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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36화 (136/275)

136화

알리즈와 헤어진 뒤, 서리스는 포도주 한잔을 받아 들고선 구석에 몸을 기대었다.

한동안 알리즈와 엑스널을 신경 쓰느라 바쁘게 돌아가던 머리가 이제야 좀 진정된 느낌이었다.

‘일이 완전히 해결된 거라고 보기에는 아직 신경 써야 할 점들이 많긴 하지만.’

엑스널이 알리즈를 건드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이번 천옥지회는 참석할 가치가 있었다.

‘문제는…….’

서리스는 포도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알리즈에게 향하려던 세계 침식자의 마수가 이제 어디로 향할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다.

당연하지만 워너힐 아카데미에는 많은 학생이 있는 만큼, 각자 남들에게 말 못 할 개인 사정이 있을 것이다.

엑스널과 알리즈만큼이나 자기 속을 썩이고 있는 녀석들도 적지는 않을 거란 소리.

‘별수 있나……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수밖에.’

천만다행히도 아직 알리즈가 폭주하던 시기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신경을 써야겠지.

“잘 해결했어?”

앞일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샌가 서발광이 다가와 물었다.

그는 꽤 여러 사람을 상대한 듯, 조금 피곤한 얼굴이었고 서리스는 따라 미소 지었다.

“그냥저냥.”

“서리스도 가족 일로 고생이 많네.”

어딘가 착잡한 눈을 한 서발광을 보고 서리스는 문뜩 떠올렸다.

도로시와 아카펠이야 가족 관계를 훤히 꿰고 있었지만.

서발광의 경우에는 그가 아는 게 전혀 없었던 것이다.

“서발광, 너희 부모님은…….”

“안녕.”

서리스가 서발광에게 질문을 하려던 찰나에 들려온 인사말에 그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삐쭉삐쭉 선 모래색 머리칼 위에 안대를 쓰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네가 펜타니엄 서리스지?”

“사성(沙星) 사풍세가 사진산 선배님이시죠?”

서리스가 그 이름을 부르자 사진산은 질색하는 반응을 보였다.

“알아봐 줘서 고맙긴 한데, 사성은 슬슬 쪽팔리니 그만 불러주라. 밑에 애들 생기면 바로 내려놓을 생각이니까.”

현 일곱별 중 하나이자 가장 연장자가 바로 그였다.

일곱별이라는 자리는 본래 새로운 신성이 나타나면 가장 연장자가 자기 자리를 물려주는 식으로 유지되어왔었다.

한데 이번 일곱별에는 워낙 뛰어난 이들이 많다 보니 아직 그 자리를 받을 신성이라고 할만한 이가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아직까지도 일곱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실정이었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다른 애들이랑 똑같아. 권유지 권유.”

사진산은 입가에 미소를 띠곤 자기 제복 위에 새겨진 해태 문양을 가리켰다.

“발리움에 들어오지 않을래?”

남두단 발리움.

비교적 최근에 생긴 단이자 오직 학생으로만 이루어진 이 단은 워너힐 아카데미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워너힐 아카데미의 네 지부는 경쟁 구도에 놓여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세계 침식에 대항하기 위한 집단이다.

그런 만큼 성위는 각 단의 경쟁이 너무 심해져 워너힐 아카데미의 설립 본질이 흐려질까 염려했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남두단이었다.

오직 학생들로만 이루어진 단.

아카데미 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남두단이다 보니 그들은 같은 학생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또래 학생들에게 밀리지 않는, 그 학년에서 가장 뛰어난 이들을 선별해 뽑는 일이 많았다.

즉, 발리움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그 학년 내에서 가장 뛰어난 이라는 의미였고.

덕분에 발리움 인원은 졸업 후에도 다른 단에서 모셔가지 못해 안달일 정도였다.

“서리스…… 발리움이래, 발리움.”

서발광이 먼저 설레발을 치며 이야기하자 서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어느 단에 들어갈지 생각 안 한 것도 있긴 했으나, 발리움은 보기에도 넣어 놓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야, 발리움에는 칼릭스가 있으니까.’

펜타니엄 칼릭스.

올해 4학년이 된 그는 다름 아닌 발리움의 학생 단장이었다.

‘날 암살하려 했던 놈이니까 어떻게든 한 번 끌어 내리고 싶긴 한데.’

적의 진지로 아무 정보 없이 무턱대고 들어가는 건 어떨까 싶다.

“뭐, 천천히 생각해봐. 어디까지나 권유니까 권유. 단지, 천구 선배가 부탁을 좀 해서 말이야.”

“천구라면 아리즈 아리온 말입니까.”

“그래, 그 아리즈 아리온 선배가 말했거든. 너한테 발리움을 생각해 보라고 전해 달라면서.”

서리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에게 먹튀를 당한 전적이 있는 그로서는 영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발리움에 들어가면 성위님을 만나기 쉬울 거란 것도 전해랬어.”

천구 녀석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서리스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건 서리스 몫이니까.

“직계니임, 직계니임!”

그러는 찰나 어느새 다가온 도로시가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서리스를 불러왔다.

보아하니 갖춰진 술을 마신 듯, 도로시의 콧등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다가 사진산 쪽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저 사람은 왜 제복 입고 머리에 안대를 쓰고 있어?”

“어? 악, 젠장, 또 쓰고 나왔나.”

그러는 순간 사진산은 도로시의 지적에 깜짝 놀라며 안대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패션인 줄 알았더니, 실수로 쓰고 있던 거였나.

그는 무안해진 듯 헛기침을 내뱉고는 도로시를 힐끔 봤다가 서리스에게 말했다.

“그럼, 생각해둬. 사교회 잘 즐기고.”

손을 흔든 뒤 떠나가는 그였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자기 팔을 잡고 있음에도 넘어지기 직전인 도로시의 양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는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도로시는 마치 롱캣 마냥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 녀석…… 얼마나 마신 거야.”

“아까부터 계속 홀짝이긴 하던데. 안 본 사이에 테이블에 있는 걸 다 마셨나 봐.”

“직계니임, 나 무울.”

“서리스, 내가 가져올게. 잠깐 기다려.”

붙들린 채 투덜거리는 도로시를 보고 서리스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무심코 웃고 말았다.

한 달 동안 훈련하느라 떨어져 지냈으니 이런 느낌도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새삼 이 두 사람과의 관계가 참 깊어졌다고 생각하며 서리스는 천옥지회의 분위기를 약간이나마 즐겼다.

* * *

천옥지회가 끝나고 아침.

어제부로 알리즈와 엑스널의 일을 마무리했던 서리스는 건물을 나서고 있었다.

첫날 이후 완전히 얹혀살게 된 마왕의 거처는 언제봐도 그 외양이 허름했다.

“으우, 머리 아파.”

“그러게, 아플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마시는 거야.”

“착쁜놈은 아직 아기라 몰라. 어른 도로시는 술맛을 깨우쳤거든.”

숙취로 또 고생 중인 도로시와 그녀의 흐트러진 제복을 단정하게 고쳐주는 서발광이 뒤따라 걸어 나왔다.

“어른 도로시라고 말할 거면 남이 챙겨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법부터 배우지 그러냐.”

“그럼 도로시는 아가 할래.”

“바로 퇴행해 버리기는.”

서리스의 핀잔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기로 돌아가 버리는 도로시를 보고 서리스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희는 로렐라이였지.”

“맞아. 서리스는 테르넬이지?”

서발광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서리스는 같은 조원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자 때마침 크라페가 평소와 같은 나른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침.”

“좋은을 붙어야 인사말이다.”

“알고 있어.”

알면 해라.

이제는 크라페와의 대화가 익숙해진 서리스는 서발광과 도로시와 헤어진 뒤 규수단 테르넬 건물로 향했다.

지부를 하나 건너가야 하는 만큼 생각보다 거리가 있었기에 주변 경치를 구경하던 서리스는.

곧 테르넬을 기점으로 무기상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계 침식을 상대로 가장 적극적으로 싸우는 단.’

그렇기 때문인지 매년 사망자도 가장 많으며 상주하는 인원이 거의 없는 곳.

테르넬은 거의 모든 인원이 작전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펜타니엄 같은 오대가 수준이 아니라면 테르넬의 단원들이 파견 나와 있는 게 일상다반사라 했지.’

실제로 대가문 영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테르넬 소유 건물들이 종종 보인다고 하니.

그들의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어느새 테르넬의 입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주작이 날개를 펴듯 넓게 펼쳐진 건물 입구를 바라보며 서리스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다름 아닌 락스카였다.

졸업하자마자 테르넬의 단장 자리를 물려받은 최연소 단장.

그가 바로 서리스의 첫째 형인 펜타니엄 락스카였으니까.

‘만날 일이 있으려나.’

알리즈와 엑스널의 원흉인 만큼 락스카에게 좋은 인상이 없던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서리스 님!”

그러는 사이 때마침 아이랑이 오자 서리스는 그녀와 인사를 나누며 테르넬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나요.”

“네, 딱히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으니까요.”

“아쉽네요. 서리스 님, 술 취한 모습이 소녀는 조금 궁금했는데.”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랑을 보고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지만 금강잔월을 익히고 나서는 술과 같은 독성 물질은 웬만하면 곧바로 해독해 버리는 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만큼 아무리 술을 위에 들이 부어도 인사불성이 될 만큼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그러고 보니 테르넬의 단장이 서리스 님의 형님이셨죠?”

때마침 아이랑이 언급하자 서리스는 몸을 멈칫하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달까.

반대편에서 한 남성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 냄새.”

크라페가 코를 감싸 쥐고, 얼마 안 있어 서리스에게도 짙은 혈향이 맡아졌다.

걸어오고 있는 사내의 흰색 제복은 마수의 사체 찌꺼기 같은 게 묻어 잔뜩 엉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이곳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오른쪽 어깨부터 시작된 반쪽짜리 붉은색 망토가 휘날렸고, 그가 점점 다가올수록 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옆으로 자연스럽게 넘긴 서리스와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와 서리스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펜타니엄 락스카.

예전에는 검성, 지금은 검치라 불리고 있는 규수단 테르넬의 단장.

그와 마주친 서리스는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가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락스카가 그를 그대로 지나쳐 버리자 서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설마, 인사 하나 없이 그대로 지나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우뚝.

그런 순간 걸어가던 락스카가 멈춰 섰다.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이 기억하던 이름을 내뱉었다.

“서리스냐?”

“늦게 알아보시네요.”

서리스도 따라 몸을 돌려세우자 그는 한동안 서리스를 보더니 몸을 돌렸다.

“다 컸군.”

서리스와는 상당히 오랜만에 봤기 때문일까.

그는 그 말만 남겨 놓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쪽 아주버님은 무뚝뚝하시네요.”

“……아이랑님, 저번부터 느끼는 건데 그 호칭은.”

“아, 저희 늦겠어요!”

서리스가 뭐라 말하기 전에 아이랑이 냉큼 발을 뻗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 걸었다.

락스카와의 첫 만남이 그리 썩 달갑지는 않았다고 생각한 채로.

* * *

절그럭절그럭―

어느 숲속 어딘가에서 쇠사슬을 끄는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견했는데. 아마도. 맞는 거 같긴 한데. 또 별이 멋대로 기울어져서. 무너트리는 건 어렵지 않아.”

그 숲속을 거닐고 있는 자는 칠흑과도 같은 긴 머리를 바닥에 질질 끌며 계속해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뜩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그때 그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미친년아! 안녕!”

쿠웅―

독특한 인사와 함께 떨어진 여성은 등장과 함께 긴 머리카락의 여성, 흑마녀를 깔아뭉갰다.

밑에 깔린 흑마녀는 이내 진득한 액체를 뚝뚝 흘리기 시작했고, 그 여성은 더러운 게 묻었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떼었다.

왼쪽 눈에 검은색 안대를 두르고 노을빛과도 같은 머리를 가진 여성은 등 뒤에 수백 개는 될법한 무기를 채운 이상한 차림새였다.

그녀는 하체를 먼저 세운 뒤 상체를 따라 일으키는 흑마녀를 보다가 히죽 웃었다.

“너, 워너힐 아카데미 갔다며? 재미 좀 봤냐?”

“점이 떨어졌어. 밤하늘에 이어진 부분 중 하나가 잘못된 게 와…….”

“아, 닥치고. 내가 너한테 뭘 묻겠니.”

괜이 물었다는 양 여성이 하하고 소리를 내자 흑마녀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별 곁에 무언가 다른 새까만 별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거기로 갔어.”

웬일로 흑마녀가 정상적인 말을 내뱉자 그녀는 입술이 찢어져라 웃었다.

“누구긴, 그놈이 갔지. 조금만 있어 봐. 곧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테니까. 그러고 보니 괜찮은 무기 가진 놈 없었냐?”

“별이 또 움직이고 닿아 변하고 있는데, 지금 어디로 가서.”

“아, 썅, 됐다, 됐어. 내가 직접 가서 찾지 뭐.”

짜증스레 욕설을 내뱉은 그녀는 흑마녀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흑마녀는 달빛 아래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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