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리버 블로우
왕지우에게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아침, 아니 사회적인 시간으로는 점심이라고 해야 할까?
사옥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그랬다.
긴장 때문일까,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손도 대지 않던 아침 식사가 오늘따라 먹고 싶어서 식당에 갔는데.
분명히 삶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달걀은 날달걀이었고.
“에구머니나! 지우 학생! 그거 순두부찌개용인데!”
“아.. 괜찮아요..”
기껏 다시 씻고 커피나 한잔 하려고 했더니 커피 캡슐이 똑 떨어졌다.
“어이어이, 쭈. 마지막 커피는 내가 드링킹 해버렸다고? 창고에도 없다고?”
“꺼져. 진짜.”
배달이라도 시키려고 했더니 오늘따라 좋아하는 카페들은 전부 문을 닫고, 배달비가 지나치게 비싼 카페들만 남았다.
아, 이 돈이면 커피를 한 잔 더 사 먹을 수 있는데.
돈 아깝다.
내가 어떻게 번 건데.
게다가 시키기라도 하면 악귀 놈들이 달려와서 자기건 없냐고 찾아댈 게 뻔하다.
상상만 해도 지친다.
왕지우는 애꿎은 휴대폰 화면만 툭툭 치다가 주문을 포기했다.
“에이, 우리 팀 잘 나가는데 왜 또 텅텅 비었냐.”
미라쥬는 올해 확실히 치고 올라왔다.
그전에도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중상위권에서 상위권으로 치고 들어온 것은 영입된 선수들의 영향이 컸다.
다만 팀 운영 자체가 대기업 마인드는 아니라 생활에 다소 불편함이 있었다.
“거기 가서 요청해. 그게 제일 빨라.”
“어디?”
“뭐더라? 지원..팀? 예쁜 누나 있는 곳. 니 갈 거면 박스 과자도 좀 요청해주라.”
귀가 솔깃해서 내려간 경영 지원팀에 예쁜 누나는 없었다.
하필 오늘 연차란다.
대신 무서운 털보가 앉아있다.
투블럭 상투 머리를 하고 친 커튼 스타일로 수염을 기른 그는 선수들 사이에서는 ‘털보’라고 불리기는 했지만 사실 상당히 힙스터 스타일이었다.
구단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게임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특히 교육이나 재무팀에는 그런 인원이 더 많다.
털보는 게임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예, 헥사 선수.”
그리고 털보는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무섭다.
“무슨 일이시죠.”
말투도 딱딱하다.
왕지우는 선택적 외향형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온라인이나 방송, LOS를 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꽤 활발해 보이지만.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다소 기가 죽는 면이 있다.
털보는 너무 인싸같다.
클럽도 다닐 것 같은.. 다른 세상의 사람 같은 느낌.
랭크가 있는 LOS에서는 내가 천룡인이지만 이 사람에게는 필살기인 듀오도, 강의도 절대 안 통할거다.
“그.. 저.. 날.. 날달걀을 제가 싫어해요.”
그래서 말이 더 어벙하게 나온다.
“네. 그런데요?”
타닥타닥.
타자 소리가 들린다.
“아침에.. 아니.. 점심? 점심 식사? 아니..”
사무국은 바쁘다.
나에게는 지금이 잠에서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인데.
이들에게는 한창인 것 같다.
다들 무슨 일을 저렇게 하는 걸까?
LOS를 할 때의 키보드 소리는 저렇지 않다.
“아니, 그걸 그렇게 처리하시면.. 전에 분명히 단가 조율을..”
다른 사람의 짜증스러운 통화 소리가 들려온다.
털보는 그 방향을 향해 손을 높이 들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선수님. 계속 말씀해주세요. 듣고 있습니다.”
정중한 태도.
하지만 왕지우는 이곳이 진짜 ‘어른의 세계’ 같아서 황급히 얼굴을 비볐다.
전에 있는 팀에서는 자신이 이런 곳까지 내려올 일이 없었다.
제대로 된 매니저가 있었으니까.
“아니, 아니, 아니에요. 그.. 뭐더라.. 뭐더라.. 박스. 박스 과자. 박스 과자가 없어요.”
그러나 미라쥬는 방송에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매니저의 역할 역시 조금 더 협소한 편이었다.
이건 편하기도 했지만 불편하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대신 주문해드릴게요. 어서 올라가세요. 오늘 경기 있잖아요? 화이팅입니다.”
사실 이런 업무는 털보의 일이 아니었지만 왕지우는 그걸 몰랐다.
“네, 네. 네. 감사, 감사합니다.”
“매니저님은.. 하. 얘가 또..”
털보가 갑자기 이마를 짚는다.
왠지 화가 난 것 같아서 왕지우는 급히 일어났다.
“안녕히 계세요.”
고등학생 때 교무실에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던 것처럼 얌전히 인사를 한 왕지우는 다시 돌아와서야 알았다.
정작 캡슐 커피와 음료는 말도 못 꺼냈다는 것을.
그래.
아주 엉망진창.
오늘 일진만큼이나 경기도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상대 정글을 의식했고, 그다음에는 상대 서포터를 너무 의식했다.
우리 정글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긴 했지만 조금 쫄기도 했고.
결국 경기도 졌다.
스윕, 2 대 0.
무거운 발걸음으로 대기실로 돌아왔지만, 결자해지하고 오라는 이인혁의 말에 결국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우리는 미라쥬에게 7주차 두 번째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11승을 달성했다.
그래, 이 말은.
우리가 이번 서머 시즌에 최소 플레이오프를 확정했다는 뜻이다.
6위 이상.
말이 그렇지, 지금 기세로는 분명히 상위권에 랭크 될 것이며 월챔도 꿈이 아니다.
“얘들아! 얘들아!”
박 감독님이 허둥지둥 나온다.
얼마나 급히 뛰어나왔는지 복장도 엉망이다.
“얘들아아아아악! 으아, 예성이, 너 진짜 너무 잘해!”
“지운아! 지운아, 정말 고생 많았다! 여태까지 너무 고생했어!”
최수철, 김한빛 코치님도 눈시울을 붉히며 선수들을 안아준다.
“폴리퐁?”
“차니퐁..? 이 아니라 이 미친 새끼야! 너 나 들으라고 계속 퐁, 퐁 한 거지?”
“눈치 제법인 듯?”
“이 병신.. 병신.. 병신같은.. 존나 잘했어.. 차니퐁..”
윤도형은 이유찬을 꽉 안았다.
“어어.. 놀리려고 한 건데..”
이유찬은 꽤 당황한 것 같았지만 윤도형의 등을 토닥였다.
플레이오프가 뭐 그렇게 큰 의미가 있냐고?
글쎄, 플옵에 못가던 팀은 처음이라 나도 낯설긴 하다.
“권건! 사랑한다!”
윤도형은 나에게까지 달려들었다.
와, 덩치 좀 봐.
근데 설마 이 형.. 울고 있는 건가?
주포로 출전도 못 했는데?
나는 양 팔을 들어 어색한 항복 포즈를 취해 보였다.
거니퐁이 아닌 게 어디야.
“이제 들어가죠. 우승한 것도 아닌데. 미라쥬 선수들은 벌써 다 들어갔어요.”
여전히 팬들은 환호를 보내고 있다.
쏟아지는 박수.
이 현장감.
“그래, 그래! 일단 오늘은 회식이다!”
“끼얏호우!”
우리는 짧게 이 분위기를 만끽한 뒤, 남은 축하를 미뤄두고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 옆자리에서 마우스 선을 구기고 있던 이유찬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야, 거니.”
“왜 그래.”
“내가 뭘 좀 본 것 같은데.”
“뭘 봐?”
“LOS 파크 특별 시스템인가?”
“대체 뭐가?”
“되게 예쁜 여성분이 돌아다니지 않았냐? 경기 중에.”
“심판진?”
“아니? 그런 거 말고 하얀 원피스를 입은..”
우리 탑이 진짜 미쳐버린 건가?
귀신을 봐?
이유찬은 내 표정을 봤는지 더벅머리를 긁는다.
“아까 은호형 옆에..”
최은호의 옆에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 거니거니야. ]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있었는데.”
[ 알려줄 게 있어. ]
“지금은 없네?”
아니, 있어.
되게 예쁜 여성분은 아니고, 키가 작은 소녀지만.
이유찬 설마 너도 취향이?
“뭘 그렇게 봐?”
아니, 아니다.
얘는 동물밖에 모르는 놈이니까.
[ 듣고 있어? ]
“마우스 선 그렇게 구기면 단선된다.”
“오우야. 이거 케이블 뭐랬는데.”
정말 오랜만에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일단 아무렇지도 않은 손길로 이유찬의 마우스를 빼앗아 제대로 정리해준다.
“니가 잘못 봤겠지.”
[ 듣고 있냐구! ]
“그런가?”
우리가 가방을 다 챙기자 코치님이 등장해 냉큼 가방을 들고 가버린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 얼굴이다.
“난 또.”
평소에는 그렇게 잘 되던 사고 분할이 이루어지질 않는다.
대체 뭐지?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일 수 있는 거라고?
“라운드 걸인 줄 알았어.”
[ 응? 왜 엄한 기분이 들지? ]
릴리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더니.
“어억?”
이유찬이 뭐에 걸린 것처럼 비틀거린다.
“유찬아! 괜찮니?”
“조심해야지! 플.레.이.오.프에 나가실 귀한 몸인데. 그치, 수철아? 허허허.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렇죠! 크으하하하하하하핫!”
“우하하하학하, 하하하, 쿨럭!”
나는 천천히 돌아서서 정면의 팬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경기 중에는 말 걸지 않기로 했잖아.’
[ 지금은 경기 중 아니잖아. ]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돌아 인사한다.
‘그렇네. 근데 이유찬이..’
[ 미라쥬 서포터 은퇴할 것 같아. ]
이번에는 왼쪽.. 뭐?
[ 은퇴. ]
이건 넘겨듣기 어려운 말인데.
#
일단 무사히 관제층에 들어서니 선수 대기실이 있는 경기층으로 올라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부 엘리베이터에는 별도의 카드 인증 절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즌 말.
점점 더 정리해야 할 데이터와 노출 내용이 많아지는 시점이다.
경기 종료 직후 모두가 바쁘게 움직였다.
두 팀이 꽤 큰 시차로 복귀한 덕에 밀집되어있던 인원도 흩어졌다.
모두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틈을 타 화장실에 몸을 숨겼다가.
안희종과 함께 FWX 대기실 방향으로 가고 있는 왕지우를 발견했다.
그는 알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대기실과 대기실 사이는.
각 팀의 경호 사각지대다.
체력 단련을 한 선수들이 아니다.
랭크로는 하늘같이 높아 보였는데.
저 새낀 프로도 아니라는 생각하고 나니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려든다.
“뒤져, 씨발!”
꽉 쥔 손에는 작은 주머니칼이 들려있다.
목표는 마우스를 쥐는 오른팔.
“헥사 선수!”
아주 찰나였다.
누군가 왕지우와 안희종을 감싸 안고.
“아악!”
몸 좌측에서 강력한 태클이 들이닥친다.
남자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땡그랑!
칼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뭐, 뭐야, 썅..”
충격에 온몸이 얼얼하다.
“씨, 씨발, 씨발 새끼..”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남자는 매끈한 바닥을 휘저으며 기었다.
“용서, 용서 못 해..”
“어, 어어.. 어어..”
왕지우는 더 커지지 않을 것 같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헥사, 개 같은 새끼야.. 니가 그렇게 잘났어? 랭크가 다인 줄 알아?”
“어억, 어어어억.. 저..저..”
왕지우와 안희종을 감싸 안은 이는 재빨리 두 선수의 눈을 가렸다.
쫄아있는 꼴이 우습다.
남자는 허우적거리며 칼을 찾는다.
저것만 다시 들면.
저 새끼한테 진짜 현실이 뭔지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 뿌득
칼날을 밟고 있는 발이 보인다.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올라간 끝에 있는 것은..
“네 말이 맞아. 여긴 게임 속이 아니니까.”
역광 속에서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근데. 여긴 스포츠 경기장이잖아.”
FWX의.. 권건이다.
태클을 걸었던 것도 그였던 모양이다.
“선수는 선수로서, 팬은 팬으로서 예의를 지켜야지?”
발길질에 칼이 저 멀리 날아간다.
“허억, 허억, 넌 또 뭐야, 씹..”
열등감으로 꽉 찬 눈의 남자.
권건은 그 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전에 없었던 사건이다.
왕지우의 평소 행실 때문일까.
아니다.
내가 FWX에 온 나비 효과일까.
이것도 아니다.
인터넷에서 부추긴 다른 사람들 때문일까.
이것 역시, 아니다.
범죄자가 그렇게 한 이유를.
굳이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잘못은 오직 그에게 있다.
“이 악물어라.”
남자는 몸이 저절로 일어서는 것을 느꼈다.
“씨, 씨발.. 무슨 프로게이머가.. 힘이..”
“팬 서비스 들어간다.”
멱살을 잡힌 남자는 본능적으로 턱에 힘을 주고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충격이 온 것은 얼굴이 아니라 복부.
유사 리버 블로우다.
“어, 억, 억, 씨.. 씹.. 얼굴.. 이.. 악물..라..”
고통에 겨운 남자는 바닥을 뒹굴며 권건에게 항의하려고 했지만.
“건아! 건아! 헉, 헉.. 왜 뛰어가!”
“뭐야, 무슨 일이야! 뭐 하는 거야! 뭐야! 야! 저거! 여기요!”
그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이 사람에게는 랭크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신이 약자임을 느끼고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었다.
“아, 깜빡했다.”
권건은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툭, 발로 건드리며 뱉었다.
“넌 내 팬 아니었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이슈가 불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