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몰려드는 거미 마수 사이.
양쪽에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어떻게든 자신들이 가진 수를 다 쏟고 있는 귀족 둘.
그 사이를 지나치며 검을 휘두른 사구룡의 눈은 눈앞에 거미 마수가 아닌 한 남자의 등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큰 키와 체격의 남자.
그는 다름 아닌 같은 귀족조차도 눈을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위엄을 자랑하는 펜타니엄 가문의 직계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타고난 별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어린 시절, 귀족이든 평민이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부르짖은 날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 생각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사구룡은 귀족들이 부러웠다.
평민치고는 높은 재능.
괜찮은 검술, 그리고 별 친화력.
하지만 그런데도 타고난 별을 지닌 귀족에 비해 사구룡은 모자랐다.
옆에 있는 두 사람만 해도 그렇다.
갈렌과 데이지는 실전 경험이 없다시피 함에도 타고난 별로 지금 상황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조차 비교 못할 서리스를 보고 사구룡은 깨달았다.
아, 이건 노력으로는 안 되는 거구나.
그래, 일곱별 중에서도 평민은 존재치 않았다.
천상사성 중 딱 한 명 무황 강혼이 존재하긴 하나.
그는 평민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예외적인 인물이라,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사구룡은 서리스를 보며 어딘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귀족을 보며 열등감을 느끼며 낙심했던 그였는데, 이 감정은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처음 만난 순간 그의 노력을 확인하듯 훑어보던 그 눈빛은.
사구룡에게 있어 꺼림칙함보다는, 왠지 모르게 인정받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마치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그가 긍정해 주듯.
서리스는 인공 세계 침식 속에서 사구룡에게 확실하게 일을 맡겼다.
지금까지 평민이라는 이유로 자기 능력을 무시하던 귀족들과 다르게 말이다.
‘나는 왜 검을 들었지?’
강해지고 싶었으니까.
세계 침식이 발생하고 잃은 동생들과 같은 이들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서리스를 보고 오래전 검을 들고자 한 이유를 떠올린 그의 눈이 오랜만에 반짝이었다.
알았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동경.’
세계 침식에서 동생을 잃었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때 자신을 구해 준 인물의 등을 통해 그 감정을 느꼈으니까.
사구룡은 그 동경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달려왔다.
평민 출신임에도 워너힐 아카데미에 용기 있게 입학서를 내밀 만큼.
귀족들이 지닌 타고난 재능 앞에 전부 부질없더라도 그 길을 달리지 않았던가.
쩌억!
그 순간 거대 거미의 몸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그 시체 위에 당당히 선 것은 다름 아닌 서리스였다.
자신과 같은 나이에도 엄청난 경지에 이른 자.
이는 뭇사람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거란 허탈감을 가져다줄 테지만.
동경이란 감정을 품고 달려온 소년에게 있어, 서리스의 모습은 허탈감보다는 새로운 꿈이 되었다.
닿지 못해도 좋다.
닿는 것을 전제로 달려온 것이 아니니까.
‘입학해서 나도 저 사람과 같은 길을 걸어 보고 싶어.’
그저 꿈을 찾은 것만으로도.
사구룡이 나아가기에는 충분한 것이기에.
그렇게 그가 서리스에게 동경을 품는 순간.
거대 거미를 손쉽게 처리한 서리스는 숨을 한 차례 골랐다.
마지막에 괴수가 내뿜은 거미줄 일부가 몸에 묻어 질척거리는 게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오랜만에 몸을 제대로 움직여서인지, 개운한 느낌도 있었다.
‘위쪽은.’
보아하니 무사한 모양이다.
데이지와 갈렌이 별을 다 쏟아부어 탈진한 기색이긴 한데 큰 문제는 없겠지.
“셋 다 끝났으니 내려와.”
주인이 쓰러지자 임시 세계 침식도 끝난 듯, 곧 서리스의 앞에 출구가 나타났다.
그렇기에 서리스가 위에 세 사람을 부르자, 데이지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덩굴을 만들었다.
뒤이어 세 사람이 덩굴을 타고 빠르게 내려왔고, 데이지는 갈렌에게 반쯤 업힌 기색이었다.
“서리스 님.”
그러는 순간 사구룡이 서리스를 불렀다.
전투의 흔적이 꽤 진하게 남긴 했지만, 아직 생생해 보인다.
‘시험 난이도가 4성급 후반 정도인데 말이지.’
사구룡이 주인을 처치할 급은 아니어도 무리 없이 마수를 상대할 수 있는 걸 보면 실력이 상당하단 소리였다.
보아하니 이놈 탐내는 사람들이 꽤 있을 거 같았다.
괜찮은 가문의 별을 새긴다면 성과를 거두기 좋으리라.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이름을 들어 본 적 없다는 거로 판단할 필요는 없지.’
서발광 수준의 재능은 아니어도 준수한 능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었다.
“저 꼭 워너힐 아카데미에 들어갈 겁니다.”
그런 순간 사구룡이 내뱉은 말에 서리스는 눈을 깜빡이었다.
“아, 그래. 열심히 해라.”
뭔가 계기라도 생긴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응원해 준 서리스는 셋과 함께 침식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갈렌은 데이지를 직접 부축하여 치료소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꼴을 보니 워너힐 아카데미는 못 붙어도 둘 다 서로의 사랑은 찾은 모양이다.
‘끼리끼리 잘 놀아라.’
부상이 전혀 없던 서리스는 사구룡도 보내곤 그 뒤 대기석으로 걸어왔다.
부상자가 아니라면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이곳에서 대기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서리스의 눈에 곧 익숙한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난 모양이군.”
이바드라가 제일 먼저 자신을 발견하곤 말을 걸자, 서리스가 가볍게 웃었다.
‘그래, 귀족 권위 의식을 부리려면 저 정도 수준은 돼야지.’
물론 이바드라 같은 경우는 가문을 위해 일부러 오만의 탈을 쓴 거니 질부터 틀리지만 말이다.
“시험은 어땠지.”
“별거 없던데. 팀원이 좀 뭣 같았던 거만 빼면.”
“흐음, 이 몸의 팀원은 다 괜찮은 놈들이었다만.”
이바드라는 턱을 매만지며 의아한 모습을 보였다.
옆을 힐끗 보니 셀링도 마찬가지로 팀원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이거, 나만 팀원 운이 안 좋았던 건가.’
이 정도 난이도야 서리스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긴 하다만.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시험을 통과조차 못 했을 수도 있었다.
특히 마지막 거대 거미를 잡는 건 고생 좀 했으리라.
그놈은 거의 5성급 막바지였으니까.
서발광이나 도로시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성이 시험 내용에 대해 대충 알려 주더군. 인공 세계 침식은 참가자의 별을 평균값으로 내서 난이도를 맞춘다고.”
그 말을 듣고 서리스는 천천히 자신의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러면 팀원 운이 나빴던 건 그 녀석들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인공 세계 침식의 난이도가 올라간 것은 순전히 자신의 탓이었음을 자각한 서리스는 셋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서발광이랑 도로시는 어디 있는지 봤어?”
“빨간 머리 여자애가 배고프다고 잠깐 자리 비워서 따라가더군.”
“엇갈렸나.”
대기 중에도 먹을 것 사러 갔다 오는 것 정도는 문제없는 모양이다.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인 서리스가 자리에 앉으려 할 찰나,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이내 서리스가 그 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세 명의 남녀를 끼고 나타난 암성 윌즈베르크 아이랑이 보였다.
인공 세계 침식을 갔다 왔음에도 여전히 면사포를 쓰고 있는 그녀는 그 망사 천 너머에서 미소 지었다.
“서리스 님, 시험 끝마치신 모양이네요.”
아이랑은 그 말과 함께 서리스가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배고프지 않으신가요? 때마침 새로 사귄 친구들과 음식을 좀 사 왔는데.”
그 말을 하며 아이랑은 뒤쪽에 서 있는 셋을 가리켜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세 사람은 손에 음식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보다 오늘 사귄 사람이라고?’
그들이 아이랑을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서리스가 이상함을 느끼자, 이바드라가 혀를 찼다.
“또 헛짓거리나 하고 있군.”
하지만 아이랑은 이바드라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마실 것도 많이 사 두었답니다. 어떠세요? 소녀의 베스트 픽들만 골라 왔는데.”
싱글벙글 웃으며 유달리 살갑게 구는 아이랑의 태도에 서리스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행동은 명백히 상대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윌즈베르크는 남의 뒤를 캐는 걸 좋아하니까. 아마 너와 이 몸의 결투 결과를 알고서 저러는 거겠지.”
이바드라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옆에 선 셀링이 그만하라는 듯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바드라는 아이랑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뒤를 캐다뇨. 그럼 소녀가 못돼 보이잖아요.”
서리스가 의아해했을 때 눈살을 찌푸린 이바드라가 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이해했다.
같은 일곱별로서 염성을 쓰러트린 서리스에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하다.
무엇보다 앞으로 워너힐 아카데미를 같이 다닐 확률이 높은 만큼, 미리 이야기해 두는 것도 차차 이득이고 말이다.
‘암성의 호기심과 소유욕은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고.’
이 말괄량이 아가씨의 호기심을 받는 건 괜찮지만, 부디 소유욕까지는 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서리스가 입을 열었다.
“마실 것만 하나 받겠습니다.”
“어쩜, 과연 쪼잔한 소인배인 염성과 다르시네요.”
여기서 빼는 게 오히려 그녀의 괜한 욕구를 자극한다는 걸 눈치챈 서리스가 주스 하나를 받자 아이랑은 기뻐하며 외쳤다.
그러자 아이랑의 도발에 욱한 셀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이바드라 님은 소인배가 아닙니다. 은근히 속에 담아 두시긴 하셔도 바로 내뱉으면서 화를 푸시는…….”
그녀가 속사포같이 내뱉자, 이바드라는 셀링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한숨을 쉬었다.
“……넌 이 몸을 옹호하는 거냐. 아님 같이 놀리는 거냐.”
그러면서도 화는 내지 않는 것이,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 주고 있었다.
“눈꼴 시리기는. 그렇죠? 서리스 님?”
“아뇨. 보기 좋은 거죠. 서로 저렇게 신뢰한다는 거는 보기보다 꽤 힘들거든요.”
저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건 좋은 일이다.
셀링은 설령 이바드라가 가문에서 퇴출당해도 따라갈 만큼의 신뢰를 보이고 있을 정도니까.
‘뭐, 나도 이제는 곁에 그런 사람이 조금 있나.’
서발광과 도로시, 그리고 아카펠까지 떠올린 서리스는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 세 사람이라면 자신도 믿고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천랑후도 포함이다.
“흐응.”
그런 서리스를 보고 면사포 너머에서 묘한 소리를 내뱉은 아이랑이었다.
“서리스 님.”
“아, 직계님이다.”
“서리스, 끝났어?”
그러는 순간 때마침 도로시와 서발광이 돌아왔다.
거기에 발렌타인도 도중에 합류한 건지, 세 사람은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크라페는?”
“나른 골드는 시험 끝나고 바로 어디 가던데. 그 이후로는 못 봤어.”
볼 일이라도 생겼나.
아직 시험 도중이건만 도로시만큼은 홀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뇌성은 저기에 혼자서 있고, 마성은.’
아레나 탑 위에서, 지고 있는 노을을 쬐며 자고 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 일곱별 각자 개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얼굴을 보지 못한 두 별도 이 녀석들 못지않겠지.
‘계속 강해져서 그런가.’
예전에는 너무나 먼 존재였던 일곱별들이 어느샌가 너무도 가까워져 있었다.
새삼스럽지만 참 자신의 운명이 많이 바뀌었구나 하고 서리스는 생각했다.
목 뒤에 새겨진 두 개의 별과 검은별.
회귀와 더불어, 이 세 별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음을 말이다.
“제군들 주목, 마지막 참가자가 끝마쳤기에 2차 시험은 여기서 종료한다.”
그런 순간 앙켈니우스가 대기장으로 들어와 말했다.
그가 하늘을 가리키자 거기에는 화면이 또다시 떠올랐고, 화면에 적힌 것은 내일 날짜와 9시라는 시간이었다.
“3차 시험은 내일 9시부터 이루어질 예정이다. 2차 시험 통과자는 8시 반에 교문 앞에 게시될 것이니 참고하고, 제군들은 다들 돌아가도록.”
결과는 내일인가.
‘하긴, 인원수가 몇인데.’
시험 결과를 내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내일도 있어? 귀찮다아.”
도로시가 투덜거리는 걸 보며 한 대 꿀밤을 먹여 준 서리스는 문뜩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일 오라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룻밤 자고 오라는 소리였다.
오늘 아침에 워너힐 아카데미를 도착했던 서리스는 당연히 방을 잡아 둔 게 없었다.
‘탈락한 시험생들도 하루 정도는 머물고 가려고 해서 방을 잡으려는 인원이 엄청 많을 게 뻔한데.’
이렇게 안 좋은 예감이 스쳤을 때, 시험생들이 같은 생각을 했는지 우르르 몰려나갔다.
‘조졌군.’
이거, 오늘 노숙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