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똑똑.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에 의자에서 쉬고 있던 윈터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러면서 그녀는 시계를 확인했다.
이 시간대에 오기로 한 사람은 없었을 텐데.
어느 녀석이 간도 크게 약속도 없이 찾아왔으려나.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턱을 괸 윈터가 입을 열었다.
“들어오거라.”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의 휴식을 방해한 당돌한 녀석을 괴롭혀줄 생각이었던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리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그는 다름 아닌 펜타니엄 서리스였다.
윈터가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물 중 하나.
‘호오.’
동시에 서리스를 바라보던 윈터의 눈에 놀라움이 감돌았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저 정갈한 기운 속에서 느껴지는 폭발적인 별.
7성이었다.
이제 막 입성한 듯싶었지만, 그는 잠깐 못 본 사이에 한 단계 더 성장해 있었다.
“혹시 쉬고 계셨습니까?”
“아니다. 어서 들어오거라.”
방금까지만 해도 이 예의 없는 방문객을 괴롭히겠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생각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지고, 윈터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품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운 이였다.
“다행이네요. 저번 일의 답례로 자주 드신다던 술을 좀 사 왔습니다.”
그 말을 하며 서리스가 잘 포장된 상자를 집무실 탁자에 내려놨고, 그 안에는 정말로 윈터가 즐겨 먹는 술이 들어 있었다.
겨울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백포도주로 겨울에만 나는 특이한 청포도로 만들어진 고가의 술이었다.
“꽤나 비싼 거지만.”
“목숨값에 비할 바겠습니까.”
윈터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동시에 그가 이 술을 사 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도 눈치챘다.
“본녀가 이 술을 마신다는 건 그리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 않을 터인데…….”
“아, 발렌타인 님에게 조언을 조금 구했습니다.”
그렇지!
윈터는 쾌재를 불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
자신이 가진 이점을 훌륭하게 이용한 발렌타인을 떠올리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흠흠, 그래서 같이 술을 골라 왔구나. 고맙다. 발렌타인에게도 인사 전해주거라. 아, 그렇지.”
그러면서 윈터는 마치 방금 생각 났다는 양 손뼉을 쳤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비녀 하나를 꺼내곤 서리스에게 건넸다.
“이걸 발렌타인에게 좀 전해 줄 수 있겠느냐. 그 아이에게 입학 선물로 주려 한 것인데, 기회가 없어서 말이다.”
“그러죠.”
서리스가 대수롭지 않게 비녀를 받아들자 윈터는 능글맞게 미소 지었다.
뛰어난 무위를 지녔다곤 해도 그는 아직 스무 살.
자신이 발렌타인과의 접점을 일부러 계속 만들어 주고 있음을 아직 눈치 못 챈 듯싶었다.
‘귀엽구나. 귀여워.’
한창 좋을 때라며 윈터가 웃고 있는 동안 비녀를 받아든 서리스는 그걸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도 윈터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어렴풋이 눈치챈 채로 말이다.
‘아무래도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윈터는 서리스를 평범한 스무 살로 알고 있지만, 그 실상은 아니다.
비록 결혼이나 연애 같은 평범한 삶은 살아 본 적 없는 서리스지만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굴렀던 그다.
윈터가 그를 스무 살이라 생각해서인지 좀 노골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만큼 서리스에게는 그 의도가 훤히 읽히고 있었다.
‘발렌타인 님과는 그런 사이가 아니건만.’
그래도 윈터가 기분 좋아 보이니 그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나 서리스는 알지 못했다.
그가 정치판에서 닳을 대로 닳은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정작 남녀관계 쪽으로는 눈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클로라 때와 같이 직설적으로 행동하면 모를까.
발렌타인은 자신의 감정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살아온 인생에서 연인이라고는 없었던 서리스였으니.
그가 스스로 눈치챌 날은 너무 먼일인 듯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모르겠구나. 스타린 님께서 떠나셨다.”
“예?”
서리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제도 만났었던 스타린이 갑자기 떠났다고 하니 놀란 것이다.
“왜 갑자기…….”
“왜 떠나셨는지 자세한 내용은 말해줄 수 없겠구나. 그저 예전부터 찾던 뭔가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셨다는 것 정도?”
작별 인사도 하지 않으신 건가.
도와주신 빚 정도는 갚게 해줄 것이지.
서리스는 아쉬움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왜냐하면 스타린은 본래대로라면 세계 침식자와의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워너힐 아카데미에 머물렀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바뀌었다.’
자신이 개입함으로써 스타린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그 사실을 아니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무려 마제 올스타드 스타린이다.
자신이 그를 걱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그렇게 홀연히 떠나시는 분이니 그리 신경 쓰지는 말거라.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한테는 괜히 심술부리시거든.”
“그건 좀 겪어 봐서 압니다.”
서리스는 윈터의 위로에 미소를 지어 보이곤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술은 잘 마시마. 그리고.”
서리스의 인사를 받은 윈터는 나이에 맞지 않게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내일 보자꾸나.”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눈치챈 서리스는 쓰게 웃곤 단장실 문을 닫고 떠나갔다.
* * *
새소리가 들려오는 아침.
어느새 봄기운이 느껴지는 햇볕을 느끼며 서리스는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같이 등교하니 좋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는 도로시와 서발광이 함께 하고 있었다.
각 단에서의 훈련이 전부 끝난 오늘은 오랜만에 A반 전원이 모이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게나 말이야. 단에 들어가면 위치가 다 다르니 어쩔 수 없지.”
“집에서 맨날 보는데, 착쁜놈도 직계님을 너무 좋아해.”
“신나는 건 신나는 거인걸.”
도로시와 이야기 나누는 서발광을 보며 서리스는 뒤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크라페가 서 있었다.
저번 대회에서 아이랑을 이긴 후, 그대로 기절해 버린 그는 이후 줄곧 저런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겼는데도 다음 대련을 이어가지 못했으니.
본인 입장에서는 조금 답답하기도 하리라.
“크라페.”
서리스가 그런 크라페를 부르자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대해에서 네가 말했던 그거 내가 좀 도와줄게.”
서리스의 강해진 모습을 보고 그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크라페다.
이걸로 기분이 좀 풀릴까 싶어 던진 얘기에 그의 얼굴에서 어느샌가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남들에 비하면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그치고는 감정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중이었다.
“크라페랑 뭐 하기로 했어?”
“강해지고 싶다길래.”
그 말을 듣고 서발광은 혹시나 하며 서리스의 귀에 대고 물었다.
“혹시 금강잔월을?”
“그건 아니지.”
크라페는 무려 그라말테의 직계다.
그런 그에게 소드란의 별을 새길 이유는 없는 것이다.
대답을 듣고 어쩐지 서발광이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의 불안이 무엇인지 눈치채곤 서리스는 그걸 해소해주기로 했다.
“걱정 마. 당분간 수하를 늘릴 생각 없으니까.”
애초에 당장은 서발광만 있어도 충분했다.
그는 워너힐 아카데미에 와서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으니까.
이제 그의 발검술은 서리스가 아닌 일반 학생은 눈으로 좇을 수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슬슬 일곱별들이랑도 해볼 만할 것 같은데.’
도로시 쪽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녀석은 최근 날아다니다 못해 천장을 뚫어버릴 기세였으니까.
‘마왕화를 푼 게 컸나.’
로렐라이 쪽에서도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상황이니 말 다했겠지.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서리스는 뿌듯함을 느꼈다.
제자들이 성장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러는 사이 서리스 일행은 어느새 워너힐 아카데미 본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서리스 님, 좋은 아침이에요.”
1학년 A반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거기에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아이랑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모습은 서리스가 알고 있던 것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늘 사용하던 면사포를 끼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새하얀 얼굴이 다 드러나 돋보이는 그녀의 외모는 이목을 한껏 끌고 있었다.
“면사포는 이제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혹시 혈귀를……?”
“반 정도는 떼어 내었네요.”
눈웃음을 보이는 그녀에게 서리스는 솔직하게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윌즈베르크에게 있어서 혈귀는 악연이자 성장의 증거였으니까.
그녀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소리였다.
“혹시 이제 남들이 다 보게 돼서 아쉽다거나 그러지는 않나요?”
“아쉽네요. 아이랑 님의 얼굴은 저만 알고 싶었는데.”
칭찬받아서인지 싱글벙글 웃던 아이랑의 농담을 서리스가 받아치자 그녀는 잠깐 몸을 움찔거리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곤 평소에는 면사포에 가려져 있어 티가 나지 않던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용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너무하세요.”
“어, 죄송합니다.”
“니들 뭐하냐.”
뭔지는 몰라도 서리스가 일단 사과를 하는 순간, 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있는 것은 이바드라와 셀링이었고, 뒤늦게 계단을 따라오던 뇌성 호라이즌도 보였다.
“이바드라, 오랜만이네.”
“그래, 오랜만이다. 세계 침식자에게 둘러싸인 삶은 재밌었냐?”
“꽤 즐겁더라. 너도 다음에 즐겨볼래?”
“이 몸은 그런데 끼이기에는 급이 안 맞아서 말이지.”
그리 말하던 이바드라는 곧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근데 너 설마.”
“있다가 이야기하자고.”
아무래도 서리스가 성장했다는 것을 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자꾸 혼자서 성큼성큼 앞서나가 버리는 그를 보고 이바드라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됐다는 양 한숨 쉬었다.
“적어도 우리가 따라갈 수는 있게 달려가라.”
“네가 빨리 따라오는 게 나을 거다.”
죽어도 늦출 생각은 없어 보이는 서리스를 보며 이바드라는 분한 듯 이를 갈 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렇게 강해져도 아직 한참 모자란다고 느끼는데.
그런 대화를 나누며 반에 들어온 서리스는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다른 학생들도 들어오며 반이 채워졌고, 잠시 후 오늘도 가장 늦게 온 스타리즈를 마지막으로 모든 학생이 도착했다.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담당 교관 밀리오레가 칼같이 걸어 들어왔다.
그는 언제나처럼 안경을 쓴 채 사이코 같은 웃음을 지었다.
“한 달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러분. 다들 어제는 푹 쉬었을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역시 저 사람…… 어딘가 망가져 있다.
시원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간 그는 문 쪽을 돌아보았고, 잠시 후 교실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한쪽은 외눈 안경에 회색 머리를 지닌 선배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용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은 로렐라이 소속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짙은 청색의 머리카락을 목 부근에서 짧게 자른 여성이었다.
여기사라는 말과 잘 매치 될 만큼 그녀의 행동거지는 매우 절도 있어 보였다.
“이번 마굴 파견에서 도움을 주실 두 분, 로렐라이 학생 단장 아세리나 벨리키군, 그리고 자룡세가의 자룡서진 양입니다.”
둘의 등장에 학생들이 술렁였다.
무려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는 학생 단장 두 명의 등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룡가.’
오대가가 아님에도 서쪽의 패왕이라 불리는 대가문이었다.
사성인 사진산의 가문 사풍세가가 소가문으로서 자룡에 속해 있었다.
그리고 아세리나 쪽은 서리스도 딱히 들어보지 못한 가문이었다.
그건 대가문과 소가문이 아닌 일반 영지 가문이라는 소리겠지.
그럼에도 학생 단장 자리에 올랐다라…….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는 순간 서리스는 벨리키와 눈이 마주쳤다.
어째서일까, 벨리키의 눈이 서서히 일그러지며 이내 그를 노골적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
서리스는 그제야 엑스널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로렐라이 학생 단장을 조심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