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52화 (153/326)

152화. 다함께

마지막까지 경기의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기에 모두가 경기에 집중하는 이 순간.

어두운 복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미..쥬.. 씹.. 레기.. 거짓.. 인증..”

입은 작게 무언가 되뇌고 있다.

“실례드립니다. 이쪽 방향은 출입하시기가 어려우십니다. 화장실은 저쪽이세요.”

그는 잔뜩 긴장한 듯 이상한 말투를 쓰고 있는 스탭과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손에 쥔 휴대폰은 아직 화면이 꺼지지 않았다.

‘강약약강’, ‘칼 맞아도 싸다’, ‘개벌레’, ‘프로 실격’, ‘부고만 듣겠다’, ‘여포 인증’.

언뜻 보기에도 자극적인 말들이 나열되어있다.

“화장실을 찾으려던 게 아니라, PD님께 볼일이 있어서요.”

남자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길을 찾는데요.”

해당 층에서 선수 대기실이 연결되는 곳은 실제 경기가 이루어지는 경기장 내부의 통로와 사원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소수의 출입문뿐.

중앙 제어 센터와 송출실 등은 모두 아래층에 있으며, 선수들 역시 입장하는 팬들과 마주치지 않게 하기 위해 동선이 구분되어있다.

아래층으로 출입해 선수 대기실로 올라오는 형식이다.

그래서 귀가 시에도 별도의 출구로 나갈 수 있다.

이런 정보는 완전히 노출되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알기 어려운 것 또한 아니다.

“아. 아까 음향 쪽에서 오신다고 했던 엔지니어님..”

아직 신참인 스탭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압 조절이 잘되지 않는다고 했나?

오늘따라 쏟아진 해설진의 고음에 사운드가 찢어지는 현상이 있다고 했다.

리미터가.. 다이나믹이.. 뭐라고 한 것 같은데.

복잡한 내용이었기에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상한 부분은 느껴지지 않는 말끔한 말투와 차려입은 자켓.

종종 선수 대기실에 접근하려고 하는 팬들이 있지만 이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다소 젊어 보이긴 하지만, 미성년자도 아닌 것 같다.

이곳은 나이로 상대방의 직책을 짐작하기 어려운 곳.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실게요!”

“인과응보..”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방긋 웃어 보였다.

“은별님! 저 안내 좀 해드리고 오겠습니다!”

“아, 네! 빨리 복귀해주세요, 성준님! 경기 곧 종료됩니다!”

“혹시 어느 쪽이 이기고 있어요?”

“아시면서?”

“아..”

“성준님은 미라쥬 팬이었죠?”

“광팬이죠.”

두 스탭이 짧게 대화를 마무리하는 사이.

“랭크로.. 남을.. 그렇게 무시해놓고서, 씨발.. 또 져?”

남자는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었다.

“가실까요?”

“예.”

다시 봐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

때론 진짜 악의를 가진 사람이 더 평범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 초년생인 스탭은 알지 못했다.

임시 출입증 발급 요청까지만 돕고 와야지.

신입 스탭은 급히 발을 옮겼다.

실내가 춥기 때문일까?

자켓 주머니에 손을 깊이 찔러넣은 남자 역시 스탭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그 뒤를.

[ 인간의 악의는 정말 예측할 수가 없네. ]

한 사람이 더 쫓는다.

[ 인과응보는 그렇게 쓰는 말이 아니라고 배웠는데. ]

사람이라는 표현이 틀린 것 같기도 하다.

소녀는 보이지 않는 나비가 되어 나풀나풀 날아갔다.

#

LOS에서 중요한 포지션을 꼽으라고 하면 의견은 반드시 다섯 갈래로 나뉠 것이다.

조건을 추가해보면 어떨까.

누가 가장 많이 맞아 줄 수 있는가.

누가 가장 많이 돌아다니는가.

누가 가장 후반 캐리력이 강한가 등으로.

그래도 부족하다고?

그럼 공격형과 지원형으로 나누고.

또 한 번 AD, AP로 나눈다.

그 외에도 나눌 분류는 무수히 많다.

이 다이어그램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확실해지는 결론이 있다.

원거리 딜러, ADC.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원딜 포지션은 가장 강력한 딜러이자 후반 캐리를 담당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중요한 소양은 ‘성장과 생존’이다.

그래서 종종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원딜을 나눌 때 세 가지 종류로 나뉜다는 말이 꽤 유명하다.

주는 것도 받아내지 못하는 원딜.

팀원들이 만들어줬을 때 잘 받아먹는 원딜.

스스로 메이킹까지 가능한 원딜.

“참자. 마시멜로는 나중에 먹으면 더 많이 먹을 수 있어.”

곽지운이 중얼거린다.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까?

이미 경기에 몰입한 왕자님은 자동 응답기처럼 의견과 생각을 뱉어낸다.

높은 집중력.

나는 우리 원딜을 이 세 종류의 원딜에 넣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말의 시초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화자 역시 무조건 세가지로 나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LOS는 단어나 분류 몇 가지로 쉽게 정리되지 않아서 재미있는 거니까.

나와 최은호가 있을 때의 곽지운은 초반에는 생존에 크게 신경 쓰지 않으면서 온전히 성장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후반의 곽지운은 때로는 미끼 역할로 메이킹하는 훌륭한 포지셔너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는 충분히 잘 참아내는 판단력을 가진 선수다.

그래, 이 선수의 장점은 인내심.

“기다릴게.”

선명한 목소리.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겠지만, 나는 뭘 기다리겠다는 말인지 안다.

원딜이 안전하게 프리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앞 라인이 확실하고, 전열을 흐트러뜨리며 시선을 끌어주는 라이너나 챔피언이 있다면 좋다.

자신의 포지셔닝은 그다음 문제다.

그래서 나의 역할은 진영 붕괴.

숨을 크게 들이키고.

좌우의 적들을 밀쳐내며 도착한 그곳은 적진의 후방.

“뱌이의 점멸 궁극기! 지금 이거 타이밍 허를 찔렀어요?! 저까지 깜짝 놀랐습니다!"

- 화들짝 모먼트!

- 저거 돼?

- 건신 첫 급발진

- 적 밸류 좋아서 계속 길어지면 게임 이상해질 수 있음

적의 시선을 끈다.

"유찬!"

"곧!"

상대의 전열을 휘저으며 원딜이 공격을 할 수 있을 만한 각을 만들어야 한다.

전투 타이밍과 챔피언이 싸울 준비가 되는 타이밍.

이게 항상 맞아떨어질 수 있을 리 없다.

기회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잡지 않으면 지나갈 뿐이니까.

다만 이건.

원딜에게까지 기회가 가게 하기 위해.

팀원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거다.

"미라쥬, 집중력 좋습니다! 아직 미포가 포지션 잡기 쉽지 않거든요!"

나는 선뜻 그 시간을 버는 역할을 한다.

적진 가운데에서 아군과 다시 합류할 수 있을까?

그건 요원하다.

어그로 수치가 높은 나에게 큰 기술들이 쏟아지게 유도하며 희생하는 것이 최선.

"권건! 이거 빠져나갈 수 있나요! 대단원!"

"낄게!"

상황 판단을 마친 김예성이 함께 뛰어든다.

나보다 한 걸음 뒤에서 엄호가 시작된다.

빼앗아 온 대단원이 서로를 향해 엇갈린다.

난전.

"탑, 나, 졔리 쪽! 사이언 봐!"

금속음.

강력한 전기장의 소리.

얼어붙은 대지와 내 어깨에 부딪히는 기둥.

“이거 너무 깊은 거 아니에요?!”

지나치게 많은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게 되면.

숨이 멎어버릴 듯한 고요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귀가 먼저 죽음을 아는 거다.

이런 것도 사플이라고 부르면 될까.

“권건에게 순식간에 딜 집중! 미라쥬, 집중력 아직 살아있어요! 지금 권건 점멸 없거든요!”

이곳은 사지.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많았다.

“이유찬, 맡긴다!”

물속에 들어온 듯 귀가 점점 먹먹해진다.

다리는 젖은 솜처럼 무겁다.

멀리서 냉병기의 마찰음이 들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과도한 힘을 분출해 무수한 적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걸어 나간다.

복수라도 하는 양 쏟아지는 적의 집요한 공격.

부서져 가는 양손의 건틀릿.

앞으로, 앞으로 한 걸음씩 옮긴다.

쓰러지더라도 최대한 아군에게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한다.

등 뒤에서 지축을 울리는 시동 소리가 들린다.

멈출 수 없는 맹공.

가속 페달과 함께 다가온 마지막 순간.

하지만 상관없다.

이미 내가 정한 미션은 성공했으니까.

뒷 일은 아군에게 달렸다.

소리가 계속 멀어진다.

“유찬!”

내가 부른 게 아니다.

“지금이야, 탑!”

째깍.

고요를 뚫고 들리는 소리.

마치 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허공을 가로지르며 난사되는 적들의 광원.

여기까지라는 판단을 내린 순간.

“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니!”

비가 그쳤나?

어둠을 느끼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그림자가 가득하다.

“완벽한 변신 타이밍!”

불을 뿜는 용이, 날고 있다.

“사이언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아아아아악!”

“이거 권건이 시선 끄는 사이 차니가 순간적으로 완전 노마크가 됐죠?!”

째깍.

어느 순간.

폭우처럼 느껴지던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몸이 뜬다.

내 눈앞에는 거대한 날개의 피막이 있다.

용은 적의 앞길을 가로막고 뒤로는 불기둥을 피워올린다.

“라온, 라온, 라온!”

나와 바톤 터치한 해방된 자가 쇠사슬을 휘두르며 적들의 발목을 묶는 찰나.

“클래스? 클래스! 클래스, 클래스!"

살짝 마지막 욕심을 낸 상대에게.

“으아아아아아아! 바론, 바론, 바론 스틸 시도마저 실패! 클래스의 봉! 풀! 주! 강타아아아아악! 오늘 FWX 서포터 다 왜 이래요? 미쳤어요? 진짜 왜 이러는 거예요! 이렇게 욕심이 많이 부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시간 수호자의 한없이 느린 손짓이 완벽하게 턴을 빼앗아.

"이거, 이거, 이거, 제가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폭탄 각!”

“포보스 선정! LOS에서! 최고 사기 챔피언! 광역! 광역 CC!”

시간을 멈춘다.

“이거, 이거, 이거어어어어억!”

째깍.

나의 시간 또한.

“지금.. 지금이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라아아아아아아악! 세에에에에자! 쌍권총 난사아아아아아악!”

“아니, 아니? 앞으로 들어가요? 앞으로 들어가요, 세자? 막 들어가요? 이제 눈에 보이는 거 없어요! 이거 완전히 일망타진! 정신 못 차려요, 미라쥬! 이거 완전히! 완전히 터집니다! 지금 이거! 그냥 총알이 아니에요! 바로! 이! 타이밍까지 참고 참아온! B!F!G! 입니다!”

째깍.

돌아간다.

“바이오! 포스! 건! 말씀이시죠!”

시간 역행.

떠올랐던 몸이 다시 내려오며, 두 다리로 일어선다.

나에게 다시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을 느낀다.

“궈어어어어언건! 부활! 이거, 살아났어요! 살렸어요! 클래스! 이거 타이밍 맞추기 굉장히 어려운 거거든요! 안 죽어요! 안 죽었어요, 권건!”

“부활한, 정글! 나, 강림!”

“그는 신인가?”

순식간에 멀어졌던 청력이 되돌아온다.

아니, 어쩌면 멀어졌다고 느낀 건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지금 FWX, 아무도 사망자 없습니다! 이거 미라쥬 절망적이에요! 바론도, 킬도,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어요! 미라쥬!”

"더 센티넬! 이것은 마치 아무도! 죽지 않은! 밤의! 기사단! F-W-X!"

이건 예상 밖이다.

“내 판단에.”

어느덧 쏟아지던 스킬의 비는 그쳤고.

“여유가 있어서 살려봤어.”

나를 위한 작은 우산을 들고 웃고 있는 우리 서포터가 보인다.

옆에는 이제야 본모습을 되찾은 용이.

그 옆에는 완벽에 가까운 플레이로 자신의 상처를 모두 회복해낸 해방자가.

그리고 그 옆에는, 게임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성장하고 싶어 하는 선장님이 있다.

모두가 조금씩 모은 기회는 나에게 한 번 더 주어진 기회가 됐다.

나는 링 위에서 홀로 싸우는 복서가 아니었다.

최선.

내가 뭐가 최선이라고 했더라?

스킬을 빼고 나 혼자 죽는 것?

어쩐지 코끝이 아리다.

감기인가?

불쾌하지 않은 회귀.

오랜만에 예측이 틀렸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우리는.”

입을 뗀다.

“차니차니퐁.”

“듣고 있어.”

“우리는?”

“우리는?”

다 함께 진격.

적 넥서스 앞으로.

“갑니다.”

“어딜?”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유쾌한 웃음이 터진다.

“FWX! FWX!”

“오늘 정말 마지막 한타 미쳤어요! 이 경기력, 이게 진짜 완전체의 FWX의 모습! 이 선수들이 이렇게까지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들인 줄 여태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위대한 탄생! 여기서, 다시 한번! 거의 반 십년 만에!”

“김미드, 우리 이거 보이스 나가?”

“이기면 매번 나가.”

“그럼 뭐 특별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런가? 탑, 이상한 말 하면 안..”

“엄마! 아빠! 사랑해!”

“지운이 형..?”

“할머니! 건강하세요!”

“은호 형까지..?”

“경기 끝내죠. 어차피 앞으로 말할 기회 많을 텐데.”

“역시 건이..”

“난 할 건데? TOP GAP.”

“얘 완전 미친 사람 아니야?”

“예성이는 하고 싶은 말 없어?”

“나..? 나는..”

나는 어느새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었다.

“역시.. 우정권?”

아니, 팀원들은 모두 함께 웃고 있었다.

“드디어 FWX가 플레이! 오프! 진출을! 확정 지으면서!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갑니다! 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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