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일하는 중입니다
1라운드는 우리 팀을 제외한 나머지 아홉 팀과의 경기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끝났다.
내가 새롭게 합류한 팀 FWX.
작년 스프링까지만 해도 그 반등의 속도가 아주 빠르지는 않았지만.
서머에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결국 올해 들어서 정점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10개 팀으로 이뤄진 LKL.
타국 리그와 비교하자면 최대 규모는 아니지만 실력의 갭이 적다.
물론 나라는 이레귤러를 뺐을 때도 1위 팀과 10위 팀의 실력 차이가 없냐고 하면 그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타국 리그와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흔히 거론되는 5대 리그 외에도 여기저기 LOS 리그가 존재하거든.
우연히 브라질 리그 선수들을 만나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의 하위권은 정말 예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축구 같은 육체 스포츠 분야로 재능이 쏠렸기 때문일까?
이들은 선수 개개인의 기량 대비 성적이 나오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상위권과 하위권의 갭은 더욱 무시무시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문성 있는 감독이 필요하다느니, 브라질리언의 워크에씩 신뢰도가 낮다느니, 국가 제도에 결함이 있다느니 하는 것들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긴 하지만.
직접 만나본 선수들의 민낯은 좀 달랐다.
말 그대로 즐긴다.
키보드를 눌러서 즐겁고, 마우스를 잡아서 재밌고, 모니터가 켜져서 행복하다.
이런 경험을 못 해봐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이 분위기, 공기, 습도, 온도를 즐긴다는 얘기다.
그래서 브라질 리그는 그야말로 축제.
직접 현지에서 본 적은 없지만 브라질 리그 결승 행사는 정말 화려하다.
자잘한 지표보다는 눈과 피부에 와닿는 스타성에 좀 더 열광하는 리그.
흥행만 기준으로 둔다면 그들은 상위권.
물론 즐겜픽도 즐겜픽이다.
박 감독님이 전해준 LOS 오디세이에 따르면.
먼 과거, 이 세상이 하나일 적에 브라질리언을 만나면 승패를 잊고 게임을 즐기라는 명언이 있었다고 한다.
huehuehue.
뭐 어쨌든.
이런 얘기를 왜 했냐고?
우리 팀에도 이런 놈들이 있다.
브라질리언 시그니처 모데 정신을 계승한 미친 탑이 그렇고,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우리 팀원들이 그렇고.
심지어 나조차도 조금은.
예전보다 아주 조금은 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적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는 브라질리언처럼.
언뜻 생각하면 프로게이머가 게임만 하는 직업 같지만.
가수가 정말 노래만 부르면 끝이 아닌 것처럼 같은 리그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는 국가도 있거든.
“그만하고 게임합시다.”
나는 가만히 손을 들어 말썽꾸러기들을 제지한다.
게임, 그래.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다.
스크림이냐고?
“오케이. 오케이. 누구 턴?”
“내 턴.”
그럴 리가 없지.
이건 프로게이머의 업무 중 하나, 콘텐츠 촬영이다.
본진이 온라인인 이상 이 파트는 프로에게 빠질 수 없는 필수 요건.
“다이.”
흘긋.
“레이즈.”
긴장감이 감돈다.
테이블 중앙에 쌓인 금빛 칩이 번들거리고 있다.
둘러앉아 있는 플레이어들은.
탐욕으로, 불안으로, 혹은 어떤 음모로 눈을 빛낸다.
조금 전의 대화마저도 어쩌면 누군가의 전략.
“레이즈.”
꿀꺽.
아이스 초코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 이러기야?”
“자신 있으면 따라와.”
“아니?”
누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따라가? 내 사전에 그런 건 없다!”
후다닥, 남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손에 든 카드를 감추며 몸을 뒤로 기울인다.
“또 춤추는 거 아니지?”
“오오오오오오올랄랄라라라오오오오요를레히요를레이레히메우오오올 인!”
촤아악.
테이블 위로 금빛 물결이 쏟아진다.
“와.. 이유찬.. 진짜 꼴 보기 싫다..”
“저거 또 트롤치는 거 아니야?”
“쟤 카드 뭐 남았어?”
다들 불평을 쏟아내지만 당당하게 서서 씩 웃고 있는 것은 이유찬.
“레히히! 레히호!”
“하.”
김예성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얼굴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더니.
“다이..”
코끝을 찡그리며 카드를 내려놓는다.
“쟤 패는 경우의 수가 뻔히 보이는데..”
그리고 결국 확 짜증이 난다는 투로 말을 맺는다.
우리는 테이블 게임을 하고 있다.
사옥에 있던 트럼프 카드를 이용한 카드 게임이다.
각자 무늬를 고른다.
무늬의 차별은 없다.
숫자와 알파벳 카드만 사용하고.
각자 2~10, 잭(J, 11), 퀸(Q, 12), 킹(K, 13), 에이스(A, 14).
총 열세장의 카드 중 두 장을 뽑는다.
그중 한 장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한 장은 핸드에 숨긴 뒤.
최종적으로 두 장의 카드 합이 가장 높은 사람이 이긴다.
단, 세 번째 판까지 같은 카드 셋을 사용하고 전 판에 오픈했던 카드는 버리기 때문에 판 수가 진행될수록 상대의 패가 예측되는 방식이다.
뽑을 수 있는 카드가 줄어드니까.
카드 게임이 으레 그렇듯 어느 정도 카운팅은 가능하다.
하지만 요령보다는 카드를 잘 배분해서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
요는 운칠기삼 운빨 게임.
“김미드! 컷!”
“나는 확률상 네 패가..”
처음에는 텍사스 홀덤 포커를 준비하려고 했지만 탑 모 씨가 룰 이해에 실패하는 바람에 급히 김수연 단장이 유학 시절 술자리에서 즐겼다는 게임을 가져왔다.
말이 안 통해도 할 수 있는 쉬운 카드 게임.
처음에는 촬영으로 시작된 게임이지만, 이제는 모두 진심이 됐다.
“혓바닥이 길다. 가만히 있어라. 뽀찌 안 받고 싶어?”
김예성이 손을 꽉 쥐고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이유찬을 노려본다.
“너 진짜 죽..”
“아이고오오오! 우리 트월킹 왕자님! 뭐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십니까?”
하지만 바로 치고 들어온 최은호가 알랑방귀를 뀌며 이유찬의 어깨를 주무른다.
“킹이면 왕이지 왜 왕자임?”
“..? 아아아아아아! 암요, 암요! 왕이죠! 왕.. 킹갓 엠페러 차니 트월 킹이시죠!”
“죄은호 쟤는 밸도 없냐? 저런 헛소리를 받아주네.”
“쉿! 촬영 중.”
벌써 판이 여러 번 돌았다.
“헤헤, 저한테 뽀찌를 좀 주시면은, 예! 제가 고오급 캡슐 커피를 대령해드리겠습니다.”
어른의 세계를 보여주겠다며, 타짜라도 된 양 꺼드럭대던 최은호는 무리한 블러핑을 치다가 순식간에 파산해 리타이어 됐고.
“유찬! 주지 마! 쟤 노름꾼이다. 하나 주잖아? 그거 가지고 바로 판 끼려고 한다..”
지나치게 투명한 곽지운은 동네 호구로 전락해 그다음 순위로 탈락했다.
운이 좋은 타입이지만 좋은 카드가 나오면 신이 나서 칩을 걸어대니 그걸 따라와 줄 사람이 있을 리가.
다만 배짱 하나는 두둑한 편.
반대로 김예성은 조심성이 많아 이런 게임에서 이기는 게 쉽지 않다.
카드 카운팅에 너무 큰 의미를 둔다고 해야 할까.
따도 적게 따고, 잃어도 적게 잃는다.
머리를 너무 써도 문제.
PC와 테이블 게임.
두 게임은 틀림없이 차이가 있지만 이런 데서 성격이 좀 묻어나긴 한다.
LOS를 제외한 다른 게임에는 일절 관심 없는 곽지운은 일찌감치 탈락한 뒤 지금은 태평하게 앉아 아이스 초코를 쪽쪽 빨고 있다.
“너 절대 불법 스포츠 도박은 안된다. 알았지? 그냥 바로 제명이야.”
“미친놈인가, 진짜? 그걸 내가 왜 해?”
“그럼 애들 노는데 꼽사리 끼려고 하지 말고 여기 앉아라, 루저 늙은아.”
“깍지 형! 너무 때리지 마라. 우리 예언자 맛 쿠키 상처받음.”
“예언자 맛 쿠키? 나?”
“니가 만든 쿠키~ 너를 위해 태웠지.”
“닥쳐! 내가 저런 새끼한테 아양을 떨었다니.”
“깨달음 안 사요.”
최은호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곽지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이거 뭐야, 내 폰 왜 안 열려. 깍지!”
“벌칙이다.”
“니가 뭔데 벌칙을 주고 지랄?”
탈락자 커뮤니티는 잘 굴러가고 있는 모양이다.
“대체 몇번을 실패한 거야? 생체 인식 한참 걸리잖아! 얘 때문에 내가 폰을 할 수가 없어!”
“촬영 중에는 촬영에 집중해야지.”
“판돈도. 없는. 게. 까불어.”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니..”
어차피 최은호는 곽지운을 이길 수 없다.
바텀 듀오의 티격태격 모먼트는 제법 인기 있는 콘텐츠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착한 형이지만 동갑내기 서포터에게만큼은 츤데레인 곽지운.
항상 모두를 놀리려고 하지만 늘 뒤통수를 맞고, 그래도 꺾이지 않는 마음의 최은호.
심지어 그가 유상준의 적응을 위해 자신을 막 대하라고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탈락한 김예성 역시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지운이 형, 나도 폰 좀 줘봐.”
“그래.”
“왜 내 폰을 주는데?”
“나도 열어볼게.”
그리고 데뷔 후 지금까지 은근히 벽 있는 타입이었던 김예성도.
“그래? 열어줄래.. 가 아니고 너도 지문 나랑 다르잖아!”
“은호 형 똑똑해졌네?”
서서히 팀원들과의 케미가 생기고 요즘에는 진짜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한다.
“얘들아! 빨리 끝내고 저거 초콜릿이나 먹자!”
아이스 초코를 다 비운 곽지운이 발을 동동 굴렀다.
분위기는 그럴듯하게 잡았지만 테이블 위에 쌓인 금색 칩은 사실 초콜릿이다.
금박에 싸인 동전 모양 초콜릿.
설 직전, 발렌타인 데이라고 팬들이 보내준 선물 중 하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팀이 단 걸 좋아한다는 이미지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은 건강식품에 관심 있는 사람이 더 많은데.
“그럴까요.”
나는 피식 웃었다.
아마 팬분들의 선물에 대한 보답은 화이트데이 특별 촬영으로 이어지겠지.
소규모 콘텐츠 촬영은 시즌 중에도 계속 이어진다.
연습, 스크림, 피드백, 방송에 더해 콘텐츠까지.
생각보다 빡빡하다.
그중 LOS와 관련 없는 콘텐츠를 시도한다는 건 크게 두 가지 상황인데.
인기가 없어서, 혹은 있어서다.
인기가 없는 경우에는 게스트나 특이한 소재로 시선을 끌어보기 위함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인기가 있어서.
팬들이 좀 더 다양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전체적인 콘텐츠 업무는 팀에서 알아서 짜기는 하니까.
성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떤 선수들은 룩북, 노래, 춤, 놀이공원 가기, 가상 데이트 등 다양한 콘텐츠를 가져오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솔직히 나도 스트레스가 없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연습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콘텐츠 촬영 중에 사이가 벌어지는 일도 있는 만큼, 팀원들과의 호흡을 맞출 생각을 하면 더욱.
하지만 선수들의 의사와는 달리 이런 콘텐츠를 자주 하는 구단이 정해져 있는 경향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내가 오래 몸담았던 스톰은 시즌 중 LOS를 거치지 않는 다른 콘텐츠를 일절 하지 않는 팀이었고.
트릭스터는 소극적이지만 다양한 실내 콘텐츠를 시도해보는 팀이었다.
유니버스는 뭐 하나를 해도 규모를 크게 키워서 확실하게 하는 팀.
룩북을 해도 강남 한복판의 의류점을 통으로 빌려서 하는 식이다.
어쨌든.
짜인 일정상 FWX도 조만간 연예인 콜라보라던가 퀴즈 쇼, 간단한 쿠킹 혹은 먹방 콘텐츠 및 사옥으로 팬들을 초대하는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나는 지금 일을 하는 셈이다.
내 주요 업무인 ‘경기’는 잘 진행되고 있다.
이전 삶에서 전승은 흔했고 무패 역시 처음 겪어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 팀으로 해낸 건 의미가 좀 다르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보조 업무인, 이런 경기 외적인 일들 역시 앞으로도 이어질 테고.
그런데도 어쩐지.
전과 달리 부담이 없다.
“야, 건이 웃는다.”
“웃는 기준이 도대체 뭐야?”
글쎄.
“나도 좀 웃겨보고 싶은데.”
그냥.
이 못난 놈들과 함께 있는 게.
“다시 트월킹 해볼까?”
“그거 아닌 것 같은데.”
“해시태그 #신고합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우연 같은 이 만남이 어처구니없어서.
“은호 폰 밴되서 웃나보다.”
“그거다!”
“형 폰 뺏어!”
“어이어이! 마사카! 그럴 리가 없잖아!”
“그 말투 뭐야?”
“몰라? 내 팬들이 하던데?”
“죄은호는 팬도 이상해.”
“디즈X.”
“박 감독님.. 이것만 해도 콘텐츠 분량 충분하겠는데요?”
“그럼 다음 촬영은 패스해도 되나요?”
“그건 아니지만요.”
“팀장님, 당신은 욕심쟁이.”
“우후훗.”
“아재요..”
그리고 이제야.
일이 일답지 않게 느껴져서.
항상 캐리를 해야 했던 내가 다른 부분에서는 캐리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냥 그래서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