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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19화 (120/326)

119화. 징크스

스프링 시즌은 이름이 무색하게 봄 날씨와 거리가 멀지만.

서머 시즌은 정말 여름이라고 할 수 있다.

변덕쟁이처럼 바뀌는 날씨.

예전에는 장마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우기라는 표현이 더 공공연하게 쓰인다.

공기는 수분을 가득 머금었고.

하늘은 언제든지 비를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은 휴일.

낮은 기압과 습한 날씨의 영향일까?

부쩍 처진 선수들은 대부분 사옥 내에서의 느긋한 휴식을 선택했다.

홀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던 나는 사옥 근처에서 최은호와 마주쳤다.

“아! 건아! 건아! 여기! 여기!”

최은호는 처음의 거만했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디 갔다 왔어? 가족들과 식사했어? 아니면 약속 있었어? 아, 꼭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물어보는 거야.”

싱글벙글 웃는 낯이다.

곽지운이 없는 곳에서의 최은호는 좀 더 수줍은 면이 있다.

어느 쪽이 진짜 최은호의 모습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비 올 것 같던데. 우산은 챙겨왔어?”

최은호가 입을 떼기 무섭게 잔뜩 구름이 끼어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두어방울 떨어진다.

“어? 진짜 오네.”

최은호는 메고 있던 작은 슬링백을 앞으로 돌려 멘다.

작은 가방에 이런저런 물건들이 충실하게 들어있었다.

우산, 물티슈, 휴대폰, 이어폰, 소포장 된 간식거리.

“나 도움 좀 되지?”

자랑스럽게 웃은 최은호가 휴대용 우산을 팡, 펼친다.

옆으로 다가온 서포터는 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여 들었다.

크지 않은 우산이지만 엷은 빗방울을 막아내기엔 충분했다.

“고맙습니다.”

사실 우산을 쓸 정도도 아니고, 사옥이 바로 앞이었지만.

나는 잠자코 우산 아래에서 최은호와 발을 맞춘다.

“그 말..”

최은호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듣기 좋다.”

우산을 들고 있다는 것이 자신이라는 걸 알아챈 듯 얼른 발걸음을 옮긴다.

“슬슬 우기가 오나 봐. 이제 곧 7월이니까.. 시간이 빠르네.”

오른손을 옴짝거린 최은호의 발걸음이 자꾸만 멈춘다.

나는 말없이 사옥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 그래, 얼른 들어가자.”

나는 올여름, 이른 태풍이 불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바람이 빠르게 불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

다른 날.

연습실.

“야.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왜? 네가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거 해도 된다고 했잖아.”

이유찬과 김예성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내가 점수 더 높은데?”

“아니라니까. 여기 다른 사이트에서 하면 내가 더 높아.”

“너는 거니로 했고 나는 권건으로 한 거잖아!”

“너네 도대체 뭐하냐?”

윤도형은 그 꼴이 황당했다.

잠시 전략 회의하겠다던 둘은 이름점을 보고 있었다.

“유사 과학 신봉자는 문봉구와 최은호만으로도 충분하다, 얘들아..”

“도형 형님, 이게 생각보다 적중률이 상당히 높아요. 누가 베스트 프렌드인가..”

이유찬이 맑은 광기의 눈을 번뜩였다.

“김미드, 이번에 F.L.E 정우랑 친구 먹었는데 걔네 팀도 다 해봤대. 그러니까 이게 증명된 방식이다 이거야.”

“그게 어떻게 증명이 돼? 모수도 적을 뿐더러 명확하게 확인된 결과값도 아니잖아.”

김예성도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뜬다.

“얘들아..”

한동안 개인 연습에 몰입해있던 윤도형은 팀의 변화가 당황스럽다.

“그거 사이트마다 다르게 나와. 방법이 여러 개래. 의미 없다니까?”

그래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직구를 꽂아봤지만.

“그럴 줄 알고 저는 종이에 적는 전통적인 방식을 동원했습니다.”

어림없는 볼이다.

이유찬은 종이를 들어 보인다.

“도형이 형, 찾아보니까 저거 일본 방식이래. 그러니까 나는 이름점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는데, 얘가 자꾸 결과 좋게 나오면 선갱 루트라고..”

김예성은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하며 윤도형에게 빨리 동의하라는 시선을 보낸다.

“예성아. 너.. 이런 애였냐? 원래 너.. 좀 말 없고.. 그런 앤줄.. 알았는데.”

“..!”

김예성은 갑자기 현타라도 맞은 것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매일매일 이유찬과 대화하면 자기도 모르게 말린다.

이때.

“흠, 흠음흠. 흠흠.”

지나간 가요를 흥얼거리며 최은호가 연습실에 등장했다.

“얘들아 굿모닝!”

활기찬 모습의 최은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출근부터 찍고!”

단말기에 지문을 등록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세 사람이 모인 곳으로 걸어온다.

“건이랑 깍지는?”

“면담 갔어.”

“그래? 일찍 하시네. 너네 뭐해?”

“얘네 이름점 본대.”

윤도형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켜던 최은호가 함박웃음 지었다.

“뭐야, 그거 내 전공이잖아. 근데 이름점은 좀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형님이 이름점 알려줬잖아요.”

“유찬아, 그래도 사주가 제일 잘 맞는 것 같아.”

“미친.. 운세 전문가 최은호..”

윤도형은 몸을 부르르 떨고 다시 자기 자리에 앉아 큐를 돌리기 시작했다.

“사주? 그거 돈 내고 봐야 하잖아요.”

“근데 진짜 생각보다 괜찮다? 나도 처음엔 우리 할머니가 자꾸 권해서 간 건데, 나쁘지 않아. 최소한 이름점보다는 낫다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김예성은 끼어들고 싶었지만 형이라서 참았다.

이제 다시 점잖아질 시간이다.

“근데 왜? 여자친구 생겼어? 우리 찬이는 너무 이른데?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아뇨? 건이 선갱 루트 보는 건데요?”

이유찬은 코를 긁었다.

뭔 연애?

인생의 낙은 게임뿐이다.

“아! 건이랑 본다고!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아, 나도 팀원들이랑도 좀 따로 볼걸. 너 진짜 똑똑하다.”

“제가 좀.”

“하.. 좋아, 다음엔 미리 예약 걸어놔야지.”

황당한 대화가 오갔지만 두 사람은 태연했다.

“일단 이름점은 됐고. 운세 보고 싶은 사람?”

오늘도 서랍에서 스포츠 테이프를 꺼내며 최은호가 소리를 높였다.

최은호는 매일 그날이나 그 주의 운세를 본다.

정말 철석같이 믿는 건 아니지만 자그마한 위안이다.

사람들이 복권을 사서 지갑에 넣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의 계기나 의지할만한 요소.

다만 남들보다 조금 더 꾸준하고 관심이 많을 뿐.

사실.

사주나 점, 타로, 운세 등이 최악을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그렇다.

포털 사이트에 공개된 운세는 더욱 그렇다.

매체에서야 ‘지금 당장 헤어져!’, ‘조심해.. 죽을 수도 있어..’ 같은 식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있지만, 오늘의 운세는 일종의 심리 상담을 표방하고있다.

어쩌면 자기 계발 서적만 읽어도 나오는 당연한 내용들을 다른 방식으로 전할 뿐.

대체로 남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다 라던가.

외면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는 식.

최은호에게 역시 그 정도의 의미다.

자기 확신이 없을 때.

우연히 ‘갑자기 작은 금전운이 생긴다’고 나오면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조금 자만하고 있을 때.

운세에서 ‘어려운 일을 마주하면 합심해서 대응하라’는 말이 나오면 좀 더 조심한다.

맞으면 좋고, 틀려도 그만.

“나는 이번 주 운세가.. 와! 태평성대래!”

그리고 당연하지만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는 기분이 좋아진다.

나쁜 괘가 나오더라도 대체로 좋게 표현되어있으니 실패할 확률이 적은 미니 게임이다.

“어떤 일을 해도 이익을 얻습니다! 평소와 똑같이 해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으며 돋보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착착 진행됩니다. 이번 주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입니다!”

최은호의 기분이 최고조로 올라갔다.

“뭐야, 이제 나 드디어 POM 한번 받나?”

“형님. 그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이리 와서 해볼래?”

이유찬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최은호의 컴퓨터를 잡았다.

“와, 형님. DPI 뭐예요.”

“마우스 너무 빨라?”

“바로 적응해버리기.”

“피지컬 놀랍고.”

두 사람은 키득거리며 웃다가 이유찬의 운세 창을 띄웠다.

“오.”

“운수..대통..이네..?”

“좋은 거예요?”

“어.. 나보다 좋네?”

“김미드, 들었어? 내가 너보다 좋대.”

“나는 운세 안 봤거든? 그리고 나 이제 네 말 신경 안 쓸 거야.”

“형님들, 김미드 삐졌나 봐요!”

“아니야!”

“너도 이거 운 테스트해 볼래?”

“안 해!”

“그럼 과자라도 줄까?”

“볶은 아몬드 갖다주던가!”

이유찬과 김예성이 다시 투닥거리는 사이.

최은호는 입술을 비죽이며 창을 닫았다.

운세는 최은호의 징크스이기도 하다.

이 징크스는 최은호가 직접 만들었다.

스포츠에서 징크스라는 것 역시 미신적인 행동.

하지만 유명하다 싶은 스포츠 선수들은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징크스다 싶었던 최은호는 운세 보기를 스스로의 징크스로 여겼다.

평범하게 말하자면 ‘루틴’일 것이다.

“에이. 이번 주에는 내가 최고일 줄 알았는데.”

투덜대며 창을 닫고 연습을 준비한다.

흘긋, 시선을 돌려 윤도형을 보니.

윤도형은 이유찬과 김예성의 눈치를 보며 몰래 권건과의 이름점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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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KL, ‘승승장구’ 현 1위! FWX, 4연 스윕. 어디까지 이어지나 ]

[ LKL에 일어나는 놀라운 이변들.. 동부의 반격이 시작됐다 ]

[ FWX, 게 섰거라! 동부 팀 부산 호넷, 수원 해머스의 이번 시즌 놀라운 약진! ]

[ ‘수렁에 빠진’ 성남 스톰과 서울 빅스 ]

[ (포토) FWX의 기운을 받아 가는 F.L.E. ]

ㄴ 경기 끝나고 FWX랑 미팅하는 동부 팀은 잘 풀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ㄴㄴ 저도 권건 선수의 사인을 받고 실버로 승급했습니다

ㄴㄴ 그러고 보니 그렇네..? 호넷이랑 해머스는 경기 후 미팅이라고 SNS에 사진 올렸자너

ㄴㄴ 축복 같은 걸 끼얹나?

ㄴㄴ 미신 아님? 빅스는 어쩌고

ㄴㄴ 빅스에게는 동부의 피가 흐르지 않지

ㄴㄴ 서부 차별하지 말라고 시불

ㄴ FWX의 “바이럴”

ㄴㄴ 바이럴이면 어떻고 미신이면 어떠냐 우리 팀 애들도 좀 만났으면ㅠㅜㅠㅠ

ㄴㄴ 팀 어딘데

ㄴㄴ 피닉스..

ㄴㄴ 거긴 권건 데뷔 날 조리돌림하려다 실패한 팀이라 안 됨 애티튜드가 글러 먹음

ㄴㄴ 제발 봐주세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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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LKL 서머 스플릿 3주차, 스물한 번째 경기로군요!”

“사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고 하기에는.. 좀 길었죠?”

“하하.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오늘따라 너.. 왜 이래요?”

“죄송합니다.”

“부스 뒤편에 진실의 방이 마련되어있습니다. 두 분, 다녀오시기를 바라겠고요. 현재 진행 상황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여전히 초반이라고 볼 수 있는 서머 시즌인데요. 하지만 스프링을 거치면서 선수들의 합이 충분히 맞아들어가기에 올해의 성적을 정리하는 중요한 시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요즘 정말 시즌이 핫한데요. 동부 팀들이 대거 치고 올라오면서 어지러운 순위권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설진은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질 수 없다는 듯 여러 자료를 띄웠다.

“2승 2패 라인이 대단히 많습니다.”

“네. 공공연한 강팀으로 불렸던 성남 스톰이 그렇죠. 이번 시즌 굉장히 부진한 성적을 보이고 있어요.”

“최근 몇 년간 3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는 스톰이 지난 스프링을 5위로 마감하고, 지금도 간신히 3위에 있습니다만.. 대진표가 상당히 좋았던 상황이기에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입니다.”

“그렇죠. 스톰은 아직 정글러와 합을 맞추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 권건 버리고.. 중국산 정글을.. 데리고 와서.. 그렇다..

- 시발 아직도 후회해 존나 권건한테 언플까지 해서

- 아직도 정신 못차림ㅋㅋㅋㅋ

“그 외에도 빅스, 유니버스가 주춤거리고 있구요. 반면 호넷과 해머스가 같은 2-2 라인에 서 있습니다!”

“특히 호넷이 지난 경기에서 빅스를 이기면서 굉장히 화제가 됐죠! 정말 야수 같은 경기력이었어요!”

“그렇습니다. 재밌는 징크스가 있죠. FWX를 만난 강팀들은 다음 경기에서 진다는 이야기. 호넷이 빅스를 이기기 직전에 빅스가 FWX에게 패배했었거든요!”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글쎄요.. 요즘 공개된 보이스 중에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다른 팀 선수들이 권건 선수를 ‘정글 멘탈 분쇄기’나 ‘팀 균열 생성기’ 등으로 부르더라구요.”

“그것참 무시무시한 별명인데요?”

“원래 그래요. 이게, 아주 전통적인 말이 있습니다. 무슨 차이라고..”

- ??? : 정글 차이

- 이런 말 해도 되는거냐고ㅋㅋㅋㅋㅋ

- 형 인성 문제 있어???????

“절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그게 아닙니다. 이게,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건너편 차선에서는 버스가 와! 근데 이쪽 라인에는 안 오네? 근데 저쪽은 계속 와. 버스가 계속 와. 그럼 어떻게 되겠어요.”

“건너편 버스 정거장으로 건너가서 종점 찍고 오는 게 빠를 수도 있겠는데요?”

“오.. 그런 방법이.”

“아무튼 LOS에서는 그게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버스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하염없이. 근데 권건 선수는 진짜 시간을 잘 맞춰요. 약속한 시각에 정확하게 그 위치에. 기상해서 머리 감고 양치하고 면도하고 옷 입고 나가면! 딱, 거기에 와요! 그럼 출퇴근이 너무 편해진다! 이겁니다.”

“그래서 버스.. 차이다?”

“예, 절대, 예. 그렇습니다. 정확히는 약속의 차이, 뭐, 예! 버스 차이! 시간 차이! 예에에! 그래요! 그거 맞아요!”

- 자폭ㅋㅋㅋㅋㅋㅋㅋ쿳소옼ㅋㅋ

- 왜 정글 차이라고 말을 못해ㅋㅋㅋㅋㅋ

- 그냥!!!! 시원하게!!!! 말하라고!!!!!!ㅋㅋㅋㅋ

- 정!

- 글!

- 차!

“아무튼 이런! 괴물 같은 FWX! 오늘은 드디어! 트릭스터와 맞붙습니다!”

“한 주의 시작을 여는 오늘의 경기! 지금부터! 만나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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