻게 알았지, 우리 딸이…….”
아빠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본 나는 근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도 토끼 같은 거 잡을 시간에 수련도 하고, 나쁜 짓도 많이 해야 대.”
나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생긴 아빠의 미간 주름을 자그마한 손으로 꾹꾹 누르며 크게 말했다.
“시엔, 아가. 우리 아기는 행복한 생각만 하면 된단다.”
“…….”
“아빠가 미르모드 가문 사람들 다 착하게 만들어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안타깝게도, 아빠의 머리는 여전히 꽃밭이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 생각했다.
‘일단 내가 더 악독하게 강해지는 쪽으로 가자. 아빠를 교화시키는 건……. 당분간은 포기해야겠다.’
나는 눈을 이글이글하게 뜨며 생각했다.
우선 세작을 보낸 놈부터 파 봐야겠다.
세작을 보낸 ‘아름다운 사람’이 도대체 누군지를 알아낼 차례였다.
***
한 편, 델피아는 무료하게 막사 안에 앉아 있었다.
사냥 대회가 끝날 때가 됐는데, 숲으로 보냈던 세작이 도착하질 않았다. 마티어스의 딸이라는 시엔도 마찬가지.
그녀는 하품을 하며 가신들이 보내온 서류를 점검했다.
사실상 모든 게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마티어스를 잘 알진 못하지만, 꽤 독특하긴 했었지.’
이제 갓 이십 대 중반 정도인 그녀는 마티어스가 자행한 악행을 몇 개밖엔 보지 못했다.
어차피 가문의 아이들은 서로 친밀한 관계가 되지 못하니까, 그와 그녀는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고.
‘그래도 흐리멍덩한 기억 속에, 마티어스는 꽤 흥미로운 인물이었던 기억이 있는데 말이지…….’
아직 세작의 소식을 받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담담하게 생각했다.
“아, 감감무소식이네. 다 죽었나 봐.”
그녀는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렸다.
마티어스가 돌아오면서 그녀의 평범한 일상에 꽤 재미있는 일이 발생할 것 같았다. 물론, 아직까지는 그저 자신의 추측일 뿐이지만.
“자꾸 이렇게 나오니까 내가 직접 가고 싶어지잖아.”
서류 안에는 전쟁광 악셀이 전쟁을 급히 마무리하고 있다는 내용도 나와 있었다.
그가 늦어도 한 달 이내로 가문에 복귀할 예정이라는 것도.
“내가 악셀보다 더 빨리 도착해야겠는데.”
델피아는 서류를 덮으며 제 목을 감싼 숄을 목 조르듯 묶었다.
“재밌을 것 같아.”
‘도대체 어린애는 어떻게 생긴 걸까? 내 반 토막만 한가.’
델피아는 ‘진짜’ 어린 시절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간지옥에서 눈을 떠 보니 성년 의식을 치르고 있었으니까.
“아, 내일이나 다음 주쯤 가면 될까.”
델피아는 새하얀 머리칼을 넘기며 씨익 웃었다.
‘성녀’가 지상에 도래할 날도 머지않았다.
그녀에게는 물론 모든 정보가 있었다. 이번 대의 성녀, 멜로디아는 고아를 후원하는 등 선량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결벽적으로 깨끗하단 말이지.’
황태자의 정치적 파트너라거나, 하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는 걸 보면 말이다.
‘신전 측에서 후계 싸움에 끼어들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신전이든 성녀든, 악마와 관련된 소문을 지닌 마티어스 미르모드가 가주 위를 승계할 수 없도록 총력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 사이에서 이득을 취할 수도 있는 모양새였다.
‘일이 제법 재미있게 되겠어.’
이번 일을 보니 마티어스는 세작을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제 세력을 여기저기 퍼트리는 데에 열심이었다.
마티어스나 마티어스의 딸.
악셀.
성녀까지.
꽤 재밌는 혼돈이 연출될 것 같았다.
“구경하고 싶어졌어.”
맹세코, 델피아는 그 혼돈 속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다.
장난스러운 관조자, 딱 좋지 않은가?
델피아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그어졌다.
***
미르모드 공작가의 후계자이자 로체른 백작이 된 아빠와 측근들의 사기를 고양하기 위한 사냥 대회는 무사히 끝났다.
‘아빠가 중간에 어디로 사라져서 심심해.’
아빠는 내 어깨를 꼭 잡아 주면서, 우리 딸을 괴롭히는 건 아빠가 다 없애 줄게, 라고 말했다. 정말로 하나도 의지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잇새로 무슨 말을 중얼거린 뒤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아빠를 뒤로했다.
그 직후, 곧장 저택의 방에 도착한 나는 캄캄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 만났던 아빠의 측근들을 떠올렸다.
“시엔 님, 밤하늘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셔요?”
아빠 친구들 생각, 이라고 말하려던 나는 창문에서 몸을 돌려 소파에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 측근들의 전력은 답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 아빠와 똑 닮아 있었다. 악당다운 면모가 있기는커녕 아주 연약하고, 섬세하고,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일 뿐…….
내 생각을 굳혀 주듯 언니들이 어느덧 자그만 봉제 인형을 꺼내 보여 주었다.
“아, 마티어스 님의 측근분들께서 토끼 인형을 대령했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어요?”
내 품 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크기의 토끼 인형을 내 손에 건네며 언니들이 뿌듯하게 웃었다.
‘이게 뭐지? 저주 인형인가?’
토끼 인형이긴 한데 토끼 인형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인형의 동그란 까만 눈은 비대칭으로 붙어 있었고 토끼 귀 위에는 터져 나온 실밥이 마구 뭉쳐 있었다.
“그분들께서 직접 만드셨다네요!”
아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저씨들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토끼 인형을 재봉했나 봐.’
그들이 곰손으로 꾸역꾸역 재봉했을 것을 상상하니 근심과 걱정이 더 커졌다.
‘내가 그 바보 아저씨들까지 전부 부양할 수 있을까?’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폭신폭신한 침구 위에 앉아 있어도 삼베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까끌거리는 이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
“시엔 님, 왜 한숨을 쉬세요?”
그래도 다행인 건 나에겐 듬직한 시녀 언니들이 있다는 것이다.
“아니…….”
“아! 그때 발견했던 세작 놈들 때문에 그러시죠?”
정확히 그 세작 때문에 한숨을 내쉰 건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작, 분명히 뭔가 이써.”
“그랬죠. 뒤를 파 봤는데 죽은 거 같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들의 목적이 오리무중이었다.
‘사냥 대회에서 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 도대체 누가 시킨 거지?’
지독한 의구심이 지펴졌을 때였다. 시녀가 말했다.
“프레스 가문에 은밀히 의뢰를 넣어 두었습니다.”
“프레스 가문?”
“예. 이쪽 벤치가 잠시 몸담았던 가문입니다. 정보를 캐내는 데에 꽤나 일가견이 있지요.”
“그 사람들 말로는, 아무래도 짐작 가는 데가 있다고 하네요.”
좀 더 캐내다 보면 나오겠지.
“그렇구나, 다행이다. 구런데…….”
나는 눈앞에 일렬로 서 있는 시녀 언니들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까 살아남는 데에 급급해서, 언니들 이름도, 가문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왼쪽 언니 이름이, 벤치?”
왼쪽에 근육이 조금 더 빵빵하고 머리에 파란색 브릿지를 넣은 시녀 언니, 벤치가 굳세게 대답했다.
“네. 프레스 자작가에서 왔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옆에 있던 앞머리가 뾰족하게 올라간 언니가 말을 이었다.
“아, 저는 프트 가문의 데드리입니다. 이렇게 이름을 말씀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던 나는 멈칫했다.
잠깐만, 내가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은데.
‘너무 이름을 바로 밝혀 주는 거 아냐?’
귀족가의 시녀는 시녀가 되면서 제 이름을 버리고 그저 ‘측근 시녀’ 혹은 ‘꾸밈 시녀’ 정도의 직함을 갖는다.
그러니 시녀들이 제 이름을 자신의 주군에게 직접 밝히는 건 평생 그 주군을 모시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런 걸 이렇게 쉽게 말해 주다니.
나는 살짝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벤치, 데드리.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세작을 잡으면 닭 모가지 꺾듯 뚜둑, 꺾어 버리겠습니다!”
“충성!”
가끔은 언니들의 저런 과격한 언행이 무서울 때도 있지만, 난 흑막이 될 거니까 익숙해져야 했다.
그리고 사실 아빠 친구 아저씨들이 건넨 토끼 인형보다는 시녀 언니들의 거친 악행이 더 안심됐다.
“조아, 일단 세작이 어디서 왔는지 차자 보자!”
언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시엔 님, 내일 약속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녀들의 말에 나는 무릎을 쳤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중대한 미션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세작을 찾기 전에, 내 편을 하나 더 만들어야 하는 미션 말이다.
바로, <세노아 신전의 성기사님 내 거 만들기> 퀘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