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돌려돌려 돌림판
“이거 예상하지 못한 라인업이 등장하면서!”
“이번 경기, 밴픽 흥미로워집니다!”
시작하자마자 경기장은 다시 달아올랐다.
- 이거 맞아? 이거 맞아? 이거 맞아?
- 왜 쟤를? 왜 쟤를? 왜 쟤를? 클래스는 어쩌고 사이다를?
- 큿소 후배 녀석에게 자리를 빼앗겨버린;
- 뭔 생각이 있겠지
- 하긴 최근 꼴픽으로도 다 이겼으니까
- 이것이 [믿음]
“지금 권건 선수가 고른 게.”
“네, 그렇습니다. 바로 마지막 픽으로 나온 람블이죠. 약 500여일 만에 등장한 정글 람블입니다.”
FWX는 올 시즌 특이한 픽을 유행시킨 팀이다.
그렇다고 항상 특이한 픽만 하는 팀은 아니고, 정말 리그에서 쓰기 어려운 띠모 따위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물론 과거 정규 경기에서 이런 픽을 선보인 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건 실수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들었다.
“사실 탑에서 쓰이던 챔피언이긴 한데. 어느 순간 어느 포지션이든 소화해내는 훌륭한 챔피언이 됐어요. 정글, 탑, 바텀.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개중에는 FWX를 꼴픽의 상징, 유럽의 롤 모델, 색다른 방식의 홍보를 시도하는 팀 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다만 상당히 괜찮은 노 코스트 중장거리 챔피언임에도 탑이나 미드에서 기용이 어려워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푸시력. 라인 푸시력이나 타워 푸시 속도를 올려줄 수 있는 아이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인데요.”
- 오
- 그래서 라인전은 이겨도 게임을 졌구나?
- 너 티어가 어디니? 그런 것도 몰라?
- 너도 모른다고 말하려고 하는 거지
- 맞아ㅎ
FWX가 ‘특이한 픽’으로 열광 받는 것은 일반 게임에서 자주 얼굴을 내비치지만 리그에서 자주 보이지 않는 픽, 그리고 연구가 필요한 픽들을 선택한다는 것이 그 이유.
특히 해당 챔피언 장인들의 지지를 크게 샀다.
그들이 사용하는 챔피언은 충분히 단점이 있지만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고.
팀에서 어떤 역할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챔피언이다.
혹은 기존 챔피언의 특이한 템트리나 스펠 등을 연구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을 뿐이다.
막장 뉴메타만 선보이는 게 아니라는 뜻.
“이후 조건부 챔피언이 됐습니다. 람블은 노코스트 챔피언인 만큼 더 아이템 영향도 많이 받습니다. 쿨감 템들의 잇달았던 너프도 한몫했죠. 지금은 그래도 쓸 수 있다는 평가긴 하지만, 암흑의 시대가 길었다는 건 그만큼 다루는 선수가 적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언뜻 쉬워 보이지만 한없이 어려운 스킬셋을 가지고 있죠. 이 챔피언이 인기가 아주 많은 편은 아니라서 사실 프로 씬에서도 궁극기 실수가 꽤 자주 나오곤 합니다. 은근히 거리나 판정 조정 패치가 잦았던 챔피언이기도 하고요.”
그들이 이런 밴픽을 하는 이유는 눈에 띄고 싶어서나 장인들의 지지를 받고 싶어서 같은 단순한 이유는 아니었다.
“잠수함 패치라고 해야 할까요, 네. 아예 궁극기 사용 메커니즘 자체에 변동이 있었던 적도 있었죠.”
적절하게 투입된 출연 빈도가 낮은 픽에는 대처하기 어렵고, 밴픽에서 유리한 고점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팀들은 바보라서 이렇게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걸림돌은 메타와 숙련도.
메타는 그렇다 쳐도, 챔피언 숙련도는 선수 개인에게 큰 부담이다.
아무리 프로라도 모든 챔피언 숙련도가 높기는 어렵다.
시간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계속해서 조금씩 변화하는 모든 챔피언의 옵션을 계속해서 체득하고 분석한다는 건.
마치 100여명의 클라이언트가 수정 사항을 요구하고 그걸 쳐내는 것과 비슷하다.
자칫하면 무엇하나 똑바로 할 수 없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가라앉게 된다.
그래서 선수들은 그 중 이번 시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챔피언의 폭을 정해놓고 훈련하는 방식을 가져가곤 한다.
게다가 팀에서 훈련 방향성을 정할 때 도움을 주면 더 좋다.
같은 챔피언이라도 탱커로 사용할지, 지원형으로 사용할지, 백도어 요원으로 기용할지 등 선택지가 무수하니까.
그래서 분석팀이 중요하다.
그것이 채지한의 팀 선택 기준이 된 것처럼.
“근데 가끔 협곡에서 람블 만나면 데미지 정말 살벌하던데?”
“잘 키우지 않는 게 중요하죠. 대신 잘 키우기도 어렵습니다.”
“네. 그래서 리그에서 잘 나오지 않아요. 그 이유를 꼽자면 수동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밥상을 깔아주는 챔피언이 아닙니다. 결코.”
“결코. 결코라고까지 말하는 거예요? 진짜? 그 정도로?”
“네. 물론 잘 커서 궤도에 오른다면 달라질 수 있긴 한데, 보통 그런 걸 전제하지는 않으니까요. 특히 성장력이 떨어지는 라인인 정글로 나왔을 때는요. 오히려..”
- 난 람블하는 새기들이 제일 싫어
- 저 멀리서 궁만 쏘고 손 빨고 있는 놈들 ㄹㅇ
- 각설이 갱플같은 놈들
- 쥐불놀이 메카 로봇 십
- 맞으면 존나 아픈데 우리 팀이면 그렇게 쓰레기가 없음
- 아ㅋㅋㅋㅋㅋ
“지금 트릭스터의 리뉴 선수가 가져간 빅터르. 오히려 저쪽이 더 쉽죠. 사실 둘 다 바닥에 불붙인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거든요. 메이킹이 가능합니다.”
해설진은 오늘도 모두 틀려버린 밴픽 예측에 이마를 치며 선수들이 최종 스왑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좋습니다! 그래서 결국! 완성된 픽은 블루 진영의 인천 트릭스터가 카뮐, 쟈크, 빅터르, 아펠, 질리얀입니다.”
이번 시즌 보수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선보였던 트릭스터의 과감함.
“딜 기댓값이 정말 높아요. 잘만 키운다면 상대는 카뮐과 빅터르, 아펠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녹아내릴 겁니다! 지금 쟈크와 질리얀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트릭스터 입장에서는 도전입니다. 이런 팀이 아니에요. 질리얀은 사실 초반 보고 뽑는 픽이 아니거든요. 특히 상대 정글이 권건이라면요.”
해설진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글에서 최은검이 쟈크를 골랐다는 것 역시 꽤 큰 결심이라는 걸 알았다.
남동현 해설은 겉으로는 말을 삼킨 채 패널을 톡톡 두들겨 다른 이들에게 알렸다.
쟈크, 최근 리그 기록, 선수명 권건.
슬쩍 그 모습을 바라본 요원이 입으로는 진행사를 읊으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다른 모니터링 요원들에게 신호한다.
이 기록은 굳이 띄우지 말라고.
방송에 나가지 않는 화면 속에서 수신호가 오갔다.
이건 은근히 자존심 싸움이다.
신챔이 나왔을 때나 오랜만에 그 픽이 나왔을 때 누가 활약을 보여줬는가.
그리고 그걸 누가 따라서 썼는가.
먼저 쓴 사람이 그 챔피언의 ‘아버지’ 격이 되기 때문이다.
팀이나 선수들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시청자들은 이것만으로도 불타오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동의합니다. 레드 진영의 대전 FWX는 요내, 람블, 아자르, 닐랴, 세주를 선택했어요.”
그저 재빨리 멘트를 잇는다.
“이거, 정말. 탑에서 이미 아자르를 보여 준 적이 있는 차니 선수죠? 그러다 보니 어디가 미드고 어디가 탑인지 구분하기 어렵고. 세주와 람블 역시 스왑이 가능한데다 중반부까지는 미드 람블 가능성까지 있었기 때문에.”
- 짜잔 릭트쑈!
- 이 새기들 만나면 진짜 픽할 때마다 짜증나 디지겠어
- 픽 토토 무쓸모 팀.. 토붕이 오늘도 운다
- 서폿 세주를 해?
- 이거 왠지 그거 생각나지 않냐?
- 아 그냥 내가 세주 서폿 할게! 나 일단 캬서스 박았어~ 이걸로 정글 해라
- ㅋㅋㅋㅋㅋㅋㅋㅋㄹㅇ 세주가 먼저 나왔자너
- 확실한 건 두 팀 다 픽이 중소기업박람회 수듄임ㅋㅋㅋㅋㅋㅋㅋ
- 아ㅋㅋㅋ 퀄리티 비슷하다고ㅋㅋㅋ
- 그래도 트릭스터가 좀 더 쉽고 세지 않음?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결국 트릭스터가 좀 더 편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동의합니다.”
“이제는 닐랴가 어느 정도 리그에 정착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런 의문이 있긴 해요. 차라리 바텀 야쓰오가 낫지 않나? 라는..”
“오,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하마터면 말실수할 뻔했네. 와, 난 또 사미레 말하는 줄. 둘은 여전히 엄대엄입니다.”
“사실 숙련도 문제에요. 세주와 함께 나온 이유는 세주의 패시브 스택 때문이고. 전체적으로 여전히 초반 라인전 우위를 통한 오브젝트 주도권은 가져올 수 있을지언정 사거리 차이로 후반 캐리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네. 유통기한이 있어요. 그리고 트릭스터는 후반 밸류가 높습니다. 다만.”
“다만?”
“닐랴는 돌진 조합에 잘 맞는 챔피언이거든요. 트릭스터 역시 팔이 아주 긴 조합은 아니구요.”
“그럼 다 보고 선택한 람블이. 결과적으로는 궁극기 사거리만 보자면 가장 팔이 긴 챔피언이라는..?”
- 그럼 진짜 서폿이 마지막에 람블 박은 게 일부러 바꾼 건가?
- 원래 권건이 세주 하려다가?
- 존나 유동닉이고~
- 클래스에서 사이다로 바꾼 이유가 이거야?
- 근데 세주도 유부챔이잖아
- ? 세주 미혼 아님?
- ? 우뒤르랑 썸타는 거 아님?
- 그럼 타고 다니는 멧돼지는 어떡하라고?
- ???
- 세주가 결혼을 했건 멧돼지를 낳았건 관심 없으니까 그런 얘긴 단톡방에서 하세요.. 제발
- 글쎄 사이다가 과연 세주를 할 수 있을까?
- 그럼 먼저 고른.. 아 쉬바 그냥 경기를 보겠어
항상 미궁으로 빠지게 하는 팀, FWX.
해설진도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들은 있지만 오히려 말을 아낀다.
“사실 굳이. 굳이 이렇게 픽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누가 굳이 이렇게 어려운 조합을 합니까, 예?”
어차피 항상 그들은 예상을 깨니까.
“근데 FWX잖아요. 누가 어려운 조합을 하냐뇨, 누가! 그렇게! 하는가가! 중요하죠.”
- ㅋ ㅑㅋㅋㅋㅋㅋㅋ
- 형 뭘 좀 아네?
- 팩트) 남동현은 FWX 극성 빠돌이다ㅋㅋㅋㅋ
- 편파 지림
- 1위 팀을 누가 미워할 수가 있음 억울하면 이기시던가~~~~
- 우리도 설움의 시절이 있었다 이거야~~~~~~~
“인정합니다. 이제 이 말을 하도 정정해서 입이 아플 지경이에요, 입이!”
“FWX가 항상 저희를 부끄럽게 만들긴 합니다. 왜, 전에도..”
“네, 두 분. 좋습니다. 어쨌든 협곡의 시간은 흐릅니다!”
감독들의 결정은 끝났고.
“예, 로딩이.. 완료됐군요!”
이제 깃발은 선수들의 손에 쥐어졌다.
“지금부터 경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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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권 너무 잃지만 말고. 실수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괜찮아요.”
“오케이.”
초반 상체 주도권은 트릭스터 쪽이 유리, 하체 주도권은 우리 쪽이 유리.
중반에 픽을 확 틀었음에도 나쁘지 않은 결과다.
하지만 난이도에서는 차이가 난다.
“바텀은 질리얀 패시브 항상 염두에 두고. 레벨 과신하지 마시구요.”
“계산하기 좀 골 아픈데? 왜 다 경험치 파티야? 나만 유리한 거 하고 싶었는데. 솔직히 저 할아범은 언제봐도 짜증나.”
닐랴와 질리얀.
이름에 무슨 유사성이라도 있나?
어쨌든 ‘경험치’라는 드문 키워드를 가진 두 챔피언이 바텀에서 만났다.
“걱정 마세요. 저쪽도 노림수 틀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오케이. 초반은 바텀한테 맡겨.”
곽지운이 야무지게 대답한다.
“응.”
유상준은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다.
“상준아, 너도 바텀이야.”
“응.”
과잉 탭이나 ESC 없음, 무빙 정상.
특별히 긴장하지 않은 것 같다.
트릭스터라는 팀에 감정이 있는 건 아닌가.
“근데, 건아. 나 물어볼 거 있는데.”
몸을 숨긴 채 적당히 첫 번째 장소를 정찰한 김예성이 입을 뗐다.
“어.”
“유체화 든 거야?”
오, 꼼꼼한데.
“어? 그러네! 근데 강타 말고 점화 들지.”
“?”
“점화 유체화 좋은데?”
“추천. 정화. 유체화. 람블.”
나는 헛소리를 하는 탑과 서포터는 일단 재끼고 가만히 파킹했다.
조그만 챔피언이 옴작대는 걸 보고 있으니 힐링이 따로 없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물고기 돌아다니는 거 지켜보는 그런 힐링 앱 같은 거.
“이 스킨이랑 유체화가 잘 어울리던데.”
“그렇구나.”
김예성이 진짜 믿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말을 붙였다.
“농담이야. 농담이고, 이래도 될 것 같아서. 점멸 쓸 각을 안 만들면 좋지.”
“건이가.. 농담을 해..?”
“용. 드리겠. 습니다.”
우리 두 번째 서포터는 붙임성이 참 좋은 것 같다.
픽을 바꾸자고 말하는 당돌함도 그렇고.
“그래. 왕 대접 좀 받아보자. 나는 벽 너머에서 강타만 쓸게.”
“물론.”
“상준아.. 원딜의 의사는 묻지 않는 거니?”
“반대?”
“아니. 찬성, 찬성이오.”
예전 트릭스터와의 경기가 떠오른다.
잠을 안 자겠다고 보채는 저 어린 것들을 내가 재우느라 고생이 참 많았지.
“애당초 정글이 점멸을 들 이유가 없지. 다음엔 그냥 텔 들어.”
“그래. 맞아. 우리가 만들어야지.”
“멀리서 궁만 쓰세요.”
그리고 내가 몰가를 했을 때의 일도.
고사리손으로 나에게 뭘 좀 쥐어다 주겠다고 억지 부리던 게 어제 같은데.
마냥 코딱지 같았던 우리 팀원들이.
어느새 꽤 자랐는지 저런 따뜻한 말을 한다.
이게 부모의 마음인가?
장하네.
“야, 거니가 하도 스킨을 안 껴서 내가 저 스킨 사줬음.”
“뭐?”
“거니 본계에도 내가 저거 선물했다고.”
“네가 뭔데 저걸 선물해?”
“나? FWX 탑. 닌 뭔데?”
“난 FWX 미드.”
음..
“근데 저거 근본 스킨아니잖아.”
“신상 좋아하는 애가 그걸 몰라? 대세는 그루브임.”
“아니지. 클래식 몰라? 슈퍼 갤럭시지.”
“혹시 미드님은 색감?이라는 게 뭔지 모름?”
“내가 태어나서 들어 본 말 중에 제일 치욕적인 말이다.”
“튜닝. 끝. 순정.”
“넌 뭔데 끼어 들음?”
“서포터.”
“인정.”
교육이 좀 잘못된 것 같기도 하고.
“그만들 하고 집중해.”
출격할 시간이다, 이 꼬맹이들아.
원래 불리해 보이는 걸 뒤집는 게 더 재밌고.
맞는 상대에게는 더 큰 절망감을 주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