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그만두고 싶은 프로게이머
어두컴컴한 시야가 밝아지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내 방이다.
매번 그렇듯이 겨울 기온이 느껴지는 쌀쌀한 방 안.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도 못했고,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는 2군 선수 시절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눈 앞에 귀여운 소녀가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 너, 이 개똥같은 놈아! ]
놀란 것도 맞지만 보자마자 느낌이 왔다.
이 아이가 나를 회귀시킨 존재구나.
수십년의 시간동안 불러도 나타나지 않던.
“저,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내 무릎이 자존심도 없이 앞으로 푹 꺾인다.
[ 어? 아니, 어림도 없지! 넌 우승을 하고 싶다고 했고, 우리의 계약은 그 때
시작됐다! ]
소녀는 턱을 들어 더욱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이것도 소원이에요.”
[ 당연히 안된다! 이미 성립된 계약은 대악마님이 오셔도 바꿀 수 없어! ]
뭐야, 그럼 어쩌라고.
이 회귀의 지옥 속에서 얻은 거라곤 토할만큼의 LOS 경험과 눈치 뿐이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의자에 앉았다.
“그럼 왜 왔어요? 짜증나게.”
[ 죽고 싶으냐! 감히! ]
“이렇게 사는거나 죽는거나.”
[ 그건..! 그래도! 넌, 예전에는 우승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지 않았더냐! ]
“그 때는 우승이 이렇게 어려운건줄 몰랐죠. 진짜 아깝게 떨어진 건 줄 알았
더니.”
언제였더라.
2026 LOS 리그 월드 챔피언십.
나는 예선에서 떨어지면서 간절하게 바랐더랬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승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지만 예선 위에는 본선이 있었고, 그 위에는 더 강한 팀들이 도사리고 있
었다.
나비 효과인지 월챔에서 만나는 팀은 종종 달라졌지만 그들이 강한 것은 변함
이 없었다.
그렇게 살고, 또 살고, 삶에서 얻어낸 추억들을 잃고, 또 돌아온다.
나는 지금도 스무살이었지만 사라지는 삶을 내 나이보다 더 많이 반복했다.
“솔직히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은데요.”
[ 너 중간중간 놀기도 했잖아! ]
“그건 휴식 기간이죠. 안식년 몰라요?”
[ 그럼 이제 다시 힘을 내야지! ]
왜 이렇게 순진한 소리를 하실까.
“세상 만사가 다 그렇게 굴러갔으면 누가 삶이 어렵다고 해요.”
[ 나는..! 나는..! 너만 믿고..! ]
소녀의 얼굴은 숫제 울상이다 못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내가 왜 위로를 해줘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울고 있
는데 뭐라고 하기도 어렵다.
울고 싶은건 난데.
그래도 나는 티슈를 몇 장 뽑아 건넸다.
[ 크응! ]
티슈를 든 내 손을 본척도 하지 않고 옷자락으로 눈가를 훔친 소녀가 입을 비
죽거렸다.
[ 너, 쉽게 가려고 마음 먹고 있지? ]
어떻게 알았지.
이제 예전의 열망은 온데간데 없고 이 회귀를 마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번엔 중국으로 건너가서 일을 좀 쉽게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맞아요. 우승하려면 그게 제일 빠를 것 같아서요.”
[ 안된다. ]
“왜요?”
[ 그런 식으로 우승하는건 안돼. ]
“제 소원에 그런 내용 없었잖아요. 우승하면 서로 좋은거 아니에요?”
[ 아니! 그건 안돼. 아무튼 안돼! ]
“제가 쉽게 우승하면 안되는건가요, 아니면 우승을 하면 안되는건가요?”
설마, 아까 대악마 어쩌구 하더니.
나는 영원히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건가?
소녀는 눈을 굴리며 무언가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했다.
[ 쉽게 우승하면 안돼. 너는 승리를 욕망하고, 좌절하고, 갈망하고, 열망을
불태워야한다. ]
무한 열차는 아니라니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승이 아니라 나다.
“이제 그런 열정이 없는데요. 하기가 싫어요.”
[ 그럴수가..! ]
앙증맞은 입술 사이로 금방이라도 나를 물 것같은 뾰족한 이가 드러났다.
그르릉, 새끼 짐승같은 소리를 낸다.
생각보다 별로 무섭지는 않은데.
뭐가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졌다.
“그럼 설명을 좀 해주세요. 왜 제가 열망을 불태워야 하는거죠?”
[ 그건 말해줄 수 없다! ]
“그러지말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 좋잖아요. 혹시 알아요? 이유를 들으면
제 마음이 바뀔지.”
[ ..정말이야? ]
“그럼요. 이미 성립된 계약은 대악마님이 오셔도 바꿀 수 없다면서요.”
의표를 찔린 듯, 소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내가? 그런 말을 했어? ]
“아까요.”
[ 그.. 그러니까, 너. 이건 비밀이다. ]
생각보다 상대가 순진한 것 같다.
뭐, 말 할 곳도 말 할 생각도 없지만.
조금 더 달래볼까.
나는 서랍 안에 들어있던 초코바를 꺼내서 건넸다.
“그럼요. 우린 한 배를 탄거잖아요. 절 지켜보신 거 아닌가요? 저 그렇게 나
쁜 놈은 아니잖아요. 계약인지 뭔지를 하셔도 되구요.”
소녀는 옆으로 메고 있던 가방의 끈을 풀어서 내 쪽으로 내밀었다.
[ 여기 넣어. ]
그리고 가방으로 초코바를 받고, 다시 가방에서 초코바를 꺼내 입에 물었다.
[ 아무튼. 네 말이 맞다! 그러면 너의 열망을 위해, 조금만 설명을 해주도록
하마. ]
“네네.”
[ 나는 인간들의 열망을 모아야해. 순수할 수록 좋아. 그래서 여기로 왔지.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뜨거운 스포츠! ]
비밀이니 뭐니 빼더니 설명을 시작한 소녀는 신이 나보였다.
“왜 하필 여기를 선택하셨어요? 혹시 LOS를 관장하는 신이나 그런건가요? 온
라인 게임도 신이 있어요?”
[ 신이라니! 언젠가는 나도 마신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빨리 제대로 된 악마로 인정받고 싶어. ]
소녀는 잠시 행복한 듯 몽롱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시무룩한 얼굴을 짓고 고
개를 저었다.
[ 이 이야기는 됐어. 그리고 축구라던가 야구같은 스포츠에는 이미 다른 악마
들이 많아서.. 자리가 없어. ]
뭐 이런 황당한 말을.
“그럼 LOS를 모르고 선택하셨다는 건가요?”
[ 아니, 아예 모르는건 아니야! 하지만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젊은 인간들
이 잔뜩 모여서 소리를 지르면서 열망 에너지를 뿜어내는 곳을 발견했지. ]
초코바를 다 먹어치운 소녀가 쓰레기를 던지자 허공에서 사라졌다.
오, 이건 좀 무서운데.
진짜 초능력같은거잖아.
[ 그리고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했고, 네 소원을 들었던거지! ]
“좋은 선수들도 많은데 하필.”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소녀는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깜짝이야.
소녀가 말간 눈으로 나를 들여다봤다.
[ 그래도 이번엔 결승전까지 갔잖아. ]
“결승전까지밖에 못간거죠. 우승을 해야지. 우승도 못했는데 무슨.”
방금 전에 꼭 격려받은 것 같았는데.
악마에게 격려라니, 착각인가?
악마들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거 아니었어?
하긴, 솔직히 이게 지옥이라면 지옥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보다 괜찮은 곳
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제한 없이 활력 넘치는 20대 초반을 반복한다.
내가 늙어 죽어서 벌로 이런 곳에 떨어졌다면 즐겁게 살 수 있을지도.
지겹고 힘들긴 하지만 우승을 하면 지옥에서 나갈수도 있고.
“그럼 제가 그 쪽에게 열망을 빼앗겨서 의지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요?”
[ 나는 열망을 빼앗아가지는 않아! 그냥 그게 내 것도 되는거지. 그러니까 투
정하지 말고, 다시 열심히 하란 말이야! 우승만 하면 놔줄테니까. ]
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소녀는 다시 방방 뛰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가 에너지의 동력원같은건가?
기분이 묘하지만 내심 반가운 기분이었다.
인과도 알게 됐고, 상대는 내 영혼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감정? 열정? 뭐 그런 걸 바라는 것 뿐이다.
무엇보다도.
의미없이 잊혀졌다고 생각한 시간들을 누군가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기운
이 나는 느낌.
상대에게 목적이 있건 아니건, 이 시간 속에서 정말로 혼자는 아니었다는 느낌.
그런다고 없던 의욕이 마구 생기지는 않지만.
“그럼 무슨 능력이라도 줘봐요. 상태창 같은 거. 그럼 나도 열정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 뭐?! 이미 적자야! 네가 열심히 하지 않아서 내 힘도 바닥이라고! 시간을
되돌리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기나 해? 조금 열심히 하는가 싶다가도 안
식년이라며 쉬어버리고!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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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말을 들어보니 이 시대의 악마들은 그리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에 비해 “순수한 열망”의 폭이 늘어 났고, 규율과 문화의 발전으로 이전
보다 위험한 열망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악마들은 어떠한 계약을 통해 대상과 관련된 열망과 부산물들을 소유하고 그
것이 자신의 힘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 열망을 이뤄낸 강한 희열을 얻어내며 계약을 종결한다.
예를 들어 축구 선수의 우승이라던가,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 대학원생의 졸
업하고자하는 욕망.
그만큼 오래 걸리고 쉽지 않은 것들이다.
“릴리님.”
소녀는 자신의 이름은 알려줄 수 없다며 릴리라고 부르라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더니 꽤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두려운 기분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다.
“저 방송하던 것도 지켜보고 계셨어요?”
[ 선수 생활 때려쳤을 때? 다 봤지. 그래도 제법 이런 저런 욕망들이 모여서
그건 나쁘지 않았어. ]
릴리는 내 방 구석에서 큐브와 씨름하고 있었다.
회귀를 한지 며칠이 지났지만 릴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계속 욕망이 어쩌구 잔소리를 하긴 하지만, 이것저것으로 흥미를 돌렸더니 조
금 덜하다.
[ 너, 자꾸 딴청부리는데. ]
“쉬어가면서 해야한다니까요, 번아웃 몰라요?”
[ 번아웃? ]
릴리의 표정이 멍했다.
지겹고 힘든일이지만 우승을 향한 내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이루고싶은 꿈이고 간절한 바람이다.
저 악마도 그걸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지금은 손하나 까딱하고싶지 않은걸 어떡해.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릴리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귓가에 대고 소리를 질
렀다.
[ 당장 컴퓨터를 켜! 그리고 게임을 해! 이기고 또 이길 때 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