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화. 놈을 쫓아!
상대가 실수한 것을 찾자면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나를 탈탈 털어먹으려던 것 치고는 과감하지 못했고.
“예성아, 나 들어갈 때 티나게 무빙 쳐도 돼.”
“티나게?”
“어차피 저쪽도 준비했던 거라 알거야. 일부러 알려줘.”
“오케이.”
“대신 내가 안 들어갈 때도 봐주려는 것처럼 무빙 쳐줘. 시야 체크는 내가 할
게.”
“오. 좋네.”
그 다음 실수는.
실제 벌린 차이에 비해 나를 적극적으로 공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텀은 사리면서 한다?”
“네. 지원 필요하면 콜할게요.”
협곡에 나쁜 챔피언은 없다.
같은 메타 아래에 쓸 수 있는 챔피언이라면 레벨과 아이템의 차이가 챔피언의
가치를 가른다.
“형들.”
지금 이건 릴리야 대 헤크림.
말 대 말의 싸움이다.
경주에서 승리하는 것은 누가 될 것인가?
“어어, 건아.”
“정글 침투 작전 개시.”
이른 타이밍에 정글을 뺏는다.
처음에는 상대도 욕심내지 않고 양보한다.
“다음.”
동선을 낭비하지 않고 빡빡하게 돌린다.
“헤크림이 먹을 게 없어요! 라온 선수가 아직까지 미드 주도권을 꽉 쥐고 있
습니다. 합류에서 차이가 나서 정글링이 불안해요.”
“다음 캠프로 가보지만 찌꺼기만 남아 있습니다! 정글 CS차이가 너무 벌어지
고 있어요. 권건 선수, 정글 압박의 정석이에요!”
“탑으로 가나요? 하지만 라인이 깊어요! 헤크림의 궁극기가 없어서 다이브를
치기에는 어려울 것 같죠? 어떻게든 레벨이라도 맞춰가야해요!”
탑이 얻어터지고 있지만 괜찮다.
어차피 상대 정글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몇 번이고 캠프를 쥐어짠다.
헤크림에게 밀고나가는 힘이 있다면 릴리야는 좀 더 속도감이 있다.
분홍색 1번마, 파란색 2번마를 제치고 앞서나갑니다.
“예성아, 아래쪽으로 무빙.”
“오케이.”
상대방이 시간과 렌즈를 낭비한다.
다시 정의로운 도둑질을 하러 간다.
양보가 계속되면 호의다.
감사.
“바위게 방향 조심.”
피닉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챘다.
생각보다 헤크림이 많이 털리기 시작하자 상대 바텀에서 급하게 지원을 나온다.
“합류 필요?”
“아뇨. 라인 이득 챙기세요.”
약간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바위게의 무빙이 나를 돕
는다.
상대도 강타를 써보지만 나와 강타 싸움을 하는 건 10년은 이르다.
바텀이 합류하기 전에 바위게를 뺏어버린다.
“피닉스의 바텀 듀오가 올라왔지만 릴리야가 너무 날래요. 별 다른 소득 없이
복귀합니다!”
“이러면 라인이 좀 타버렸는데요? 너무 아쉽습니다! 이거 하나하나가 스노우
볼이에요!”
“헤크림이 바텀에서 대기합니다. 상대 스펠이라도 빼 보려는걸까요!”
“일단 경험치를 나눠먹는 게 시급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도리어 죽을 가능성
이 있어요. 그러면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피닉스, 좀 더 참아야해요!”
헤크림은 쑥과 마늘을 먹고 사람이라도 되고 싶다.
라이너들 곁에 서서 경험치 고혈을 빨아먹는다.
“쟤 저기서 대기하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하는 중.”
“헤크림이 너 고소하겠다.”
똥차가 되어버린 헤크림은 던지고 싶은 기분일거다.
하지만 아직 미드 녹턴은 궁극기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먼저 주먹을 뻗었으면 자기도 얻어맞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지.
게임은 이제 시작이다.
#
“시발. 이거 킹상치 않다.”
“시야 투자 좀 더 해야할 것 같은데. 레오니로 여기 붙어줄 수 있어?”
“오키. 근데 너 왜 아직도 5렙이냐.”
“쏘리.”
피닉스의 정글러 안승현은 넋이 나갈 것 같았다.
“혹시 게임 패치됐냐?”
“또 뭔 소리야.”
“내 헤크림만 패치 전인 것 같은데. 존나 약함.”
“선생님. 정신 차리시고요, 이제 라인에서 좀 떠나주시죠?”
“나 홈리스야. 경험치 좀 먹고 가자.”
“나도 망한다고! 레드 달라고 안할테니까 그거라도 챙겨.”
조금만 더 여기서 뭉그적거리다가는 원딜러 왕준군에게까지 갱을 당할 것 같
아서 다시 길을 떠났다.
오늘따라 마우스가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싸움 몇 번 잘 걸면 가능성 있어. 보여주자.”
격려하는 서포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한 귀로 흘렸다.
어떻게 저렇게 빠르지..
경기인데 핵 쓰나..
왜 벌써 코어가 완성됐지..
이거 내 캠프 또 없나..
없네.
어쨌든 길 잃은 헤크림은 울며겨자먹기로 정글로 돌아갔다.
그러나 배가 고픈 건 똑같았다.
#
“여기서 보니까 왜이렇게 불안해보이냐.”
“녹턴 픽이요? 지금 너무 잘 풀어나가고 있는데요.”
박진현 감독의 중얼거림에 최수철 코치가 냉큼 대답했다.
가속도가 붙은 권건의 릴리야다.
헤크림이 혼자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피닉스의 각 라이너들의 정글러를 도와줄만큼 사정이 좋지 않았다.
탑 냐르가 발이 풀려있지만 미드 녹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일이 벌써 15년차다. 근데 15년 내내 그래.”
“감독 경력이 코 흘리면서 게임 하던 것까지 포함하는 거였나요?”
“절대 코를 흘릴 정도로 어리진 않았다..”
“그러시겠죠. 형님은 나이가 좀 들었으니까.”
최 코치를 흘겨본 박 감독은 의자에 다시 몸을 기댔다.
“차라리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나도 축구 감독처럼 소리라도 지를 수 있
으면 나으려나.”
“글쎄요. 야구처럼 벤치 클리어링 같은 게 있다면 그 때는 도움이 되실지도
모르죠. 아. 안되려나. 평소에 운동 좀 더 하세요.”
“야, 너 진짜.”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김한빛 코치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우리가 여기 앉아서 이런 게임 보면서 잡담을 한 게 얼마만이죠?”
“그러게. 한 마디라도 하면 큰일 나는 것 처럼 아무 말도 못했으니까.”
“지고 있으니까요.”
“후, 오늘 패기 좋다. 그래. 이번 판, 지면 어떻냐. 밴픽만으로도 갚아줬으니
까 됐다.”
그 때, 옵저빙 모니터에 헤크림을 향해 접근하는 릴리야가 보이고.
권건의 보이스가 들려온다.
“예성아. 궁 준비.”
“어디?”
“상대 레드.”
“확인.”
헤크림이 불안한 마음에 최대한 뒤로 몸을 빼는 무빙을 보였지만 소용없었다.
“위험해요, 헤크림, 아!”
“결국 이 그림이 나오고 마네요! 릴리야의 선공과 함께 들어오는 녹턴의 합
류! 불이 꺼집니다!”
이미 움직임이 느려진 헤크림은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지원가기가 힘들어요! 불이 꺼졌습니다. 마피아는 고개를 들고..!”
“헤크림이 아직도! 아직도 6레벨을 못 찍었어요! 레드만 먹었어도! 6레벨이
됐을텐데! 쫄딱 망해버렸습니다, 쫄딱 망했어요!”
한참을 굶었던 헤크림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던 레드가 멀어지고.
“릴리야와 녹턴은 추격의 대가죠! 도망치지 못하고, 여기서 결국 킬을 내주고
맙니다!”
드디어 환성이 터져나온다.
분명히 유리한 경기지만 기세를 굳히기에 킬 스코어만큼 확실한 지표는 없다.
- 순식간;;
- 이거 맞냐? 왜 2렙 차이 나는데?
- 헤크림 다이소 템트리ㄷㄷㄷ
- 이거네 이렇게 쓰는거네
- 똑같은 말인데 저쪽은 왜 육식이고 우리는 초식인데
- 비건 선언한듯
- 신인 존나 예리한데ㅋㅋㅋㅋㅋ 숨도 못쉬게 겜하네
- 겜 벌써 터진 것 같은데;;
“수철아, 봤니?”
“네.”
“내가 애들 믿고 있다고 했지? 거봐! 잘 하잖아!”
“감독님 방금 전까지 불안해하고 계셨는데요.”
“내가? 언제?”
“진짜 나이가 드셨나?”
“그런 말 해도 안먹혀.”
삼십대 중반의 박 감독은 이십대 후반의 젊은 코치 앞에서 빵긋 웃어보였다.
박 감독이 불안해했던 미드 녹턴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상대가 녹턴을 기용했던 전 판과는 확실히 긍정적인 양상이다.
어느새 코치 박스 안의 모든 사람은 입을 닫았다.
이미 권건의 다음 오더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
해설진도 순식간에 기울어진 전황에 목소리를 높였다.
“비상! 비상입니다! 큰일 났어요! 이 그림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거든
요! 녹턴이 궁이 돌아올 때마다 또 똑같은 그림이 재현될 겁니다!”
“ FWX는 준비해온 계획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어요! 용까지 먹고, 무사히 빠
집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정말로, 헤크림이 완전히 망해버렸어요! 여태까지는 굶었
지만 마실 물은 있다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물마저 말라버렸습니다!”
하지만 밸류가 올라간 릴리야의 압박으로 피닉스의 탑도 더 이상 이점을 가지
기 힘들었다.
어디서 출발한 것일지 모르는 데굴데굴 씨앗이 자꾸만 굴러온다.
곧 갱을 올 거라고 생각해서 뺐는데 오지 않는 게 반복된다.
문봉구의 요른은 긁히고 긁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꺾이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요른이 하루종일 맞고 있는.. 아, 데굴데굴 씨앗! 기가 막히게 적중합니다!
그 위로 요른이 뿔피리를! 부우우우우우! 안돼요, 도망칠 수 없어요!”
이번에는 진짜 근처에서 굴러왔던 씨앗이었다.
피닉스의 도장훈은 아차했지만 이미 늦었다.
“한 수 앞에서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탑에서 냐르가 죽는 사이 드
디어 헤크림이 6레벨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빠르게 굴러갔다.
“이번에는 용 뒤쪽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녹턴과 헤크림이 눈을 마주쳤습니
다!”
“맞춰놨어. 난 지금 궁 쿨이야.”
“깍지! 묶어줘!”
녹턴이 붙기 시작하자 헤크림은 스펠을 사용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궁극기가 없으니 충분히 떨쳐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첫 번째 세트의 피닉스가 그렸던 그림처럼.
멀리서 개입한 진으로 순식간에 헤크림의 발이 묶인다.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바텀에서 편안하게 플레이하던 곽지운의 진이 커튼콜을 펼친다.
“나갈 때는 아니란다.”
“하나!”
“놈을 쫓아!”
“두울!”
“얼마 가지 못했을 거야!”
“세엣!”
시야 지원과 함께 총탄이 시원하게 헤크림을 때린다.
“여기!”
하지만 마지막 한 발은 아끼고 아꼈던 궁극기를 도주기로 사용해버린 헤크림
의 꼬리를 스쳤다.
“아슬아슬하게 살아.. 나갔습니다! 아, 진의 지원으로 헤크림의 궁극기가 빠
집니다. 이거 너무 아쉬운데요. 곧 있을 한타에서 힘이 쭉 빠질 것 같습니다!”
“일단 궁 뺐어.”
곽지운이 만발에 실패하며 결국 헤크림은 도망쳤다.
“정말 간신히 숨만 붙어있어요. 모든 스펠이 다 빠지면서 헤크림이 또다시 암
흑기를 맞았습니다!”
“이미 게임이 너무 기울었어요. 미드가 뻥 뚫려버렸습니다. 이제 아자르의 슈
퍼 토스에 모든 걸 거는 수 밖에 없어요! 슈퍼 토스! 해 줘! 해 줘! 제발!”
“하지만 시야 차이가 너무 심한데요! 마치 녹턴 궁이 계속 켜져있는 것처럼
아무데도 나갈 수가 없어요. 아, 어떻게 해야하죠 피닉스!”
시간이 흐를수록 게임은 압도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감독님, 우리 뭐 피드백거리라도 적어야 하는데. 하하핫!”
“피드백 할 게 어딨어. 나한테 저 조합 쥐여줘도 내가 저렇게 못할 것 같은데.”
말과는 달리 감코진은 노트 위로 손을 열심히 움직이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저는 적을 게 있어요.”
“응? 그게 뭔데.”
“우리가 미드 녹턴도 쓸 수 있게 됐다는 거..”
“맞네! 하하하, 내가 그걸 깜빡했네. 하마터면 중요한 정보를 빼놓을 뻔 했
어. 하하하! 좋은 지적이야!”
어느새 박 감독은 밴픽에서 실수를 한 게 아닐까 하던 걱정을 깨끗이 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