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20화 (121/326)

120화. 운수 좋은 날

최은호는 컨디션이 좋은 것 같았다.

이 주의 운세가 아주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번 주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라니.

거기다 이번 주 일정은 트릭스터와 피닉스.

트릭스터는 강적인 만큼 활약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피닉스는 이야기가 다르다.

FWX도 잠깐 주춤했던 시기가 있지만 피닉스도 모든 팀에게 희망을 주는 팀.

사실 최은호는 강팀을 상대하는 것보다 약팀을 상대하는 게 더 좋다.

그거야 당연하지.

RPG 게임처럼 강적을 이긴다고 추가 포인트를 주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같은 1승인데.

상대를 압살하는 게 더 신나고 좋은 거 아니야?

어차피 상위권 싸움이나 플옵과는 거리가 멀었던 최은호의 생각이다.

“트릭스터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전에 정리해온 정보를 토대로..”

“일단 주도권을 절반 이상 잡아 오는 게 중요해. 오늘 컨디션 어때?”

“전 괜찮아요.”

곽지운이 가볍게 대답했다.

“상대 원딜 수호가 아무래도 리스크 있으면서 화력 있는 픽으로 가려고 할 가능성이 높거든요.”

“그렇지. 고구미 선수라면.. 어쩌면 굉장히 자극적인 원딜을 고를 수도 있지.”

“네. 그래서 저희도 너무 수동적인 픽하면 온종일 맞다가 끝날 수도 있어요.”

“그래, 지운아. 고마워.”

박진현 감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 컨디션 어때?”

원딜과 감독의 시선이 서포터에게 꽂힌다.

최은호는 왠지 평소와 좀 다른 느낌을 받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런 시선과 함께 들어오는 질문은 왠지 함정인 경우가 많다.

조별 과제라던가 협업에서.

괜히 내가 잘할 자신이 있다거나 전문 분야라고 말했다가 눈탱이를 맞을 수도 있는 것처럼.

최은호는 그런 부분을 부담스러워하는 타입이다.

“어..”

최은호는 사실 순수 연습 시간으로 보면 전체 평균보다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연습량을 부쩍 늘렸다.

물론 연습 시간이 실력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동료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오늘 왠지 좋아요. 잘 할 수 있어요!”

많은 연습량과 기분 좋았던 이번 주의 운세가 더해지면 어딘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는다.

“그래? 알겠어.”

박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세는 이유찬이 더 좋게 나오기는 했지만.

어차피 같은 팀인데, 뭐.

“유찬아.”

“예?”

“너 왠지 집 되게 부자일 것 같다.”

“저희 집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관심이 없어서?”

“네.”

긴장을 덜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진다.

최은호 생각에.

아마도 이유찬은 타고난 팔자가 좋을 것 같다.

어쩌면 프로게이머를 하지 않았어도 잘 살 것 같은 그런 느낌?

대부분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뻔뻔한 면이 있으며.

남들과 다르게 사는 느낌.

설마 세대 차이는 아니겠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그리고 왠지 건이도, 예성이도..”

최은호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곽지운에 대해서는 잘 안다.

곽지운은 말 그대로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

최은호가 아주 어렸을 적, 그의 집은 아주 어려웠다.

지금은 최은호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돈을 벌면서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사실 그건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형 덕분이다.

형은 정말 잘난 사람.

형이 없었다면, 그가 여기에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은호는 아직도 친형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생각보다는 돈을 잘 벌고.

매체에도 놀라운 연봉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있곤 하지만.

그건 정말 탑 티어 선수와 서부 팀의 이야기.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부분에서 제도적 개선이 있었고, FWX는 선수들의 연봉에 그렇게 인색한 편은 아니지만.

평가에 따라 연봉은 매우 다르고 평균 수명 또한 굉장히 짧다.

직업의 지속성에 대해 걱정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해외로 일찍 나가봤으면 좀 나았을까?

팀 이적을 덜 하는 게 나았을까?

아니면 내 재능과 열정이 부족한 걸까?

군대는 어떻게 하지?

은퇴하고 나면 방송을 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이미 시장은 포화 상태던데..

다른 일을 찾아봐야 하나..

애매한 최은호는 이것이 프로게이머 계에서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아마 대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기 마련.

별들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나.

“어쨌든 오늘 트릭스터 이기면 진짜 우리 1등 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형님, 제가 오드 선수 부셔버립니다.”

이유찬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오드 선수를? 니가?”

“예에. 가능. 형님, 케비 선수 박살 가능?”

“가능.”

“그럼 은호 형님, ‘가능’으로 이행시! ‘가’!”

“가.. 가.. 가지마, 얘들아?!”

“‘능’!”

“능.. 능력 키워올게.”

“이거 자신감 맞아요?”

황당함에 주변에서 웃음이 터진다.

“아니, 왜 갑자기 이런 걸 시키냐고..”

최은호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자기도 모르게 조금 튀어나온 속마음.

미래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일찍 금전 감각을 기른 최은호로서는 앞날이 창창해 보이는 이유찬에게 사소한 부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미안함이 존재한다.

권건과 이유찬.

두 사람은 사실상 신인으로 콜업되었기에 아마 자신보다 연봉이 낮을 것이다.

지금 활약하고 있는 FWX가 얼마나 저가의 팀인지.

참 놀랍고, 또 민망하다.

하지만 당장 이번 시즌이 끝난 뒤.

FWX가 인력 충원으로 더 높은 곳을 노린다면?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계약은 올해까지니까.

권건이 모든 오더를 맡아주는 상황이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서포터라는 포지션도 티 나게 활약하기 쉽지 않아서.

내 역할을 잃었을까, 남들에게 나쁘게 보일까 두렵다.

“내가 오늘 꼭 보여줄게.”

그러니까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

“거니! ‘가’!”

어느새 이유찬은 권건 곁에서 이행시 운을 띄우고 있었다.

“가자.”

“오오, ‘능’!”

“FWX.”

권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와우.. 이행시 개잘하네.”

“역시 건이.”

“?”

#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밴픽이 완료됩니다!”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지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명언이더라고.

인간관계에서의 괴로움도, 뜻밖에 벌어진 사고도.

일단 몸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어느 정도 잊혀지기 마련이다.

“오늘 FWX와 트릭스터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있는, 아주 시간이 꽉 찬 밴픽이었어요!”

“두 팀이 서로를 아주 잘 알거든요!”

- 새로운 단짝 팀ㅋㅋㅋㅋ

- 예전에는 FWX랑 엮으면 존나 빡쳤을텐데ㅋㅋㅋㅋㅋ

- 서로 호감팀 ㄹㅇ

- 자강두천ㄷㄷㄷ

- 지옥에서 올라온 FWXㄷㄷㄷ

운동은 머릿속을 끊임없이 떠도는 상념들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내가 운동을 선택한 것처럼, 모든 사람은 의지하는 곳이 있다.

그 수단에 귀천은 없다고 생각한다.

과한 음주나 도박처럼 삶에 악영향을 주는 정도만 아니라면.

“상대 정글이 바텀 동선. 주의하세요.”

“당길까?”

곽지운이 짧게 물었다.

“잠깐!”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 전, 최은호가 낚아챈다.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

항상 순위라고 따라붙는 팀 앞의 숫자에 약했던 최은호다.

어쩌면 최근, 득실 차로 우리가 트릭스터보다 딱 한 걸음 앞서기 때문일까.

오.

그렇게 생각하면 ‘약팀에게 강한’ 속성을 가진, 현 1위 팀의 최은호는 무적이라는 뜻?

나쁘지 않은데?

“이거, 내가 한 번 빨아들여 볼게! 보자!”

로칸을 잡은 최은호가 오랜만에 큰 소리를 낸다.

“초반 타이밍! 트릭스터 정글 무사 선수가 바텀을 노려보는데! FWX, 이 사실을 알고 있긴 합니다! 와드로 아까 위쪽에서 확인은 했거든요!”

최근의 바텀 플레이는 정글의 우위를 바탕으로 정보전을 펼치는 식이다.

육탄전을 통해 얻는 이득은 항상 리스크를 수반하지만.

수행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좋다.

“먼저 우리 욕심쟁이 원딜한테 대포 싸악 넣어주고?”

작은 디테일을 챙기는 섬세한 서포터.

“이렇게, 아이고! 죽는다 죽는다 죽는.. 척! 하면서?”

그리고 방송을 하는 것처럼 여유만만한 말투.

“마지막 틱에 플 교환해주고? 살아버리기.”

“와우.”

상대 정글의 스펠까지 빼는 과감함과 좋은 움직임.

내가 시동을 걸기도 전에.

바텀에서 좋은 경기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우! FWX! 훌륭하게 스킬 피하면서 갱을 흘려냅니다!”

“클래스 선수의 로칸이 살짝 다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면서 상당히 많은 스펠을 소모시킵니다! 이거, 플레이 굉장히 깔끔한데요!”

“진짜, 그냥 한바탕 춤을 췄어요! 뭐예요? 클래스, 오늘 컨디션 굉장히 좋은데요! 집중력이 살아있습니다!”

“오늘 이 선수 정말 화려하게 등장했어요!”

- 오늘 따갚스가 웬일? 자리 바꿨어?

- 하긴 얘도 잘할 때 됐어ㅋㅋㅋㅋ

- FWX 까라가 있지ㅋㅋㅋ

- 개같이 부활

- 진짜 오랜만에 주사위 6 떳냐ㅋㅋㅋㅋ

만만치 않은 상대에게 합리적인 플레이.

“뭐야! 은호 형님 최고!”

“아하핫.”

우리들의 칭찬에 확신이 든 건지.

“어어어어? 이거 정말 완벽한 시간 쪼개기입니다?”

“이거, 클래스 선수! 클래스 선수의 미드 로밍! 정말 감쪽같은 타이밍인데요? 상대는 클래스 선수가 귀환한 줄 아는 것 같은데요!”

점점 더 최은호는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이제! 예성이한테까지 선한 영향력 행사하고?”

아주 과거.

지금에는 전설로만 전해지는, 서포터의 개념이 없고 ‘로머’가 있던 시절.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좋은 역할을 해내면서.

“바로 킬까지 따버리기! 너무 달죠?”

“은호 형, 나이스.”

“미드에서! FWX가 서포터의 로밍으로 선취점을 얻습니다!”

- 깔끔하게 땄다ㅋㅋㅋ

- 우리 클래스 오늘 동선 아주 포스트-클래스야?

- 탈 최은호의 시대ㅋㅋㅋㅋㅋㅋ

- 이런 서폿이 퍼블 먹는 건 인정이지

- 오늘 살아있는 로칸 그 잡채

- 자기 닮은 거 잘하는 게 국룰임ㅋㅋㅋㅋ

- 그래서 지난 시즌에 고양이 마스터였음?ㅋㅋㅋ

“그게 바로 나. 최은호의 클래스다.”

“오늘 클래스 선수! 아니, 감각 대체 뭔가요? 이거 진짜 오늘 해체주의적 동선이거든요! 클-디 워홀 스타일! 저기에 있는지 상상이나 했겠어요? 트릭스터의 퓨처 선수도 굉장히 노련한 선수인데요! 그만큼 감쪽같이 속았다는 겁니다! 방금 완전 시간의 마술사였거든요! 나노 마이크로 플랜 맨!”

“그렇죠! 지금 아주 긍정적인 의미에서 FWX가 균형 있는 플레이를 해주고 있어요!”

“이러면 이거, 이제, FWX가 이게, 약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매애애애애앤날! FWX의 바텀에는 뭔가 있다, 뭔가 있다, 힘이 아주 장사다! 이런 말은 했었는데 클래스 선수가 뭘 보여준 적은 별로 없었거든요! 이거, 느껴집니다.”

“뭐가 느껴지나요!”

“고요한 폭발이 있었습니다. 이게 아무리 소리가 안 난다고 해도, 냄새는 나기 마련이거든요. 분명히 뭔가 터졌습니다. 아주 조요오옹하게! 지금 바텀에서, 아니, 서포터에게서 뭔가 만들어졌다는 게 느껴지거든요? 다음 턴까지 쭉 FWX에게 이어집니다. 정글러가 턴을 쓴 게 아니잖아요!”

“뭔가 더러운 표현인 것 같은데요.”

- 사람이 방구야? 어?

- 또다시 떠오르는 ‘탑의 문 모씨’..

- 근데 방귀가 터지기 시작하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게 뭐다?

- 나 그거 알아

- 시밸럼들아 더러운 이야기 좀 그만해ㅋㅋㅋㅋㅋㅋㅋ 부정 탄단 말이야ㅋㅋㅋ

- 원래 이런 얘기가 제일 신남ㅋㅋㅋㅋㅋㅋ

- FWX가 서폿 게임 하는 팀이 아니긴 하지

- ? 바텀겜도 아니고 서폿겜? 그딴 게 어딨음?

- 잼민이니?

- 그러던 시절도 있단다

- ㄴㄴ 확실한 건 서폿 메이킹 하나 보고 게임하는 게 좋은 건 아님

- 그건 맞음

- 어쨌든 오랜만에 비행기 떴다ㅋㅋㅋ 오늘은 퍼스트 클래스다

“아, 까비. 이게 내 킬이네. 흐흥.”

“괜찮아. 딱뎀이었으니까. 오히려 좋아. 난 스펠 안 썼어. 은호 형, 고마워.”

퍼블을 챙긴 최은호.

아주 뛰어난 서포터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성격적으로나 연차로나 ‘무난한’ 동부권 선수라는 평가.

선호하는 챔피언과 그렇지 않은 챔피언이 다소 구분되어 있으며.

분명히 기복이 있는 선수.

“바텀 주도권 꽉 잡고 갈게. 편하게 플레이해, 건아. 미드는 내가 자주 갈 테니까. 알았지?”

최은호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하다.

유럽의 교수님 같은 플레이 스타일을 떠오르게 하는 특이한 위치 선정.

그래서 만들어진 ‘유럽행 비행기 좌석’ 밈.

잘 할 때는 퍼스트나 프레스티지 클래스, 못 할 때는 이코노미 클래스.

이유로 클래스라는 선수명과 제법 잘 어울렸지만.

작년 FWX의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거의 사장됐던 표현이다.

하지만 내가 FWX에 온 뒤.

‘자신만의 각’을 주장하던 최은호는 순순히 한발 뒤로 물러나 내 의견을 존중해줬다.

“오늘 느낌 진짜 좋거든.”

어쩐지.

오늘은 최은호의 운수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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