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탑과 미드
“전령 직전 교전에서 FWX가 퍼블을 올립니다!”
오늘따라 우리 미드가 날카롭다.
“합류하려던 바텀 듀오는 잘 살아갔지만 교전에 참여한 미드 사일이 리싱과 트페에게 끊기면서! 리싱 퍼블!”
“전령 타이밍, 사일이 미리 트페의 궁을 뺏어둔 게 도리어 아쉬운 결과가 됐죠!”
“권건 선수가 퍼블을 가져가면 항상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데요!”
“이러면 전령까지 블루 진영, FWX가 가져갑니다!”
우리는 상대보다 조금 더 빨라야 한다.
“이제 천천히 시야를 넓혀나가고 있는 FWX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미드가 능동적인 운영챔을 들고 나온 것.
이건 뭔가 달라진 것 같다.
김예성이 피드백 시간에 조심스럽게 내놓은 이야기는 그랬다.
사실 자신은 미드 AD나 암살자 챔피언을 좋아한다는 것.
물론 대부분의 챔피언을 굉장한 숙련도로 소화해내는 선수긴 하지만.
평소의 성격이나 여태까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어쩐지 녹턴을 갑자기 하자고 했을 때도 능숙하게 해내더라니.
역시 사람의 느낌과 선호하는 챔피언은 다른 법이다.
전우협만 봐도 그렇다.
김예성이 빅스에서 자주 잡았던 픽 갈레오.
그리고 지금 잡은 픽 트페.
둘은 아군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합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지만, 수동적이냐 능동적이냐는 부분에서 다르다.
아군이 있어야만 갈 수 있는 갈레오와 달리.
스스로 길을 여는 트페.
“빅스, 바텀 미드로 올리나요? 이거 바텀에서도 살짝 밀리고 있어서..!”
“라인 스왑할 때는 깊숙이 밀어 넣어주는 게 예의거든요! 근데 지금 빅스가 미드에 힘을 주지 않고, 전령 피해를 최소화하지 않으면 라온의 트페가 완전히 발이 풀려버립니다? 급하게 출발! 손해가 발생합니다!”
“괜찮습니다, 빅스. 그래도 이 정도 손해까지는 괜찮아요. 용 양보받았고, 이대로 천천히 가기만 하면 시간은 빅스의 편입니다!”
빅스는 스프링 최종 3위.
밴픽이 압도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서로 약간 꼬인 상황.
한 턴씩 주고받고, 나는 자연스럽게 전황 분석을 남기며 카운터 정글링에 들어간다.
“그래도 탑 쪽 한 번 노려보나요? 빅스?”
내 몸은 하나이기에.
“유찬, 잠깐.”
동시에 여러 곳에 등장할 수는 없는 노릇.
“어!”
이유찬이 몸을 들썩였지만, 손은 입력된 명령어에 따라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안돼.”
“어떻게 알았어?! 귀신이네.”
다이브까지 보려고 했겠지.
뻔하다.
“함정이었어?”
“알면 됐어.”
“근데 내가 먼저 죽이면 퍼블 따고 죽인 거니까 이득?”
“퍼블은 이미 나왔어. 그리고 라인은?”
이유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아직 이유찬은 부족하다.
출전 시 흥분도도 높은 편이다.
라인전 체급은 괜찮지만 부주의한 부분이 조금씩 나온다.
이번 시즌, 우리 팀에 위기가 온다면.
이유찬이 내 요구 사항에 피지컬이 따라오지 못하는 순간이 아닐까?
상대 탑 고재길의 수준 높은 연기.
내가 수정초의 유무를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이유찬은 스캬너의 첫 제물이 됐을지도 모른다.
“오오오우! 으차! 차니 선수, 상당히 아슬아슬하게 빠집니다! 앞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뒤로 점프! 오래 끌지는 못했지만 시간 소모하게 했어요!”
“꼬리 맛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살기 감지했죠? 이 선수도 눈치가 아주 빠르고 육감적인 선수네요?”
- 까비ㅋㅋㅋㅋㅋ
- 한 걸음만 더 나왔으면 전갈 런치행이었는데ㅋㅋㅋ
- 여태까지 오지게 싸워주다가 희한하게 눈치채네
- FWX에 오면 탑 클래식 갱 회피 능력 옵션 무료 추가
- 팬시도 이거 기가 막혔는데ㅠ
- 그게 누구임?
- 어휴ㅠ 첩자 녀석
- 권건이 위치 말해줬겠지ㅋㅋㅋ 권파고ㅋㅋㅋ
- 보이스 들어보고 싶다.. 그냥 권건 보이스 켜주면 좋겠어..
“우리 유찬이가 상대 정글을 잡아놓고 있는 거야? 대단하네.”
최은호의 습관적 칭찬.
“은호 형님이 안전해졌죠. 탑 차이.”
“그, 그래. 그럼 하는 김에 텔은 바텀으로 한번 타 줄래?”
“바..텀이..? 어디..? 텔이.. 뭐죠..?”
“너는.. 진짜구나. 봉구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유찬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지만.
“이유찬. 상대가 아이스크림 사준대? 그걸 왜 따라가?”
서늘한 김예성의 목소리에.
“건이 말만 듣고 게임 할거야? 내가 사일 안 잡아뒀으면 바로 3인 다이브였어.”
“김트페..”
“...”
이유찬이 머쓱해 하면서 살짝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맞는 말이긴 한데.
이런 태도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내 리싱이 단거리는 괜찮아도 중장거리 경주에서는 스캬너한테 불리해. 절대 빨려 들어가지마. 생각보다 궁극기 적중 거리 길어.”
시선을 돌려보려고 했지만 김예성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이냐르.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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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빅스의 빈스 선수의 아펠은 미드에 계속 묶여있어요! 이거 지켜야 하거든요!”
“근데 또 리싱이 너무 발이 풀려있어요, 스캬너가 하고 싶은 게 땅따먹기인데 이게 쉽지가 않거든요? 이상해요! 방금 전에 점령한 것 같은데 자꾸 자기 땅이 아니에요!”
빅스는 자신들 뜻대로 경기가 풀리지 않아 답답한 기분이었다.
상대는 주도권이 떨어지는 픽이 아니다.
그럼 밀고 들어오겠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스캬너가 활약할 각이 나와야 한다.
궁극기를 썩혀놓는다고 더 강해지는 건 아니니까.
근데?
“기태 형, 쟤 좀 끌어봐.”
“각이 안 나와.”
“스펠이랑 템 뒀다 어디다 쓰게? 그거 안 쓰면 누가 포인트로 전환해줘?”
“주호 너도 호응 잘 해줘 봐. 이속 나한테 주고.”
“상황 봐서 변이가 나으면 변이로 쓸게.”
메이킹이 지연되고 있다.
시간을 끌면 된다지만 왠지 불안하다.
시간은 상대적 유리함일 뿐, 스택형 챔피언을 들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 얘기 할 때 아니야. 나 분리불안 생길 것 같아. 아까 봤어? 권건.. 아, 리싱 여기 우리 쪽 정글 지나간 거 보였잖아! 제발 미드로 붙어!”
원딜 강한빈은 강하게 호소했다.
“권건? 신고합니다. 너 벌금.”
서포터 진주호는 어깨를 으쓱인다.
“이럴 때 장난치지 말라고!”
너무 친하다.
너무 가깝다.
이건 특정 상황에서는 불편이 된다.
포지션마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까.
“장난 아닌데. 진짜로 자꾸 걔 이름 꺼내지 마. 난 그게 더 불안해.”
또다시 사이드로 밀려난 미드 이지원은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한타를 해. 내가 냐르 궁으로 죽여줄게.”
빅스도 팀플레이가 강점이다.
그런데 왜 FWX만 만나면 이렇게 경기가 답답해지는지 모르겠다.
“쟤 분노 관리 좀 하는데.”
“그럼 타이밍을 꼬아 보던가.”
“여기 벽 뒤에 숨어봐. 여기 미드에서 칼리 한번 보자.”
친절하게 위치까지 안내해주는 서포터.
미드에서 폴짝폴짝 신이 난 움직임의 곽지운이 보인다.
“정글 위치는?”
김기태는 맵을 다시 한번 훑었다.
미드에는 우리 팀 바텀 듀오와 나.
상대는 원딜이 시야에 들어오고, 서포터는 근처에 있을 가능성.
그리고 권건은 아까 동선으로 보아 용 쪽 시야 작업을 하고 있을 듯.
나쁘지 않은 시기다.
망설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좋아.. 고!”
곽지운이 앞쪽으로 나오는 찰나.
김기태는 스캬너에 시동을 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훅, 하고 머리 위에 동그란 눈이 떠오른다.
심판이라도 되는 양 자신의 움직임을 내려다보는 불쾌한 김예성의 시선.
“스캬너, 드디어 달립니다!”
아.
상대에는 권건만 있는 게 아니었지.
권건이 주는 스트레스에 나도 모르게 정글에 의식이 쏠렸다.
“조심!”
“일단 돌입!”
강렬한 백핑과 타겟 핑이 사방에서 찍힌다.
가속도가 붙은 이상 멈출 수 없다.
충분히 상대 원딜을 잡을 수 있다.
아니, 잡아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세자, 세자, 세자! 피할 수 있나요! 빨라요!”
“아아아아! 정면에서 쏟아지는 레나타의 적대적 인수! 미스터 선수, 점멸 반응으로 계속 접근!”
상당히 느린 상대 서포터의 궁극기가 정확한 타이밍에 쏟아져 들어오고.
점멸로 광란의 물결을 제치고 속도를 냈음에도, 꼬리 끝에 상대가 닿지 않는다.
“세자, 쭉쭉 빠집니다! 아! 이거, 안 닿아요! 안 닿아!”
“쫓아요, 쫓아요! 세자 선수도 무사히 빠져 나가지는..아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곧 닿을 것이다.
닿는다, 닿는다, 닿는.. 닿는다!
“세자 선수 칼리! 물립니다!”
그때.
몸이 공중으로 떠오른다.
바람이 시원하다.
분명히 제압하고 있는 상대 원딜이 웃는 것 같다.
수정으로 만들어진 전갈의 외골격을 버둥거려보지만 소용없다.
에어본?
루루야, 왜 네가 여기에 있어?
나보다 뒤에서 따라오던 네가.
설마.
“궈어어어어어언건! 진짜 순식간에! 순식간에 뒤에서 나타나서 슬라아아아이이딩! 끝내주는 발재간! 이이이쿠우! 광란에 빠진 플랜 선수의 루루를 발로 차면서!”
또 너냐, 권건?
“미친 당구킥!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단숨에 상황을 뒤집어버립니다!”
“아, 스캬너가 칼리를 붙잡았지만! 이미 불리해요! 다행히 빈스 선수의 아펠은 도망쳤습니다!”
“그렇다는 건 뭐예요! 딜 지원이 없습니다! 스붕이 되어버려요!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계획한 게 아니었어?! 권건! 지금 무에타이 초고수잖아요, 이 선수! 발차기 한방에 붕붕 날아가요!”
“아, 이거, 이거! 살아갈 수 없어요! 제압을 하긴 했는데! 그대로 얻어맞습니다!”
“감히 누굴 납치하려고 해! 아아앙?! 권건! 온 세상에 외쳤죠?!”
“빅스! 정글, 서폿! 정글 서폿, 이대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이거야말로 탑에게 주는 선물 아닌가요?!”
- 미친 거 아니냐? 플로 각 맞추는 거 시발 나올 때마다 지리네
- 신의 권건 리싱;; 무적권;; 무적권 리싱;;
- 리싱의 씨발차기..
- 권건한테 리싱 주지 마라;;
- 시발 그럼 뭘 줘야 되는데;;
- 하이라이트 대머리 전문가 권건;;
- 이 조합에서 누가 메이킹 할 건데;; 권건요;;
- 여기 왜 이렇게 땀이 많이 나냐;;;
“아닙니다! 탑에서도, 탑에서도!”
탑으로 올라오는 순간 미드에서 보였던 권건의 무빙.
김예성은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이유찬과 이야기 나눴던 계획을 실행할 때다.
“이냐르. 그윈 스택 빠졌어. 내가 먼저 몸 댄다. 한 대. 그리고 안쪽으로 돌파하면서 네가 두 대.”
종종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던 내 성격.
그건 섬세한 계산이 장점이고.
“확인.”
“내가 안개 안에서 골카 먹이면?”
“내가 바로 핑퐁. 그리고 궁.”
“하나, 둘, 셋.”
“준비하시고! 쏘세요!”
위기의 순간에도 무지성에 가까웠던 이유찬의 성격.
그건 과감한 스킬샷이 장점인 거다.
김예성은 의식적으로 등을 곧게 폈다.
항상 이해받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나도 이해해야 한다.
“으아아아아아! 차니 선수와 라온 선수의 환상적인 어그로 삥뽕! 아슬아슬하게 살아나갑니다! 라온, 차니 선수 통각을 완전히 잃어버렸어요!”
한동안 병 속에 갇힌 벼룩처럼 학습되었던 무기력.
하지만 김예성은 용기를 냈다.
“이거, 이거! 죽음의 듀얼! 실존했습니다! 카드, 카드를 뽑으면 사람이 죽는다구요! 그윈이 죽어요!”
절대 안주하지 않는다.
내게 손을 먼저 내밀어 준 권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
이전 빅스와의 경기.
그 날도 권건은 게임의 운전대를 잡기 위해 다재다능한 리싱을 했다.
오늘도 그렇다.
이건 희생이다.
하지만 너도 항상 선턴잡이 역할을 강요받고.
항상 무언가 만들어내야만 하는 픽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리그는 끝이 없는 레이싱.
완벽한 사람이라도 과열된 차체를 혼자 감당할 수는 없다.
우리 정글이 혼자 운전대를 잡고 짐을 짊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팀이 더 완벽해질 수 있게 나도 탑에게 손을 내민다.
“상대 정글이 몸을 보인 틈을 타, 동시에! 동시에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이거 하려고 트페 뽑았다! 라온이! 차니 선수와 환상적인 호흡으로!”
“탑에서 그윈을 잡아내면서! FWX에서 트페를 가져간 이유를 톡톡히 보여줍니다!”
“이거 FWX가 여태까지 주로 권건 선수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버티는 이미지가 있었거든요! 진짜 많이 달라졌습니다, 많이 달라졌어요 FWX!”
네가 나에게 알려준 것처럼, 너도 좀 더 재밌고 편하게 경기를 뛸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가 지면 건이 뺏어간다고 했어.”
“그래서 스캬너를? 어떤 잡놈들이 그런 개소리를 해?”
“빅스 팬분들 치어풀.”
“팬? 아. 나는 정말 경솔한 탑이라니까? 어쨌든 어림도 없지. 다 밟아버리자. 김트페.”
“좋아, 이냐르.”
“권건을 지켜라.”
감히 누구를 탐내.
빅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다만.
“하.. 권.. 아니 리싱 왜 의식 안했어..”
“분명 무빙이.. 페이크였나, 아, 존나 골 때리네.. 첨탑 때문에 더 헷갈려..”
“김예성 오늘 레전드긴 하네..”
“나 왜 심장이 뛰지? 이 감정.. 뭐지?”
“권건에게 흔들다리 효과?”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심장이 안 뛰면 죽어, 멍청이들아..”
현실적으로 이 경기에서 이긴다고 해서 조공으로 권건을 받을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런 막무가내식 우기기도 한 적 없는 빅스 선수들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