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아슬아슬했죠
이런 사건은 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하지만 여러 번 살면서 내린 결론은.
패치 내역에 변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거다.
뭐, 이제는 메타 변화가 있어봤자 전 챔피언이 리메이크되지 않는 한 별 차이는 없겠지만.
대신 일어나지 않은 일들도 있다.
LKL 아나운서 누나의 결혼 같은 것.
이런 작은 이벤트 외에도 여러 가지 흉흉한 사건 사고들은 늘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사건이 내 눈앞에서 벌어질 뻔한 건 처음이다.
릴리가 경고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성격과는 별개로 내가 꽤 괜찮은 서포터로 평가하는 왕지우도.
착한 꼰대 안희종도 어떤 불상사를 겪었을지 모른다.
심지어 리그가 중단됐을 수도 있다.
그럼?
이번 삶도 나가리지.
그래서 나는 내가 달려든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감독님과 곽지운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나를 그냥 꾸준히 운동하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두 사람 입장에서는 좀, 그럴 만도 했다 싶다.
내가 앞으로의 1년만 생각하고 달려들었다면, 팀원들은 내 인생 전부를 걱정한 거다.
삶은 한 번뿐이니까.
그리고 이 걱정을 하는 건 우리 팀원들만이 아니었다.
“..래서, 정말 지극한 감사의 말을 드리면서. 권건 선수께 전합니다.”
내 앞에는 굉장한 남자가 앉아있다.
언뜻 봐도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그가 내민 명함은 미라쥬 재무팀 팀장 한상열.
나와는 접점이 없었던 곳.
재무팀 팀장이 비즈니스 관계가 아닌 나에게 찾아온 건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다.
저 사람은 3대를 몇이나 칠까?
물론 나는 절대, 절대로 헬스에 미친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근육량으로 판단하는 돌은 자도 아니고.
하지만 회귀마다 모든 근육이 초기화된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20대 초반의 몸은 숨만 쉬어도 근성장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성장은 삶의 활력소이며 게임은 체력이 좋아야 잘 할 수 있다.
건강한 몸에 뛰어난 피지컬이 깃드는 법.
그리고 게임은 장르를 바꿀 수 없지만 운동은 장르를 바꿀 수 있으니까.
그럼 집착하게 될 수밖에 없잖아?
아닌가.
어쨌든 이런 분야를 오랫동안 접하다 보면.
대충 저 사람이 어떤 운동을 했을지 알 수 있다.
저건 틀림없이 크로스핏 같은 고강도 운동으로 만들어진 압축 근육이다.
“하지만 과정 중에 권건 선수께서 폭.. 음, 주먹.. 아니, 인과응보를 실천하신 것은 사실이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절대 나가지 않도록 이야기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저 수염.
나는 수염에 대한 조예는 없지만.
김예성이 그를 보자마자 바버샵을 다니는 게 틀림없다며, 친 커튼 스타일이 어쩌고, 자기는 구티 스타일이 어쩌고 이야기를 늘어놨기에.
이것 역시 꽤 신경 쓴 부분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선수분들은 몸이 재산이고. 냉정하게 말해서, 저희 팀을 위해서 권건 선수가 다쳤다면 오히려 더 큰 일이 났을 테니까요.”
근데 여기서도 잔소리를.
“배상도 더 복잡해졌을 테고. 일반인이 흉기에 대응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니, 앞으로는 그러지 마십시오.”
한 팀장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맺은 뒤 나와 같은 눈빛으로 훑었다.
“일반인.. 은 아니실 수도 있겠지만.”
어너두?
반가워서 머슬 그리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인사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옆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이 친구, 그때 헥사 선수와 벨 선수를 감쌌던 스탭입니다.”
아.
그 사람.
“만약 권건님이 몸통 박치기를 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칼에 맞았을 거예요. 하하. 저도 모르게 감싼 거지만.. 어차피 다 제 탓이라..”
뭐더라.
지금 엄청 유명하던데.
그래, 동천동 미빠 박성준.
“동천동에 살지는 않고요.”
한 팀장이 슬쩍 끼어들어 궁금함을 해소해준다.
아쉽네.
그래도 미라쥬 팬인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위기의 상황에서 선수들을 보호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성준님. 그런 말은 자제하십시오. 애당초 신입 스탭에 불과한 성준님이 임시 출입증을 발급 요청했을 때, 해당 보안 담당자는 뭘 하고 있었나요. 쳐다보지도 않고 출입증을 건넸죠? 그러니까 이제 그런 말은 하지 마시죠.”
한 팀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왠지 아까보다는 조금 따뜻하게 느껴진다.
“호신술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일반인이.. 어휴.”
“그러게요.”
나도 모르게 대답했더니 박성준이 웃으며 자기 뒤통수를 매만졌다.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아, 이제 시간 더 뺏지 않겠습니다. 바쁜 일정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내 앞에 작은 종이 가방을 내려놨다.
그리고 한 팀장은 깔끔하게 일어났고.
박성준은 계속해서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다.
“그런데. 제 머리 스타일이나 수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 분은 처음이네요.”
음.
근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뵙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한 팀장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 복귀합시다. 매니저님.”
“예, 팀장님!”
어쨌든.
미라쥬에도 일을 꽤 괜찮게 하는 사람이 있긴 하네.
#
그 주 경기가 모두 끝난 일요일 밤.
“저는 못 봤죠.”
- 소문이 무성하던데ㅋㅋㅋ
- 진짜 못 봄???
- 야 근데 봐도 못 봤다고 해야지;;
- 벌써 경찰 다 다녀갔음
“남동현 해설님은 봤어요?”
“아뇨, 저도 못 봤는데..”
- 나 아직도 손이 떨림 씨발 직관 갔는데 범죄자랑 같은 곳에 있었다고?
- 그날 머 특별한 거 없었음??
- 어디 커뮤에 글 올렸다던데? 그거 흉기충 본인임?
- 그건 모르겠는데 일단 오염된 구역으로 지정됐음
남동현 해설이 말을 흐렸다.
두 사람은 심야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온라인 경기라고 하더라도 해설진은 LOS 파크로 출근했다.
하지만 갑자기 다른 방식으로 경기를 치루게 된 팀들은 묘하게 집중력이 떨어져 보였다.
마저 경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기존에 예약되어있던 표는 모두 취소됐고 경기장 출입 역시 금지됐기에 관심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사건뿐이었다.
“에이. 그래요. 그럼 진짜 딱 5분만 이야기해요. 어차피 이제 방송 끝낼 거였으니까.”
“오케, 오케. 5분 괜찮아요.”
흉기, 괴한 침입, 보안 문제, 그리고 다행히 선수 피해는 없다는 것.
여기까지가 알려진 내용의 전부였다.
그날 해설을 진행한 강기수 해설, 그리고 콘텐츠를 위해 LOS 파크에 있었던 남동현.
사실 두 해설자는 스탭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조사차 나온 경찰로부터 2차 피해에 대한 주의점 역시 들었기에.
“솔직히 나 먼저 말한다. 진짜 몰라. 나 하나도 몰라.”
- 거짓말ㅠㅠㅠㅠㅠ
- 권건이 뭐 구해줬다고ㅋㅋㅋㅋ
- ㅁㅈ 갑자기 인사하다 말고 존나 뛰어갔자나
- 왜 뛰어간 건지 넘모 궁금
- 킹리적 확신 8_8
“진짜 저도. 저 그 자리에 없었어요. 찍고. 나 카페 쪽에 있었잖아. 그날, 오신 분들은 봤을 거예요. 저 콘텐츠 다 찍고 팬 사인회라도 참여하려고..”
“동현 해설님. 뭔 팬싸?”
“아! 팬싸 아니고, 그냥 권건 선수 얼굴만 보려고 했어요. 요새 연락도 잘 못 하고 그래가지고..”
“어장관리?”
“하하.. 제가.. 물고기면 몰라도..”
“그건 그렇네요. 나도 넣어줘, 그 어장.”
“풀방. 죄송.”
“동현님이 뭔데 풀방을 정함.”
“권건 선수의 친구창을 해설진에게도 오픈한 핵심 요원.”
“인정.”
- ㅋㅋㅋㅋㅋㅋ
- ㄹㅇ
- 근데 권건이 뭐가 예뻐서 미라쥬를 구해줘?
- 칼 든 사람을 일반인이 어떻게 구함
- 그럼 왜 뛰어갔음?
- 화장실이 급했나 보지
- 근데 진짜면 영웅이잖아 왜 안 알림?
- 언노운 히어로?
“그러니까요. 아마 알려질 만 하면 다 알려졌을 거예요. 여러분. 지금 문제의 본질은 진짜 그 사람, 아니, 사람도 아니지. 그 미친 새끼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는가가 큰일이죠.”
- 걔 미라쥬 팬 아님?
- 미라쥬 팬들 알만하다ㅉㅉㅉ
- 우리가 그런거 아니라니까
- 반성하고 있습니다;;
- 게시판에 글 썼으니까 팬이겠지 대댓글도 싹 잡아다 처벌해야함
- 그거 불확실하다니까
“아니, 그건 팬심이 아니죠. 설혹 팬‘이었던 게’ 맞아도 범죄자 한명이나 게시판 글이 미라쥬의 팬 전체를 대변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쵸?”
- 미라쥬 팬인데 저 절대 그런 사람 아닙니다ㅠㅠㅠㅠ
- ㅁㅈ 프레임 씌우지 마세요ㅠㅠㅠㅠ
- 그래도 ㅅㅂ 커뮤가 무섭네..
- 손가락 조심해라 진짜
“맞아요. 동의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싸우지 마시고. 오늘은 방송 여기까지 할까요?”
“좋습니다. 여러분, 안녕!”
“경기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
- ㅠㅠㅠㅠㅠㅠ
- 랑바ㅠㅠㅠㅠ 템바ㅠㅠㅠㅠ
- 아니 아무 이야기도 안했잖아!!!!!
- 잘가여ㅠㅠㅠㅠ
- ㅂㅂㅂㅂ
방송이 꺼졌다.
강기수와 남동현은 잠시 침묵했다.
혹시나 방송이 켜져 있지 않을까 여러 번 다시 확인했다.
꺼진 게 확실하다.
“권.”
“권.”
“먼저 얘기하세요.”
“동현님 먼저 해.”
“네.. 그. 권건 선수가.”
“맞아.”
“맞죠? 와.. 진짜.”
“어질어질하네.”
두 사람은 각자 입을 막고 어색한 표정으로 있었다.
온라인이지만 캠으로 서로가 보인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모르겠어요. 내가 들은 건 그.. 아나운서 현아님인데.”
“아니, 거기 계셨다구요?”
“인터뷰 준비. 좀 멀리 계셨다더라.”
“와.. 진짜 놀라셨겠다.”
“뒤쪽이라 흉기가 보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던데. 그래도 막 욕하는 소리 같은 게 들려서 봤다나 봐요.”
“저도 스태프분들께 전해 들었어요.”
“내가 언젠가 한 번 진짜 큰일 날 줄 알았어. 아.. 씨, 진짜.”
“경기장 경호원은요?”
“그게 뭐 경호원인가. 말만 경호원이지. 그냥 도어맨이잖아. 팀 경호는 서로 대기실 왔다 갔다 할 때 다 따라다니지는 않고.”
두 사람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진짜 이런 말 해도 돼요?”
“어. 해요.”
“진짜 실직하는 줄 알았네.”
“와. 씨이이바.. 아. 욕 미안. 근데 나도.”
두 사람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짚었다.
“진짜 만에 하나.. 그냥 생채기만 나도 문제인데. 혹시라도 진짜.. 진짜.. 최악의 상황으로.. 누구 하나 어떻게 됐으면..”
“귀신의 집 되는 거죠 뭐.. 리그 망하고.. 월챔 서렌 치고.. 상상만 해도 너무..”
“사실 지금도 각 구단이 보이콧할까 봐 너무.. 무섭다.”
“하..”
“아니, 이게 진짜 어이가 없는데. 권건 그 선수는 대체 뭐하던 사람이래?”
“권건 선수요? 그냥 운동 좋아하는.. 운동.. 좀 많이 좋아하는 정도로 알고 있는데.”
“많이?”
“매일 간대요.”
“운동을 매일? 그게 인간이냐? 사이보그지.”
“그쵸?”
“근데 내가 현아님한테 듣기로는, 그. 무슨 아저씨 영화처럼 칼 뺏기 딱! 어? 팟, 팟, 팟, 팟! 하더니 팔꿈치로 딱! 어택 빡! 그러면서 ‘난 오늘만 산다’.”
“제가 스탭분한테 들은 건 영춘권을 촥! 스피드로 팍, 파파 팍! 칼 뺏어서 던져버리고 멱살을 싸악! ‘이 세상에 경기장을 두려워하는 선수는 없다. 오직 LKL을 존중하는 선수만 있을 뿐이다.’”
“캬아!”
“크아!”
“근데 무슨 칼이래?”
“일본도랬나?”
“내가 들은 건 롱소드.”
“설마, 자객의 발톱 정도는 됐겠죠.”
“그럼 권건 선수는 발분?”
두 사람은 한참 웃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절대 비밀로 하자. 흠흠, 마음속으로 우리 직장을 지켜주신 그 분께 감사나 합시다.”
“네.”
“그리고 동현님, 나 권건 선수 연락처 좀.”
“싫어요.”
#
반나절의 휴일.
원래라면 슬슬 휴일을 회수하는 시기였지만 팀은 고심 끝에 선수들에게 휴식 시간을 줬다.
리프레시, 그리고 전에 취소됐던 회식을 대신하기 위함이다.
반나절이라고는 해도 주요 일정인 오후 스크림을 전부 취소했으며 앞 타임 스크림을 잡아두지 않았던 날이기에 여유롭다.
선수들은 대회도 대회였지만 미묘하게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일찍 외출하기로 했다.
물론 ‘보호자’와 함께.
“얘들아. 오늘은 내가 못 따라가. 멀리 가지 말고. 더운데 오래 돌아다니거나 운동을 오래 하면 탈수 증상이 올 수 있으니까 내가 물병을 하나씩..”
“아휴! 박 감독님 할아버지세요? 김 코치님도 가잖아요! 그리고 우리 진짜 잠깐 나가는 건데!”
곽지운은 투덜거렸지만.
“걱정 마시죠. 감독님. 제가 물을 챙겼습니다.”
“역시 관리왕 은호. 네가 자랑스럽다. 항상 조심하고. 알았지?”
“저는 간식을 챙겼어요. 당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그래, 건강은 예성이지.”
박 감독에게는 한없이 듬직한 이인조가 있다.
“김예성. 니 홍삼 캔디 내가 다 없애버린다.”
“도형이 형. 이거 홍삼 캔디 아니야.”
“그럼 뭔데?”
“도라지 정과.”
“얘는 멀쩡하게 생겨서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김미드야. 흑마늘은 안 챙겨가냐?”
“아쉽지만 그건 다 떨어졌어.”
“까비.”
“미친놈들끼리 잘 만났네.. 블랙 갈릭의 저주 시벌 진짜.”
“도형이 형 또 패드립하냐?”
“이게 왜 패드립?”
“흑마늘 진액은 예성이네 어머니께서..”
“정말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몸이 건강해졌어요.”
“야. 윤도형. 니는 미미퐁인지 뭔지나 챙겨가.”
“나 미미퐁은 없는데. 걔는 1기 멤버가..”
“꺼져. 내 초콜릿이나 다시 사줘. 한정판으로.”
“아직도 그 얘기 함? 지독하다, 정말.”
권건은 그 모습을 보며.
여기에 자기 말고는 정상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