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_지키고 싶은 과거
차라리 처음부터 적당한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면 나았을 것이다.
권건은 뛰어난 선수였다.
그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결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이 선수는 그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운이 나빴을 뿐이다.
지금 그가 FWX에서 만들어낸 대부분의 문화나 관계, 협조, 배경들이.
그에게는 오지 않았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이들을 사랑한다.
갈망을 거름으로 틔운 희망.
희망이 무너지는 순간의 절망.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열망.
그리고 수확.
[ 그건.. 과일. 가장 달콤한.. ]
달콤하고 선명한 감정이 느껴진다.
FWX는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호흡으로.
한 숨, 모자람 없이.
#
막상 집중하고 나니 SHG에 대한 분노는 사그라들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분노 다음에 우울이 오던가?
아님 말고.
어쨌든 늘 그렇듯이 다를 바 없이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 무거운 긴장감의 정체를 상기한다.
“서로 지연시키면서.. SHG, 미드 올립니다?!”
“이거 시간 끌려고 했던 거지 진짜로 내줄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거든요?”
“왕슈잉의 아라가 전령 방향!”
“라온의 제이슨, 깔끔하게 와드 박고 빠집니다!”
아주 낯설지도 않은 이 결승.
다시 돌아온다면 그저 다시 하면 될 일이고.
“권건 선수, 왼쪽으로!”
종종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이번 회귀가 완전한 실패이자 끝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 자리.
“아, 왕슈잉! 전령 아니에요, 전령 아니에요!”
“블루 카정 들어간 권건 쪽!”
“위기, 위기, 위기! 권건 위기! 위기!”
하지만 이번에는 숨이 메여오는 압박감이 있었다.
그게 LKL 결승에서 내 눈을 멀게 했던 그 감정.
분명한 위기.
하지만 위기에 비해 어렵지 않았던 극복.
“어어어어어어!”
“팅 선수의 요공도 따라붙습니다!”
“안 돼요! 안 돼요!”
나는 깊이 몸을 던졌다가.
“블루, 블루, 블루! 블루는!”
훌쩍 빠져나간다.
“뺏었어요!”
“도망은.. 도망..은!”
“점멸!”
“권건의 점멸!”
“요리조리? 요리조리? 피해, 피해요!”
“요공, 따돌리면서.. 이번에는 미드 왕슈잉이 혼령 질주로!”
“제발, 제발, 퍼블 안 돼요! 제발, 제발! 권건! 제발!”
“제ㅡ발ㅡ!”
그래, 그 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
나에게는 이 팀이, 이 순간이, 이 추억이, 그리고.
“언덕.. 대각선으로.. 넘어.. 가면서어어어어어!”
“피ㅡ했ㅡ어ㅡ요!”
“매혹! 피하면서어어어어어어억!”
“미친 슈퍼 플레이! 권건이이이이이이이! 살아ㅡ나ㅡ갑니다!”
“더 못 쫓아와요, SHG, 더 못 쫓아와요! 라온이 백업합니다!”
이 팀이 소중하다.
“완ㅡ벽한 드리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두 번 만났을 때 더는 순수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게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단 한 번만 살 수 있는 인생의 소중함이니까.
나는 갑자기 그걸 느껴버린 셈이다.
“이러면, 이러면, 이러며어어어어어어어어언!”
“이거 정확하게 계산해봐야 해요, 이거!”
“전령 타이밍 늦게 잡으면서 두 팀 상당히 예민했는데, FWX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드리블해주면서 지금 이거..”
“블루 뺏었고, 정글러 팅과 미드 왕슈잉의 점멸 뽑았고, 아라는 궁도 빠졌어요.”
“이러면 전령 싸움 보기 힘들죠?”
“그리고 더, 더 이야기할 게 있는데!”
“그게 뭔가요!”
“이렇게 되면 성장 격차가 나거든요? 킬을 땄었더라도 경험치 손해는 있었을 수 있는데, 권건이 살고 라온은 처음부터 따라가 주지 않으면서 미드에서 차이가 나기 시작했어요!”
“아아아아! 그러면 이거 킬이 나지는 않았지만 정확히..”
“상당히 유리해집니다!”
“차니가 자연스럽게 밀어 넣으면서 전령 주도권 가질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요!”
“FㅡWㅡX!”
음.
꽤 오랫동안 잊어버렸던 절실한 감정이라서 좀 민망하네.
뭐가 저어어어엉말 소중하다느니 그런 거.
다만 나와 가까웠던 스톰의 강준윤이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다른 말을 했을 때.
어쩌면 나는 꽤 슬펐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들과도 그럴까 봐.
오늘따라 내가 감정적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나이스.”
“역시 건신.”
그래도.
딱 한 번만 봐줘.
진짜 어쩌면 이게 내 유언이 될지도 모르잖아.
세상에 다시 없을 이 순간이 죽어버린다면 나는 또 홀로 남아서 이렇게.
이렇게, ‘누구’를 향하는 건지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겠지.
이건 고독한 회귀자의 오래된 습관이다.
“계속 가자. 전령 봐.”
“오케이!”
남에게 넘길 수 없는 나의 우울을 깊은 목구멍으로 삼킨다.
마음이 커질수록 더 심해지는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FWX에게 계속해서 주도권 넘어갑니다!”
“이 팀, 지금 실수가 없어요!”
“오히려 SHG가 빨려 들어갑니다!”
FWX.
그저 못난 놈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지, 모를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들이 과연 뭘 알기나 할지.
“어어, 지금 바텀, 지금 바텀?”
“격렬하게 견제하던 바텀! 서로 반피? 서로 반피!”
“정글러 없죠? 아까 봤죠? 점멸도 빠졌잖아요!”
“이건..!”
나는 지켜본다.
“클래스의 럭스! 앞 점멸 속박!”
“와아아아아아아악! 클래스으!”
최은호.
“메이메이, 메이메이의 노틸! 노틸 묶입니다!”
“바로 세자 끌어보는데..!”
“세자의 케틀! 이거어어어어어어어어얼!”
“종이 한 장! 종이 한 장! 피합.. 히이이이익!”
“덫, 덫, 덫, 덫!”
“이렇게 되면!”
곽지운.
“FㅡWㅡX!”
“퍼브으으으으으으으으을!”
“케틀 럭스의 힘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이러면 지금..”
그리고.
“라온, 라온, 라온! 라온의 제이슨!”
“내려왔어요! 로밍 왔어요! 권건이 만들어 준 타이밍, 여기에 씁니다!”
“이거! 이거!”
“이거 귀환하던 류의 아펠을, 벽 너머에서..!”
“초ㅡ장거리ㅡ 포오오오오오겨어어어어어어억!”
김예성.
“맞은 거 알았어요, 알았어요! 순간 시야, 순간 시야, 이거, 순간..!”
“살았어요, 살았어요! 류! 혹시 류까지 잡을 수는 없나요? 제발!”
“방법이..”
그래.
“클래스 럭스의 데맛ㅡ씨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빗나..! 시야, 시야, 순간 시야아아아아아! 시야가..!”
“세자의ㅡㅡㅡㅡㅡ 영점 조준! 비장의 한발!”
“이러면, 이러면, 이러며어어어어언!”
따라오고 있다.
이 선수들이 내 마음을 알아챌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이들은 내 뒤를 쫓고 있다.
“뻐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SHG의 바텀이ㅡ 터어어어어집니다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양쪽 입꼬리를 위로 물었다.
잘하네.
“그러면 대ㅡ각선?”
“킹각선! 킹갓선!”
“전령, 안 쳤죠, 안 치고 기다렸어요! FWX!”
우울 다음이 뭐더라, 그래.
수용이었지?
근데 이게 무슨 단계더라.
죽음의 5단계 아니야?
“양측 탑-정글 2 대 2 싸움!”
죽음의 5단계건 삶의 5단계건 상관없다.
나보다 그 경계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아라는 여전히 미드에 묶여있습니다, 이거 웨이브 수급 해야 하거든요!”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서로 먼저 들어가기 껄끄러운데요, 이거.. 차니가 케낸이라.. 이거!”
“어떻게 할 건가요, SHG! 야, 그냥 우리 싸우지 말까? 서로 딜도 애매한데 싸우지 말까?”
손끝의 감각을 재면서 습관에 가까운 카운트 다운을 한다.
성큼성큼 죽음을 향해 몸을 던질 준비를 한다.
“어어어, 아뇨, 아뇨, 거리, 거리, 거리..”
하나, 정글러라는 포지션이 그렇고.
“헤이랑의 그라..!”
“이거 각 설마..!”
“술통 폭..!”
둘, 세주라는 챔피언이 그러하며.
“점멸 배치기 콤보! 가로ㅡ 막ㅡ았ㅡ어ㅡ요! 권건! 권거어어어어어어어어언!”
셋.
나라는 사람이 그렇다.
“이거, 이거, 이걸! 이걸, 어떻게, 선궁 예측 배치기였는데!”
“세주한테 풀딜, 풀딜!”
“위허어어어어어엄?”
“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차니 각..!”
오.
“찌직, 찌직, 찌직, 찌직!”
“점멸ㅡ 소용돌이!”
나를 이 팀으로 데려와 주신 구원자, 어서 오고.
내가 할 행동을 예측한 이유찬의 몸놀림이 날래다.
잠깐 내 곁을 스쳤던 탑이 멀어지더니.
“이러면, 이렇게 되면!”
“아직 점멸 안 돌았던 요공이, 요공이, 팅의 요공이!”
“딜 집중!”
“차니가! 끝까지 추격하면서! 정글러, 살아가지ㅡ 못합니다!”
끝내 또다시 득점을 기록한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거 진짜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오늘 컨디션 무슨 일인가요, FWX!”
나는 한참 탑과 비비던 어깨를 떼고 정비를 거친다.
우리가 오더하지 않는 연습을 한 건 아니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가장 좋은 오더는 아무도 오더하지 않는 거다.
“나이스.”
“나이스.”
나는 문득 물었다.
“이유찬.”
“어?”
“넌 나중에 뭐 하고 싶어?”
“나?”
킬을 먹고 배부른 표정을 짓던 이유찬이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너 따라다니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무슨 소원이 있겠냐?”
아.
그랬어?
진작 말하지.
“그래?”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이유찬은 날 보며 씩 웃었다.
“나보다 잘하는 놈이랑 게임.”
나한테 가르쳐준 것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고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게 ‘진짜’ 웃는 표정이구나.
“유니콘, 니 이야기하는 거 맞아.”
뒷말은 안 해도 아는데.
대책 없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온다.
역시 나는 이 하루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지키고 싶다.
#
SHG의 도발이 무색하게 첫 번째 세트는 정말 자연스럽게 기울어지면서 끝났다.
SHG는 FWX가 한타를 볼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게임 초반 권건의 실수라고 생각했던 부분에 빨려 들어가면서 말린 답 없는 경기였다.
그리고 그게 FWX의 시그니처 같은 경기력이기도 했다.
무결점 스노우볼.
그 누구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 누구도 실수하지 않았다.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최전방에서 뚫리지 않는 방패 역할을 하는 정글러의 플레이는 ‘실수’가 나올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고.
나머지 선수들은 그 안에서 최선의 플레이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우승을 한 건 아니다.
한국에 있는 해설진은 첫 번째 세트를 가져간 FWX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해지는 현장의 분위기가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장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따금 FWX를 응원하는 함성이 들려왔지만 그럴 때마다 야유가 섞여들었다.
소리를 지르던 팬이 입을 다물고 나서야 음산한 소음이 잦아들었다.
“이건.. 좀 너무한데요.”
“네, 이건.. 음.”
“아무리 최근 우승을 전부 LPL이 가져갔다지만.. 이건.. 그러니까, 그.”
멀리 있는 해설진은 완곡하게 불만을 표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네. FWX가 당당하게, 우승으로 LKL의 왕좌를 되찾아와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단지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면, FWX 선수들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두려워서가 아니다.
장엄한 긴장감.
혹은 사명.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다만 한 세트를 마친 뒤.
권건이 하나의 실타래를 풀어낸 모습이라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중압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그건 감히 ‘월챔 우승’이라는 명예를 욕심내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아직 군대도 가지 않은 이 젊은 선수들이 겪어 보지 못한, 목숨을 건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이유는 모른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건아, 괜찮니?”
“괜찮습니다.”
“다음 세트에도 잘 해보자.”
하지만 한 번 더 이긴다면.
그리고 끝까지 이긴다면.
이 선수가 더 가벼워질 수 있지 않을까.
“네.”
나머지 선수들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
“화이팅!”
그렇게 두 번째 세트.
SHG는 이제 FWX를 강팀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대적자, 호적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작 그걸로 달라질 건 없겠지만.
적막 속에서 이루어진 밴픽이었다.
두 번째 세트에서 그들은 첫 밴으로 권건의 세주를 선택했다.
그리고 권건이 뽑아 든 건 방패가 아니라 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