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왜 설레냐?
“야! 지금 싸움 보자! 나 궁 있어!”
탑 요른은 없는 궁이 있다고 한다.
[ 위험해! 말에서 내려서 도망쳐! 어? 네가 말이라고? ]
정글 헤크림은 옆에 붙어있는 악마 때문에 괴롭다.
“빨리! 얘 스펠 다 빠짐!”
미드 오리안느는 상대 스펠이 있어도 없다고 한다.
“얘들아 조금 느긋하게 보면 좋을 것 같아. 나 아직 점프가 안돌아와서..”
원딜 트리는 말이 길어서 정보 전달이 느리다.
“저, 저, 저, 그 저, 그거!”
서폿 레오니는 말을 할 줄 모른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상대도 엉망진창, 우리도 엉망진창.
우리만큼이나 빅스의 연습실도 아수라장이 됐을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게임은 정신없이 흘러갔고, 우리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오늘의 스크림은 여기까지.
두 팀 모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자리를 정리한 감독님과 선수들은 카페테리아로 모였다.
승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모두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의 감독님만 빼고.
“자, 수고들 많았다.”
감독님이 스태프가 주문 받아 가져다 준 음료를 나눠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어땠니.”
아무도 입을 떼지 않자 감독님이 지호를 지목했다.
“지호야. 어땠어?”
“저는. 그러니까. 음. 상대가 쉬웠던 것 같아요. 근데 더 잘했으면 좋았을것
같아요.”
지호는 여전히 감독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지만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창민이는.”
“누가 로밍 좀 와줬으면 몇 번 더 땄을것 같아서 아쉬워요.”
그렇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의견을 물은 감독님은 잠시 턱을 괴었다.
대부분 우리가 싸움은 우리가 더 잘했다, 등의 의견이었다.
감독님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상대가 쉬웠던 게 맞는 것같아요.”
“지호랑 같은 의견이야?”
고개를 저은 내가 말을 이었다.
“아뇨, 상대는 탑 주도권이 있었는데도 오브젝트를 쉽게 양보했어요. 이쪽의
성장 기대값이 더 높은데 타이밍을 놓친거죠.”
그리고 나는 그걸 다 챙겼고.
감독님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 봐봐. 지금 여기 내 음료수 보여?”
감독님의 초코 라떼는 손을 대지 않아 여러 층으로 나뉘어있었다.
“지금 이게 너네 상태야. 아직까지 우리는 팀 게임을 하지 못하고 있어.”
감독님이 빨대를 꽂더니, 휘핑크림부터 초코 시럽까지 한번에 휘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드는게 내가 할 일이지. 오늘은 첫 스크림이니까. 수고 많
이들 했다. 밥 먹을 사람들 먹고, 휴식하다가 8시에 회의실에서 보자.”
#
양태진 감독은 아내가 챙겨준 건강 도시락을 들고 피드백룸으로 향했다.
경기 자체는 솔랭과 다를 바 없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어, 태양아. 세부 데이터는 어때.”
피드백룸에 앉아있던 구태양 코치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를 반겼다.
구태양 코치의 태블릿 PC에는 분석팀의 손을 거친 자료가 담겨있었다.
“1차 정리까지만 진행됐어요.”
인게임에서 제공되는 데이터는 단순했다.
각각 맡은 바 역할에 따라 KDA(데스 대비 킬+어시)나 DPM(분당 데미지)등은
달라지기 마련이고, 단적인 정보로 선수나 챔피언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감독과 코치는 역할을 나눴다.
코치는 데이터를 확인하면서 지표 흐름을 관찰했고, 감독은 새내기 선수들 뒤
에서 그들의 콜과 흥분도를 체크했다.
“음. 창민이의 오리안느. 생각한 것 보단 분당 데미지가 높네?”
감독이 플레이만 지켜보면서 느꼈던 점들을 데이터에 대한 프레시 아이로 질
문한다.
“창민이가 후반부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딜교를 많이하더라구요. 주도권을 잡
아 준 건 좋은데, 결국 데스로 이어져서 리스크가 커졌죠.”
그리고 코치가 전체적으로 관찰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각자 챙겨온 도시락을 펼치고서 화면 앞에 자리를 잡았
지만, 밥은 먹는둥 마는 둥 하며 데이터와 씨름했다.
첫 스크림이기에 의미가 없었지만 동시에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의 대화는 감정적인 부분으로 방향을 돌렸다.
“일도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
“새 서폿이기도 하고.. 지호가 도발 모션하는 거 보셨어요?”
“응. 아마 그것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 밴픽 땐 말도 못하던 녀석이 완전..”
게임 내의 성격과 일상 생활 속에서의 성격이 다른 선수들이 많다.
이지호는 자신이 좋은 플레이를 했다 싶으면 거침없이 춤추기 모션을 취하고.
처음 만난 상대라도 귀여운 인장을 띄우면서 아는척하고 대기 중일때도 전체
채팅으로 말을 건다.
하지만 이지호와 함께 라인에 서는 정일도는 집중 할 수 있는 환경을 선호한다.
이지호의 행동들이 룰에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그가 상대를 도발하는 모습이
정일도에게 불편감을 줄 수 있다.
구태양은 감독의 말을 메모했다.
“유찬이는 좀 어떻던가요.”
“유찬이? 유찬이가 유찬이 했지. 요른으로도 들이박을 줄은 몰랐다. 근데 즐
거워하더라.”
이유찬은 탱커 메타가 다가올 수록 힘들어하고 있었다.
공격적인 스타일과 수비적인 스타일에서 스위칭이 잘 되지 않는 점이 좀체로
해결되지 않는다.
“오늘은 플레이가 꽤 괜찮아 보였어.”
“라인 상황 안봐가면서 들이박는데, 건이가 그 때마다 라인 커버를 잘해줬죠.
그래서 손실이 적더라구요.”
“건이가 스킬 배분이랑 스택 관리도 기가 막히게 하던데.”
권건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태양아, 너도 나랑 같은 생각하지.”
“맞아요. 저도 건이가 와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지하던 양태진의 얼굴이 스르르 풀렸다.
“걔 진짜 괜찮던데? 헤크림 장인인가?”
“아뇨. 솔랭 돌리는 거 보니까 폭도 넓은 것 같아요. 제출한 서류에서도 그랬
고.”
“콜도 잘하던데. 필요한 말만 딱딱 하고, 상대 정글 위치도 잘 맞추고.”
두 사람은 이제서야 첫술을 떴다.
양태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너무 설레발이냐? 왠지 복권 당첨일 것 같아.”
마음대로 기대했다가 생각만큼 되지 않아 괴로운 일은 흔했다.
“저도 좀 설레요.”
“너까지 설레면 어떡해. 너는 냉철하게 분석을 해. 니가 잘해야 우리 코치 한
명 더 뽑지.”
말은 저렇게 해도 항상 구태양이 힘들어하지 않을까 도와주는 양태진이다.
구태양은 짐짓 못이기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형님이랑 둘이 하는 것도 괜찮은데요. 옛날 생각도 나고.”
“어허, 감독님이라고 불러.”
두 사람은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식사를 마친 선수들에게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중국어 책을 보려다가 다시 덮었다.
왜 중국어 공부를 하냐, 중국 진출이 목표냐 같은 질문이 피곤할 것 같아서다.
절대 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가 아니다.
정말로.
사옥의 휴식 공간은 넓고 쾌적했다.
FWX의 다른 게임 팀들도 모두 사용하는 공간이었는데, 편하게 쉴 수 있는 장
소들과 녹색 식물들로 가득했다.
이전 팀이었던 스톰의 시설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서울에 있었기에 협소했다.
반면 FWX의 사옥은 설계 과정부터 큰 규모로 설계한 티가 났다.
그 중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바로 트로피 전시대.
한쪽 벽면을 따라 각 팀들의 우승 기록과 트로피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LOS
팀의 칸에만 트로피 대신 챔피언 피규어와 브랜딩 피켓이 놓여있었다.
“우리가 저기에 월챔 트로피 채우자.”
언제 다가왔는지 유찬이가 나를 툭 치며 말했다.
“음.”
나는 그렇게까지 여기 오래 있을 생각은 없는데.
시설도 마음에 들고 감코진도 생각보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인 것 같지만, 글쎄.
2군에서 1군을 가고, 그 후 1군에서 또 우승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거의 꼴찌인 이 팀에서라니.
“1군으로 올라가는게 먼저 아니야?”
우승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날카로운 말투가 나왔다.
하지만 유찬이는 신경쓰지 않는듯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도 우승하고, 1군에서도 우승하고. 다 박살내버리는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을 피했다.
[ 얘가 아까 너한테 아이템을 선물했던 빨간색 산양이었지? 괜찮은 녀석이네. ]
‘빨간 산양이 아니고, 요른이요.’
릴리는 나를 지켜봤다고 하지만 LOS에 대해서 아는게 거의 없다.
[ 산양 아니야? 뿔이 있고 귀여운 얼굴이잖아. 선물도 주고, 착한 산양! ]
‘선물이라기보다는..’
“꿀팁. FWX 특, 화장실에 온수 비데 있음. 나 똥 싸고 피드백 감!”
유찬이가 먼저 일어났다.
[ 난 쟤 맘에 들어. ]
릴리는 유찬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선물 주는 산양 때문일까, 똥 때문일까 모르겠네.
#
“자. 앞으로 스크림이 끝나면 이렇게 모이는 시간이 있을거야.”
감독님이 차근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오늘의 데이터 이야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몇몇 선수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가 꼭 지켜야할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생각이야. 너희는 2군에서의
생활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아니요..”
지호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그래. 2군은 1군으로 가기 위한 요람이다. 너희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여기서는, 일반 플레이어의 모습을 벗고 완전히 프로게
이머가 되어야 하는거지.”
감독님은 눈을 빛냈다.
자신의 팀을 요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니, 어떤 의미론 대단하다.
내가 머물렀던 팀 중에서는 은근히 1군 감독의 자리를 노리며 경쟁 구도를 짜
는 감독도 있었고, 완전히 다른 리그라고 생각해서 콜업이 될 경우 선수를 빼
앗긴다고 생각하는 감독 들도 있었다.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건 이거다. 서로 반말을 해라.”
뭔가 중요한 말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말에 선수들의 눈이 동그
래졌다.
“반말요?”
“그래. 형이라고 부르지 말라는건 아니야. 이건 첫번째 규칙이다.”
몇몇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번째. 콜 규칙을 다시 기억해. 이건 계속 복습할거야. 콜은 짧고
정확하게.”
팀마다 콜의 디테일은 달랐지만, 감독님이 말하는 것은 아주 기본이 되는 내
용이었다.
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프로와 일반 유저의 차이점이 있다면 ‘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반 유저가 5:5 게임을 구성하는 것은 쉽지 않다.
또 그 열 명이 팀 별로 보이스 채팅을 하는 상황 역시 찾기 어렵다.
프로는 콜을 통해 판단을 하고, 협업하며, 신뢰를 쌓는다.
“콜에 대한 내용은 계속해서 알려줄게. 하지만 오늘 스크림에서 너희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했지.”
“그러면 콜 말고는 한마디도 안해야하나요?”
손을 반 쯤 들어올린 창민이가 질문을 던졌다.
감독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게임 내내 집중할 수는 없지. 게임에 관한 수다도 괜찮아. 그렇지만
바짝 집중해야할 타이밍이 있을거야. 모두 알고 있지?”
“싸움 났을 때요?”
“비슷해. 싸움 났을 때, 그리고 싸움을 준비하고 있을 때. 그 때는 더 신경
써주길 바란다. 이건 하루아침에 되지 않을거야.”
감독님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지막으로, 서로 칭찬하고 고마워해라. 잘했다고 이야기해줘. 좋든 싫든,
우리는 한 팀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