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107화 (108/326)

107화. 제로백

FWX와 빅스의 경기는 완벽에 가깝게 굴러갔다.

“FWX를 상대하는 팀들에게 좋은 점이 있어요.”

“그게 뭔가요!”

물론, FWX의 입장에서의 완벽이다.

“이번 시즌 FWX는.. 현상금이 잘 붙습니다!”

“네, 그래서요?”

“그래서 한 번 잡으면 거의 원 플러스 원입니다! 킬을 냈는데 돈이 두 배? 파격 행사죠.”

- 씨바 우와 호재네요! 존나 감사합니다

- 개꼴받네;; 차이가 안 났으면 안 붙었지 시벌

- 작전주임 저거;; 이득 생각하고 들어가면 존나 털림

- 초반에 탑바텀이 정글 많이 봐주면 뭐 하냐고 쓸모없는 전갈새기

- 그래도 카정은 많이 안 당했잖아^^

- ㄲㅈ

- FWX라면 이제 진절머리가 나

후반에 몸을 일으키는 편이던 김예성이 움직이는 타이밍을 초중반으로 확 끌어오면서.

아직 경험이 부족한 탑이 불안한 교차점을 만나기 전에 유의미한 차이를 벌렸다.

그렇게 미드가 발이 풀려서 정글과 함께 게임을 누비고 다니자.

자연스레 게임 자체에 활력이 돌면서 시야 차이가 벌어지고.

힘을 기른 탑과 바텀은 이제 정글의 품을 떠나 자율 주행 모드로 돌입했다.

빅스는 천천히 전열을 뒤로 물리며 가다듬었다.

“근데 우리 미드는 아까 뭐 했어?”

탑에서 능숙하게 연기를 펼쳤던 고재길이 불편한 심리를 드러낸다.

미드와 탑 방향에서 동시에 손실이 발생했다.

더블 플레이.

한정된 기회 자원으로 턴 개념이 있는 팀전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철저하게 계산된 FWX의 2 대 1 다이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줬더라면.

아니면 사이드에서 시야 노출 관리만이라도 철저히 했다면 당하지 않았을 일이다.

“사일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뺏을 궁도 수두룩하고. 하다못해 숨어서 트페 궁만 써줬어도 쫄았을 텐데. 그것도 아니면 고속도로를 제대로 뚫던가.”

스프링 시즌에는 자주 보이지 않았지만 사일은 탑에서도 충분히 사랑받는 픽.

고재길이 이런 점들을 꼬집었지만 미드 이지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재길은 원래 저런 타입이다.

특별히 감정이 있어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사실 적시.

그냥 좀 무신경한 탑.

문제는, 다른 사람이다.

“휴, 그러게. 우리가 꿀픽 후픽 막픽까지 밀어줘도 지원이가 뭘 못 해주네. 아쉽다? 받쳐주는 건 예성이가 참 잘했는데.”

말한 고재길은 순수하게 질문이었을지언정.

그걸 받아서 떠드는 정글 김기태의 말에는 약간 감정이 담겨있었다.

“에이, 기태 형. 한타 보면 돼. 다시 힘내서 해보자. 근데 루루는 제발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로 좀 와주고.”

그래도 평화를 사랑하는 원딜 강한빈이 재빨리 중재하며 서폿을 부른다.

여전히 경기는 진행되고 있으니까.

“아, 오케. 나 시야 잡느라. 우리 미드는 뭐해? 잘 크고 있지? 그거 투자 많이 했으니까 캐리해 줘야 한다?”

굳이 더 찔러오는 진주호의 한마디.

하고 있는데 잘하라는 말을 듣는 건 언제나 화가 나는 일이다.

지금 대화를 명백히 심판이 듣고 있는데도 이런다.

결국 이지원은 입을 떼고 말았다.

“아니, 나 좀 억울해. 솔직히..”

“아무것도 안 한 미드는 발언권 없죠~? 라고 할 뻔?”

하지만 이것마저 끊고 들어오는 김기태.

“야, 그만해. 지원이 울겠다.”

이지원을 뺀 모두에게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진다.

순간 정수리에 강렬한 타격감을 느낀 이지원은 자기도 모르게 /ff를 쳤다가 프로다운 피지컬로 지웠다.

그래, 평소엔 친해도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일부러 한명을 놀려서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 거?

알고는 있다.

예전엔 김예성이 그런 욕받이 역할을 했으니까.

그때 다수의 편에 서서 같이 웃어넘기기만 했던 걸 돌려받는 걸까?

어이가 없네.

근데 나는 병신같은 성격이 아니라서.

잘 못 참겠어, 이거.

“미안한데. 지금 기태 형 스캬너도 존나 쓸모없거든? 버스 태워준다면서?”

인간은 두려운 것을 마주했을 때 받은 스트레스를 주위로 발산한다.

이것은 솔랭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프로의 세계에서 역시 발생하는 현상.

끼리끼리 동갑 라인이 많고, 서로 허물없이 지내 케미 좋기로 유명한 빅스.

장점은 한타.

하지만 그 장점을 채 보여주지도 못하고.

FWX를 만난 빅스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

재밌는 일이다.

김예성은 의사 표현을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었다.

의견을 개진했다가 크게 덴 적이 있는 것처럼.

어떤 부분에 대해서 확언하기도 싫어하고.

일단 우기고 보는 이유찬과는 정반대의 타입이다.

“지금 바로 시야 켤게.”

“그래.”

그런데 오늘은 좀 더 적극적이다.

“와, 진짜 오늘 게임 너무 편하다.”

“그러게. 내가 뭐 입을 뗄 일이 없네. 난 스펠 체크만 할게.”

“너 원래 그거밖에 안 하잖아. 건이가 다 하지.”

“어떻게 알았지. 역시 내 원딜.”

“역시 두꺼운 피부 내 서폿.”

“지금은 두꺼운 피부 아닌데.”

어쩌면 그건 트페라는 완벽한 시야 챔피언을 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제 사일 경계해요. 아까 사이드에서 혼자 먹으면서 컸거든. 현상금 있으니까. 계속 주의.”

사실 인원수나 로밍 차이를 이용해 들어간 다이브가 항상 이득은 아니다.

다이브 후에는 반드시 그사이에 생긴 이격을 메워야 한다.

“알겠어!”

어쨌든 상대 미드는 잠시간 견제 없는 성장 기회와 동시에 타워 하나를 얻었으니까.

하지만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바로 기세와 멘탈리티.

기세는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니지만, 대형 스노우볼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멘탈리티는 정신이나 감각, 감정 같은 것들의 총집합체.

“이제 다음 웨이브까지 먹고 필요하면 마지막 정비 타이밍. 바론 준비해요.”

“버스 좋다.”

“안전벨트 잘 매라.”

승리를 위한 가장 기본 재료는 준비됐다.

하지만 상대가 경험치에서 아주 많이 밀리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집중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든든한 앞 라인이 없으니까.

곽지운은 잘 풀린 상체를 두고 ‘버스’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건 흔히 말하는 버스라기보다는.

레이싱카에 가까울 것이다.

이 경기에서, 팀원들은 승객보다는 크루가 어울린다.

“유찬이 빨리 와서 시야 뚫는 거 도와줄래?”

“저 리콜 중. 12초 뒤에 도착요.”

“야, 라인 욕심쟁이야. 진짜 12초인지 잰다?”

“12초 아닐 것 같은데. 좀 더 늦을 것 같은데.”

김예성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당연히 더 걸린다.

왜 12초라는 계산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탑은 이런 것도 확언한다.

“저 실제로도 제로백 12초.”

“?”

“뭐래?”

잡담에 자주 끼어드는 편이 아닌데.

이건 못 참겠다.

“유찬. 제로백이 뭔지 알아?”

“백 미터를 몇 초에 가는지 아니야?”

이러다가 우리 탑 라이너 밑천 다 드러나겠다.

어디 가서 나랑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말하지 마라.

제로백은 몰라도, 모르면 말을 아끼는 게 상책이라는 건 배웠잖아.

“나도 제로백 모르지만 대충 그건 아닌 것 같아. 자동차 용어 아니야?”

“우리 유찬이는 아는 게 뭐야?”

“제가 너무 빨라서 그래요? 야구하라는 소리도 들었음.”

“도대체 제로백이랑 달리기랑 야구의 관계는 뭐지?”

“쟤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

제로백이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이유찬이 게임에 재능이 있다는 게 다행일 뿐.

“얘들 싸움 보려나?”

“싸우러 와요. 우리가 바론 먹고 들어가면 클리어하기 어려우니까. 우리도 지금 바론 없이 들어가기엔 팔이 짧으니까 바로 갑니다.”

“오케이.”

“먼저 쳐서 싸움 유도할게요.”

다시 마지막 전투를 준비할 차례다.

시야는 준비됐다.

“지금 이렇게 불리한 게임에서는요! 스캬너가 할 일을 찾기가 힘들어요! 끌면 무조건 좋긴 한데, 상대를 한 턴에 죽이지 못하면 진짜 아주 곤란해지거든요? 물고기를 낚긴 했는데 그게 상어면 바로 상어한테 먹혀버릴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FWX 선수들이 하나하나 폭탄처럼 느껴지네요. 좀 더 섬세해야겠죠!”

“그래도 가치가 있다면, 지금 세자 선수의 칼리가 수은을 올리게 했다 정도예요. 세자 선수가 상당히 안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고, 돈 차이도 벌려놨기 때문에 유비무환으로 구매한 것 같기는 한데!”

“그렇습니다. 지금 스캬너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아요. 하지만 FWX도 폭딜이 조합이 아니거든요. 탱커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만하기 때문에 일단 한타 봐야 합니다!”

“FWX, 바론 치기 시작합니다! 칼리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빨라요! 속도가 거의 사기입니다. 백이면 백! 과속 카메라에 잡힐 만큼 빠르거든요!”

그래.

여전히 상대를 얕봐선 안 된다.

항상 변수가 있다는 것.

“이제 집중합시다. 딜 중지 신호 잘 따라주고, 지운이 형은 바론에 최대한 집중. 천천히 합류. 만약 우리가 먹는 데 실패하면 다 죽여서 버프 뺍니다.”

“아니, 내가 먹을게.”

“좋아요. 냐르, 궁은?”

“분노 12초.”

이유찬은 다시 확언했다.

“알겠어.”

김예성이 대답한다.

글쎄, 외부적 요소가 개입될 수 있는 스택을 어떻게 확언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유찬의 말을 시간적 개념의 ‘초’로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면.

감각적으로는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아마 ‘곧’이나 ‘금방’ 정도의 표현.

“제가 먼저 돌아섭니다. 스캬너 스틸 조심. 저 제압하고 스틸 노릴 거예요.”

이제 이유찬에게 익숙해져 간다.

팀원들도 모두 이해했다.

“오케이.”

아슬아슬한 타이밍.

바론의 체력 바가 포인트를 통과할 무렵.

“빅스, 빅스! 돌입, 돌입합니다, 일촉즉발!”

부드럽게 공기를 찢으며 상대가 가속하는 소리가 들린다.

중장거리의 스캬너와 단거리의 리싱.

짧지만 중요한 레이스.

몇 번째 랩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게 마지막 랩이라는 것.

“닿을 듯 닿지 않는 권건의 드리프트!”

화면에 꽂히는 내 핑은 약속.

이쪽으로 움직여라.

적에게 꽂히는 타겟핑은 지시.

주시하라.

냐르 궁을 뺏어 들고 있는 상대 미드에게 기회를 줄 수는 없다.

인코스로 각을 꺾어 들어가면서 허공을 유영하는 찰나에 생각을 더듬는다.

가장 최선은 무엇인가.

“동시에, 동시에! 아, 사일, 사일, 사일!”

바론 앞에서 가장 유용한 미끼, 그건 바로 나.

나는 적을 향해 들어간다.

절대 판정 스킬을 가진 적의 주의를 돌리면서 나에게 스킬을 쏟아붓게 만든다.

“사일과 리싱, 서로 궁극기! 사일이 멀리 차이지만! 동시에! 뺏은 냐르 궁으로 리싱 순간 무력화!”

신사적이지 않은 거친 레이싱 속, 측면 충돌.

“스캬너가 바로 권건을 제압하면서 바론 쪽, 스틸, 스틸, 스틸, 스틸 시도!”

“스틸..?! 아니! 아니, 아니! 완벽한 딜 중지! 세자가 먹었어요! 칼리! 칼리! 창 뽑아내면서어어어어어! FWX, 바론! 가져갑니다!”

그리고.

이유찬의 개념 속 ‘12초’의 제로백.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순간.

그리고 가속한 우리가 시속 100km에 닿은 그 순간.

“으아아아아아아아! 차아아아아니! 냐르! 궁극기 정확하게!”

레나타의 궁극기의 지원과 함께 폭발하듯이 터져나오는 이유찬의 가속.

우리는 순식간에 최고 속도를 낸다.

“심지어 권건이 폭탄 목걸이 걸고 한 바퀴 돌려 피흡하면서! 살았어요! 또 살았어요! 또오오오오오! 또오오오오오!”

“위험, 위험, 위험합니다! 이거 지금 트페 카드가 그냥 카드가 아니거든요! 돈으로 때려요! 딜 충분히 나옵니다! 냐르도 딜이예요! 핵심은 칼리, 칼리! 칼리도 프리딜!”

“다시 붙습니다! 리싱 다시 붙어요! 위험해요, 위험해요 빅스! 궁극기 손실이 너무 큽니다! 위기! 위기! 리싱을 물었던 스캬너가 가장 먼저 끊깁니다!”

바론도 먹었지만.

“이 팀 미쳤어요! 미쳤어요! 그냥 미쳤어요! 대화 불가능! 셔터 내립니다!”

“리벤지 선수의 사일이 미련이 남은 것처럼 뛰어들어보지만! 결국 전사!”

다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남아..남아있어요! 라아아아온, 운명 켭니다!”

그리고, 퇴각하는 상대를 끝까지 바라보던 김예성은.

서킷을 달리고 있는 우리들보다 조금 더 앞장서서.

정확한 위치에서 피트 스탑을 준비한다.

“너희랑 게임하는 거.”

문을 열고 여유롭게 걸어나온 김예성의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 카드가 마지막 거점을 알린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이 레이싱의 완벽함을 점검하고.

“진짜 재밌어.”

이제 눈앞에 남은 건 결승선뿐.

완벽하게 레이싱을 성공시킨 크루원들은 다 함께 환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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