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호수 중간에 있는 워너힐 아카데미로 들어가는 배편.
이번 연도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식을 위해 수많은 이들이 방문하며 배 안은 북적거리고 있었다.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 소식은 윗사람들 사이에서만 도는 이야기고.
일반 가문들이나 평민들은 알 수조차 없는 정보였다.
그렇기에 세계는 그런 불온한 움직임 속에서도 평소와 같은 일상이 유지되고 있었다.
“저기…… 눈치껏 다른 자리로 좀 가지?”
“갈 거면, 네가 가. 여기 먼저 온 건 나야.”
그리고 그 평화로운 일상에서 부딪친 두 사람이 있었다.
한쪽은 웨이브 진 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다른 한쪽은 검은색 머리카락의 조금 사나운 눈매를 가진 소년이었다.
“저, 저기 봐봐…… 저 머리카락 색이랑 얼굴…… 혹시.”
“영성이다, 분명 영성이야.”
그런 둘을 보고 배에 있던 이들이 놀란 얼굴로 쑥덕거렸다.
영성 마키나 뮤리널.
은색 머리 소녀의 정체였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그녀는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을 위해 이 배편에 올라 있었다.
“그럼 그 옆에는?”
“너 모르냐? 펜타니엄이잖아.”
“페, 펜타니엄? 그럼 혹시 검성?!”
대화를 나누던 한 명이 놀란 듯 외치자 다른 한 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검성은 여자야. 그 검성의 쌍둥이 남동생인가 그럴 거야.”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참.”
뮤리널의 옆에 앉아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펜타니엄 제로.
그들의 추측대로 검성 샬롯의 쌍둥이 남동생 되는 이였다.
샬롯과 같이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제로와 뮤리널이 왜 같이 앉아 있는가.
그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샬롯 때문이었다.
‘이 녀석 옆이면 샬롯이 나타날 거로 생각했는데.’
워너힐 아카데미로 향하는 배편.
뮤리널은 제로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의 옆에 착석했다.
샬롯을 무척이나 좋아하며 따르는 그녀는 쌍둥이인 제로와 샬롯이 같이 왔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샬롯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배는 출발해버리고 말았다.
그 사실에 의아함을 보인 뮤리널이 제로에게 이를 물어보자.
웬걸 샬롯이 자신과 왜 같이 오냐고 되묻지 않는가.
그 탓에 뮤리널은 심통이 나 있었고, 제로는 그런 그녀의 짜증에 덩달아 저기압 상태였다.
“샬롯을 왜 나한테서 찾아. 그 녀석 얼굴 못 본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
“넌 쌍둥이잖아. 하아, 진짜 쓸모없어.”
“쓸모? 이게 돌았나. 야, 입학시험 치르기도 전에 눈물 질질 짜면서 마키나로 돌아가고 싶냐?”
“지금 자기 소개하는 거야?”
제로의 도발을 듣고 뮤리널은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네가 나를?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뮤리널은 제로를 무척이나 같잖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 눈을 마주한 제로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하, 당연히 가능하지. 난 무려 검룡 펜타니엄 서리스의 동생이니까!”
제로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뮤리널을 향해 그리 외쳤다.
지난날 서리스가 월하십인에 올라 검룡이라는 별호를 받았다는 것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가.
오래전, 서리스를 따르기로 다짐한 제로에게있어 자신의 형은 어느새 우상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자신에게 무시당하던 그 형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장해 그 샬롯을 꺾고.
끝내는 가장 큰형인 락스카와 같은 월하십인까지 오른 그 모습은 제로에게, 마치 인간 승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순간 제로는 어째서인지 뮤리널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걸 느꼈다.
그녀라면 분명히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 했을 텐데.
고개를 돌리자 뮤리널은 두 눈을 어디 둘지 모른 채 입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고 제로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냐.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게.”
“어, 으, 아니, 그게 아니라.”
뮤리널은 입안이 바싹 마른 듯 침을 삼키곤 조심스레 물었다.
“……너 서리스 그 사람이랑 친해?”
“당연한 거 아니냐. 친동생인데.”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곤 하나.
제로는 서리스가 샬롯을 꺾은 이후, 그를 무척이나 잘 따랐다.
그런 만큼 서리스도 제로를 동생처럼 대해주었었으니.
제로 말마따나 둘의 사이는 꽤 좋은 편이었다.
“친동생, 그래, 친동생이지.”
뮤리널은 제로의 말을 곱씹으며 눈을 아래로 돌렸다.
그녀는 과거 마키나를 방문한 서리스에게 된통 혼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아직까지도 그녀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하루로 남아있었다.
그녀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진 날이었다.
그래서 서리스의 이름만 나와도 이를 가는 그녀지만 그러면서도 뭔지 모를 두려움 또한 같이 느끼고 있었다.
고작해야 한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그에게 뮤리널은 조금의 반항도 못 하고 무력하게 당했었다.
그날의 기억은 화가 나면서도 그녀에게는 두려움을 심어줬다.
만약 그를 또다시 만나게 되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러 그가 그때와 같이 악귀가 된다면.
뮤리널의 다리가 마구 떨리기 시작했다.
눈 내리는 마키나에서 두 팔을 들고 벌벌 떨고 있던 것은 그녀에게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뮤리널은 마키나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영황 마키나 드웨이진에게 자신이 당했던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날 드웨이진은 서리스를 찾아갔었다.
그런 드웨이진이 돌아와 샬롯에게 말했던 것은 다름 아닌 ‘그와 잘 지내라.’라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자기한테 누군가와 잘 지내라고 하다니.
그녀 인생에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뮤리널은 더더욱 겁먹고 말았다.
아버지조차도 잘 지내라고 하는 인물.
그녀의 머릿속에서 서리스는 세계 침식자보다 더 무서운 인물로 각인되어 버렸다.
“지 혼자 열 받았다가 식기는, 별꼴이네.”
제로는 뮤리널을 보며 김빠진 표정을 지은 채 바깥을 바라보았다.
곧 워너힐 아카데미다.
뮤리널이 좀 뜬금없이 시비를 걸긴 했지만, 제로도 샬롯과 관련해서는 마음이 그리 편하지 않았다.
‘분명 샬롯도 워너힐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러 이곳에 올 거야.’
샬롯은 펜타니엄 가주 자리에 관심이 있다.
지금은 그녀 위에 락스카와 무려 최연소 월하십인에 오른 서리스도 있긴 하나.
그녀에게 포기라는 건, 보기에도 없는 선택지일 것이다.
그런 샬롯이 워너힐 아카데미를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 때문인지 제로는 긴장한 듯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지난 시간.
제로는 청랑단에서 선봉대를 자처하며 활동했다.
비록 서리스처럼 청랑호법이 되거나 하지는 못했었지만.
그는 자신이 무척이나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림자에서 느껴지는 힘은 옛날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샬롯과 맞서 볼 수 있을까?
하다못해 겁먹지 않을 수는 있을까?
제로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온 워너힐 아카데미다.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제로와 뮤리널이 제각기 심란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사이 배가 부두에 정박하였다.
선원들의 말을 들으며 배 위에서 내려온 제로는 긴장된 숨을 한차례 내뱉었다.
시험은 내일부터인 만큼, 하루 일찍 온 셈이다.
그러는 사이 뮤리널도 그를 따라 배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더니 이내 흥하고 고개를 돌렸다.
둘 다 전혀 친해질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뮤리널.”
“아, 오빠.”
그런 순간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그녀의 오빠인 엑스널이 서 있었다.
엑스널은 그녀를 보다가 곧 제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그를 알아본 듯 미소 지어 말했다.
“그쪽 친구가 서리스 후배의 동생인 펜타니엄 제로지? 반가워.”
“형을 아십니까?”
서리스를 친근하게 부르는 엑스널을 보고 제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다마다. 우리 나이대 가장 유명인이고, 나랑 같은 아크 단원인데.”
그 말을 하며 엑스널은 뒤에 ‘악연이지만.’이라고 덧붙였으나 제로는 상관없었다.
마키나 엑스널 하면 제로도 이름을 알 만큼 뛰어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서리스에 관해 좋게 말하고 있으니, 괜히 자신이 뿌듯했기 때문이었다.
“서리스는 안 보이는데, 기다리는 중이니?”
“예, 그렇습니다.”
제로는 서리스가 있는 아라만의 저택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워너힐 아카데미 특성상 입학식에는 사람이 워낙 많이 몰리는 만큼,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로는 사전에 서리스와 연락해 그쪽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아마 정확하게는 앞으로도 거기서 지내다가 맞을 것이다.
아라만 저택이 모습은 좀 그래도 빈방이 워낙 많으니 말이다.
“잘됐다. 뮤리널 너도 서리스가 오면 같이 따라가.”
“어, 뭐, 뭐!? 내가 왜!?”
그러는 순간 엑스널의 말을 듣고 뮤리널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야 네가 앞으로 지내기로 한 곳이 서리스네 저택이니까. 입학한 뒤로도 말이야.”
연이어 들려온 말에 뮤리널이 경기를 일으켰다.
지금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뮤리널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리스의 저택에서 지내라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미쳤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집은!?”
“나는 큰집을 선호하지 않으니까. 집이 좀 아담해. 그리고 내 집에 다른 사람 들이는 거, 싫거든.”
자기 집에 관해서는 결벽증 같은 게 있는 엑스널이다.
그가 저택을 구하지 않는 이유도.
방을 무조건 깨끗하게 유지 시키기 위함인 것을 잘 아는 뮤리널이기에 그녀는 입을 벙긋거렸다.
“서리스 쪽은 저택이라 방이 많아. 애초에 원래도 여러 명이 지내는 구조고 내가 사전에 부탁해놨으니까 거기로 가.”
“싫어! 싫다고!”
“그럼 밖에서 자렴.”
냉혹한 그 말을 듣고 뮤리널이 울상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집 구할 거야.”
“나중이라면 몰라도 오늘은 없어. 애초에 왜 이리 고집이야? 내가 이리한 것도 다 아버지 명이었는데.”
아버지 명이라는 소리를 듣고 뮤리널이 몸을 굳혔다.
애초에 워너힐 아카데미는 입학식만 제외한다면 딱히 집을 구하기 어려운 곳이 아니다.
그랬다면 매년 생겨나는 학생들이 지낼 곳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구태여 엑스널이 뮤리널을 서리스 저택에 부탁한 이유는 순전히 아버지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잘 지내보라는 게?’
뮤리널은 드페리널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곤, 그 자리에 서서 입을 벌렸다.
그녀에게 있어 가주인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로!”
그러는 순간 저 멀리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제로를 반갑게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서발광이었고, 엑스널은 그쪽을 보며 말했다.
“마침 왔네.”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세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등장하자마자 주위 모든 사람의 반응이 달라졌다.
“검룡, 검룡이다!?”
“월하십인이야!”
월하십인, 워너힐 아카데미를 목표로 하는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꿈의 경지 중 하나.
그리고 그런 월하십인을 고작해야 스무 살이라는 나이에 오른 전설 같은 존재.
워너힐 아카데미를 입학하는 학생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사람 일 순위가 바로 서리스였다.
그가 등장한 것만으로 난리가 난 상황 속에서 그가 이쪽을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뮤리널은 마치 맹수를 만난 초식 동물처럼 두 다리를 사시나무 떨듯 떨기 시작했다.
워너힐 아카데미, 굳이 입학해야 할까?
그녀가 그런 의문을 가진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