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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니엄 검황가 셋째 도련님-128화 (128/275)

128화

다음 날, 퇴원 전 혹시나 있을 이상 검사를 마치고 서리스가 병실로 돌아왔는데, 그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리스으.”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서발광을 보고 서리스가 멋쩍게 웃자, 이를 본 도로시가 껑충 뛰며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멀쩡하네!”

무슨 동물적 감각이라도 있는 건가.

도로시 말대로 퇴원 전 최종 검사에서도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은 서리스는 울고 있는 서발광의 머리를 살포시 두드려 주었다.

“쯧, 거봐라, 내가 걱정할 것도 없다고 했잖나.”

“서리스 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이건 기운을 북돋아 주는 약재로 만든 주스입니다. 일단 마셔 두면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마워요, 셀링. 이바드라, 너도.”

이바드라와 셀링도 와 주었기에 감사 인사를 한 그는 고개를 돌려 발렌타인을 바라봤다.

눈가를 파르르 떨던 그녀는 서리스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줄 알았습니다.”

“다친 곳 하나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과하게 걱정해 준다며 서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게 썩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기에 모두에게 고마웠다.

덜컹!

그 순간,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등장했다.

평소와 달리 면사포를 쓰지 않은 병원복 차림의 그녀는 다름 아닌 아이랑이였고.

그녀는 서리스를 보자마자 두 눈을 크게 떴다.

“서리스 님, 죄송합니다.”

갑자기 구십 도로 고개를 팍 숙이며 사과하는 그녀를 보고 서리스는 당황했다.

“소녀, 흑마녀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오히려 폐만 끼쳤습니다. 이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빚이라니.

서리스가 보기에 흑마녀는 일반적인 규격을 한참 넘어선 존재였다.

겁에 질려 돌발 행동을 하지 않고, 악착같이 소리를 참아 낸 것만 해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했다.

애초에 흑마녀가 노린 건 서리스였다.

그녀는 우연히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아이랑은 서리스에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평생을 다해 갚아야 할만한 빛을 졌다는 미안함과 자신 스스로 느낀 수치심을 이렇게라도 풀어야 했기에.

“예, 그렇게 하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이제 그만 숙이셔도 됩니다.”

결국, 서리스는 조금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았다.

사정을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이렇게라도 그녀의 부담감을 줄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리스의 부탁에 아이랑은 얌전히 상체를 세우더니, 붕대가 감긴 그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서리스님, 이 손은…….”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도 그에게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렇기에 아이랑이 의아해하며 묻자 서리스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말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언가가 깨문 자국이라고 하지 않았어?”

서리스가 기절해 있을 때, 의사를 통해 그의 상태를 들었던 서발광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는 당연히 마수에게 물렸겠거니 했지만, 그 말을 들은 아이랑의 뇌리에 떠오른 한 조각의 또렷한 기억.

공포에 질린 채 서리스의 손을 깨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

이내 그녀는 그 새하얀 피부를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물들이더니, 어쩔 줄 몰라 하며 병실에서 도망치듯 뛰쳐나갔다.

“아, 깜짝이야. 서리스, 다행히 일어났구나.”

그 순간, 그런 그녀와 마치 교대하듯 알리즈가 나타났다.

흑마녀 때문에 난리가 나서인지, 알리즈의 안색에도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알리즈와 접촉한 세계 침식자는 누굴까?’

병실로 들어온 그를 서리스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에 빠졌다.

세계 침식자의 힘을 알고 나니, 그런 존재와 계약할 알리즈를 자신이 막을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던 탓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제일 좋은 건 세계 침식자의 접근 자체를 막는 것.

서리스는 알리즈가 흑화할 가능성 중 가장 큰 원인인 마키나 엑스널을 떠올렸다.

‘최대한 빨리 조져버려야겠어.’

그는 혼자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런 결심을 품었다.

* * *

한편, 병실을 뛰쳐나온 아이랑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감싼 채 건물 옥상 입구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어쩌지…… 지금까지는 갈증을 잘 견뎌 왔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윌즈베르크라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이 갈증.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이 갈증을 해결하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누군가의 몸 어딘가에 각인하듯 송곳니를 박아 넣는 것.

윌즈베르크의 송곳니로 생기는 흉터는 별문신과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한 번 새겨진 흉터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으며, 윌즈베르크에서 그것이 뜻하는 바는.

이 사람은 나의 갈증을 해결해 준 사람이자, 평생 함께하고픈 이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저 깨물린 자국일 뿐이겠지만, 윌즈베르크 사람에게는 그런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사고잖아요.’

그러나 사고라 하고 넘기기엔 너무 선명한 각인이었다.

그녀가 서리스의 손을 보자마자 반응한 이유도 그의 손에서 미약하게 느껴지는 윌즈베르크의 기운 때문이었으니까.

‘어머니나 언니들이 이 사실을 알면.’

자신의 미래가 보이는 듯 아이랑은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각인을 지우는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누가 이걸 없던 일로 하고 싶냐 물으면, 곧장 대답을 못 할 정도로 미묘한 심리 상태.

각인 대상이 싫냐고 물으면.

‘……싫지는 않죠.’

처음 볼 때부터 서리스는 그녀가 갈증을 느낄 만큼 호감이 가는 타입이었기도 하고.

또래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과 실력, 거기에 천재 특유의 자만심도 전혀 없었다.

그리고 예의는 바른데, 상황에 따라 능청맞게 구는 법까지 알고.

아이랑이 눈치채지 못한 것을 쉽게 캐치할 만큼 눈썰미도 뛰어나다.

그래, 이렇게 조건만 따지고 보면 서리스는 최고의 상대라 봐도 좋았다.

어딜 봐도 좋은 조건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랑의 빨간 두 눈이 한 차례 흔들거렸다.

‘아이랑 잘 들으렴. 한 번 잡은 대어는 절대로 놓치지 말렴. 만약 그랬다간 평생 후회하게 될 테니까.’

어머니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기며 아이랑은 양 주먹을 꾸욱 쥐었다.

‘……발렌타인 님께는 죄송하지만.’

아이랑이 보기에도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가 온 것 같았다.

* * *

서리스는 무사히 퇴원을 마쳤다.

하루 정도 생긴 휴식 시간을 누리기에 앞서, 그는 흑마녀와 관련된 정보를 아카데미 쪽 사람들에게 넘겼다.

남들이 의심하지 않을 선에서 과거의 기억을 일부 담은 만큼 흑마녀를 잡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서리스는 그녀를 천하오장성이나 천상사성 정도의 존재가 오지 않으면 쓰러트리지 못할 정도의 강자로 보고 있었다.

확실히 워너힐 아카데미의 전력이 뛰어나긴 하나, 최흉이 그들의 최우선 목표이다 보니 그녀와 같은 세계 침식자를 상대할 만한 이가 이곳에 남아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그 대안으로 천하오장성과 천상사성의 도움을 청하기도 어려운 것이, 이들 또한 거의 다 최흉 쪽에서 활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침식자를 전문적으로 상대할 전력이 필요할지도 몰라.’

악스달이 있긴 하나, 그 조직은 어디까지나 잠식자, 조력자와 싸우는 데 집중하고 있다.

‘광견과 흑마녀를 놓고 보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그들보다 더 전문적으로 세계 침식자에 맞설 이들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크라페가 가장 쓸만하긴 할 텐데.’

그의 코와 능력이 그들을 상대하는 데 유용하기도 하고, 크라페는 후에 세계 침식자를 직접 죽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품은 채 서리스는 하루 동안 개인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휴식은 언제나 짧게 느껴진다고 했던가.

다음 날 다시금 제복 차림으로 돌아온 서리스는 퇴원한 크라페와 함께 악스달 본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옆을 슬쩍 본 서리스는 어제 자신이 남긴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는 듯, 어딘가 멍해 보이는 그에게 가벼운 딱밤을 날렸다.

“정신 좀 차리지? 오늘부터 다시 훈련 시작일 텐데, 언제까지 넋 놓고 있으려고.”

서리스에게 딱밤을 맞은 크라페는 자기 이마를 매만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질문.”

“뭔데.”

“그때 모든 걸 다 쓰란 말.”

크라페는 서리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어?”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서리스는 부정도 긍정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서리스가 알리즈의 비밀을 아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과거에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냥 티가 났어. 너는 코가 예민한 것처럼, 나도 이래저래 예민한 부분이 있어서.”

그렇기에 서리스는 대강 얼버무리기로 했다.

다행히 크라페도 내 설명에서 나름 납득하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그 뒤로 별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 왔네.”

때마침 악스달 본부 훈련장에 도착한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마녀 사건 때 디다트 교관이 죽어서, 오늘 새로운 후임자가 올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이 또한 아니었는데.’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재해에 휘말린 것이라…… 서리스는 짧게 애도를 표했다.

죽음 하나하나에 집착하기에는 과거에서 너무 많은 죽음을 봤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 침식자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 최흉이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긴 했지만, 악스달로서는 원래 이맘때쯤 교관을 바꾸기로 계획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계획만큼 잘 흘러간 상황은 아니어도 새로운 교관이 오리라.

“……안녕하세요.”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면사포를 쓰게 된 아이랑이 훈련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어제 일 이후로 서리스를 의식하는 듯, 그에게 더 쭈뼛거리는 태도를 보였다.

나름 색다른 모습이라 서리스가 흉터가 남은 손을 그녀 앞에서 슥슥 흔들면.

아이랑은 머리카락을 곤두세우며 면사포 아래로 손을 넣어 얼굴을 가렸다.

“……소녀에게 짓궂게 굴지 말아주세요.”

공포를 못 이겨 내 손을 깨문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인 걸까.

그 흉터의 진실을 알 수 없는 서리스로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냥 넘어갈 뿐이었다.

“왔어.”

그렇게 아이랑 놀리기를 서리스가 그만하는 순간, 크라페가 입구 쪽을 보며 말을 해왔다.

아무래도 새로운 교관이 온 듯싶었다.

“내가 왜 교관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목소리가 들려온 곳에는 우리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서리스의 눈에 익다 못해 어제도 떠올린 남자였다.

“반가워. 담당 교관들이 흑마녀 건으로 바빠서 당분간은 선배인 내가 조교 역할을 맡기로 했어.”

그는 자신도 마지못해 왔다는 듯 말하는 내내 귀찮은 기색을 내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서리스는 헛웃음을 삼켰다.

본래라면 악스달에서 뛰어난 교관이 나와 우리를 가르쳤겠지만.

악스달이 흑마녀와의 조우 장소에서 가장 가까웠던 만큼 피해가 가장 컸다.

그렇기에 그 일 처리를 위해 교관 역을 다른 이에게 맡길 수도 있다곤 생각했었지만.

설마 2학년을 파견할 줄이야.

1년 전에 악스달의 교육 과정을 겪어 봤으니 그나마 적합하리라 생각한 걸까.

반대로 2학년이 그나마 손이 남아서일 수도 있겠지.

“나는 마키나 엑스널, 너희들도 날 알고는 있겠지?”

마키나 엑스널.

전 일곱별로서 영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

알리즈가 흑화한 원인인 그가 조교로서 서리스의 앞에 섰다.

“너희는 그래도 운이 좋네. 알리즈 같은 친구에게는 배울 게 없지만, 다행히 내가 왔으니 꽤 유익한 시간일 거야.”

일부러 알리즈를 언급하는 그를 보고 있으니 서리스는 다시금 떠올랐다.

이 자식 때문에 소드란 가주 시절, 알리즈가 일으킨 사건 배상금 문제로 지원금이 확 줄어 버렸던 게.

“알리즈는 착하긴 해도, 누굴 가르칠만한 실력이 전혀 없거든.”

서리스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그는 명백한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서리스는 가볍게 웃었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 와줬네.’

그는 평생 모를 것이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서리스가 가장 패 죽이고 싶었던 녀석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될 상대를 건드렸다는 것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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