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_보고 싶은 미래
만들어진 적막 속의 결승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그 색이 변한다.
결승에 앞서 들었던 모래의 만다라.
곧 사라질 마지막 장면.
깎아지른 듯한 장자제의 잔도를 따라 걷는 불안함과 거기서 나오는 위압감.
이 장대한 현장에 온 사람들은 압도당했다.
그중 어떤 사람들은 편견을 깨고 진실을 보고자 했다.
여기에 서 있는 선수들은 온 마음을 다 쏟아 부어 경기에 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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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G가 또다시 블루 진영을 선택합니다!”
“..이번에는 SHG가 세주를 밴하면서 케낸을 가져왔죠. 아무래도 초반 주도권이 넘어간 뒤, 탑 케낸의 강제 한타를 막아낼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네에!”
“대신 미드에서 왕슈잉 선수가 트타를 가져갔는데요.”
“그렇죠. 신인 미드 권건이 보여준 뒤 다시 유행한 픽인데, 중국에서도 꽤 연구를 했나 보죠?”
“하하,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왕슈잉 저 선수, 트타를 꽤 잘합니다. LPL에서는 유명하죠.”
“그리고 팅 선수는 요공보다는 마오차이가 낫다고 판단한 것 같네요.”
“아무래도 절대 판정이 있으니까요. 아까 권건 선수를 놓치면서 스노우볼이 굴러가기 시작했거든요! 물론 뒤틀린 전진은 양날의 검이긴 합니다만..”
“근데. FWX가 이걸 허락했다는 건 그만큼 대처 방안이 있다, 그렇게 보면 될까요?”
“아무래도 생각이 있겠죠?”
SHG는 고집을 버렸다.
정상적인 밴픽으로 틀면서.
“하지만 이렇게 되면 차니 선수가 레넥을 잡고 케낸을 맞상대해야 하고.”
“라온 선수가 리산으로 트타를 상대하게 되는데요, 이거..”
“게다가.. 와, 트타가 정화를 들었네요? 쓰읍..”
“아. 이거 각오했습니다. SHG, 각오했어요. 미드 구도 피곤해질 것 같습니다.”
“이게 딱 들어맞네요. 트타에 징크시면 굉장히 후반을 본다는 얘긴데.. 상체만 떼놓고 보자면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는 않거든요? 혹시라도 라인 푸시 말리게 되면 트타가 일찍 출발해버릴 수도 있어요.”
“레넥도 아, 이건 진짜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렵죠. 양쪽 모두 할만하다고 볼 수는 있는데, 소규모 교전에서 못 굴리고 한타로 가게 되면..”
꽤 교묘하게 찔러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FWX 바텀도 자이야 로칸이라 이게 타임 리미트가 걸려있다는 느낌이 확 들어요.”
“이거 왠지 불안.. 아니, 아니아니.”
“불? 불..?”
“부.. 불 안 꺼줄래?”
“그른 믈 흐즈 믈즈그 흣져.”
“흠흠, 그러니까!”
이 구도는 강요다.
우리 조합이 전 세트에 비해 초반 교전에 좀 더 신경 썼다면, SHG는 극후반 밸류를 극도로 높이면서 중간중간 압정을 깔았다.
난이도가 올라간 게임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정글이죠.”
“네. 정글.”
“정글.”
이 경기에서의 나는, 앨리스다.
그리고 상대를 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본다.
레넥과의 조합도.
리산과의 조합도.
자이야 로칸과의 조합도 어울리는 좋은 조합.
그러니까 이게 우리가 선택한 정답이다.
“경기 시작합니다!”
문득 내 손이 조금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긴장했구나.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을 푼다.
그걸 몇 번 반복하면서 서서히 집중 상태로 들어간다.
감각에 집중한다.
거미줄을 깐 것처럼.
나붓하게 온 정신을 기울인다.
“차니가 생각보다 견제를 많이 당하고 있어요!”
“아! 케낸 얍삽이 지린다! 삭제 좀!”
“아, 이거 상상했던 최악의 그림이거든요? 이쯤 되면..”
툭, 쳐서 올린다.
“후우우우우우우!”
“숨통ㅡ 트였어요!”
위기를 넘긴다.
“아, 이거.. 팅의 완벽한 갱킹!”
“라온, 라온, 라온, 라온! 위기!”
다시 한번 툭, 쳐서 올린다.
“ㅡ이 위기를ㅡㅡ 넘깁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이번에는 여덟개의 눈으로 본다.
정신력을 소모한다.
“하! 이게 지금 생각보다 쉽지가 않아요, 이게!”
“앨리스가 저레벨 다이브에서 상당히 강점을 보이는 챔피언인데, 지금 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숨을 크게 들이쉰다.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편다.
“바텀에서는 충분히 압박을 해주고 있긴 한데.. 이게 각이, SHG에 루루가 있다 보니까..”
지금은 충분한 라인이 없다.
틀어막혔다.
“답답한 상황..”
라인을 수습하러 돌아다니는 건 계속해서 SHG에게 쫓겨 다니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촘촘하게 흔들리는 캠프들의 깜빡임을 주시한다.
“ㅡ어, 권건?”
“어어, 이거, 지금 이거, 지금 이거?”
“들어가요?”
“이게 그러니까 굉장히 과감한 움직임인데, 캠프가 아직..”
찾았다.
“동선ㅡ 겹칩니다!”
반가워.
“팅의 마오! 지금은.. 지금은, 아!”
“빠른 판단, 점멸 쓰면서 빠져나갑니다!”
이제부터 나.
그쪽한테 대놓고 매달릴 거야.
“어어, 또 마주쳐요?”
이거 그린 라이트인가요?
나는 왼쪽 입꼬리를 올리려다 의식적으로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렇게 웃으면 뭐랬지?
기억이 안 나네.
“바텀.”
바텀에게 짐을 넘기고.
“알겠어.”
나는 최선과 최단의 동선을 짠다.
“미드 교전!”
SHG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칼박으로 들어온다.
“팅의 점멸 속박!”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는 미드행이었던 거다.
“아, 이거, 아! 라온 점멸 없거든요! 가불기잖아요, 가불기!”
“안 돼요! 트타한테 죽으면 진짜 안 돼요!”
김예성이 최선의 스킬 배분을 마치고 찰나의 시간을 번다.
“아, 이거, 이거!”
“다이브!”
아쉽지만.
“안돼요오오오오오옷!”
이렇게 되면 아무 피해도 없는 결말은 존재할 수 없다.
“거짓말같이 정글러 등장!”
대신 무거운 공기에 내 몸을 맡겼다가.
“권건의 고치이이이이이이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쏟아낸다.
“다이브 친 트타가 아니라, 마오 쪽으로! 쫓아가는 줄 알았는데 뒤ㅡ쪽으로오오오!”
“팅이 묶입니다!”
이거, 역시 그린 라이트지?
“어어, 어어어어, 어어어어!”
“아.. 흐! 라온.. 쓰러지고! 앨리스, 권건의 앨리스가! 마오 마무리하러 갑니다!”
쫓는다.
“마오 쓰러집.. 어?”
“엇?”
“트타가.. 죽었습니다? 점멸.. 쓰고 죽었죠?”
“그러니까 이게..”
손끝이 짜릿짜릿하다.
어쩌면 아까 그건 긴장이 아니라 떨림이었을까?
“봉풀주 리산의 점화..!”
“몸을 대주려던 마오가 못 들어가면서..!”
나는 한순간 한순간 손에 닿는 이 짜릿함을 사랑한다.
내가 정확하게 상대를 타격했을 때 희열을 느낀다.
완벽한 움직임으로 적을 봉쇄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퍼블 내주고ㅡ 2 대 1 교환!”
“권건이! 라인 잔반까지 깔끔하게 비우고 갑니다!”
그리고 항상 달콤한 보상이 따른다.
“판단 제법이네, 우리 정글?”
그래서 게임이 좋다.
“그럼 쉽게 이길 줄 알았어?”
“하.. 저건 딱 봐도 저격한 거잖아. 내가 카드 한 장 빼준거야.”
“밴 된 숫자로 나랑 붙어보게?”
“꼬였네. 꼬였어.”
“김예성 많이 변했다.”
“권건 많이 변했다.”
극찬이네.
“근데 그거 알아? 이제 내 점멸이 쟤보다 먼저 돈다?”
“안 가요.”
짧은 소회를 나누고 다시 툭툭, 어깨 힘을 뺀다.
눈을 가늘게 뜬다.
“게임 풀립니다, 이거, 진짜 많ㅡㅡㅡㅡㅡ이 풀립니다!”
쉽게 기울어질 이 경기를 돌려놨다.
뿌듯하다.
LOS는 언제나 나를 높은 곳에 데려다 놓는다.
이 직관적인 감각과 말초 신경을 저미는 듯한 이 느낌을 참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입을 연다.
“다들 할 수 있지?”
“정상 궤도로 진입한다, 오바.”
“도킹, 도킹. 도킹 완료.”
장난스러운 대답이 들려온다.
놀라울 만큼 안정된 감각이다.
나는 협곡을 내려다본다.
“야, 이다음에 킬 먹는 사람은..”
이제야 숨이 터진 누군가 말한다.
아주 짧은 잡담.
“내가 이따 아이스크림 사준다.”
“그럼 난 배 맛 나는 거. 그거 맛있더라.”
“닌 단 것 좀 그만 처먹어라.”
나는 그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이따가’를 들으며.
손을 쥐었다 편다.
“용, FWX가 두 번째 용까지 차지하면서 상황 빠르게 돌아갑니다!”
짧은 생각에 잠긴다.
여기는 내 인생 게임에서 가장 멀리 왔던 저장 포인트.
월챔 결승.
그래서 나에겐 늘 여기가 막보였고, 엔딩 장소였다.
그 뒤는 없다.
그러니까 ‘이따가’도 없었다.
늘.
“이건 거의 공짜로 먹었죠. 근데요. 이건 처음부터 SHG가 양보할 생각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전령 가져가면서 서로 반대로..”
“FWX는 후반을 막을 심산이고 SHG는 시간을 빨리 감을..”
나는 내가 이 인연을, 이번 삶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아가는 게 있었다.
깨달았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어떤 것.
그건 바로.
내가 어느 순간부터 꿈을 꾸지 않고 있었다는 거다.
“전령은 어디로 가나요, 미드, 미드 방향인가요?”
“일단 지금 팅 선수의 요공이 동선을..”
“아, 이렇게 계속 시간 지연될수록 FWX가 좋을 건 없는데요..”
“그렇습니다, 세자 클래스가 징크시 루루를 상대로 자이야와 로칸을 뽑았다는 건, 라인전 단계에서는 좀 더 큰 이득을 봐야 한다는..”
나는.
항상 여기가 끝이었다.
막연히 넘어가고 싶다고만 생각할 뿐 그 뒤를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듣기 좋은 말, 위대해 보이는 말을 늘어놓은 적은 있지만 그건 우리의 우승으로 따라오는 일들을 나열한 것뿐이다.
“그래서 지금, 그래서 지그으으음!”
그냥 월챔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 내 유일한 목표였고 그게 ‘끝’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아주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바텀. 바텀. 바텀? 바텀? 바텀!”
“웨이웨이의 스킬이 빠진 사이, 이거, 이거, 클래스! 클래스! 클래스으으으으!”
“로카아아아아아아아안! 마구간에서 돌아 나오면서 이거, 이거, 이거어어어어어!”
“매혹의 질주!”
모두 목표가 있었다.
“화려한ㅡ 등ㅡ자아아아앙!”
최은호는 부와 명예를 목표로 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점멸 쓰려는 순간에, 이거!”
“세자, 세자, 세자! 자이야!”
“땡ㅡ겼ㅡ어요! 깃ㅡ부르미이이이이이!”
곽지운은 리그를 부흥시키고 싶다고 했다.
“류의 징크시, 이거, 이건 도망가기가..!”
LKL 우승 상금을 모조리 이스포츠 재단과 출신 아카데미에 기부한 우리 주장은, 언젠가 제 아들도 프로로 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아니, 사나요, 사나요? 사나요?”
“메이메이가 아슬아슬하게 궁극기로 살리고..!”
“거리! 벌립니다!”
“아..”
“정화 점멸 다 뺐으니까 이거라도.. 어?”
“잠깐만요.”
“잠깐만요, 잠깐만요!”
“이거..”
이 다이나믹한 듀오는 가장 오랫동안 붙어있었지만 충분히 달랐고.
서로 다른 꿈을 찾았다.
“라온.. 라온.. 라온.. 라온..!”
“라아아아아아아아아아오오오오오오오오오온!”
“로ㅡ밍ㅡ왔ㅡ어ㅡ요!”
“아까 전의 웨이브 주도권으로! 여기까지! 힘을 전달합니다아아아아아악!”
김예성.
“얼음 갈퀴 길, 다가갑니다, 다가갑니다, 이제 루루가 해줄 수 있는 거 없어요!”
“아아아아! 류 후회해요, 욕심내지 말 걸!”
“다가갑니다, 다가갑니다!”
김예성은 이 리그에 영원히 남을 레전드가 되고 싶다고 했고.
“얼음 파펴어어어어어언! 터지면서!”
사적으로는 나와 가족이 되고 싶다는 욕심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이거 빠직! 으로 대포 한 번 더 욕심내다가.. 류!”
“여기서.. 쓰러집니다아아아아아아아악!”
“바텀이, 바텀이 또 한 번! 또 한 번! 한번 더어어어어어어!”
이유찬과 유상준은 틀림없이 ‘이 게임을 늙어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겠지만.
말하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각자의 목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명예와 인정.
“냉기의 지배, 냉기의 지배! 이제 징크시가 우리 편이죠? 메이메이, 도망갈 곳 없습니다!”
“세자와 클래스가! 나머지까지 잡아내면서!”
“바텀이ㅡ 다시 한 버어어어어어어어어언!”
“터ㅡ집니다!”
다들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 월챔 결승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나만이 그걸 깨닫지 못했었다.
나만 여기가 엔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먼 미래를 바라면서 달리고 있는 이 세상에 나만 오도 가도 못한 채 고여있었던 거다.
항상 여기에 혼자 있었다.
나는 뭘 하고 싶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구도가 달라져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SHG가 변주한 게, 아무짝에도! 아아아아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지금!”
“이쯤 되면 SHG 바텀은 악몽 꿀 것 같죠! 1절, 2절, 3절, 익절!”
“욕심을 못 버렸어요! 욕심을!”
스스로를 어른 취급하던 나는 꿈도 없는 사람이었나?
아니면 내가 어른이기 때문에 꿈을 꾸지 않았던 걸까.
“나이스, 미드 바텀!”
“이제 아이스크림 사줘.”
“중간 교전 가자.”
“야. 탑. 나 다음 턴에 탑 찌를게.”
“아이스크림.”
“야. 미드. 무조건 내가 킬 먹게 해드림.”
“어순 이상하다?”
게임은 안정됐다.
내가 손을 대지 않아도.
내가 방패를 들건, 칼을 들건 FWX는 이제 정상 궤도에 올랐다.
“은호 형.”
그렇다는 건.
나도 여기서 같이 공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이스크림 그거, 한 번만 더하자.”
꿈은.. 천천히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다들 나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당장은.
“이따가.. 나 하겐X즈 먹게.”
“나도!”
그냥 당장은, 내가 ‘이따가’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불을 삼킨 마냥 참을 수 없게 뜨거운 기분이 든다.
“아~ 진짜.. 다들 거지냐고..”
“너 돈 많잖아. 세계 최고의 서포터 최은호.”
“그건 맞지. 후후.. 큭큭.. 하하하핫!”
이 사람들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