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북천존자
“흑혈신마가 죽은 사건으로 천하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그렇겠지. 무림 십대고수 중 하나라면 중원 무림을 대표하는 고수니까.”
“천주님 명대로 은근하게 소문이 퍼지게는 했지만 이런 일은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북밀영주 태성기와 함께 북밀천주인 북천존자를 옆에서 보필하고 있는 은밀영주 경대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천주의 명에 의문을 표시하는 자체가 불경이었지만 그라서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흑혈신마가 북천존자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우연히 퍼진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중원은 크다. 기인이사도 많지. 만약 은밀하게 일을 처리한다면 정말 무수히 죽여야 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들과 싸운다면 십대고수와 백대고수 중 상위 몇 명만 죽여도 곧 내게 굴복할 것이다.”
경대철은 북천존자의 말을 듣자 그때서야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음 행보는?”
“오십여 년 전 내가 이십대 청년일 때 무림 곳곳에서 반원 세력이 나타나고 있었다. 처음 원을 세울 때와는 이미 상황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기는 힘든 상태였지, 결국 차선책으로 나온 것이 무림의 고수들을 비무라는 이름으로 제거하는 것 이었다. 암살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복수심만 더 키워줄 수 있다는 의견 때문에 정식 비무를 택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내가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북천존자는 초원에서 내려오는 강력한 패도적인 무공에 사방을 정벌하면서 약탈한 수많은 비급을 참고하여 새로운 무공을 창시했었다. 그의 나이 겨우 약관일 때 이룬 일이니 그가 얼마나 무공의 천재였는지 알 만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일은 모두가 익히 알듯이 중원무림의 처참한 패배였다. 물론 중원무림은 아직도 북천존자와 원의 관계는 알지 못했다. 만약 알게 되면 반원 감정만 더 키울 수 있다는 심모원려(深謀遠慮)였다.
그리고 그 비무는 북천존자에게도 무공을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었다. 이후 수많은 고수를 잃고 자존심까지 짓눌린 무림이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하면서 정치에 관심을 끊자, 황실에서는 북천존자에게 그만 비무행을 하고 돌아오라고 명했다. 북천존자가 이유도 없이 사라진 비사가 거기에 있었다.
“그 당시는 어쩔 수 없이 비무행을 멈추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나를 간섭할 사람은 없다. 모두가 복원(復元)을 염원하니 그동안은 나도 정치에서 손을 뺄 수 없었지만 이제 내가 아니라 그들이 나를 버린 것이니 그들도 더 이상은 내게 의무에 대해서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다 내 생각으로는 원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어렵다. 이미 하늘이 우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은 황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림을 제압하면 어쩌면 더 이상의 힘을 가질 수도 있다.”
놀랍게도 말의 내용과는 달리 북천존자의 표정은 처음부터 황실전복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투였다.
“그럼 북밀사자님께 태성기를 보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런 계획이 있으시면 모두 모아 힘을 합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어차피 나의 싸움은 개인적인 싸움이다. 비록 청담이 상당한 무력을 사방에서 모았다고는 하지만 무림이 힘을 합친다면 그것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뿐이다. 아니, 나라 해도 무림 전체의 힘을 당할 수는 없다. 누군가가 흙탕물을 튕기며 사방을 헤집고 다니면 올바른 판단을 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 아이들이 사방에서 소란을 피우는 동안 나는 천하를 뒤집어놓을 것이다.”
말하는 북천존자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어려서부터 무공이 좋았고 승부가 좋았다. 하지만 칸의 자손으로 무공을 배우는 데는 엄청난 혜택을 보았지만 그를 제어하는 손도 무척 많았다.
원 말에는 황제가 암살의 위협에 거처를 하루에도 몇 번씩 옮겨 다녀야 할 정도였고 그는 황실의 보위를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대세를 거스르기는 힘들었다. 몇 번 주원장을 죽이려고도 해봤지만 그때마다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나타나 실패를 하고는 그는 하늘이 그들을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초원으로 돌아간 그는 이후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주원장을 죽이려고 잠입했다가 생각지도 않게 기룡왕을 알게 된 것도 그에게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에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대제자와 같은 청담을 중원으로 들여보냈고 기룡왕에게도 그가 원의 황실 사람이라는 것을 숨겼다. 기룡왕은 욕심도 많지만 의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중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배신을 할 사람이었다.
청담에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전갈을 듣고는 거의 사십 년 만에 다시 중원에 들어왔던 그는 청담의 계획을 듣고는 확실히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다시 초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초원을 비운 몇 달 사이 모든 정황이 변했다. 우선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주던 북원의 칸이 누군가에 의해 암살을 당했고 그로 인하여 간신히 붙들어왔던 부족 연합도 완전히 깨져 있었다. 같은 피를 나눈 부족들이 서로 반목을 하고 서로를 원수라 칭하며 완전 내란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힘을 모두 모아도 성공 확률이 오 할이 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족장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 것이 부족의 특징이었다. 그가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엄청난 피를 부를 것이 뻔했다. 자신에게 반대한다 해도 같은 피를 나눈 그들을 부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 죽일 수는 없었던 그는 그동안 그가 키워온 무사들과 이곳저곳에서 친분과 금전으로 회유한 여러 무인들만으로 명을 무너뜨릴 생각을 했다. 세력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청담의 계획이 완벽하게 성공한다면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믿었던 청담의 계획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포쾌에 의해 실패했다는 말을 듣고는 북천존자는 다시 하늘이 그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계획을 바꿔 무림에 먼저 터전을 마련할 생각을 했다.
무림이라는 곳이 무공만으로 정복하거나 일통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었다. 이미 그는 알게 모르게 모든 사람에게 천하제일고수로 각인되어 있었다. 다만 신비하게 사라졌고 무림명숙들이 그에게 너무 많이 죽었기에 쉬쉬할 뿐이었다.
북천존자는 우선 한 지역을 장악한 후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 천하를 잠식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무작정 세력을 키운다면 기존의 세력들이 힘을 합쳐 대항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지루한 소모전이 될 확률이 높았고 결국 뿌리가 없는 그들이 패할 공산이 컸다.
북천존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 아예 반항할 생각조차 못하게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포쾌 놈이 계속 일을 망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예 이번 기회에 그동안 열심히 수련한 용사들의 실력도 발휘할 기회를 줄 겸 수하들을 보내 그놈을 제거하는 것이 어떨지……?”
“아니다. 일개 포쾌가 그렇게 무공이 높다면 분명 황궁에서 특별하게 보낸 자일 것이다. 당분간 되도록 관부는 건드리지 않는다.”
“존명!”
* * *
죄 없는 고남보를 한 방에 작살 낸 유성탄은 쪼그리고 앉아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고남보의 코에 손을 한 번 대보고는 안심한 듯이 일어섰다.
“자식이 생각보다 뼈는 튼튼한 모양이군, 죽지 않았으면 됐고. 야! 너, 이리 와봐.”
갑자기 유성탄이 그가 숨은 골목의 담벼락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다 아니까 이리 나오라니까!”
다시 한 번 유성탄이 재촉하자 삼십쯤 먹은 장한 하나가 쭈뼛거리며 나왔다.
“하후란에게 연락해서 청담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라.”
유성탄의 뜬금없는 말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장한은 눈이 동그래지며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있냐?”
“그거야…….”
“내가 바로 너무 잘생겨서 마누라를 셋이나 얻을 예정인 특수포쾌 포천망쾌야.”
장한은 이미 유성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소개하는데 굳이 잘생겨서 마누라를 셋이나 얻을 거라고 아무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유성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킥 웃었다.
“웃어?”
“아닙니다. 그리고 청담이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너 바보냐?”
“예?”
“서쪽이 한 군데냐? 세상에 서쪽은 수천 군데가 넘어. 그런데 무조건 서쪽이라고 하면 어딘지 어떻게 알아!”
“서쪽은 하나밖에 없는데요?”
“정말 무식한 놈일세. 자, 여기서 보면 저쪽이 서쪽이지?”
“예?”
“그럼 여기서 보면 어디가 서쪽이냐?”
“똑같은데요?”
“야, 이 자식아. 여기서 가면 이쪽 서쪽이고 저기서 가면 저쪽 서쪽이잖아. 뭐가 같아!”
장한은 유성탄의 말에 안색이 굳어져서 급히 대답했다.
“하하… 그러고 보니 나리 말씀이 맞습니다. 서쪽이 많군요.”
“알았으면 빨리 가서 어디 서쪽인지 알아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이쪽 서쪽은 뭐고 저쪽 서쪽은 뭐야? 다 같은 방향이구먼.’
장한은 유성탄의 주먹이 무서워 맞장구는 쳤지만 이해가 안 가는지 속으로 한마디 중얼거리고는 사라졌다.
“하여간에 자식들이 무식해 가지고… 다 가르쳐줘야지 안다니까. 에이!”
장한이 말한 것은 서쪽 방향이라는 말이었지만 유성탄이 말한 것은 갈 방향이었다. 광동에서 움직인 사람의 서쪽하고 절강에서 움직인 사람의 서쪽하고 방향은 같을지 모르지만 둘이 도착하는 곳은 판이하게 다른 것과 마찬가지였다.
괜히 엄한 장한에게 짜증을 부린 유성탄은 다시 쭈그리고 앉더니 갑자기 지금 자신의 상황이 무척 몸에 익은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심각한 얼굴로 곰곰이 생각했다.
“에이 씨! 옛날에 엄마한테 맞고 도망쳐서 숨어 있었던 상황이었구나. 난 또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나 했네.”
“아가씨! 전 유성탄과 혼인 못 해요!”
“이유가 뭐니?”
“천요궁은 사파예요. 어떻게 요사스런 천요궁의 궁주와 함께한 남자를 섬긴단 말이에요. 전 그렇게 못 합니다.”
“니가 천요궁이 사파 소리 듣는 데 뭐 보태준 거 있냐!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감히 궁주님 면전에서 그런 무례한!”
언제 나타났는지 교미향이 앉아 있는 화설군의 뒤에 서 있다가 백리빙의 말이 떨어지자 흥분해서 소리쳤다.
“흥! 당연하지요. 아무 남자 앞에서나 옷을 훌떡훌떡 벗는 천요궁 사람하고 무림에서 성녀 소리 듣는 신녀궁 사람하고 같을 수는 없지요.”
“백리 총사는 제가 아무 남자 앞에서나 옷 벗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화설군이 화가 나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궁주의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며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성탄이 왜 궁주님께 넘어갔겠어요? 유성탄을 어떻게 속였기에 그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이라고 하느냐고요! 길 가는 말을 잡고 물어봐요. 천요궁의 궁주가 불쌍한 사람인가 아닌가!”
“말이야 사람 말을 못 알아들으니 당연히 대답을 못 하겠지요. 하지만 똑바른 사람이라면 천요궁의 궁주라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 자리인지 알 거예요. 백리 총사는 고상하고 귀한 여인이 자리 하나 잘못 앉아가지고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며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힘든 일인지 모를 거예요.”
“오해가 아니고 사실이니까 문제지요!”
화설군의 전음이 교미향의 귀를 울렸다.
[교 당주! 뭐 하는 거예요! 내가 직접 싸워야겠어요!]
화를 억지로 참느라 얼굴색까지 변한 화설군은 고상하게 앉아 있는 정자운의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교미향은 전음을 듣자마자 다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야! 태군께서 내게 뭐라고 했는지 아냐? 내 가슴이 소 젖 같아서 머리에 베면 정말 푹신하겠다고 하더라. 백리빙 너는 가슴도 없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씨! 쪽팔리게’
교미향의 말을 들은 화설군의 인상이 찌그러들었다. 아무리 고상하게 보이려고 해도 도와주지를 않으니 고상하게 보이려야 보일 수가 없었다.
“이거 왜 이래요! 나도 남들만큼 나올 것은 다 나왔다고요!”
“빙아!”
교미향의 말에 순간 열이 받은 백리빙이 소리치자 정자운이 급히 불렀다.
“자, 내 말 좀 들어봐요. 지금 무림 십대고수 중 하나인 흑혈신마가 죽었다는 말은 들었지요?”
갑자기 무림의 가장 큰 이야깃거리가 정자운의 입에서 나오자 모두 쳐다본다.
“그리고 흑혈신마를 죽인 자가 오십 년 전의 신비인인 북천존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소문이에요.”
“그게 지금 이 상황과 무슨 상관이 있지요?”
화설군은 무슨 뜬금없는 얘기냐는 듯이 물었다.
“아니, 상관있어요. 이미 무림 십대고수 중 세 분이 유 상공을 북천존자와 맞먹는 인물로 지목했어요.”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자운의 말이 사실이라면 유성탄이 천하제일 혹은 제이의 고수라는 말이 되는 것이었다. 화설군의 입이 벌어졌다. 천요궁의 태군이 천하제일, 제이를 다투는 고수라면 누가 감히 천요궁을 업신여기겠는가.
“그런데 그 말은 유 상공께서 북천존자와 싸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정자운의 말에 다시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북천존자는 이미 오십여 년 전에 천하의 모든 고수를 꺾었던 사람이에요. 유성탄은 어찌하다가 맷집 하나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의 무공 실력은 실지로 형편없다고요. 안 돼요! 그럼 유성탄 죽어요.”
방금까지 유성탄을 성토하던 백리빙이 가장 먼저 펄쩍 뛰었다.
“난 이 나이에 과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가 온몸을 다 던져서라도 막을 거예요.”
화설군이 천요궁의 궁주답게 유성탄이 북천존자와 싸우겠다면 몸으로 막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무림인입니다. 그리고 유 상공께서도 무림인이고요. 이미 무림인의 낙인이 찍힌 이상 무림의 위기를 보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저도 위험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막고 싶고요. 하지만 천하가 원한다면, 유 상공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면, 유 상공께서 결국은 북천존자와 싸우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돼요. 이런 상황에서 유 상공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야 할 우리가 싸우는 바람에 그분이 정문도 아닌 창문으로 도망치셨어요. 그분같이 여린 성격에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힘들어할지 생각은 해보셨나요? 빙아, 너도 마찬가지다. 이미 정인으로 정했으면 그분을 마음으로 따라야지 화가 난다고 자신의 지아비가 될 사람을 창문으로 도망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마음이 여린 유성탄이라니? 화설군과 백리빙은 정자운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건지 그냥 입에 발린 소리인지 알고 싶은 것이었다.
“그럼 아가씨께서는 그래도 유성탄에게 시집을 가시겠다는 말인가요?”
백리빙은 정자운의 처지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어제 같았으면 정자운도 화설군과 같이 한 남자를 지아비로 섬긴다는 생각을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의 그녀는 이미 유성탄에게 침이 발린 상태였다. 춘약이 유성탄을 구해주고 있었다.
“그분은 남들은 상상도 못할 어려운 삶을 살아온 분이다. 나도 이런 상황이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미 일어난 일을 억지로 되돌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파국이 될 수밖에 없다. 혼인이고 사랑이고 다 깨져버릴 거야. 그리고 그분은 누구의 손도 미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을 벌이고 돌아다닐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분을 올바르게 이끌 의무가 있다.”
“천요궁주는 분명 유성탄이를 나쁜 길로 이끌 거예요.”
“천요궁주께서 유 상공을 오로지 이용할 생각으로 혼인을 하려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화 궁주님을 믿는다. 내가 보기에는 화 궁주는 정말 깨끗하신 분이다.”
화설군은 정자운의 말을 듣자 입이 벌어졌다. 천하가 인정한 신녀가 자신을 깨끗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아무리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칭찬은 기분이 좋은 법이었다.
“자, 이제 유 상공을 찾아보지요. 지금 얼마나 낙심하시고 계시겠어요.”
“낙심이요? 아가씨는 아직도 그 작자의 본성을 모르고 계세요.”
백리빙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화설군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 같은 종류의 남자는 낙심이라는 것을 모르지요.”
남자에 대한 연구만 전문적으로 한 천요궁주의 부언이었다.
“쟤는 엉덩이 처졌고… 아, 아깝다. 몸매는 죽이는데 얼굴이 왜 저 모양이냐. 쯧쯧!”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청담에 대한 정보를 기다리던 유성탄은 생각 외로 많은 여인이 골목길 앞을 지나다니자 아예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여인들의 몸매를 감상하고 있었다. 여인들에게 점수를 매기는 그의 얼굴에는 깊은 낙심의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그, 어떻게 내 마누라들보다 예쁜 여자는 한 명도 없냐.”
이미 자신의 처지를 잊었는지 그녀들이 자신의 마누라가 되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유성탄은 세상에 생각보다 예쁜 여자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낙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북과 호남의 경계에 위치한 동정호는 그 경관이 아름다워 마치 선경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찬사를 받은 곳이었다. 원체 크기도 크기려니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고 낚싯대 하나만 있으면 먹는 것이 해결되니 많은 기인이사들이 즐겨 은거 장소로 택하는 곳이기도 했다.
“한가하시구려.”
하얀 백발을 날리며 흰 마의를 입은 신선풍의 노인이 낚싯대를 늘이고 있는 곳에 검은 마의를 입은 노인이 다가서더니 말을 걸었다. 흑백으로 뚜렷이 비교가 되는 두 노인은 풍기는 기운도 완연하게 달랐다.
“허허허! 인생이란 것이 모든 것이 한가하다면 한가한 것이 아니겠소. 마음먹기 달린 것이겠지요.”
“역시 이미 세상사에 달관하신 것 같구려. 그렇다면 굳이 세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으시겠소?”
“날 죽이시러 오셨소? 허허, 다 늙어서 낚싯대에 의지해 연명하고 있는 노부에게 아직도 볼일이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동정어은……. 참 좋은 이름이오. 십절지존보다 마음에 드는 이름이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렇게 떳떳하게 정면으로 나섰다면 무명소졸은 아닐 것 같은데 누구신지 말해 주실 수 있겠소?”
흰 마의를 입은 노인은 약간 의외라는 듯이 그때서야 감은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십절지존 대무진, 누구라도 들으면 경외의 예를 지키는 무림 십대고수 중 다섯 명의 정파인 중 하나였다.
모든 무기는 물론, 시(詩), 서(書), 화(畵), 거기다 음(音)까지 모든 것이 독보적이다 해서 붙은 이름이 십절지존이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세속의 명예에 미련을 끊고 동정호에 은거하여 낚시로 소일하면서 붙은 이름이 동정어은(洞定漁隱)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북천존자라고 부릅디다.”
“그대가… 어이 그대가 다시……?”
절대로 평정이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십절지존은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무림의 소식에 신경을 쓰지 않던 그로서는 북천존자가 다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이렇게 놀란다는 것은 그만큼 북천존자라는 이름이 중원무림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식으로 비무를 청하겠소.”
북천존자는 포권을 하더니 비무를 신청했다.
“내게 존자와 비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줄은 짐작도 못했소이다. 흔쾌히 받아들이겠소.”
북천존자는 십절지존의 말을 듣자 가까이 있는 바위로 가더니 손가락을 바위에 박더니 일필휘지로 그의 이름을 적었다.
“듣던 대로 대단하시구려.”
십절지존은 감탄의 목소리를 내뱉더니 그 역시 손가락을 바위에 박더니 역시 그의 이름을 써나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비무를 할 경우 정당한 비무였음을 증명하는 의식이었다.
* * *
천하가 다시 격동했다. 흑혈신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북천존자가 재출현했음을 확실하게 알리는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찌하시렵니까?”
무허 진인을 다시 찾은 청오 진인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대무진 그 친구가 죽다니… 세속의 모든 인연을 끊고 나름대로 도를 찾던 친구였는데…….”
무허 진인은 신선의 풍모를 지니고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짓던 십절지존의 얼굴을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북천존자가 천하에 포고를 했다고?”
“예, 십절지존까지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찾아갔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직접 찾아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군산에서 기다릴 것이니 누구든 자신에게 도전을 하라고 포고를 했습니다. 일 년간 누구를 막론하고 비무를 받아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간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무림은 자신을 천하제일고수로 인정하고 무림의 모든 일에 자신의 재가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재가? 무림의 황제라도 되겠다는 의미인가?”
“현재 중론은 무림맹을 결성해서…….”
“지금 홀로 천하를 향해 모든 도전을 받아주겠다는 자를 우리가 지금 무리를 지어 가서 상대를 하자는 말인가?”
“저도 마땅치는 않습니다. 하지만 비무라는 것이 누가 봐도 함정입니다. 이미 흑혈신마나 십절지존께서 당한 것으로 보아 공식적으로 중원의 고수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수작인 듯한데 우리가 거기에 장단을 맞춰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해도 우리는 장단을 맞춰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천년무림의 전통을 이어가는 일임과 동시에 새외의 세력에게 치욕의 지배를 받았던 중원무림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무허 진인의 정파에서의 영향력은 소림의 대하 선사와 화산의 매화검선과 더불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반대한다면 무림맹의 결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 아이… 내가 느낀 그 아이의 힘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분명 나를 능가했었다. 아직은 무르익지 못했지만 일 년여의 시간이라면 그 아이를 단련시키는 데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닐 것이다.’
무허 진인은 악동 같은 모습에 포쾌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던 유성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의 팔 성이 넘는 공력을 온전히 다리 힘으로만 견디다가는 갑작스럽게 뿜어져 나오던 정체 모를 거력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당시 무려 이 장이 넘게 튕겨나갔던 것이다. 물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행동은 했지만 무허 진인에게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 * *
“그러니까 더 이상 안 싸울 거란 말이지? 좋아 이거 가지고 가서 사고 싶은 거 사.”
찾기 쉽게 숨어 있던 유성탄인지라 찾으려고 하자마자 곧장 찾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백리빙과 화설군이 화해했다는 말에 유성탄이 기분이 좋은지 품안에서 금자를 무려 두 냥이나 내놓으며 통 큰 척한다.
‘무엇이든 사라고 돈을 주는 남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여자에게 예쁨을 받는다.’
유성화에게 배운 아주 중요한 격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진 게 없는 여인들 얘기였고 유성탄의 앞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부자였다. 앞에 놓인 금자 두 냥은 관심도 안 보인 그녀들은 유성탄에게 안으로 들어가자고 눈짓을 했다. 그녀들로서는 뭔가 유성탄과 그녀들의 관계를 확실히 정립할 필요가 있었고 거기에 더하여 현 무림정세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잉! 아무리 화해를 했다지만 대낮부터 셋이서 나를……?’
야무진 공상을 하며 유성탄이 아우들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으로 들어가자 철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대형께서 왜 저렇게 기분이 좋으시지요? 나 같으면 골치가 아파서 인상이 찌그러질 상황인데요.”
“너는 아직도 대형을 모르냐?”
마동파의 말에 모두 쳐다본다.
“뻔한 거 아니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계시는 게 분명하다. 아니지, 이미 떡을 머리로는 먹으시고 혼자 기분이 황홀경일지도.”
마동파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누라에 첫째, 둘째가 어디 있어? 나한테는 모두 첫째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백리빙은 아직 내키지 않았지만 정자운의 강요에 못 이겨 화설군을 인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자운은 어차피 그녀가 상전으로 모시고 있으니 정자운을 위로 놓는 것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아니, 당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화설군까지 형님으로 모실 수는 없었다. 누가 뭐래도 유성탄을 제일 먼저 안 것이 자신이라는 자부심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화설군은 자신의 신분으로 보아 백리빙은 당연히 자신의 밑이라 생각했고 정자운을 자신의 밑으로 놓을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견을 들은 유성탄의 입에서는 뜻밖의 소리가 나왔다.
“한 집안이 잘되려면 위계질서가 잡혀야 합니다. 당연히 부인들 간에도 서열이 있어야 집안을 잘 꾸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정자운의 말을 확실하게 이해를 하진 못했지만 분명 옳은 소리일 거라는 것은 짐작한 유성탄이었다.
‘이거 분명 뭔가 해결책을 내놓지 않으면 만날 싸울 것 같은데… 어떡하지?’
“나이로 하자! 나이 제일 많은 사람이 첫째! 어때?”
“솔직히 저희들은 어릴 적 사부님께서 주워 와서 키우셨기 때문에 정확한 생일을 알지 못합니다.”
정자운의 말에 화설군이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본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뭔가 처음으로 동병상련의 느낌을 받는 그녀였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제일 먼저 애기를 낳는 사람이 첫째, 그 다음 낳으면 둘째. 어때?”
혼인한 여인들에게 출산이란 무림여인이라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그녀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잠시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좋아요! 어차피 아직은 혼인을 한 사이가 아니고 또 일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우선은 그 방법을 하나의 의견으로 생각해 놓겠어요. 그리고 더 좋은 생각이 나면 그것을 채택하기로 해요.”
“그럼 이제 우리도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유성탄은 얘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이 들자 약간 느끼한 목소리로 자신의 공상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했다.
“그래요. 지금까지는 우리 사적인 얘기였고 이제부터 유 상공께서 무림인의 한 명으로 그리고 천하의 안녕을 책임 질 포쾌로서 어찌할 것인지 의견을 듣고 싶네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린고? 무림인의 한 명이란 거는 그렇다 치고 내가 왜 천하의 안녕을 책임진다는 거지?’
“자운이가 뭘 몰라서 그러나 본데 나 천하의 안녕을 지키는 포쾌 아니야! 난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특수포쾌야.”
“그 특수임무가 바로 천하의 안녕을 지키는 거라는 것을 몰라요!”
백리빙이 유성탄이 또 무조건 회피하고 보려고 들자 따끔하게 말했다.
“하하하, 빙아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나의 특수임무는 반역의 도당을 잡아들이는 일이라니까! 누가 그런 유언비어를 흘렸는지 모르지만 그런 데 현혹되면 안 돼!”
“그래서 사내대장부로 태어나서 천하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모른 척하겠다는 건가요?”
다시 뾰족하게 말하는 백리빙을 보며 유성탄이 다시 말했다.
“도대체 천하가 무슨 위험에 빠진다는 거야? 밖에 나가봐. 얼마나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지금 무림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무림? 거기야 어차피 힘만 센 무식한 놈들이 지들끼리 싸우는 곳이고, 나 같은 평화주의자는 그런 데 끼면 안 되지! 나는 여기 일만 끝나면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들하고 부모님 모시고 열심히 살라고 그러는데. 그리고 내가 무림인이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무림이 싫어서 무도 안 먹는 사람이야.”
“그럼 유랑께서는 아내들이 죽어도 상관 안 하시겠네요?”
듣고 있던 화설군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아내? 내 아내! 어느 놈이 감히 내 아내의 몸에 손을 대! 내가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내 아내가 죽는 것은 못 보지! 누구든 당신들을 건드리면 그때는 모두 죽음이야!”
유성탄이 흥분해서 소리치자 화설군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유랑의 말씀은 무림이 싫어서 무도 안 먹는다고 했는데… 어쩌지요? 저희들은 모두 무림인인데.”
‘이 씨! 좆 됐다.’
그녀들이 끼어든다면 그로서는 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잠시 세 여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던 유성탄은 그녀들 없이 혼자서 감숙으로 돌아가 사느니 그녀들을 데리고 충동에 가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고민에 빠진다.
“이거 알아?”
“뭔지 설명을 해야지 무조건 이거 아냐고 물으면 어떻게 알아요!”
백리빙이 여전히 마음이 풀리지 않았는지 말꼬리를 물고 들어갔다.
“내가 무림 일에 상관하면 분명 흑혈 영감을 죽였다는 자를 만날 텐데, 잘못하면 셋 다 과부 된다는 생각을 안 해봤어?”
“저희는 무림 여인입니다. 무림인으로 태어난 이상 지인의 죽음을 언제나 염두에 두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한 가지 약속을 드리겠어요. 만약 유 상공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다면 저 역시 같이 목숨을 끊을 것입니다.”
‘이 씨! 강태웅이보다 더 강적이네.’
“저는 제 손으로 내 눈을 뽑아버리겠어요.”
‘저 애는 또 왜 저렇게 살벌한 소리를…….’
“호호, 저는 유랑과 같이 관 속에 들어가겠어요. 그리고 해골이 되어서도 유랑을 꼭 껴안고 있을게요.”
‘살아서 안아야지 재미있지, 죽어서 해골을 껴안고 있으면 무슨 재미야? 얘들이 모두 얼굴만 예쁘지 생각하는 것은 완전 괴담 수준이네. 씨!’
“에이! 그래, 나보고 어쩌라고!”
결국 유성탄이 지고 말았다. 세상에 유성탄이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무려 셋이나 더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왜 약속을 어긴 거요?”
절강에 자리 잡은 금모전의 장원에 도착한 청담은 현 책임자인 외당 당주 포덕술에게 추궁하듯이 물었다.
“약속을 어긴 것은 그쪽 아니오? 분명 호응하는 무인들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소! 우리만으로 상관세가를 친다는 것은 스스로 묘를 파는 거나 다를 게 뭐란 말이오! 거기다 만약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면 금모전만 혼자 똥을 뒤집어쓰게 되는 거 아니오! 청 형이 우리 금모전을 아주 우습게 여기는 모양인데 우리는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오.”
청담은 포덕술의 말을 듣고는 얼굴에 사이한 미소를 띠며 다시 말했다.
“알고 있지! 금모전이 얼마나 욕심이 많은 곳인지.”
포덕술은 청담의 말투가 반말투로 변하자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손이 뒤로 돌아갔다. 무기를 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기를 빼지 못했다. 어느새 청담의 장이 그의 가슴을 후려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방에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으윽! 청담, 네놈이 감히 배신을……!”
“배신? 하하하, 금모전 따위에게 무슨 배신을 하고 자시고 할 것이 있단 말이냐! 어차피 금모전은 우리에게 소모품에 불과했다.”
무림 오대사파 중 하나인 금모전을 작은 흑도파 대하듯이 말하는 청담의 말에 포덕술이 분노에 찬 눈으로 쳐다보며 다시 무기를 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내장이 크게 상한 그는 손을 올릴 수가 없었다.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결국 반항을 포기한 포덕술이 살기 띤 목소리로 묻자 청담은 빙긋 웃더니 물었다.
“사구치평은 사파인 중 잔머리가 가장 발달했다고 들었는데, 진짜 잔머리였나 보구나. 너희들은 이미 마약 거래를 시작할 때부터 소모품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너희들이 오늘 여기서 전멸당하는 것도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유? 이유는 너희들이 여기서 죽음으로써 금모전이 대대적으로 마룡방과 구룡회를 칠 거라는 거지.”
“전주님께서 어떤 분인데 네 생각대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전주님께서는 곧 모든 것을 알아내고는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넌 이만 죽어라.”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한 청담의 손이 포덕술의 머리에 닿자 포덕술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이 터져버렸다. 금모전의 외당당주로 무림의 절정고수로 큰소리치며 살던 그로서는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광밀단 단주 윤장도가 스르르 나타나더니 보고했다.
“전부 다 목을 잘라서 대나무에 끼워 담에 걸어놔라. 그리고 준비해 놓은 종이를 붙여놔라.”
“존명!”
‘사구치평은 기회만 생기면 절강으로 들어오고 싶어했다. 이 정도 멍석을 깔아주었으니 분명 몽땅 끌고 들어올 것이다.’
* * *
“다 죽었다고……?”
“예.”
내당당주 여충락의 보고를 받은 사구치평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전주님, 제가 당장 수하들을 이끌고 절강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격이 불같은 기명우가 열이 받아서 소리쳤다.
“조용히 해라!”
사구치평이 기명우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모두 조용해졌다.
“누구의 짓인지 알아냈느냐?”
“절강에 허락 없이 발을 들여놓은 대가라고 적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들어오면 이번에는 사지를 잘라놓겠다고 했습니다.”
여충락의 이어지는 보고에 사구치평의 얼굴에 살벌한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고 그의 손에 잡혀 있던 태사의 팔걸이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떨어져버렸다.
“전주님!”
“조용히 하라고 했다! 포덕술이 죽었다. 기명우 너까지 잃을 수는 없다. 절강은 우리의 세력이 아니다. 무조건 들어간다는 것은 또 다른 전멸을 부를 뿐이다.”
“그렇다면 전면전을……?”
여충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비해라, 마룡방이고 구룡회고 다 쓸어버릴 것이다.”
사구치평이 청담의 짐작대로 전면전을 선택했다.
* * *
“공주 마마! 지금 무림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저도 들었어요. 북천존자라는 자가 나타나서 무림에 자신에게 도전하라고 포고를 했다고요?”
“예, 이렇게 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상황이 달라지다니요?”
“무림인들의 움직임을 우리가 짐작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무인들의 움직임이 반역을 위한 거병인지 아니면 무림인의 움직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군을 동원하면 안 될까요?”
“무림인들 사이에서 주도권 싸움이 일어나면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북천존자란 자는 어떤 자인가요? 신타와 싸우면 어느 정도 싸울 수 있을까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제가 비록 백대고수의 상위 자리를 지키고는 있지만 무림 십대고수에게는 십초지적이 안 됩니다. 그런 십대고수가 그의 손에 죽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일초지적도 안 될 것입니다.”
주소연은 팔지신타의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팔지신타는 그녀가 아는 최고의 고수였고 대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것으로 짐작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일초지적이 안 된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말인가.
“그런 자가 만약 황상을 해하려 든다면 어떻게 막을 수가 있지요?”
“막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황상께서 주무시는 곳은 극비사항이 되는 것입니다. 단시간에 황상을 찾지 못한다면 아무리 고수라 해도 결국 경비병에 걸릴 것이고 군사가 출동하면 그로서도 견디지 못하고 물러서겠지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무림을 꺼려하고 어떻게든 제어하려고 하신 이유가 있었군요. 기회만 생기면 황제까지 죽일 수 있는 자들이 무림인들이니 말이에요. 어쨌든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요?”
“동창에서도 지금 청담이란 자를 찾아나섰다고 합니다. 현재 공주마마의 의중부터 확실히 말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말이지요?”
“반역의 무리를 잡는 것이 우선인지 아니면 동창의 위신을 꺾어 그들을 견제하는 것이 목적인지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주소연은 팔지신타의 말을 듣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눈치 채셨어요? 저는 신타 할아범이 정치적이 아니셔서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그래요, 지금 황실은 아주 튼튼합니다. 반역의 낌새는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걱정하지 않아요. 황상께서는 태자께서 황위를 잇기 전에 동창의 기를 꺾으시려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생각보다 대처는 쉽습니다. 현재 유성탄이 왜관에 있습니다. 그리고 북천존자는 군산에서 도전을 기다리겠다고 했습니다. 유성탄에게 군산으로 가서 치안을 확립하라고 명하십시오.”
“그러면요?”
“현재 동창의 움직임을 보면 유성탄의 행적과 일치합니다. 그 말은 동창에서 유성탄이 반역의 무리를 찾는 핵심인물이라고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성탄이 군산으로 움직이면 동창도 그쪽으로 따라갈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현재 하후란의 정보와 우리가 얻은 정보를 종합해 보면 반역의 무리들은 청담과 깊은 관계가 있어요. 하지만 청담 그자에게 반역을 주도할 만한 군사는 없는 것이 분명해요. 그렇다면 이번 반역 건은 찻잔 속의 미풍에 불과할 거예요. 그리고 황상께서 어림군에서 날랜 무사들 수십을 차출해서 보내주신다고 했어요.”
“어림군을요?”
“기룡왕을 잡으라는 어명이 계셨어요.”
“기룡왕 전하를요?”
“황상께서 밀지를 보내셨어요. 기룡왕이 지금은 할아버님께서 버티고 있으니 은둔자처럼 가만히 있지만 분명 태자께서 황제가 되시면 정사에 관여하려 들 거라고요. 오래전부터 기룡왕을 제거하려고 하셨던 모양이에요. 이번 제가 올린 장계를 보시고는 이번 반역에 분명 기룡왕이 관여했을 거라고 하셨어요. 만약 증거를 못 찾으면 증거를 만들고 연관이 없다면 연관을 만들어서 기룡왕을 반역에 엮으라고 하셨어요.”
“기룡왕은 거의 만 명에 가까운 군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십의 어림군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정면 대결은 안 되겠지요. 황상께서도 그들이 거병을 하는 상황은 원치 않으세요.”
“그렇다면 황궁으로 불러들여 잡아들이는 것이 가장 쉽지 않을까요?”
“예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평화시기예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황궁에 불러들여 잡아들이는 것은 각 지역의 군벌들을 자극해서 정정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는 판단이십니다.”
팔지신타는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패황이라는 말까지 듣던 영락제였지만 이미 나이가 들었다. 다음 대 황제가 될 손자가 아직 이십도 안 되었으니 정정(政情)이 불안해지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었다.
“그럼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기룡왕은 아주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에요. 할아버지께서 수십 년을 비리를 잡아내서 제거하려고 했는데도 걸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용의주도한 사람인지 아실 거예요. 우선은 무림 일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요.”
* * *
“뭐! 연 소주,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아예 나를 지 부하 취급하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 여인과 싸우느라 심심할 겨를이 없던 유성탄은 주소연이 보낸 서찰의 내용을 정자운에게 듣고는 열이 받아 말했다.
“연 소주가 누구지요?”
화설군이 물었다.
“별거 아닌 놈이야. 검찰관이라고 나보다 한참 낮은 놈인데 까부네.”
“검찰관이면 얼마나 높은 지위인데 포쾌하고 비교를 해요?”
백리빙이 웃긴다는 듯이 말하자 정자운이 백리빙을 꾹 찔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강태웅이 넌지시 물었다. 벌써 꽤 오랜 시간을 한곳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방도들 수련시키랴, 이름만 당주인 아우들과 방도들에게 나름 방규를 주입시키며 방의 체계를 잡아나가랴 쉴 틈은 없었지만 그래도 북천존자의 등장과 함께 무림이 바삐 돌아가는데 한곳에만 있는 것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군산에 가서 치안을 유지하라고 했을까?”
유성탄의 질문에 모두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여기서 치안을 유지해야 구룡회도 잡고 마룡방도 잡으면서 돈까지 버는데 말이야.”
유성탄은 물 좋은 곳을 놔두고 새로 개척해야 하는 곳으로 떠나는 것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로서는 안 갈 수 없었다. 서찰의 말미에 아버지 유정삼과 아우인 유성우의 승차(昇次)가 곧 다가왔다는 말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자! 이 자식이 또 아버지하고 성우를 가지고 협박을 한다. 씨!”
군산은 사방에서 온 무인들로 정신이 없었다. 북천존자에 의해 흑혈신마가 죽은 것으로 짐작이 가는 상황에서 십절지존까지 그에게 죽자 무림은 긴장에 빠졌다. 그런데 누구의 도전이든 다 받아주겠다는 북천존자의 포고는 무림에 혼란을 가져왔다.
수많은 고수가 군산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별 볼일 없는 자들은 평생의 이야깃거리라도 하나 얻을 요량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몰려들었다.
“군산에 뭔 일이 생겼냐? 이 많은 작자들이 군산으로 가는 거야?”
군산이 아직도 오백 리는 남았는데 들르는 주점마다 무림인들로 보이는 자들이 북적거리자 유성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글쎄요? 원체 군산 쪽이 무척 바쁜 곳입니다.”
아직은 유성탄에게 사실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모두 슬슬 눈을 피해가며 얼버무렸다. 문제는 유성탄 일행의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었다. 포쾌 복장을 한 유성탄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주위를 따르는 오십여 명이 넘는 산적 같은 인상의 유성방도들과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 명의 여인 그리고 그 주위를 따르는 역시 쭉쭉빵빵인 천요궁의 십여 명의 궁도와 역시 십여 명의 신녀단의 여인들의 부조화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안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유성탄을 믿고 간이 산만큼 부어오른 유성방도들이 눈을 부라렸고 당연히 무림인인 그들과 시비가 붙었다. 물론 시비는 그냥 시비로 끝나곤 했지만 이따금 칼부림이 벌어지기도 했다.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감히 눈을 부라리느냐?”
주루에 앉은 천요궁도들을 쳐다보는 한 무리의 무림인들에게 또 유성방도들이 협박하듯이 눈을 부라리자 그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진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받아친 것이다.
“이것들이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우리가 대유성방의 방도다! 좀 알고 까불어라!”
“유성방? 자네들, 들어본 적 있어?”
“야! 쟤들 좀 까불지 말라고 해라. 가는 곳마다 쪽팔리게 해서 죽겠다.”
“전에 대형은 더하셨어요. 가는 곳마다 우리가 얼마나 쪽팔렸는데요.”
“죽을래?”
“헤헤!”
“어? 가만있어 봐!”
방도들이 아무 데서나 시비를 벌이자 뭐라고 한마디 하던 유성탄은 주루의 이층에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다시 올라가는 한 인영을 발견하고 뭔가 생각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는 거지요?”
유성탄이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기자 화설군이 아우들을 보며 물었다.
“모르지요. 우리가 아는 건 저렇게 말도 없이 어디 가시면 꼭 그다음에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는 거지요.”
마동파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말에 정자운이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가서 말려야지 이렇게 그냥 앉아 계시면 어떡해요?”
“세상에 대형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솔직히 대형께서 형수님들 앞에서 하는 행동들은 정말 신기하다니까요.”
“뭐가요?”
“대형께서 세 분 형수님 앞에서는 전혀 화를 내지 않으시잖아요. 형수님들같이 대형에게 대했다가는 누구를 막론하고 된통 터지거든요.”
그녀들은 마동파의 말을 듣고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정자운을 따라 일어서서 계단을 올라갔다.
“아, 이게 누구야!”
유성탄은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커다랗게 소리쳤다. 이층에는 같은 무리로 보이는 무림인들이 약 삼십여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유성탄이 올라와서 소리치자 인상이 팍 찌그러들었다.
“아니, 금모전에서 잘 살더니 여기는 왜 온 거야?”
유성탄이 소리치자 한 명이 일어서더니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시오.”
“왜? 비밀이야?”
“비밀이랄 것까지는 없어도 사방에 떠벌릴 일도 아니오.”
“그래? 그럼 뭐가 겁나? 금모전에서…….”
“비밀이오!”
“비밀이구먼. 뭐… 그런데 비밀이면 입 막는 데 성의를 좀 보여야 하는데…….”
‘거머리 같은 놈!’
금모전 백은단 단주 위지월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품에서 전낭 하나를 꺼내더니 몽땅 유성탄에게 던졌다.
‘걸렸지!’
전낭을 받아 든 유성탄은 전낭이 묵직하자 기분이 좋은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전낭을 우선 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몽둥이를 꺼내 들었다.
“내가 거지냐!”
“그게 무슨……?”
위지월은 위험을 직감하고 급히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유성탄은 금모전에서 그와 싸울 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아이구!”
위지월은 눈앞에 별이 번쩍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백은단의 단원들과 대주 만가호가 급히 무기를 빼어 들려고 했다.
“무기 뽑기만 해! 그때는 날 원망해도 소용없다.”
이미 금모전에서 유성탄의 실력을 본 그들이었고 단주인 위지월이 손도 못 쓰고 쓰러지는 것을 본 그들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명색이 대금모전의 정예 무력집단의 단원인 그들이 단지 한마디 호통에 그대로 굴복하기에는 체면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몇몇이 무기를 빼어 들다가는 순식간에 달려든 유성탄의 몽둥이에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때 계단을 올라온 정자운이 소리쳤다. 금방 쫓아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이십여 명이 넘게 쓰러져 있자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아무리 무뢰배라 해도 사람을 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이유도 없이 때리는 거예요!”
백리빙도 같이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유랑께서 이럴 때는 이유가 있겠지? 호호호, 잘했어요. 남자가 모름지기 화끈한 데가 있어야지요.”
세 마누라 예정녀들의 각기 다른 반응을 들으며 유성탄이 씩 웃는다.
‘헤헤헤! 말하는 것이 어떻게 저렇게 다 다르냐? 하여간에 귀엽다니까!’
무조건 그녀들의 모든 것이 다 예쁜 유성탄에게는 그녀들이 한 말의 뜻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얘들 금모전이라고 좀 이상한 애들 모인 곳에 있는 애들인데 나한테 까불잖아? 잠깐만 기다려.”
유성탄은 한마디 하더니 위지월을 발로 툭 찼다.
“일어나!”
“왜 이러는 거요? 전낭도 줬지 않소?”
위지월은 유성탄의 발짓에 정신이 없는 듯 머리를 한번 흔들더니 커다랗게 항변했다.
“왜 던진 거야? 나를 거지로 생각한 거지?”
유성탄은 주먹으로 위지월의 배를 한 대 후려치며 물었다.
“으아악! 아니오! 절대로 그게 아니오.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뿐이오.”
위지월은 유성탄의 주먹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지 크게 비명을 지르며 부인했다.
“무의식적? 흠,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나를 거지로 생각했다, 이거지!”
유성탄은 턱에 손을 대고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다시 한 대 후려치며 다시 물었다.
“으악! 절대로 아니오. 정말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위지월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울려나왔다.
“그럼 왜 던졌는데? 거지로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
유성탄이 다시 한 대 치려고 주먹을 들자 위지월이 유성탄의 바지를 잡으며 울부짖듯이 말했다.
“절대로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그럼 여기에 왜 왔어?”
“그건 그냥 지나는 길이었… 으악! 윽, 컥컥!”
“거지로 생각 안 했는데 왜 돈을 던진 거야!”
위지월이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유성탄의 주먹이 이번에는 위지월의 목을 후려쳤다.
“그건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무의식적으로 나를 거지로 생각했다는 말이잖아!”
“아니라니까요? 정말입니다.”
“그래? 그럼 여기에 왜 왔는데?”
“그건 그냥 지나가느… 으악!”
“이 자식이 나를 거지로 생각해 놓고는 아니라고 그러네! 넌 좀 더 맞아야 해! 그럼 말해 봐! 왜 돈을 던진 거야!”
“그건 무의식적… 으악!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시 대답하던 위지월은 말이 계속 반복되고 있자 그때서야 뭔가를 느낀 듯 무조건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살려달라고? 거지취급을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살려달라는 거야, 씨! 그런데 여기 왜 왔어?”
“이번에 절강에 갔던 금모전의 무사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금모전에서는 마룡방이나 구룡회의 짓이라고 짐작하고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은밀하게 절강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흠, 그러니까 한마디로 싸우러 간다는 말이군. 니들만으로는 어려울 텐데? 딴 사람들은 어디 갔어?”
“그것은 전의 비밀인지라… 으악!”
“다시 묻는데 돈 왜 던진 거야? 나를 거지로 본 거 맞지!”
다시 한 대 맞은 위지월은 그때서야 유성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모두 말하기 전에는 계속적으로 돈을 던진 것을 물고 늘어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는 유성탄의 주먹이 너무 괴로웠다.
“다 인계하고 왔냐?”
“예, 관아에서 처음에는 무림인은 받을 수 없다고 버티더니 대형의 이름을 대면서 포천망쾌 님의 명이라고 했더니 순순히 옥에 집어넣더군요.”
위지월에게 알 건 다 알아낸 유성탄은 모두의 혈을 짚어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는 가까운 관아로 모두 보냈다. 반역에 준하는 치안불안유발범이라는 거창한 죄를 씌운 것이다.
“사구치평 그 영감이 직접 나왔다는데, 어떡할까? 그 영감 흑혈 영감 못지않게 강하단 말이야.”
“지금 천하가 북천존자 때문에 아주 시끄러워요. 이런 상황에서 금모전이 절강까지 원정을 가서 마룡방과 구룡회와 전면전이 붙는다면 천하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질 수도 있어요. 막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유성탄의 행동에 놀랐던 정자운은 생각 외로 유성탄의 행동에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신중하게 금모전에 의해서 생길 파장을 생각해 보더니 유성탄에게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파끼리 싸우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지들끼리 싸우다가 둘 다 망하라고 놔두지요.”
백리빙이 굳이 막을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유랑! 이번 기회에 몽땅 싸잡아서 없애버리고 절강은 우리 천요궁에서 장악하면 어떻겠어요?”
절강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마룡방과 구룡회의 위세에 힘을 못 쓰던 화설군이 슬쩍 자신의 포부를 내비치자 유성탄이 솔깃한 듯이 물었다.
“천요궁이 장악하면 생기는 게 많나?”
“상공! 상공은 정파인이에요. 어떤 지역을 장악하고 하는 그런 생각은 하시면 안 됩니다.”
정자운이 급히 둘의 대화를 막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어째서 유랑이 정파인이라는 말인가요? 제가 본 바로는 유랑은 사파인 중의 사파인이에요. 세상 누구도 유랑 같은 사파인이 되기는 힘들걸요. 아까 봤잖아요. 금모전의 무사 하나를 작살내는 거!”
‘에이, 애들 또 싸운다. 안 되겠다. 정파, 사파 소리 안 나오게 해야지.’
“조용!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무림의 정파도 사파도 아니야! 나는, 포천망쾌야! 그러니까 무림인들 사이에 나를 끼워 넣지 마.”
‘햐! 대형 엄청 똑똑해지셨네.’
유성탄이 단숨에 마누라들의 논란을 잠재워 버리자 아우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인들 틈에서 볶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순발력이 생기는 법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어이, 안녕하시오?”
여충락과 기명우는 절강에 들어가는 즉시 사구치평이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만드는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마룡방이나 구룡회나 어디도 금모전에게 만만한 곳은 없었다. 그들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구치평의 말마따나 그들의 총단을 급습하여 대가리들을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속전속결이 최선이었고 또한 비밀엄수가 필수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요?”
신중하게 대화를 나누던 여충락이 이상하게 짜증스런 목소리에 긴장해서 물었다.
“글쎄다? 아주 싹수없는 목소린데.”
콰다당!
“자식들이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왜 까부는 거야!”
갑작스럽게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려오자 여충락과 기명우는 그때서야 뭔가 생각이 난 듯이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아니? 저 또라이가 여긴 어떻게?’
여충락의 얼굴색이 변했다. 유성탄과 금모전은 모종의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어? 이거 봐라. 무지 높은 분들이 오셨네.”
유성탄은 기명우와 여충락이 금모전에서 대단히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포천망쾌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시오?”
“지나가다 보니까 웬 무지막지한 놈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 않겠소? 내가 누구요? 천하의 치안은 내 손에! 이게 내 좌우명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다 때려잡아 관아에 집어넣었지요.”
“잘하셨구려.”
여충락은 유성탄이 말하는 것이 설마하니 금모전의 백은단이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동네 무뢰배들을 잡았나 보다 하는 짐작으로 맞장구를 쳐줬다. 빨리 유성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하하! 역시 높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게 나같이 고단수란 말이야. 나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 줄 알았소이다.”
여충락과 기명우는 요점이 없는 유성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잡아들여 놓고 보니 이놈들이 금모전의 백은단이라고 그러는 거요.”
기명우와 여충락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이오?”
“금모전같이 대단한 문파에서 도둑놈같이 살살 숨어서 움직인다는 것이 말이 안 돼서 내가 좀 두들겨 팼더니 여기를 가르쳐줍디다. 그런데 여러분들을 보니 그놈들 말이 맞는 듯하긴 한데 역시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뭐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오?”
“금모전에 가만히 있으면 나한테 맞지도 않고 편안하게 살 텐데 뭐 하러 이런 곳에 나타나서 매를 버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이놈이 이제 보니 시비를 걸려고 왔구나!”
성질이 불같은 기명우가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여충락이 급히 앞을 가로막으며 말린다.
“장로님, 잠깐만 참으십시오. 본 전하고 포천망쾌하고는 서로 돕기로 약속을 한 걸로 아는데 잊으신 거요?”
“약속? 나같이 고상한 특수포쾌가 사파의 우두머리하고 무슨 약속을 해? 괜히 누명 씌우지 마라!”
“전주님과 술까지 같이 먹으면서 약속하지 않으셨소? 우리는 그래도 포천망쾌라면 자신이 한 말은 책임지는 사나이라고 생각했소.”
‘에이 씨! 여기서 사나이는 왜 나오는 거야.’
“거참, 이상한 놈들일세? 니들은 오줌 눈다고 변소에 가서 똥 싸고 나온 적 없냐? 사람들이 다 그런 거야. 어떻게 만고의 진리를 모르냐. 무식해 가지고. 에그!”
“지금 천금 같은 남자끼리의 약속에 대해 말하는데 오줌똥은 왜 나오는 거요?”
“오줌 눈다고 약속하고서 들어가서는 약속을 어기고 똥을 싸는 거, 그것도 약속을 어긴 거라 이거야! 그리고 지금 천금 같은 약속이라고 했는데 니들이 언제 나한테 천금 준 적 있어? 그래도 모르지, 지금이라도 천금을 준다면 내가 약속을 지킬까 말까 고민은 해볼지?”
기명우와 여충락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져 버렸다.
“정말 세상에 이렇게 짜증나는 놈은 처음 본다. 나 기명우가 정말 이번만은 못 참겠다!”
기명우는 말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의 절멸신장으로 유성탄의 가슴을 후려쳤다.
“이 영감 진짜 미련하네! 저번에 정통으로 맞았는데도 내가 끄떡없었잖아? 기억 안 나?”
유성탄이 전과는 달리 가볍게 피하며 말하자 기명우가 의외라는 듯이 뒤로 한발 물러서더니 소리쳤다.
“이놈아, 그때 너 나의 장에 맞고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었다. 그리고 아프다고 얼마나 엄살을 부렸는데 끄떡없었다고 거짓말을 치느냐!”
‘저 영감이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 뭔 기억력이 좋아. 씨!’
“이놈의 영감이 나이를 먹더니 기억력까지 왜곡하는구나! 좋다, 그럴 때는 머리에 몽둥이찜질이 직효약이다!”
소리를 지른 유성탄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기명우의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가자 여충락이 시비를 피하기는 틀렸다고 보았는지 검을 빼 들고는 유성탄의 옆구리를 갈라왔다.
“선사께서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허허허! 무림의 홍복이 아닌가 싶소이다.”
유성탄이 주루 안을 완전 쑥대밭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허리가 완전히 굽고 얼굴에 주름이 너무 많아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노승과 언젠가 유성탄에게 업어달라고 보채던 도인이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거의 구 성에 가까운 공력으로 천근추를 펼치자 내가 십 성을 사용했어도 막기 힘든 거력이 튀어나오더군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 아이는 자신이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더군요.”
“진인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저 아이가 사용하는 무공은 보기에는 태극권과 육합권 같지만 전혀 다른 무공입니다. 그 말은 저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무공을 창안했다고 봐야겠지요. 그런데 저 아이의 움직임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동작을 보이고 있습니다.”
“빈도도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완전히 뼈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군요.”
“오직 저 아이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배워도 펼칠 수가 없는 무공이지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까?”
“북천존자는 가히 천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한 무공의 귀재입니다. 우리 같은 범인은 백 년을 더 노력한다고 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이미 오십여 년 전에 그의 무공은 지금의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그걸 알기에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빈도의 한계인지 어느 선부터는 더 이상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더군요.”
대하 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십여 년 전 소림의 최고수는 당시 나한각의 각주였던 영우 대사였다. 그 당시 십팔나한의 수좌승이었던 대하 선사는 영우 대사가 얼마나 강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북천존자와 삼 일 밤낮을 싸웠다. 그런데 결과는 사뭇 달랐다. 둘 다 지치다가 영우 대사가 졌다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우 대사는 점점 지치는데 북천존자는 오히려 더 강해져갔었다. 대하 선사나 무허 진인이나 당장 북천존자를 찾아가 승부를 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저 아이가 자신의 기운을 확실하게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심법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하, 대사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그래서 제가 심법을 하나 가르쳐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당의 심법은 단시일에 익히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보다 소림에 쉬운 신공이 있으니 빈승이 먼저 가르쳐보았으면 합니다.”
소림은 무공의 본산답게 심법이나 신공도 쉬운 것부터 어려운 것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무허 진인은 대하 선사의 말을 듣자 빙그레 웃었다. 대하 선사가 스스로 가르쳐보겠다는 것은 유성탄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는 말이었다.
“뭐 하냐? 들어와서 이것들 다 묶어서 관아로 보내라!”
순식간에 다 쓰러뜨린 유성탄이 밖을 향해 소리치자 유성방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오라를 들고는 뛰어 들어왔다.
금모전에서는 제법 싸움이 되었던 기명우와 여충락이었지만 놀랍게도 지금은 오초지적도 되지 못했다.
“금모전주는 늙었으니까 좀 봐주지, 뭐.”
금모전주는 싸우기가 껄끄러워서 피하면서 마치 봐주는 것처럼 중얼거린 유성탄은 자신의 세 마누라 얼굴을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아우들이나 오살을 끌고 오면 저들도 싸우겠다고 나설 것이 뻔했고 아직도 왜관에서 입은 상처가 낫지도 않았는데 또 상처를 입게 되면 또 치료비가 들 것이 뻔하자 유성탄은 마누라들을 호위하라고 이르고는 방도들 몇 명만 끌고 혼자서 슬쩍 온 것이다.
“허허, 시주! 인상이 참 좋구려. 이리 와보시게. 내가 관상 한번 봐주겠네.”
유성탄은 빨리 마누라들을 보고 싶어 급히 가는데 쓸데없이 초치는 듯한 목소리에 흘깃 쳐다보고 못 본 척하고는 오히려 빨리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동냥도 가지가지로 하는군. 머리까지 빡빡 밀면 더 불쌍하게 봐줄 줄 아나. 씨!’
유성탄은 대하 선사를 거지로 보고는 빨리 도망칠 생각이었다.
“시주! 공짜로 봐줄게.”
‘잉!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지나온 머리 깎은 중이 어느새 앞에 앉아서는 다시 말을 걸자 유성탄은 뒤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 빠르기면 완전 특급거지다. 잘못하면 한 푼이 아니라 두 푼을 뺏길지도 몰라.’
“시주, 관상에 악재수가 좀 있어. 공짜라는데 한번 보고 가도 손해는 없을 텐데.”
어느새 벌써 다시 앞쪽에 앉아 있는 대하 선사의 이번 말에는 유성탄도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악재수가 있다지 않는가.
‘뭐야? 어떻게 얼굴이 완전히 썩어 있네.’
대하 선사의 앞에 선 유성탄은 대하 선사의 얼굴의 주름을 보자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보아하니 참 불쌍하게 살아온 인생 같으신데, 사기까지 치면 인생 헛산 게 되는 겁니다.”
“허허허! 시주의 말이 맞소이다. 솔직히 이미 인생을 헛산 게 빈승이지요.”
“알고 있으면서 아직도 이렇게 사시면 안 되지요. 일을 하세요, 일을! 날 보슈. 난 정말 뼈가 빠지도록 열심히 일을 해서 이렇게 성공한 거요.”
대하 선사가 유성탄의 말에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상하게 유성탄은 찝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한 영감이네. 씨…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데 왜 이러지?’
“뼈가 빠지게 일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보다는…….”
“뭐, 남들보다 나을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남들만큼은…….”
‘에이 씨, 이 영감하고는 상종을 말아야겠다.’
유성탄은 말할 때마다 대하 선사의 미소 띤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지자 자꾸 말을 바꾸다가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는 몸을 돌렸다.
“허허허, 보기 드물게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시주로다.”
대하 선사는 유성탄의 눈에서 맑은 기운을 느끼고는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하하하! 내가 겸손해서 말은 잘 안 하는데 남들이 다 나를 보면 정말 깨끗한 사람이라고…….”
유성탄은 대하 선사의 말이 마음에 들자 다시 몸을 돌리며 또 뻥을 치려다가는 다시 말을 멈췄다.
“시주, 우선 여기 앉아보시게.”
“에이, 앉으면 안 되는데…….”
유성탄은 정말 앉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앉고 말았다.
“흠! 초년에 고생이 심했구먼.”
“어! 정말 맞추시네. 내 원체 입이 무겁고 진중하다 보니 말을 안 해서 그런데 세상에 나보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거 뻥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년은 커다란 명성과 부를 누릴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커다란 명성과 부? 하하하! 역시 나 유성탄은 뭔가 다르다니까.”
“그런데 고비가 하나 있습니다.”
“고비요? 하하하, 나 유성탄에게는 고비란 것이 없소이다.”
“고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니 누구라도 피해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잉! 그럼 그 고비라는 것이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고비란 말뜻이 좋은 적은 없지요.”
유성탄의 얼굴이 구겨졌다.
‘에이, 이래서 점 같은 것은 보는 게 아닌데…….”
“그런 혹시 부적 같은 거 사라는 말은 아니겠지요?”
“부적은 아닌데, 내가 불경 몇 마디 들려줄 테니 한번 들어보시겠소?”
“돈 줘야 하는 거요?”
“어찌 불승이 되어가지고 돈을 받겠습니까?”
“하하하! 불승이셨군요. 참 좋은 거 하십니다. 한번 말해 보시오.”
돈을 안 받는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유성탄이 들어보겠다는 듯이 말하자 대하 선사의 입에서 소림의 기본심공의 구결이 흘러나왔다.
‘에이 씨!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있나.’
스스로 무공을 창안할 정도면 당연히 어느 정도 무공 구결 정도는 알아들을 줄 알았던 대하 선사는 차근차근 구결을 불러주었지만 유성탄의 귀에는 그냥 중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 죄송한데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던 유성탄이 묻자 구결을 읊던 대하 선사가 말을 멈추고 유성탄을 쳐다보았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아주 유명한 격언이 있는데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말해 보시지요.”
“소귀에 경 읽기라고.”
대하 선사는 유성탄의 말을 듣자 잠시 유성탄의 눈을 쳐다보다가는 유성탄이 자신의 구결을 전혀 이해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라… 하하하, 빈승이 아직 불심이 깊지 못해 시주의 깊은 속을 몰랐습니다.”
“깊은 속까지야 뭐. 그냥 제가 조금 유식하다 보니 불경 같은 것도 신경만 쓰면 다 이해를 하지만 오늘은 전혀 신경을 쓰고 싶지 않은 날이군요.”
들을 말을 다 들었다고 생각한 유성탄은 안됐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주름이 가득한 대하 선사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더니 품속에서 동전 한 문을 꺼내서는 손에 쥐여주었다. 더 앉아 있다가는 두 문은 빼앗길 것 같아서 일어섰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한 문은 주고 싶었다. 그러자 대하 선사는 유성탄의 맥문을 손으로 쥐었다가는 금방 놓았다.
“영감, 얼굴이 엄청 불쌍하게 생기셔서 장사는 잘될 것 같소이다. 그리고 내가 무려 동전 한 문이나 주니까 용기를 잃지 마시오. 세상은 생각보다 각박하기만 한 것은 아니외다.”
유성탄이 스스로 한 문을 줄 정도이니 얼마나 불쌍하게 생긴 얼굴인지 짐작이 될 것이었다.
“아미타불! 홍복이로다.”
손에 놓인 동전 한 문을 잠깐 쳐다본 대하 선사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고 있는 유성탄의 등 뒤에 대고 합장을 하고는 불호를 한번 읊조렸다. 그리고 혜광심어로 뭔 말인가를 유성탄에게 보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미타불. 괜한 걱정을 한 듯싶습니다. 잠깐 맥을 짚어봤는데 정말 놀라운 거력이 몸에 꿈틀대더군요. 굳이 심법을 가르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빈승의 생각으로는 북천존자에게 이기지는 못한다 해도 북천존자가 더 이상 무림을 우습게보지는 못하도록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저 시주의 마음가짐인데… 천하에 저렇게 마음이 평온한 시주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선사께서도 그렇게 보셨군요. 빈도도 처음 보고 자신의 속마음을 표정과 말에 모두 나타내는 저 아이의 깨끗한 심성에 놀랐습니다. 말과 행동에 거짓이 전혀 없더군요.”
모든 사람이 마질이라고 부를 정도로 뻥과 거짓말은 일상사며 사람 괴롭히는 게 취미이고 마음속에 언제나 불만이 가득 차 있는 듯한 유성탄에 대한 두 사람의 평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 진상 어떻게 하죠?”
백리빙이 마차 창으로 밖을 쳐다보다가는 완전 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군산을 향해 떠난 유성탄은 뭔가 생각할 게 있다면서 춘약을 실은 마차 위로 올라가서 드러누웠고 그 모습을 보는 백리빙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어때서요? 남자에게 춘약은 보물이라고 들었어요.”
“천요궁에서는 춘약이 보물일지 몰라도 신녀궁에서는 아주 흉측한 물건이거든요! 아가씨, 저 춘약을 빨리 없애버리게 하지요.”
정자운도 마차 전체가 춘약 더미라는 말을 듣고는 처음에는 깜짝 놀라 다 태워버리자고 했었다. 그러나 펄쩍 뛰는 유성탄을 보고는 너무 밀어붙이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마간 두고 보기로 했다가는 지금은 춘약을 없애기보다는 춘약을 분석해서 해약도 만들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춘약의 어떤 점이 여인을 그렇게 만드는지 연구해 보는 걸로 생각을 바꿨다. 신녀궁주다운 생각이었다.
“그동안 춘약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고 구한다 해도 소량이라 춘약에 대한 연구가 신녀궁에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 마차면 춘약을 완전히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니 우선 놔두자꾸나.”
“호호호! 신녀궁에서 이제 춘약 장사를 할 생각인가 보군요?”
화설군의 말에 백리빙이 살짝 째려본다.
“이상하단 말이야. 그 영감의 얼굴이 왜 자꾸 떠오르지?”
벌렁 누운 유성탄의 눈에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이 보였다. 파란 하늘을 떠다니는 한 점 구름은 유성탄에게도 뭔가 한가한 평온을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구름 위로 주름진 얼굴에 신비한 미소를 보이던 대하 선사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전혀 이해도 안 가는 그 불경 소리도 그렇고, 마지막에 귀에 들린 이상한 소리도 그렇고. 씨! 아무래도 보약 좀 먹어야지 환청까지 들리고 안 되겠다.’
“대형!”
“왜! 대형이 오랜만에 평화를 즐기려는데 왜 또 방해냐!”
갑자기 들려온 황대산의 목소리에 유성탄의 상념이 깨졌고 짜증스러운 유성탄의 목소리에 황대산이 급히 말했다.
“저기 앞에…….”
“뭐? 으잉! 저 영감이… 씨, 똥 밟았나 본데.”
유성탄 일행이 움직이는 관도의 앞에 수십여 명의 장한들이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술병이 놓인 탁자 하나와 절대자의 풍모를 보이는 금모전의 전주 사구치평이 앉아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일단 앞으로 나서서 ‘누가 감히 유성방의 앞을 가로막느냐’며 개기기부터 할 장우왕조차도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사구치평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엄청났다.
“저 깃발은 금모전을 나타내는 건데. 금모전이 어떻게 여기까지?”
같은 사파인 천요궁의 궁주답게 금방 금모전의 표식을 알아본 화설군이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금모전이요? 금모전이면 오대사파 중 하난데?”
백리빙도 놀란 얼굴로 무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비록 활동하는 지역이 달라 만날 일은 별로 없었지만 오대사파라면 신녀궁이나 천요궁 정도는 단숨에 쓰러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오랜만이군.”
“뭐, 일 년도 안 됐는데 오랜만까지야.”
사구치평의 앞에 유성탄이 앉자 사구치평이 술 한잔을 따라주더니 말했다. 그러자 술잔을 입에 털어넣은 유성탄이 별로 반갑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난 우리 사이가 좋은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지?”
“남자끼리 좋고 나쁘고 어디 있겠소.”
“하하하! 맞는 말이야. 남자끼리는 좋고 나쁘고, 보다는 신의를 따져야겠지.”
‘신의? 에이 씨. 내가 별로 안 좋아하는 단언데.’
“솔직히 내가 좀 무식해서 신의가 뭘 뜻하는지를 모릅니다.”
“흠, 하지만 글 뜻을 모른다고 해서 약속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 이유를 말해 주겠나?”
“이유요? 무슨 이유?”
“자네가 금모전의 수하들을 다 때려서 옥에 가둔 이유 말일세.”
말하는 사구치평의 몸에서는 진한 혈향이 풍기고 있었다.
“금모전의 수하요? 난 금모전의 수하를 때려 옥에 가둔 적이 없는데.”
“이미 다 알고 왔는데 발뺌을 할 생각인가?”
말을 하면서도 사구치평은 속으로 이상한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너무 달라졌다. 정말 백마성의 철립마륜과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처음 보고를 받고는 너무 화가 나서 절강을 치는 것을 포기하고 당장 유성탄을 때려죽일 생각으로 달려온 그였지만 유성탄을 보면서 사구치평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금모전에서 처음 봤을 때는 특이하다고는 느꼈어도 자신이 제거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유성탄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솔직히 철립마륜과 사구치평을 비교한다면 그가 약간 꿇리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 영감, 전에 봤을 때는 엄청 센 거 같았는데, 오늘 보니 그렇지도 않네. 늙어서 힘이 빠진 모양인데, 성질대로 그냥 때려잡아?’
유성탄도 전에 느꼈던 사구치평과 오늘 만난 사구치평이 다른 것 같자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뒤를 한번 쳐다보더니 포기한다. 사구치평은 쉽게 이기기 힘든 상대였고 자신이 사구치평과 싸우는 동안에 자신의 아우를 비롯한 유성방도들은 사구치평의 뒤에 서 있는 금모전의 무사들에게 전멸을 당할 공산이 다분했다. 거기다 마누라 예정녀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유성탄은 포기했다.
“아! 그자들! 하하하, 그자들이 금모전의 수하들이었습니까? 난 치안을 책임진 포쾌로서 사방을 불안에 떨게 하는 무뢰배들을 옥에 가둔 것밖에 없었는데, 그게 금모전의 수하였군요. 아이고, 이것 참 미안해서 어떡하죠? 다음부터는 금모전과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알아보고 때려잡도록 하지요. 그럼 됐지요? 제가 좀 바빠서.”
“지금 감히 나 사구치평을 농락할 생각인가?”
“무슨 그런 소리를. 난 남자는 농락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둘은 탁자를 가운데 놓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서로 간에 꺼리는 점이 있는지라 손을 쓰지는 못하고 있었다.
“좋네! 자네의 말을 믿지. 대신 우리가 약속한 대로 마룡방과 구룡회를 치는 데 도와줘야겠네.”
“그런 약속을 우리가 했었던가요? 이상하네. 걔들을 때려잡아 옥에 가둔다는 약속은 한 것 같은데 치는 것까지 돕는다는 말은 안 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절강에 가보시면 알겠지만 나 마룡방도와 구룡회원들 엄청 많이 때려잡았습니다. 그 정도면 나 유성탄, 신의를 지켰다고 하늘에 대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이다.”
“신의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방금 그런 것 같은데?”
“하하하, 내가 겸손해서 잘 말은 안 하는데, 저 정말 천재입니다. 모르는 글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결국 스스로 알아내곤 하지요.”
‘천하에 무식한 놈!’
“좋네! 그렇다면 더 이상은 금모전의 행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로 알고 이만 가겠네. 하지만 수하들은 내보내주게.”
“죄송합니다. 제가 특수포쾌인지라 잡아넣는 것은 마음대로지만 풀어주는 것은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절강에 가는 것은 포기하시죠? 이거 극비인데 전주님에게만 말해 드리지요. 지금 반역의 무리를 잡는다고 절강에 백만대군이 와 있습니다. 들어가면 아마 군대의 창에 꼬치가 될 수 있습니다.”
유성탄의 말이 뻥이라는 것을 아는 사구치평의 주먹이 꽉 쥐어졌고 몸에서 다시 혈향이 피어올랐다. 자신의 일을 계속 방해하겠다는 말로 들린 것이다. 그러나 사구치평은 결국 손을 못 썼다.
“돌아간다!”
“와아! 대형, 정말 존경합니다. 어쩌면 말도 그렇게 잘하시고!”
사구치평과 금모전의 수하들이 돌아가자 마동파가 환호하며 유성탄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사구치평이 피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 사실이 무림에 알려지면 유성탄의 성가는 십대고수를 능가하게 될 공산이 컸다.
“얘가 누굴 안으려고 그래! 저리 가!”
유성탄이 간단하게 마동파의 팔을 피하며 말하고는 곧장 마차 앞으로 달려가더니 창에 팔을 기대고는 마누라 예정녀들에게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잘했지?”
“형님, 금모전에 나가 있는 정보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금모전이 절강에 들어서는 즉시 마룡방과 구룡회에 알리고 그들이 금모전을 상대하기 위해 무사를 움직이는 즉시, 상관세가를 마룡방과 구룡회로 변장한 세외의 무사들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여 서로를 상잔하게 할 계획을 진행 중이던 청담은 태성기의 목소리에 뭔가 일이 잘못됐음을 느끼고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계속되는 실패가 그를 경직시키고 있었다.
“금모전이 절강에 들어서기 직전에 포천망쾌에게 된통 당하고는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뭐야! 이… 포천망쾌 이놈…….”
청담은 태성기의 말을 듣자마자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음성에는 극도의 분노가 담겨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몸이 떨려오게 할 정도였다.
“절강에 있던 놈이 언제 또 그쪽으로 갔다는 거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움직이는 방향이 군산 쪽이라고 합니다.”
“군산? 그렇다면… 이놈이 천주님이 계신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
“아마 그럴 것입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청담이 결정한 듯이 말했다.
“우리의 모든 전력을 군산으로 옮긴다.”
“형님!”
“포천망쾌 그놈을 죽이지 않고는 우리의 일이 계속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계획을 전부 다 알아채는 것을 보아서는 대단한 정보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모든 일의 처리는 포천망쾌가 하고 있다. 그 말은 그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고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포천망쾌만 제거하면 더 이상 우리를 방해할 수 없다는 말이지.”
여전히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청담이었다.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천주님과는 상관없이 혼란을 만들라고 명하셨는데 우리 전력을 모두 군산으로 옮기는 것은…….”
“아니다. 포천망쾌를 죽이는 것이 현재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천주님과는 상관없이 군산에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채지공!”
“부르셨습니까?”
“완전한 강시들이 몇 구나 되느냐?”
“완성된 철골강시는 열두 구입니다. 그리고 초벌강시가 오십여 구 정도 됩니다.”
“전부 군산으로 옮긴다.”
“잘못해서 걸리면 문제가 커집니다. 강시의 제조는 무조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천주님과는 아무런 상관 없다. 군산에 도착하는 즉시 무조건적인 도살에 들어간다.”
태성기와 채지공의 얼굴에 뜻밖이라는 표정이 나타났다. 언제나 완벽한 계획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을 행하는 청담의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담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계획마다 모두 포천망쾌에 의해서 좌절되자 자신도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해서 상황을 보기로 한 것이다.
* * *
“여긴 또 왜 왔소? 하여간에 늙은 영감이 정말 빨빨대고 엄청 돌아다니네.”
군산에 거의 도착할 즈음 마지막으로 들른 주루에 궁상개가 다시 얼굴을 들이밀자 유성탄이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자운아! 아니, 신녀궁주! 저놈 어른에게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거냐?”
“유 상공! 사람이 살아가면서 예의란 없어서는 안 될 중요 덕목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은 아주 중요하답니다.”
“자꾸 이렇게 무식하게 굴면 우리까지 막된 여자가 된다는 거 알아요!”
정자운과 백리빙이 번갈아 가며 성토하자 유성탄이 궁상개를 노려보더니 입을 삐쭉거리며 다시 말했다.
“좋겠시다, 영감은. 편이 많아서.”
“너 설마 저 춘약을 가지고 군산으로 들어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지?”
자리에 앉은 궁상개가 물었다.
“들어가려고 하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춘약은 탐내지 마시오.”
“줘도 안 갖는다, 이놈아!”
“잘 생각했시다. 그런데 절대 안 주니까 그런 말도 하지 마시오.”
“에그, 너 정말 저거 가지고 군산에 들어가면 아마 전부 다 너를 공적으로 삼아 죽이려고 들 텐데, 그래도 좋냐?”
“어느 놈이 감히 내 물건을 탐내요? 그랬다가는 나한테 죽지. 씨!”
“말 좀 제대로 들어요! 물건을 탐낸다는 말이 아니라 저 춘약이 너무 나쁜 물건이라 사람들이 소지만 해도 죽이려 든다는 말이에요!”
백리빙이 답답한 듯이 끼어들자 흘낏 쳐다본 유성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 소지만 해도 나쁜 놈으로 몰아서 죽이고 지들이 가로채려고 한다는 거.”
‘진짜 말이 안 통하는 놈이라니까.’
“그러니까, 거지 영감이 군산에서 일을 마치고 나올 때까지 보관해 줄 테니 춘약은 놔두고 군산으로 들어가라, 이 말이오?”
궁상개는 유성탄이 춘약을 마차째 가지고 군산에 들어간다면 정작 중요한 일은 시작도 못하고 계속 쓸데없는 시비에 휘말릴 것이 걱정이 되어 춘약을 우선 개방에서 맡아주겠다고 제안했다. 개방 역시 춘약을 맡는 것은 원치 않은 일이지만 북천존자가 군산에 나타나 무림에 도전하라고 포고를 한 비상시국인 만큼 어느 정도 오해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래, 개방이라면 천하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그걸 누가 정한 거요. 세상에 거지들을 믿는 바보도 있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난 절대로 개방을 믿을 수 없소.”
“개방은 믿을 만한 곳이에요. 한번 믿어보세요.”
“당신보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개방하고 비교하는 거예요. 개방을 믿고 궁상개 선배님 말대로 하세요.”
“그래요. 제가 생각해도 춘약까지 가지고 군산에 간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네요. 군산에 들어가면 저의 미모 때문에라도 모든 사람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릴 텐데 춘약까지 알려지면 정말 복잡해질 거예요.”
정자운과 백리빙은 물론 화설군까지 찬성하자 유성탄이 뭔가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거야 매일 일어나는 일상사니까. 뭐… 좋시다. 내 개방을 믿지는 않지만 영감이 나를 그렇게 믿는다니까 우선 맡겨보겠소. 대신 조금이라도 춘약이 없어지면 그때는 세상의 거지는 내 원수가 되는 거요.”
‘뭔 말을 하는 거야? 하여간에 정말 웃기는 놈이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유성탄을 보며 궁상개가 혀를 끌끌 찼지만 괜히 말꼬리를 잡았다가 일이 틀어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고맙다.”
궁상개가 정자운을 보며 말하자 유성탄이 웃긴다는 듯이 말했다.
“내게 고마워해야지 누구에게 고마워하는 거요? 하여간에 영감이 누구에게 고마워할지 그것도 모르고. 에그!”
‘내가 말을 말아야지. 에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