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전 일곱별 영성인 마키나 엑스널.
동생인 마키나 뮤리널의 등장으로 일곱별이라는 자리를 매우 빠르게 내려놓은 그이지만.
그것은 단지 그가 원해서였을 뿐,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서리스는 그 사실을 조교 역할을 다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확신하게 되었다.
“악스달은 세계 침식 발생 후 생겨나는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창설된 단체야.”
엑스널은 지금 서리스와 아이랑 그리고 크라페를 데리고 세계 침식이 일어났었던 장소에 와있었다.
그의 발아래에서 솟아난 얼음이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던 다리 사이를 이었다.
절벽의 넓이가 꽤 되었음에도 그는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 위를 느긋하게 걸어갔다.
“세간에서는 세계 침식이 일어나도 그걸 그냥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고 쉽게 착각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그의 말대로 세계 침식이 발생했던 숲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미개척 지역이라 다행이지 만약 민가가 있었다면, 다시 복구하는 데 한참 걸렸으리라.
“자연 파괴는 기본이고, 주인이 죽어 세계 침식이 사라져도 일부 오염된 땅은 여전히 남아 있지. 그리고 거기서는 마수가 태어나기도 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의 발 앞에는 어느새 붉은색 진액과 함께 그 위에 자라난 붉은색 식물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분명 세계 침식은 사라졌지만, 그 여파가 일부 남아 있는 것이었다.
“갑자기 마수가 나타나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후 처리를 못 해서야.”
그러며 그가 손을 휘젓자, 또다시 솟구친 얼음들이 붉은색 지대를 모두 덮었다.
그 반경이 족히 1km는 되었지만, 그는 타고난 별이 많은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흐응.”
그걸 지켜보던 아이랑도 짧게 감탄하는 사이 그는 얼어붙은 붉은 지대 위를 서슴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악스달은 청소부와 비슷한 취급을 받기도 했어. 물론 그런 인식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지만.”
“세계 침식 숭배자들 때문이겠지.”
여전히 그의 앞에서 망나니 행세를 하는 서리스가 반말로 가볍게 덧붙이자 그는 자기가 할 말을 빼앗긴 것에 불쾌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었다.
“서리스 후배 말대로야. 세계 침식 숭배자, 잠식자나 조력자 혹은 미치광이들이 전부 포함된 이들이지.”
세계 침식자의 힘에 홀리거나 그 유혹에 넘어가 버린 이들.
그런 이들을 모두 통틀어 부르는 호칭이 바로 세계 침식 숭배자였다.
세계 침식의 여파는 그들이 이용하기에 매우 유용한 재료였다.
세계 침식에는 검은별의 힘이 깃들어 있다.
그런 힘들을 이용한다면 마수를 만들거나 혹은 광견과 같이 육체를 개량하는 미친 짓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그때마다 검은별로 인해 정신이 망가져 버릴 테지만, 이미 미쳐버린 이들에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 친구들은 세계 침식의 여파가 남은 곳에 나타날 확률이 높아. 덕분에 오염된 곳을 복구하려는 악스달과 가장 많이 조우해.”
그렇기에 악스달은 대인전에 특화될 수밖에 없었다.
잠식자와 조력자, 거기에 어쩌다가는 세계 침식자와도 마주칠 일이 있는 이들이기에.
그들은 철저하게 대인전을 가정하여 훈련을 해왔다.
“그리고 너희는 운이 좋아.”
그 순간 엑스널의 주위에서 스산한 한기가 담긴 바람이 퍼져 나갔다.
은발 아래 그의 눈동자가 완연히 호선을 그렸을 때, 그가 서 있던 바닥에서 열 개의 창이 솟구쳤다.
명백히 그를 노린 공격.
그러나 엑스널의 손짓 한 번에 창들은 얼어붙더니 하나씩 깨져나갔다.
“카하악?!”
동시에 숲속 저편에서 사람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얼음의 칼날에 심장이 꿰뚫려 사망한 시체가 있었다.
심장에서 타고 흐른 냉기는 순식간에 시체를 뒤덮더니 이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상대를 죽이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군.’
서리스도 검은별이 없었더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기척을 완벽히 죽이고 있던 이였지만.
엑스널은 상대의 위치를 진즉에 알고 있었는지 능숙하게 상대를 처리했다.
“다름 아닌 내가, 너희들에게 대인전을 가르칠 거니까.”
미개척 지역.
범죄자가 가장 숨어들기 좋은 지역이며 잠식자와 조력자가 가장 많이 숨어 있기도 한 지역.
이곳에서 악스달은 그야말로 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 * *
엑스널은 서리스 외 두 명을 이끌고 미개척 지역을 거리낌 없이 돌아다니며 잠식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오래전, 이 근처에서 이상한 제단을 만들던 잠식자들과 조력자들이 있었는데.
뭐, 결국 소탕당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세력의 잔당들이 이곳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서리스 일행이 하는 것은 일종의 잔당 소탕인 셈이었다.
“아악, 왜, 왜 우리를?!”
“이러지 마세요! 저는 그저 이 숲에 볼일이 있을 뿐이라!”
잠식자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계 침식자의 뜻만으로 움직이는 자들.
그렇기에 우리의 공격을 받은 그들은 억울함과 비통함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세계 침식에서 자신들을 지켜줘야 할 영웅들이 어째서 자신들을 사냥하냐며.
그 모습은 평범한 이들과 너무나도 다를 바 없어 보여.
마치 인간 사냥과도 같았다.
“코 아파.”
하지만 옆에 있는 크라페가 그들이 내뿜는 악취에 질린 표정을 지을 만큼.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잠식자들이었다.
“사람의 양심을 일부러 건드리는 거네요.”
암성이라 불리는 아이랑 조차도 이런 건 달갑지 않은 듯, 혀를 찼다.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표정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무언가를 좀먹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세계 침식자들이 노리는 게 다 이런 거야. 너희들도 익숙해지는 게 좋아. 세계 침식에 맞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적어도 그들이 조금은 고통을 덜 받기를 바라듯.
엑스널은 잠식자를 모조리 일격에 끝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서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저놈은 실력도 좋고, 잠식당한 피해자들을 위할 줄도 아는 주제에 알리즈에게는 왜 그러는 걸까.’
서리스가 검은별을 쓰지 않는다는 가정으로 그와 붙으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엑스널은 실력 있는 이였다.
듣기론 2학년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실력이 좋은 건 물론.
지난 며칠간 그에게 훈련받으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이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정식 단원들은 물론이고 같은 일반 학생들도.
그 호감은 그의 배경인 마키나 가문을 향한 게 아니라 엑스널이라는 이를 향한 것들이었다.
실제로 그는 친절했다.
서리스야 펜타니엄이라는 점과 더불어 그에게 망나니처럼 굴었던 만큼 안 좋은 인상이 박혀서이지.
그는 크라페와 아이랑의 질문에도 성심성의껏 답하며 그들의 문제점도 알려주는 등 성실하고 유능한 조교였다.
지금도 잠식자들을 상대하는 마음가짐과 혹시나 정신 쪽으로 트라우마가 생길 것을 고려해 귀수단 플레미아 쪽 정신과 의사를 추천해 주고 있을 정도니까.
그런 그가.
펜타니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리즈를 그토록 괴롭힐 이유가 있는가?
‘뭔가 있군.’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과거로 돌아오기 전, 결국 알리즈가 일으킨 사건의 원흉은 그였고.
그때 죽어라 고생했던 걸 떠올려 보면 역시 죽방 한대 정돈 먹여 주고 싶었다.
서리스가 그렇게 주먹을 말아쥐는 사이 잔당 처리를 끝낸 크라페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곧 서리스의 옆에 다가와 옷을 꾹꾹 당겼다.
“저쪽.”
이에 서리스가 엑스널 쪽을 쳐다보자 그도 크라페의 코에 대해서 알고 있는 덕분인지, 아무런 질문도 없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잠시 후, 우거진 나무숲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산맥을 따라 즐비한 평야 지대 쪽에서 사람들이 보였다.
유목민인 듯, 그들이 키우는 양 떼가 평야를 돌아다니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사람이 살법한 집들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곳도 미개척 지역.
본래라면 소수 민족으로 판단하고 넘어갈 법했지만, 집 옆에 세워진 제단은 그 생각을 가볍게 사라지게 해주었다.
그 증거로 지금 서리스도 평야 지대에서 진동하는 검은별의 기운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잔당들 소탕이라 했었지.”
일이 조금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짐작한 서리스가 묻자 엑스널도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거기에 덤으로 조사 임무도 있었어.”
잔당들이 혹시나 다시 제단을 세웠는지 알아볼 속셈이었겠지.
“어쩔 거야?”
서리스를 포함한 세 명은 1학년.
그리고 엑스널은 2학년에 지나지 않지만.
솔직하게 말해 네 사람은 일반적인 학생과는 그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었다.
엑스널을 포함하면 무려 셋이 일곱별 출신이다.
거기다 일곱별을 뛰어넘는 수준인 서리스까지 포함된 만큼.
정식 단원으로 이루어진 웬만한 팀 수준은 충분히 되는 것이었다.
“크라페 후배, 저들의 인원수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
“3성 48명, 4성에서 5성 열두 명 그리고 한 명은 아마 6성, 이쪽이 조력자.”
엑스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이 네 명이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상대였다.
‘그리고.’
엑스널은 서리스 쪽을 힐끔 보았다.
월석을 깨트린 별 보유량에다가 황사자라는 별호로 불리는 글라오스를 마성과 함께 쓰러트린 실력.
지금까지는 훈련과 숨어 있는 잔당 소탕에 지나지 않아 그 힘을 전부 볼 수 없었지만.
조력자까지 포함된 숭배자들이라면 그 실력을 확실히 볼 수 있을 것이었다.
‘알아 둬야 한다.’
마키나와 펜타니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적이다.
둘 다 검을 주력으로 다루는 오대가 이기 때문이었다.
검술 명가.
두 가문 앞에 항상 붙는 그 말.
그러나 그 말은 먼 옛날, 삼무제 시절 펜타니엄 요치아가 검제라는 별호를 가지고 가고부터 어느샌가 펜타니엄만이 사용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마키나는 굴욕의 연속이었다.
검을 다루는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검술 명가라 칭해질 수 없었고.
검과 관련된 별호는 모조리 펜타니엄의 것이 되었다.
그것은 마키나의 한이었다.
스스로 검을 버리는 일이 되더라도 펜타니엄을 넘어 버리고 말겠다는 한.
그러나 여기 있는 마키나 엑스널은 마키나가 나아가기를 포기한 검의 길을 꿋꿋이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따고 싶었어.’
영성이 아닌 검성이라는 별호를.
하지만 무슨 짓거리를 해도 펜타니엄 락스카가 가진 그 호칭은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
엑스널은 검성이라는 별호에 끝끝내 닿지 못했다.
온몸을 휘감는 자괴감과 분함 덕분에 오만이라는 감정을 저 멀리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오만과 다른 여타 감정들은 일종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영성이라는 별호를 일찍이 내려놔 동생에게 물려줬던 것은.
펜타니엄에게만 주어지는 검의 별호를 자신이 따내기 위해서, 그는 일곱별을 빠르게 졸업한 것이었다.
‘그리고 서리스는.’
별호가 없다.
그가 활약할 때는 이미 또래 후기지수 중에서 일곱별이 다 나왔던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엑스널이 알아본 서리스는 갑자기 굴러온 돌 같은 존재였다.
일찍이 두각을 드러냈다면 진작 일곱별 중 한자리를 꿰차야 했을 것이고.
반대로 뒤늦게 재능이 개화했다고 하기에는 그 성장 속도가 너무 빨랐다.
‘분명 뭔가가 있을 거야.’
그러나 그것까지는 엑스널이 알 수 없는 노릇.
그저 지금은 서리스가 어느 정도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검의 길을 위협할 인물일지 아닐지를 알아낼 뿐이었다.
‘만약 내 계획에 걸림돌이 될 싹수가 보인다면…….’
엑스널은 얼음이 자라나듯 솟아나 만들어진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은 검을 꽈악 쥐었다.
왜인지 모르게 알리즈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엑스널은 지금 상황에 더욱 집중하기로 하였다.
“그 정도면 우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지원을 부를 수도 있지만, 어때?”
리더라도 팀원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은 기본.
엑스널이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서리스는 이미 악스판시온을 어깨 위에 걸치고 있었다.
“아저씨, 내 실력 보고 싶잖아?”
엑스널이 얼굴을 살짝 굳혔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모를 리가 있나.”
그러면서 서리스는 터덜터덜 숲 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크라페와 아이랑이 아무렇지 않게 따르자 엑스널은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해야 며칠 사이 저 세 명 중 리더 역할을 하게 된 이가 누군지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놈은 난놈이다.
“서리스 후배.”
엑스널은 발아래 얼음을 일으키며 그를 불러 세웠다.
서리스가 힐끔 그를 보자 엑스널은 입가에 옅은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날 때쯤에는 그 같잖은 가짜 망나니 행세는 그만두고, 제대로 선배 대우하라고.”
“하.”
서리스는 소리 내어 웃곤 그 또한 그림자를 일으켰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무슨.”
이윽고 얼음과 그림자가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