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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악당 아저씨보다 내가 더 강하거든 (12/77)


12화. 악당 아저씨보다 내가 더 강하거든
2023.01.10.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눈을 꼭 감고 포기하려던 그때, 내 귓가에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진정해, 시엔. 저 말은 가짜야.’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선물해 준 조그마한 목걸이가 반짝, 빛을 냈다.

푸르스름한 빛은 나를 지켜 줄 듯 말 듯 미세하게 빛났다.

그렇지만 미력한 요정의 기운은 강한 환영까지 전부 없애 주지는 못했다. 당연하지, 내가 요정의 핏줄은 아니니까.


‘그래도 이 빛 덕분에 조금 기운이 나.’

귓가에 들리던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눈앞에 무언가가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나를 감싸 안던 푸르스름한 빛이 생명력을 잃고 꺼졌다. 내 귓가에 ‘힘내’라는 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눈을 조금씩 떴다.

평범한 다섯 살짜리 어린애는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붕괴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곳이지만, 괜찮다.


‘나한테는 우리 아빠가 있으니까.’

 

 
농사짓느라 손발이 다 부르터 버린 바보 아빠를 이 조그만 손으로 꼭 지켜 줄 거니까.

나는 새하얀 손을 꾹 움켜쥐고 바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일으켰다.

그리고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나는 내 토끼 모양 가방을 떠올렸다.

함께 시골에서 살던 때, 매일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만들어 담아 주었던 아빠가 떠올랐다.


‘우리 시엔, 토끼 모양 가방 예쁘다.’

‘나 토끼 안닌데?’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기 토끼지, 그럼.’

그렇게 말해 주는 아빠가 내 진짜 아빠고…….


“그 사람들은 내 가족 아냐.”

나는 알고 있었다.

<환영 미로>를 통과하는 한 가지 방법은 끔찍한 트라우마를 대면하고 그 기억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임을.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환각과 환청을 피해 미로 안을 헤매다 쓸쓸히 죽어 가거나, 탈출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커다란 문제를 안고 피폐하게 살아갔다.

그렇지만 나는 <환영 미로>의 수법도, 탈출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직접 함정에 몸을 던지는 도박을 했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서 이겨 내야 하는 법이니까.

나는 조그만 불씨를 틔우듯 작게 말했다.


“나는…… 소중한 아빠 이써.”

교육원장의 환술에 당했던 아이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게는 커다란 희망과, 지켜야 할 아빠가 있었다.

내가 무너지면 이 미르모드가에서 아빠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주먹을 꾹 쥐고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어둠을 물리치는 게 빛이듯, 부정적인 절망을 이겨 내는 건 긍정적인 희망이니까.


“우리 아빠는 나 사랑한다고 했거든.”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그동안 아빠가 내게 해 줬던 말들을 하나씩 하나씩 끊임없이 되새겼다.

반짝반짝, 전구가 하나둘씩 켜지는 것처럼 내 마음에 따뜻한 온기가 밀려들었다.


‘아빠는 날 사랑한다고 했어.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다고, 뭘 해도 사랑스럽다고 했어.’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나는 미로의 벽에 등을 기댔다.


‘내 꿈은, 아빠랑 평생 행복하게 사는 거야.’

나는 입 안으로 내 소망을 작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 하나를 켜듯이.

내 귓가에 웅성거리던 소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리고 그 소음 대신 눈앞에 아빠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골 마을에서 매일매일 맛있는 빵을 구워 주던 아빠.

내가 콜록콜록, 재채기할 때마다 건강식을 산더미만큼 구해 오던 아빠.

글자를 하나하나 알려 주면서, 발음하는 방법을 알려 주던 아빠.

다른 사람들이 내가 늦되다고 한마디씩 할 때마다, 느린 게 아니라 차근차근 배워 가는 거라고 말하던 아빠…….

토끼 모양 도시락을 차려 주던 아빠.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나를 꼭 안고 자던 모습까지.


‘딸,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가끔 내가 과거의 편린 때문에 악몽을 꿀 때면 아빠는 밤이 새도록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밤새 자장가를 부르다 목이 다 쉬어서는.


‘아빠가 우리 시엔 사랑하는 거, 알지?’

계속, 내 귓가에 다정한 말들을 속삭여 주던 우리 아빠.


‘아빠가 다 해 줄게. 우리 딸은 행복하기만 해.’

포근하게 나를 감싸 주는 것 같은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

전생에서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내가 처음으로 가져 본 무조건적인 애정.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난 우리 아빠를 구할 거야. 반드시 살아남아서 행복하게 살 거야.’

나는 ‘행복한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소망 하나만을 품고 환생했다.

모든 건 신이 내 소망에 응답해 준 덕분이었다.

신조차 내 꿈을 지켜 줬는데, 고작 교육원장 따위에게 질 리 없다.


‘나는 환영 따위에 지지 않아, 절대로.’

사악한 환상을 깨부수는 건, 가장 강력한 희망뿐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강력할수록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리지 않는다.

행복해지겠다는 믿음 하나로 신을 소환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나였다.

그래서 이 안에 당당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살아남을 거니까.


‘나는 아빠랑 행복하게 살 거니까.’

나는 단단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거울이 깨지듯이 환영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환영 미로가 무너지자 경악한 표정의 교육원장이 내 눈앞에 보였다.


“너…….”

“이제 할아버지 차례야.”

환영술사의 환영에는 치명적인 제약이 있다.

그건 바로 리플렉션이라는 약점이었다.

리플렉션.

환영술사는 환영이 깨지면 고스란히 그 잔해를 돌려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와 다르게 환영술사의 ‘특혜’를 받아 몸이 미로 안으로 완벽히 이동하지는 않으나, 육체와 정신체가 반쯤 분리될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정신체 일부가 미로 안에 갇힌 채로 고문 같은 환영을 보게 되는 셈이다.

나는 내 손에 쥔, 이제는 조각난 마력석을 흔들었다.


“마력석이 빨개지고 있어.”

“너, 너…… 이러고 무사할 줄 알아?”

“웅. 할아버지는 이제 많이 아플걸!”

내 말이 신호탄이었을까.

마력석이 손안에서 강하게 진동함과 동시에 교육원장이 제 심장을 급하게 움켜쥐었다.


“크으윽……!”

드디어 그에게도 새로운 환영의 악몽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자기 자신이 만든 환술에 역으로 공격당하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끔찍한 환영을 겪고 있을 그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닥거렸다.


“강한 자라면 빠져나와 바.”

“……이, 입, 닥쳐.”

그에게 내 목소리가 들릴까?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줄 생각이었다.


“약한 자라면…….”

난 미르모드 가풍에 대해선 잘 모르는 꼬마애지만 오늘부로 한 가지는 분명히 배웠다.


“잡아먹히겠지? 약한 자는 잡아먹히는 고니까.”

지금까지 많은 아이들을 끔찍한 트라우마 속으로 보냈던 교육원장.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지독한 환영 속에서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평생 자기가 괴롭힌 그 아이들처럼, 그는 그 악몽을 영원히 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그가 가진 마음에 달려 있었다.

나는 싸늘하게 웃으며 교육원장의 끄나풀인 릴미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묘한 상황에 다리가 풀린 듯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선새미, 안녕?”

“……너, 도대체 교육원장께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추방자의 딸 주제에!”

“내가 뭘 했는데?”

“네가 교육원장님의 목숨을 위협했어! 테스트도 제대로 보지 않았지.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그러나 씩씩대면서도 무서운 듯 그는 내 근처로 다가오질 못했다.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토끼 모양 가방에서 조그마한 거울을 꺼냈다.


“바보 아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당장 원장님을 제대로-.”

“선생님도 같이 가야 대자나.”

내 말에 그는 의아한 듯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나는 그를 향해 거울의 앞면을 보여 주었다.

이 거울은 도서관에서도 흔히 대여할 수 있는, 하급 아티팩트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리플렉션.”

이 거울은 내가 직전에 겪었던 마법을 반사해서 돌려줄 수 있는 것이었다.

딱 한 번밖에 쓰지 못하고, 영향력이 적지만.


“너, 너……!”

“나한테 미안하다구 해.”

그는 박쥐 같은 자였다.

뱀 같은 시선이 무릎 꿇은 교육원장 쪽을 힐끗거리더니 나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미, 미안하다!”

“아, 구래?”

“그래, 살려 줘! 미, 미안하니까!”

나는 거울 아티팩트의 앞면을 톡톡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흠…… 싫은데?”

명백한 거절이었다.

이내 상황을 파악한 그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나를 때리려는 걸까. 그렇다면 한 대 정도는 맞아 줄 용의가 있긴 했지만…….

역시 거울 아티팩트의 효과가 더 빨랐다.


“크흡!”

괴상한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그는 교육원장처럼 바닥에 차츰 허물어졌다.


“바부.”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본디 성품이 악한 사람들의 악몽은 더욱 끔찍한 법이었다.

그들은 당분간 이 방 안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나온다 하더라도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을 리 없지.


‘너희 삶의 기준은 부패와 제 한 몸의 영달일 뿐이니까.’

나는 그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몸을 돌렸다.


‘내 편으로 만들까 했는데 이런 놈들은 내 편으로 만들어도 뒤통수만 칠 뿐이겠지!’

그리고, 내가 싫다니까 어쩌겠어?

나는 가방끈을 손으로 꾹 쥐었다.

내 주변에서 깜빡, 푸른빛이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날 계속 지켜 줘서 고마워요, 요정님!’

환영 미로 안에 있을 때, 내 근처에서 간간이 맴돌던 푸른빛을 기억한다.

나는 평범한 일반인이지만 잘 연구하면 언젠가는 요정님을 소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콰앙!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그리고 바깥에는, 무시무시한 표정의 아빠가 서 있었다.


“시엔!”

“아빠아!”

나는 빠르게 아빠한테 다가가 꼭 안겼다.

고양이처럼 아빠의 옷에 내 얼굴을 부비느라 몰랐다.

그가 허공을 멍하게 응시하는 두 남자를 건조하게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티어스의 눈짓 한 번에, 그들은 심장이 조여드는 극심한 공포를 느끼며 허물어졌다는 것도.

그 둘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영영 없을 터였다.

***

아빠의 손을 꼭 붙잡고 북쪽 첨탑으로 들어온 나는 취조를 당하기 시작했다.


“시엔, 아빠가 위험한 일은 절대 하지 말라고 했지.”

“그치만 테스트! 한다구 해……서…….”

“나쁜 사람들 따라가지 말랬잖아. 혹시나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아빠는 혼자 어떻게 살아.”

나는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막 아빠 생각하니까 힘이 났지. 그래서 갠차났다?”

“도대체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시엔? 응? 너처럼 작고 약한 애가…….”

“음. 음……. 별거 없는데! 아빠 생각하니까 환영이 딱 깨졌지 뭐야?”

나는 그들에게 고의적으로 복수한 이야기는 쏙 빼고 설명했다. 우리 착한 아빠가 그런 나쁜 말을 들으면 속상해서 울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백 퍼센트 진실은 영원히 꾹 함구하기로 한 것이다.


“너……. 휴, 그래. 케이크부터 먹자.”

나는 아, 했고 아빠가 생크림 케이크를 입 안에 떠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케이크를 먹던 나는 문득 환영 미로 속에서 보았던 악몽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마주한 과거의 편린들이 마음을 괴롭혔다.

나는 살짝 몸을 떨며 아빠를 불렀다.


“……그런데 아빠.”

“응.”

“아빠가 매일 말했다?”

“어떤 거?”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긴장이 됐다.


“나, 쓸모없어두 좋다구…….”

“응.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

“안 착해두 갠차나? 막 컵 다 깨 버려도?”

불안해진 나는 손가락을 작게 꼼지락거렸다. 아빠한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아주 조금만.


“컵 깨면?”

조금 어리둥절한 목소리였다.


“으응…….”

불안한 마음으로 눈을 데굴 굴리는데 아빠의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컵 백 개 깨면, 천 개 사 줄게.”

원래 아빠는 안 그랬는데. 쓸모없다고 모욕하고 이것도 못 하는 거냐고 비난했는데.

지금 우리 아빠는, 바보 같은 시골 농부 마티어스 아빠는…….


“그까짓 거 하나도 안 아까워, 우리 딸이니까.”

……나보고 우리 딸이라고 한다.

따뜻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그까짓 거 하나도 안 아깝다고 한다.

눈가가 가냘프게 떨려서 나는 조그만 호빵 같은 손을 눈가에 가져다 댔다. 눈앞에 암막 커튼이 쳐진 것처럼 가려졌다. 손 틈새로 아빠를 빼꼼히 보는 것도 지금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눈을 가린 걸 어떤 신호로 인식한 걸까? 아빠의 목소리가 조금 더 다급하고 조급해졌다.

나는 눈썹 뼈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면서 애써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안 착해도 돼. 아주 나빠도 돼. 그렇지만 아빠는 우리 딸이 행복한 생각만 했으면 좋겠어. 좋은 경험만 겪으면 더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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