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순한 맛
권건은 호넷 전 승리 인터뷰에서 ‘월챔 진출’을 예고했다.
사실 진짜 FWX의 예언자는 권건이다.
권건은 말이 그리 많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입을 열고 어떤 말을 하면, 항상 그것이 진짜가 된다.
이걸 예언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FWX의 박진현 감독은 자신이 말한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예언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집중을 깬 것은 최수철이다.
“형님.”
“어, 수철아.”
최수철 코치는 박 감독 앞에 커피를 내려놨다.
늘 마시는 사옥 커피가 아니라 바깥에서 사 온 사제 커피다.
“잠깐 쉬시죠. 힘들지도 않으세요?”
박 감독의 지시로 선수들 앞에서는 최대한 서로에게 감독, 코치 호칭을 사용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조금 편하게 대화한다.
“그래도 해야지. 시즌과 시험 기간이 겹칠 때도 있으니까, 미리..”
박 감독은 자신의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슬쩍 엿본 제목은 ‘스포츠 경영 관리’.
“와.. 진짜 형님은.”
최 코치는 고개를 내저었다.
박 감독은 리그 초기의 프로다.
그 당시 밸류가 아주 높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미드로 데뷔하고 2년 후 서포터로 전향하면서 오랜 기간 선수 활동을 했고, 지금은 감독직까지 오른 사람.
최 코치 역시 프로 출신이다.
인게임에 관한 부분을 연구하는 역할.
그래서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의 LOS는 박 감독이 활동하던 때와 매우 다르다.
게임이 경천동지할 정도로 변해서.
그때의 지식과 전략은 틀만 남은 것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박 감독은 연구를 이어 나가면서도 경기에 관한 내용에서 최수철의 의견을 크게 존중했다.
멘탈에 관한 부분은 다른 코치인 김한빛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공부 안 지겨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명의 전문가에게 맡겨두지만은 않는다.
결국 결정권자는 감독.
박 감독은 팀을 총괄하기 위해 노력했다.
메타나 새로운 전략에 관한 공부는 물론, 프로로 활동한 시간 사이 놓쳐버린 학업을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계속해서 이어 나간다.
“그래도 해야지.”
알아야 할 지식이 끝이 없다.
지도자로서 알아야 할 것들.
스포츠 대중화를 위한 것들.
각 선수에 맞는 건강 관리 방법.
심지어 선수들의 늦은 사춘기에 대응하기 위한 심리 공부까지 빼놓지 않는다.
“참. 정말이지.”
최 코치는 박 감독을 보며 뭐가 됐어도 됐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휴식 시간에도 공부하는 미친 사람이 어딨어?
권건이 게임 속의 시간을 쪼개서 쓴다면.
박 감독은 현실의 시간을 쪼개서 쓴다.
감독도 미쳤다.
“그래도 여태까지 공부해 둔 게 쓸모없지는 않아. 이제는.”
박 감독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예전에는 책상머리 감독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까.
프로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독직에 앉을 수 있었던 세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팀 성적, 그러니까 감독의 포트폴리오가 따라와야 하는 문제.
그래서 박 감독은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현실은 달랐다.
“다행이에요.”
최 코치는 툭 던졌다.
그의 첫 감독은 박 감독이 아니다.
그래서 박 감독이 꽤 괜찮은 지도자라는 것도 알았다.
변한 것은 게임만이 아니다.
선수들의 생활 환경이나 제도 개선도 많았다.
선수의 권리와 사회 인식 역시 그렇다.
그런 면에서 박 감독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결정은 무겁게, 사고방식은 유연하게.
“형님이 잘리기 전에 건이가 들어와서.”
“그래. 맞다. 아슬아슬했거든. 사실 지금도 모른다. 남은 시즌도 잘 풀려야 할 텐데. 하하하!”
감독도 선수를 잘 만나야 한다.
흔히 감독의 능력이 화젯거리가 되지만.
감독들 역시 자신과 맞는 선수를 만나야만 날개를 펼칠 수 있다.
박 감독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는 이제야 최 코치가 가져온 커피에 손을 댔다.
“어, 앗 뜨거.”
“조금 식혀서 드세요.”
컵 뚜껑을 여니 진한 향기가 쏟아져나온다.
“한여름에 웬 뜨거운 커피야?”
“이게 바리스타가 직접 내린 거라서요. 방금 눈앞에서 받아온 거예요.”
“그렇게 말하니까 좀 다르게 느껴지네.”
“네. 분위기 좋더라고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 속 조금의 틈.
그리고 평소와 다른 커피.
뜨거운 커피를 입에 대자.
“어, 야. 좋다. 이거.”
귀 뒤로 에어컨 바람이 살랑살랑 스친다.
“내가 커피는 잘 모르는데. 이거..”
노곤한 정신을 깨우는 것은 카페인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향기에 대한 후각 반응, 그리고 상대적으로 강하게 느껴지는 바람의 냉기였다.
“아예 냄새부터 다르네.”
“그런가요? 역시 비싸서 그런가?”
최 코치는 어깨를 으쓱했지만.
“그렇구나. 음. 오감 훈련. 새로운 향기, 낯선 촉감.. 감각을.. 깨우는. 선수들에게도..”
잠시 박 감독이 노트에 무언가 적고 있는 것을 바라보던 최 코치는 어깨를 으쓱했다.
또 저런다.
온종일 선수, 선수, 선수 생각뿐.
“한빛이는?”
“한빛 형님은 지금 은호한테요.”
“좋아. 이따가 한빛이 좀 불러줘.”
“이따가요?”
“응. 지금 너는 나랑 얘기 좀 하자. 거시적으로 봤을 때..”
“형님, 지금 간신히 쉴 수 있는 시간인데.”
“그럴 시간이 어딨어. 일단 앉아.”
최 코치는 박 감독의 손에 붙잡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한빛 형님 커피인데..”
“그냥 이따가 아이스로 만들어서 줘. 시원하고 좋겠네.”
필사적인 변명도 먹히지 않았다.
“아니.. 향기가..”
“그래서 다음 경기에는..”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만 좋은 감독인 것 같았다.
#
“안녕하세요.”
나는 방송을 켰다.
오랜만이다.
- 찌세(zzise_332) 님이 1,735명의 시청자를 보냈습니다
부쩍 수가 늘어난 전입 신고.
- 으아아아ㅏㅏㅏㅏ
- 우효wwwwwwwwww 히사시부리!!!!!!!!!!!
- 형! 형! 형! 형! 형!
- 왜 이제 온 거야? 왜 이제 온 거야? 왜 이제 온 거야?
- 왜 잘생겼어? 왜 잘생겼어? 왜 잘생겼어?
나는 큐를 돌리고, 느긋하게 스트레칭했다.
최근에 최은호를 보다 보니 새삼 건강 관리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어서.
요즘에는 운동 후에 요가 시퀀스를 추가했다.
사실 근육을 단련한 뒤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은 그 이후의 일정에 도움이 많이 된다.
워낙 앉아있는 시간이 기니까.
- 오늘은 움직이고 있어!!!!!!!!!
- 움직임 존나 커 내가 본 것 중에 제일 큼
- 지진 나는 줄 알았네 ㅆㅂㅜㅠㅜㅠㅜㅠㅠㅠㅠㅜ
슬슬 알림을 본 사람들도 들어온다.
채팅에 가속도가 붙는다.
잠시 안정되기를 기다릴 겸.
나는 방금 잡힌 큐에서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게임이 끝났을 무렵, 생각대로 채팅방은 어느 정도 균형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나는 오랜 시간 방송을 한 적이 있다.
원하는 팀을 찾지 못하고.
이번에는 될 줄 알았지만 뜻밖의 대진으로 나가떨어진 뒤 강한 번아웃이 왔을 때.
우승까지의 무게감을 버텨내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 방송을 잠시의 일탈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러분과.”
그래서 이 ‘방송’이라는 것을.
솔직히 꽤 잘 알고 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 계.탔.다
- inver기자입니다, 권건 선수 이번 경기 후 인터뷰에서..
- 인터뷰는 시간을 따로 따시구여ㅋㅋㅋㅋ
- 오늘 그냥 게임 하지 마요 제발
- 다른 프로한테 권건 뺏기는 거 지.긋.지.긋.해
사실은 제법 경계하기도 했다.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사람 마음이란 게 참 무섭더라.
처음에는 ‘소통’을 빙자하며 시작했던 방송은.
어느 순간 ‘돈과 명예’에 휘둘리게 된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돈은 보지 않았다는 사실일까.
내가 대단한 금수저이거나 청빈한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정해져 있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특정 시점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벌면 뭐 해?
당장 어느 정도 쓸 수는 있겠지만 방송을 키워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정산 수익이 안정화될 때쯤엔 어차피 초기화될걸.
돈이라는 것을 제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게이머로서는 최고의 장점인 승부욕이란 놈이 나를 집어삼켰다.
- 와 채팅 미친 너무 빨리 올라가
- 몇 명이 보고 있는거임 대체
- 맨날 방송하면 시청자 1위 그냥 찍을 듯
- 걍 노방종하면 좋겠음ㅠㅠㅠㅠ
나는 갖은 항목에서 1위를 하지 못하는 것을 참지 못했고.
금전적 의미는 없더라도 시청자들이 쏴주는 액수에서 나의 가치를 느꼈다.
그리고 결국 플랫폼의 프로모션, 이벤트까지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LOS도 끝없는 달리기지만.
최소한 한 판이 끝나면 승패가 나오고, 랭킹은 1위와 유지라는 세이브 포인트가 존재한다.
LOS라는 ‘판’이 정해져 있는 거니까.
하지만 방송은 그렇지 않았다.
방송에는 LOS만 있는 게 아니다.
먹방, 토크, 음악, 크리에이트.
심지어 다른 게임까지.
다양한 장르가 동시에 경쟁하는 곳.
- 형형 첫사랑 이야기해주세요
- 권건 선수도 예언 한번 ㄱ
- 오늘은 이 게임 어떰? 선물해드림
- 혹시 먹방은 안 하시나요
- 아직 시즌 중인데 너무 괴롭히지 마셈; 근데 노래 잘해요?
- 왠지 요리도 잘할 것 같지 않음??
- 패션 콘텐츠 한번 해주세요 제발
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잡아먹히고 마는 욕망의 항아리.
그게 방송 판.
승부욕을 줄이는 것은 어쩌면 내가 타고나지 못한 재능.
그래서 나는 초심을 잃지 않고 활동하는 스트리머들을 존중한다.
- 내가 형이었으면 그냥 방송만 하고 돈 벌어서 먹고 살았을 것 같은데
- ㄹㅇ 프로게이머보다 잘 벌듯
- 그냥 카메라 켜고 숨만 쉬어도 돈 들어올걸
- 인생 편하겠다
나는 그냥 웃었다.
오늘, 방송을 켜기 직전.
“편하게 해.”
박진현 감독님은 나에게 짧은 말을 했다.
“방송 자체에 부담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들다면 언제든지 꺼도 좋아. 지금 너는 프로게이머지, 프로 방송인이 아니니까. 다만 팬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면 되는 거야.”
그 말은 나에게 꽤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겐 나의 어떤 면이 대단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이제서야 막 마음의 문을 여는 단계의 미숙한 사람일 뿐이니까.
“이 정도가 좋습니다.”
- 쓸쓸한 웃음.. 이건 귀하군요?
- 형은 왜 욕심이 없어? 혹시 사람 아니야? 그럴 줄 알았어
- 존나 해탈한 사람 같은데
- hoxy 다른 애들이 괴롭혀???? 폴리 그 새끼지? 인상부터 알아봤다 내가
- 우리 도형이가 설마 ㅠㅠㅠㅠ 바로 손절한다 폴리 해명해
- 걍 이 새끼 팬서비스 정신이 부족한 거 아님? 팬 없으면 프로게이머가 뭔 의미라고
- 삐빅 강퇴 좀
조금 철이 없던 시절의 나는, 오직 내가 게임을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모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송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나는, 내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각각의 키워드에 불과하다.
냉정하게 말해.
그저 한 게임을 잘하는 것만으로 크게 성공하기는 힘들다.
얼굴이 잘생기기만 해도 마찬가지.
적당한 위트와 매너.
다른 매력을 파생시킬 수 있을 만한 방점 등.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 할 만한 요소와 의외성 있는 약점이 충분히 주어져야만 문장이 생겨난다.
예를 들어 반응 속도가 뛰어나 어느 게임에서나 쉽게 1위를 찍지만, 멘트는 어눌한 미남 스트리머.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 처음 하는 게임이라도 순식간에 적응하지만, 피지컬이 시청자보다 떨어져 웃음을 선사하는 스트리머.
“제가 말주변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서.”
그러니까 ‘적당한 약점’이 있는 캐릭터를 잡아야 한다.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는 게 어렵거든요. 그래서 게임만 하는 거죠.”
- 아니야 형 형 말 존나 잘해 제발 아무 말이나 해도 잘하는 것 같아
- 말은 하지마 우리가 다 할 게
- 시발 그건 아니지 말은 해줘 근데 그냥 가나다라마바사 한 번만 해줘 TTS라도 만들게
- 좋은 생각이다
- ㄹㅇ AI
시청자들에게 ‘나는 이 스트리머가 이러이러한 점에서 괜찮아서 좋아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서사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좋은 방송인.
그리고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길.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웃는 것 좀 봐 시발렐루야
- 게임만 하다가 말하니까 새롭네
- 내가 남캠 저스트 채팅을 보고 있을 줄은
- 매일~~~~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요~~~
- 이러면 방송을 매일 보는 수밖에 없다
- 알림 설정 필수
- 언제 또 묵언 수행 들어갈지 모릅니다
뭐, 어쨌든.
나는 경계를 명확하게 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은 LOS에서 최고가 되는 것뿐이다.
언젠가 먼 미래에는 다른 욕심을 내 볼 수도 있겠지만.
당장 할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것은 나 자신의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 후원 아직도 안 받아요????
- 나 영도하고 싶은데
-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 제발
- 채팅 너무 빨라서 못 보고 있는 거 아님?
“여러분의 말은 모두 다 보고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스트리머가 아니라.
FWX의 일원이니까.
“여기서는 경쟁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저 우리끼리 했다면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임일 뿐인 이 스포츠를 문화로 바꿔준 사람들.
그리고 이 팀을 응원해주는 것에 감사를 전하는 시간.
“그저 편하게 즐기다 가시면 좋겠습니다.”
- 아ㅋㅋㅋ 힐링 지렸고
- 자연의 소리..
- 말을 왤캐 곱게 해? 트래쉬 토크랑 딴판이야
- 이것이 [갭 모에].. 팬에게는 다정한 남자..
- 너, 내 최애가 돼라.
- 권건 좀 짠하네.. 내 마음에 짠
- 야 미라쥬 애들도 방송한다
나에게 여태까지 방송이란, 편방향적인 소통 창구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조금.
익명의 팬들이 친구같이 느껴진다.
“자, 그럼.”
뭐 어쨌든.
“다른 방에 침투해볼까요?”
평화는 내 영토로 족하고.
이제 침략전이다.
웬 침략이냐고?
다른 LOS 팀 방송을 FWX가 이기는 것 정도는 욕심낼 수 있잖아?
상호 방송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