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게이머, 그만두고 싶습니다-71화 (72/326)

71화. 스타일

피드백 시간.

“예성이? 옷 그거 뭐야.”

“와, 몸 좋으면 저런 거 막 입어도 되는갑다.”

“...”

숙소에 갔다 온 김예성은 묵묵히 캐비닛에 가서 겉옷을 벗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수다스러운 문봉구와 곽지운의 잔말이 끊이지 않았다.

“오널 방송 날도 아닌디.”

“자켓 입었어. 대박. 개멋있어. 누구 만나?”

“설마 면접 보러 가는감?”

무던히 장난스러웠지만 김예성은 난처한 듯 귀가 빨개져 있었다.

“얘들아, 조심. 누굴 만나니, 면접이니. 넘겨짚지 말자.”

박 감독님은 곽지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 미안.”

“아이고. 맞네. 미안혀. 멋있어가지고. 내가 아직 철이 읍다.”

김예성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야. 바보들아. 예성이 스타일 그거잖아. 그..”

최은호가 끼어들었다.

“Y2K요.”

“맞아. 역시 건이도 좀 아네.”

“와이투케이? 검색해도 안 나와. 투가 이 투가 아닌가?”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일종의 사회화 훈련 같은 것들을 담당해주기도 한다.

상당히 오랜 시간 외부와 단절되어 합숙만 하는 선수들.

그래서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잡아주는 어머니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은호, 손목은 왜 그래?”

“아. 이거 파스예요. 방송에서 리액션하다가 좀 부딪혔어요. 아프지는 않아요.”

그런 면에서 박 감독님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응. 이상 있으면 꼭 말해줘. 이제 집중하자. 집중.”

박 감독님이 박수를 가볍게 치자 단숨에 시선이 모였다.

“이번 빅스 전. 빅스는 메타 적응 능력이 뛰어난 팀이다. 재작년까지 중위권이었지만 작년에 2위까지 뛰었던..”

박 감독님의 시선이 살짝 김예성에게 닿았다.

빅스는 김예성이 데뷔했던 팀이고, 성장했던 팀이며, 친정팀이다.

내가 빅스에 있었을 때.

빅스의 미드 라이너인 이지원은 소위 말하는 가자미형 미드였다.

전형적인 받쳐주는 라이너.

김예성 역시 받쳐주는 타입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포텐셜이 다르다.

차려진 찬에 따라 가자미의 역할도, 도미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게 김예성이다.

이번 시즌 초에는..

다소 부족했던 정글러의 역량과 오더의 부재로 상당한 누수가 있었지만.

그 때도 미드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김예성은.

플레이 스타일만으로 따지면 인천 트릭스터에 더 잘맞았을거다.

하지만 트릭스터에는 이미 퓨처, 오미래가 있다.

가까이에서 김예성을 지켜본 본 결과.

김예성은 팀에서 요구하는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치명적인 한 가지.

오더 능력이 없다.

이런 선수들은 팀에 따라 굉장히 많이 흔들린다.

트릭스터가 괜찮을 것이라는 건.

그곳에서라면 오더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아마 김예성이 무언가를 요구받지 않는 안정적인 상태에서 포텐셜을 터뜨린다면..

뭐,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정말 중요한 건 팀원들과의 케미.

오미래가 순수 라인전 체급은 약간 밀리더라도 트릭스터의 든든한 중심인 이유가 있다.

어쨌든.

준우승까지 갔던 팀이 왜 김예성과 결별했는가.

왜 식스맨이었던 이지원이 주전이 되었나.

이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이건 팬들 입장에서도, 같은 팀원 입장에서도 궁금할만한 이야기지만.

이적 사유같은 것들은 구단과 선수 모두에게 프라이빗한 내용이다.

하지만 나도 빅스를 알기 때문에 예상되는 부분은 있다.

“기억해 둬야 할 사항들도 몇 가지 더. 이건 한 번 더 배부할테지만, 디테일 잊지 않게 신경쓰자. 바람 영혼이 궁극기 쿨타임을..”

빅스와의 경기가 코 앞이다.

어쩌면.. 좀 더 이야기 해보는 게 나을지도.

#

7주차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 오후 5시 경기.

“지난 FWX전에서 권건 선수한테 호되게 당했었거든요. 그 때는 진짜 사람 아니라고, 아니아니.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동부의 부산 호넷이 서부의 대구 유니버스를 2:1로 이기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럼, 권건 선수의 플레이에 영감을 받으신 건가요?”

아나운서는 POM을 받은 호넷의 정글러 장민성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네. 그 때 권건 선수 리싱 플레이가 좀 어이없을 정도였거든요. 근데 그 장면이 오프 더 레코드로 나오는데 진짜 상대 스펠이랑 마나 체크해서 오더 내리는 거 보고 자극을 많이 받았어요. 우연이 아니었구나 하고.”

- 우리 민성이ㅋㅋㅋ 백신 맞았네

- 이제 강팀 면역이다ㅋㅋㅋ

- 옵레 개쩔던데;; 존나 소름끼침ㅡㅡ

- 프로는 다 그럼?

- 그랬음 졌겠냐?

“와. 서로에게 굉장히 좋은 자극제가 되고 있는 두 팀이네요. 근데 오늘 세모 선수도 좋은 모습 보여주셔서 이렇게 POM까지 받았는데. 다시 한 번 권건 선수를 만난다면, 이길 자신 있나요?”

“아. 하하. 제가 알기로 지금 FWX랑 다시 만나기가.. 엄청 어려울걸요? 플옵 마지막 자리 두고 치열해서.. 근데, 그래도 만약 다시 만나면. 음..”

장민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냥 웃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안 만나는 쪽으로..”

제법 인기 많은 팀인 호넷의 업셋 후.

커뮤니티 사이트는 긍정적인 여론으로 들끓었다.

- LKL 자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요즘 업셋 맘에 들어

항상 약팀들은 홀린 듯이 똑같은 픽하고 똑같은 운영 했는데

요즘 FWX 때문인지 동부 팀들도 치열하게 연구해옴

재밌는 픽 많이 나오고 리그 자체의 체급이 강화되면 세계 무대에서도 좋을 듯

강팀들도 긴장하는 게 느껴짐

ㄴ 념글 추

ㄴ 좋은 자극제가 된 것 같음

ㄴ ㅇㅇ 고착화 심했는데 좋더라

ㄴ 이제 승점 자판기는 업따!

ㄴ FWX한테 일단 한 번 맞으면 다 정신 들어서 열심히 함ㅋㅋㅋ

ㄴㄴ 거기다 P.O도 못오니 얼마나 심성 고운 백신이야

ㄴㄴ 갈 수도 있지 왜 애들 기를 죽이고 그래요..

#

나는 오랜만에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

- 나 : 일도야

- 정일도 : 건이 형! (손 흔드는 이모티콘)

- 정일도 : 요즘 바쁠텐데!

- 정일도 : 경기 진짜 잘 보고있어 완전 팬이야

종종 오고가는 단톡방에서 가볍게 대화한 것 외에.

일대일 메시지가 오랜만이고, 이 친구가 너무 진지한 타입이라.

잠시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했다.

- 정일도 : 무슨 일 있어?

- 나 : 너는 팀에 성격이 안 맞는 사람이 있으면 힘들어?

- 정일도 : 나? 나라면..

- 나 : 폭력은 안돼

- 정일도 : (깜짝 놀라는 이모티콘) ㅋㅋㅋㅋ 옛날에 그건 장난이었어 진짜 팬다는 게 아니라

- 정일도 : 나처럼 연약한 사람이 어떻게 폭력을 써;;

- 정일도 : 사실 전에는 창민이가 좀 그랬는데

- 정일도 : 지금은 괜찮아 한울이랑 새 미드 산이가 잘 맞아

- 정일도 : 여긴 괜찮은 사람들이 더 많아서

- 나 : 불편한 사람이 더 많으면?

- 정일도 : 그럼 솔직히.. 프로 생활하기 힘들지

- 정일도 : 좋은 사람들만 있어도 가끔 한계를 느껴 난

일도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놨다.

- 정일도 : 나는 친구들이랑 피시방 대회 참여했다가 잘 풀린 케이스인데

- 정일도 : 그 때랑 많이 달라, 내가 고른 멤버가 아니니까

- 정일도 : 프로 생활도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너무 어렵고..

- 정일도 : 편입이나 직장 생활 같은 거 아닐까?

- 정일도 : 내가 바꿀 수 없다면 이적밖에는 답이 없지

- 정일도 : 형 뭐야 설마

- 나 : 아니야

- 정일도 : 형 절대 안돼 진짜 형 팬분들이 형만 보고 있는거 알지

- 나 : 아니야

- 정일도 : 형 형 진짜..

그냥 채팅창을 닫았다.

숙소의 콘솔 위에는 처음 만난 날 김예성이 준 일회용 온열 안대가 있다.

포장을 뜯으니 금방 뜨끈해진다.

나는 눈 위에 안대를 올리고 잠을 청했다.

#

빅스는 승패 관리에 꾸준한 팀이다.

성남 스톰이나 인천 트릭스터 등의 팀과의 매치에서는 지더라도 2:1로 득실차를 아끼고.

이길만한 팀들에게는 꼼꼼하게 셧아웃을 챙기면서 상위권을 유지했다.

선수들의 태세 전환이 무척 빠르고, 새로운 전략을 자주 꺼내는 편인 팀이기도 했다.

올 시즌, 라인전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으나 한타력이 아주 좋다는 평가.

팀원들간의 합도 좋다.

선수들 간의 케미를 강조한 콘텐츠나 다양한 외부 활동 등으로 높은 인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와, 얘네 이 쪽이랑 프로모션 했나.”

“뭐야? 껌 아니야?”

“응. 빅스의 집중력, 캔디 팝과 함께.. 광고?”

“광고 같은데.”

수요일 5시.

서울 빅스와의 경기 날.

선수들은 경기 대기실에서 제공받은 간식거리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 내 껌은 토이.”

껌 포장지에는 각 선수들의 사인과 사진이 새겨져있었다.

LOS 리그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종종 선수들이 광고 계약을 맺곤 했지만 그 범위가 아주 넓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빅스는 모기업이 식품 산업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내 건 리벤지.”

윤도형의 손에 쥐여진 껌에는 빅스의 미드, 이지원.

리벤지 선수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와. 이거 상품 되게 빨리 뽑았나보네?”

이지원도 원래부터 빅스 소속.

그래서 충분히 빨리 광고에 투입 될 수 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스토브 리그가 끝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광고 모델 계약과 필요 절차, 실제 상품 생산과 공급까지의 시간을 상상하던 김예성은 스스로가 별로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 혹시 이거 판박이 되냐?”

“안되는 것 같은데? 왜?”

“내 발바닥에 붙여놓으면 오늘 그냥 이길 것 같아서.”

“개더러워.”

곽지운과 최은호가 이야기하는 사이.

김한빛 코치는 김예성과 오늘의 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미드를 강하게 가져가기로 했던 거. 기억하지?”

“네.”

“괜찮겠어? 혹시 컨디션 나쁘면 플랜 B로 틀어도 괜찮아.”

“괜찮아요.”

김예성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물 좀 마셔.”

김 코치는 물을 가져다 준 뒤 잠시 자리를 떴다.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권건이 옆에 앉아있었다.

“집중이 잘 안 돼?”

권건은 항상 그렇듯이 높낮이가 없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괜찮아.”

“내가 인간관계에 닳은 게 많아서 잘 못 느끼는 편인데. 너 빅스랑 잘 안 맞았지?”

김예성은 잠깐 머뭇거렸다.

너무 투박한 질문이었다.

“빅스는 사생활이란 게 없잖아.”

어떻게 알았지.

김예성은 고개를 들어 권건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권건은 선수들이 내려놓은 껌종이들을 정돈하고 있었다.

“팀 스타일이란게 그렇더라. 네가 옷을 고를 때 처럼. 몸에 안 맞을 때가 있더라. 그럼 갈아입으면 되는거야.”

피드백 시간을 제외하고 권건이 이렇게까지 길게 말한 적이 있었나.

그래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니가 원하는 스타일로 갈아입어. 팀 스타일도, 플레이 스타일도.”

권건이 서툴게나마 마음을 써주고 있다는 점.

“그..”

김예성은 느닷없이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을 더 아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오프닝이다.

시뻘개진 얼굴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적하고 잘 안풀려서 불안했지.”

껌종이들을 다 챙긴 권건은 가볍게 손에 힘을 줘서 여러 장을 한꺼번에 찢었다.

“이제.”

훌쩍 일어난 권건이 쓰레기통에 종이를 버린다.

“나가자. 경기장으로.”

김예성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네가 누구인지 보여주자.”

분명 동갑일 팀원의 등이 한없이 커보였다.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