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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75화 (76/326)

75화. 한 편의 극

밀고 당기기.

연애에서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이 표현이 LOS에서도 꽤 적합할 때가 많다.

특히, 게임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잡고자 할 때 유용하다.

예를 들어 지금.

“짜오 거기 있을거예요.”

“여기?”

“히이이이이익! 클래스! 한 걸음! 한 걸음!”

“맞지?”

“네.”

“안 들어가나요, 클래스? 망설이나요? 미스터 선수 숨 참는 중!”

“오케이. 여기?”

최은호는 얄미운 스탑 무빙을 선보인다.

바도의 몸이 꿈실거린다.

사실 너무 도발적인 모션은 지양하는 게 옳다.

상대를 감정적으로 만들기 좋긴 하지만, 알고 있을거라는 의심을 사기도 하니까.

최은호가 종종 하는 실수다.

“아아아아아! 숨 넘어가겠어요! 알고 있는건가요? 이거 알고 있는 거 맞죠! 분명히 시야는 없는데!”

지금은 뭐, 별로 상관 없지만.

“한 번만 더?”

“차, 창 끝! 창 끝! 맞지 않습니다! 졔리가 벽을 타고 함께 와보지만! 따닥! 기절시키면서! FWX가 무사히 위협을 넘깁니다! 세자 클래스 듀오, 무사히 빠져 나갑니다!”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들어갔으면 잡혔을텐데!”

“뭔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나요? 진짜 한 끗 차이! 조상님이 뜯어말렸죠?”

“친 짜오의 위치가 발각되면서! 시간을 꽤 낭비한 셈이 됐습니다!”

하지만 으레 밀당이 그렇듯.

밀어내기를 당한 쪽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저, 저, 저 바도의 배! 배! 동그란 뱃살! 이거 꿈에 나올 것 같아요! 너무 약올라요!”

“시간을 끄는 나이스 플레이였죠.”

“오우야. 리얼이었고.”

“드리블 좋았어요.”

“땡큐.”

어쨌든 이런 밀당은 시간 끌기에 좋다.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연기력도 중요한 문제다.

보고도 못 본 척 연기하는 무빙, 귀환하는 척이나 로밍 가는 척.

이건 따로 시간을 내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좋은 미드 라이너들이 그렇듯.

김예성도 이 분야의 전문가다.

다만 이 연기가 통하냐, 통하지 않냐는 보통 개인의 연기력 문제가 아니다.

당연하지만 팀 전체가 시야나 주도권을 크게 잃은 상태라면 밀린다.

연기가 괜찮았는데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면 이건 어느정도 팀 탓을 해도 된다고 본다.

누군가 자기도 모르게 적에게 힌트를 주고 있거나 역할에 부재가 있기 때문일테니까.

적을 속인다는 건, 그만큼 호흡이 중요하다.

다 함께 한바탕 연극을 펼치는 거다.

그래.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

극의 무대.

가운데에 자리한 배우는 김예성.

주도권을 가져와 꾸준히 페이크 무빙을 연기하고 있다.

“여기 용 확인! 빅스가 치는 중이다, 얘들아!”

“전령 치는 척할게요.”

가지 않을 이유가 되는 무대 장치.

갱킹 대신 챙길만한 것이 있는가.

“하지만 바로 탑으로.”

평소의 패턴.

예를 들어, 이번 판의 정글러가 갱에는 관심 없고 성장에 집중하는 것 처럼 행동하는가.

“현재 구슬프게 처맞는 연기 중.”

혼신의 바보 연기를 담당하는 배우.

문봉구의 메소드 연기는 나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

“내가 미드 시야 한번 훑어 놨어!”

“은호 형. 굿.”

시야, 챔피언의 궁극기 레벨에 따른 사거리 등과.

“아아아아앗!”

“요른, 드디어 첫 뿔피리를 붑니다!”

“아! 뒤에서 나타난 권건! 권건의 그브! 시야, 시야, 시야! 아, 냐르! 눈 앞이 안보여요!”

“갈레오, 갈레오, 갈레오!”

“드디어, 힘을 아끼던 영웅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영웅.. 출..!”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대의 심리.

“혀어어어어어언!”

“첫 갱! 첫 갱!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권거어어언! 권거어어언!”

“거의 한 호흡으로! 뿌우, 깡! 쿠웅! 환상적인 연계 플레이였습니다!”

“토이 선수, 갈레오까지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아요! 점멸까지 빠지고 맙니다!”

“이거, 냐르가 메가 직전이라 방심했죠! 여태까지 정말 잘 괴롭혀주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요른이 어시를 가져가게 되면 기분이 좋을 수가 없어요! 맛이 안납니다!”

“한 라인만 더도 아니에요. 그냥, 딱 한 마리만 더. 이게 중죄였나봅니다! 아! 하늘은 왜 나를 낳고 미니언을 낳았나! 아슬아슬한 타이밍! FWX가 퍼블을 가져갑니다!”

완전히 속아 넘어온 적.

그 위에서, 우리는 박수치는 관객들에게 무대 인사를 올린다.

“하하하, 이 세 사람 뭔가요! 정말, 팀 플레이가 너무 좋아요! 한타도 잘하고! 교전도 잘하고! 이제 전령가면 됩니다! 거기다 지금 빅스는 하체 쪽에서 한 턴을 쓰는 바람에! 탑 타워까지 채굴 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게 요른이 생각보다 타워 채굴 굉장하거든요! 대장장이 출신입니다?!”

“깡, 깡! 경쾌하죠.”

“어, 시원허다. 뒤틀린 황천의 박치기 맛이 어떠냐.”

문봉구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보였다.

“봉구야, 왜?”

“그런 것이 있어. 여눈이나 사는 형은 몰라.”

“뭔데.”

“선택적 용기에 대한.. 준엄한 응징이랄까..”

아무래도 우리 우직한 탑 라이너 역시 상대가 수확낫을 들고 오는 건 못내 신경쓰였던 것 같다.

어쨌든.

이제 미드에 묶여있던 우리 날개 달린 배우에게 자유를 줄 시간이다.

#

게임은 천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첫 용을 내준 뒤, FWX는 오브젝트 관리에 좀 더 신경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왠 날파리가 계속해서 빅스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니, 저 매지컬 저니 진짜 존나 빡쳐.”

“잼도랜드 어이 없네.”

오늘 최은호의 컨디션은 하늘을 날아다녔다.

아군과 적 모두를 화나게 하는 재미, 피쯔 서폿으로 랭크를 올렸던 게 최은호다.

일단 갈레오가 어느정도 풀리고나니.

빅스 입장에서는 바도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날랜 이즈를 잡아먹기 쉽지 않다.

“갈레오 조금 더 압박해볼래?”

“그게, 쉽지가 않은데. 나 AP라.”

“너 로밍 돼?”

“나 지금 자리 비우면 미드 타워 나갈듯.”

“그럼 바텀 올라간다. 아라, 비켜!”

“강한빈 개웃겨.”

빅스의 미드 이지원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려는 것을 참았다.

어느 순간 갈레오에게 CS를 지고 있다.

따박따박 깔끔하게 CS를 훑어내는 갈레오가 부담스럽다.

밀린 방학 숙제를 보는 것 같다.

그래도 같은 팀이었으니까 반가운 마음에 인장도 몇 번 띄워봤는데 김예성은 대답도 안해줘서 민망하다.

저 새끼 이번 시즌 갈레오 안할거라며!

미드 중심 초반 메이킹으로 발 풀기로 했잖아!

이즈 잡기에는 아라가 좋다고, 해달래서 굳이 아라 뽑았는데!

기태 형이 첫 갱을 좀 더 섬세하게 해줬다면 어땠을까.

아님 아라 고를 때 말려주지, 좀.

후회는 언제나 늦다.

미드에서 비키는 타이밍을 좀 더 늦추고 싶은데.

발언권이 없다.

이지원은 사이드로 밀려났다.

뭔가 잘못됐다.

솔직히 김예성이 팀을 나갔을 때.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이 좋은 팀을 놔두고 대체 왜?

서로 엄청 친하고 편한데.

근데 이제서야, 이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게임이 잘 풀릴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

황족 소리를 들어야하는 미드가 짬처리를 강요받다니!

그래, 아마 틀림없이 김예성도 이런 게 답답했을 것이다.

이지원은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탑은 두 팀 모두 텔을 가지고 있습니다! FWX, 갈레오와 아라의 라인을 계속해서 맞춰주고 있습니다!”

“이제 상당히 단단하죠, 이거 부담스럽습니다!”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사이드가 제 집처럼 마음이 편한 미드는 없다.

꼭 집에서 쫓겨난 자식처럼 사이드에 머물던 이지원은 살짝 밀리는 것을 느끼고 라인을 스왑하기 위해 귀환을 택했다.

절대 김예성의 갈레오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다.

전략적 선택이다.

하지만 귀환이 완료되어야할 타이밍.

왜인지 아이템 구매가 되질 않는다.

“클래스의 바도가 아주 날랜데요!”

“아라의 귀환을 끊었어요! 오늘 플레이 아주 좋습니다!”

- 아주 ㅈ습니다

- 킹받네ㅋㅋㅋㅋ

- 바도 잡기 시도 3트째ㅋㅋㅋㅋ

- 존나 호로록 사라져버리는···..

잠시 바도에게 신경이 쏠렸지만 금방 포기했다.

어차피 바도는 피리 부는 사나이에 불과하다.

이지원은 다시 귀환을 눌렀다.

화면이 어두워진다.

“아, 이번에는 연막탄! 그브가 왔어요! 안녕? 아라야? 너 거기서 뭐해? 집에 가니?”

“권건, 깔끔하게 빠집니다! 이 친구도 제법 재빠르거든요? 심지어 맞붙어서 싸우기도 쉽지 않습니다!”

1초가 중요한 순간.

귀환이 두 번 끊겼다.

스왑 타이밍은 물건너갔다.

이지원은 무언가 툭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저 씨벌놈들 좀 잡자. 싸워야겠다.”

“오 마이 갓. 왜 그뤠, 지원? 와이 쏘 앵그리?”

“얘 개빡쳤다.”

평소처럼 웃는 팀원들이 더 얄밉다.

자기들도 아까 열받는다고 했으면서.

점점 감정적인 플레이가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이지원은 이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빅스는 팀원 간의 나이 차가 적고 사적인 거리가 매우 가까운 팀이다.

성적이 급상승하기 시작한 것도 또래의 선수들로 팀이 구성된 이후부터.

회사로 치자면 가족같은 회사라고 해야할까.

뭐..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되긴 한다.

그 점을 한타로 잘 승화시키기도 했고.

어쨌든 이런 말괄량이 팀을 상대로.

우리가 고단한 정면 5 대 5를 해 줄 필요는 없다.

아직까지는.

첫 번째 세트에서 으라차차 미드 난타 공연을 보여줬으니.

두 번째 세트의 전략은.

우리가 준비한 무대 위에 올려 감정을 흔드는 거다.

이 팀의 약점이자 강점은 팀 전체가 재밌게 게임을 한다는 점이다.

프로 정신이 부족하다고?

글쎄, 게임을 즐기면서 이기기까지 하면 더 좋은 게 아닐까.

누군가에겐 천국일 수도 있다.

나에게는 썩 잘 맞는 팀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재밌게 게임을 한다는 건.

재미가 없어지면 게임을 하기 싫고 쉽게 짜증이 난다는 것과도 맞닿아있다.

“종, 종, 종, 종글링.”

상대가 라인전을 먼저 끝내버리면서 발이 풀린 최은호의 바도는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어쩌면 이 세트에서만큼은 나보다 이동 거리가 길지 않을까..

잠깐.

라이너가 정글러를 상대로 이동 거리 승?

이건 처음 짰던 공연안이랑 다른데?

이런 것조차 지고 싶지 않은 나, 이상한가요.

“각 라인의 대응이 너무 유연해요, FWX!”

“초반에 친 짜오 대신 그브가 이득을 보면서, 굴려내는 데에는 실패했어요!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한타 보는 거 어떤가요? 어떻게든 요른을 공략해서, 궁이라도 빼면!”

아차.

“어어어어?”

“어어, 바텀, 바텀!”

“아, 아아아아! 바텀 타워 밀던 아라가! 요른, 요른에게 발목이 붙잡히는데요! 이거, 이거 못 참았나요! 한 마리보다, 한 웨이브보다 무서운 타워 막타!”

“왜죠! 이거 지금 깰 필요 없잖아요! 왜 이렇게 급하게!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플레이한 건가요, 리벤지 선수!”

“궁극기까지 동원해서 도망쳐보려고 했지만! 안돼요, 안돼요! 빅스! 졔리, 졔리와 유마 합류할 수 있나요? 안돼요, 이것 마저 안됩니다! 님아, 그 벽을 넘지 마오!”

이럴 수가.

“졔리는 벽을 타고 올 수 있지만! 바도는 벽을 뚫고! 갈레오는 그 위를 날아서! 빠르게 합류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아아앗!”

최은호와 김예성이 너무 빠르다.

“바도는 갈레오의 이동식! 최첨단! 소환진! 아아아아아! FWX!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요! 설마 계획이 다아아아아! 있었던 건가요!”

“아라, 아라! 끊깁니다! 사이드가 나갔어요!”

“이렇게되면 용 쪽 시야가 FWX에게 넘어갑니다! 드래곤 타이밍이 금방인데요!”

“이거 어떻게 하죠, 이번 용 주면 3용입니다! 그럼 한타 선택권이 완전히 FWX에게 넘어가요!”

“아니면 일부러 네 번째 용 넘기면서 바론, 바론 한 방 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빅스?”

“예? 이 상황에 바론 한 방이요?”

“저도 솔직히 좀, 오버라고 생각했어요.”

음.

배우들 컨디션 체크 완료.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지금부터는 공연의 하이라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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