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소드란 울드렌.
과거로 오기 전 서리스의 이름.
가문별이 최흉 별가루 평원의 주인 월사자에게 저주받고 난 후, 한없이 추락했던 소드란.
그러나 서리스는 그 시절에도 가문을 버리지 않고 살아갔다.
같은 귀족들에게는 펜타니엄에게 빌붙어 사는 취급 당하고.
휘하 청림단 병사들에게는 무시당하는 그런 삶.
소드란은 좌천 지역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참 엉망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 가지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울드렌이 소드란 가주로 오른 뒤, 끝없는 초롱을 막던 청림단의 사상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해마다 수십 명씩 나왔던 사상자.
그러나 울드렌이 소드란 가주가 되고부터 나온 청림단 사상자는 단 두 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청림단 병사는 항상 대체할 수 있는 병력이었고, 청림단 병사에게 울드렌의 지시는 답답했다.
그는 신중했고, 조심스러웠으며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넜다.
자신이 힘이 없기에 약자가 할 수 있는 것을 또렷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행동은 무지한 이들에게 겁쟁이니, 시간을 끄니 하며 욕설로 돌아오곤 했지만.
그와 가까운 몇몇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지휘만큼은 천재라고.
그리고 이 순간.
서리스의 지휘는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데이지, 3시 방향 2m급 중형 마수 온다. 덩굴로 잠깐 발을 묶어. 갈렌, 갑옷으로 버티면서 마수가 덩굴에 엉키도록 시간을 끌어. 사구룡, 5시 방향 소형 마수 둘 처리 후 바로 저쪽에 합류해.”
빠르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서리스는 동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마수를 정리했다.
서리스가 초기에 확실하게 기강을 잡은 만큼.
팀 내에 그의 지시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세계 침식 내의 상황이 빠르게 돌아가는 탓에, 데이지와 갈렌의 불만도 쏙 들어갔다.
서리스의 예상대로 실전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그는 그들의 실수도 쉽사리 메꿔 주었다.
“행동을 망설이지 마. 부족한 건 내가 다 채운다.”
“네!”
그 결과 처음에는 그의 강함에 짓눌려 두려워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이젠 그게 든든함으로 바뀌어 서리스를 신뢰하게 되었다.
덕분에 삐걱거리던 갈렌과 데이지도 서리스라는 존재를 믿고 마음껏 싸우고 있었다.
‘워너힐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가문에 있어 영광일 테니. 기회라고 생각한 거겠지.’
다른 건 몰라도 가문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 단 건 철저하게 배운 듯.
두 사람은 나름 열심히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사실 거기에 더해 자신들보다 더 활약하는 평민 사구룡의 모습에 분해 더 분발하는 것이지만.
서리스는 그것까지는 전혀 관심 없었다.
‘옛날보다는 훨씬 편하군.’
과거와는 다르게 자신 스스로 지휘에 부족한 빈자리를 메꿀 수 있단 것이.
얼마나 큰 메리트인지 서리스는 새삼 느꼈다.
지금의 자신은 과거와 달리 가문도, 힘도 전부 가지고 있다.
옛날처럼 무조건 안전을 생각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팀원의 수준과 마수의 수준을 파악하는 능력이 훨씬 늘어 지휘가 편했던 것이다.
‘그때는 고생 많이 했었지.’
우습게도 그 고생이 지금에서 빛을 발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도로시와 아카펠, 서발광이야 워낙 재주가 뛰어나니 대충 지시를 내려도 알아서 판단하고 따라줬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다 지적하며 움직이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 여전히 세계 침식에서만큼은 자신의 지시는 정확하고, 유효했다.
팀원의 상황을 살피고 그 상황에 맞게 지휘하는 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탁월했던 것이다.
‘위급할 때에 맞춰 금강호기를 둘러 줘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전장을 보는 눈이 넓어졌단 말이지.’
그 덕에 싸우는 와중에도 세 사람을 살피며 서리스는 지시를 빠르게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전투가 수월하게 이어지자, 갈렌과 데이지도 신난 듯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하앗, 이 나의 검을 받아라!”
“덩굴 준비됐어요! 또 묶어요!”
‘참 단순한 녀석들이다.’
워너힐 아카데미에 합격하기는 힘들 거라 보지만, 부디 이날의 기억을 가지고 가문으로 돌아가서도 활약해 줬으면 좋겠다.
‘괜히 헛바람 들어서 죽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는 서리스가 알 바 아니었다.
‘그에 비해 사구룡, 저 녀석은 쓸 만하네.’
평민이라곤 하나, 집단별은 새겨 놓은 듯 사구룡은 꽤나 능숙하게 마수를 상대했다.
기본기는 탄탄하고, 검술과 경험도 준수하니.
이 팀에서 가장 걱정 없는 그였다.
“서리스 님, 주인에게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그래.”
게다가 아까 전 일 덕분인지 서리스에게 꽤나 호감이 간 듯 행동하는 그였다.
‘하여튼 귀족 녀석들은 권위 의식 때문에 저런 인재들도 번번이 놓친단 말이지.’
그나마 대가문인 펜타니엄은 전생에서나 지금이나, 실용성과 실력 지상주의다 보니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
비록 그 기준에 못 미쳐 점차 세력이 줄어든 것이 소드란이었지만 말이다.
‘다 왔군.’
그러는 사이, 사구룡의 말대로 주인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꽤나 큰 놈인 듯 거대한 기척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다들 조용.”
마수는 대부분 정리됐기에 서리스가 신호를 주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전투로 고양되었을 갈렌과 데이지의 감정을 죽이고자 일부러 별까지 끌어내며 말했기에 다들 순순히 서리스의 말을 들었다.
사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데이지와 갈렌은 그와 함께 세계 침식 속에서 싸워 보니 확실히 체감한 게 있었다.
‘괴물.’
‘저게 대가문 직계라는 거구나.’
서리스와의 넘을 수 없는 격차를 말이다.
가문의 영광을 위해 워너힐 아카데미를 찾아왔지만, 그들은 현실을 자각했다.
서리스와 같은 이들과 경쟁을 할 수 있냐고 물으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 든 것은 오직 하나.
서리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가문이 이래도 그간 대가문 직계 분들은 몇 명이나 보았지.’
‘저도 가문 내에서 별의 재능으로는 손꼽히니까 안다구요. 분명해요. 서리스 님은 대가문 분 중에서도 특별한 수준이에요.’
만약 서리스가 검성이나 염성을 꺾었다는 소식을 그들이 알고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런 태도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펜타니엄과 너무 먼 시골 영지에 살던 갈렌과 데이지는 그런 소식은 접할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서리스가 일반적인 대가문 직계보다도 강한 거 같다고 생각할 뿐.
그러는 사이 서리스는 동굴 끝자락에서 아래에 펼쳐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수천 개는 넘어 보이는 알들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서리스가 느꼈던 거대한 기척이 어째선지 보이지 않았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세계 침식이라 그런가.’
아쉽게도 일반적인 세계 침식과 달라서인지, 검은별 특유의 수색 능력이 영 먹통이었다.
하긴, 세계 침식의 마수들처럼 검은별을 지닌 것도 아닐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만.
‘이것도 환상계 마법이랑 공간 마법 등 여러 가지를 섞어서 만든 거라고 했지.’
조금 기감을 늘려 보니 느껴지는 건 세계 침식보다는 별로 가득 찬 공간과 비슷했다.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역시 마법이라는 건 자신의 상식 외의 힘인 듯하였다.
꿈틀.
‘가만히 있어라.’
그 순간 악스판시온이 또다시 그림자에서 슬며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인공 세계 침식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만큼 별이 충만하니, 악스판시온이 식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악스판시온이 별을 먹기라도 했다간 이 공간이 망가질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서리스는 악스판시온을 뽑지 않고 평소처럼 그림자 검만을 다루는 와중이었다.
그 탓에 악스판시온이 조금 열 받은 듯하지만, 그냥 무시했다.
“데이지.”
“네, 네!”
“화염 꽃이었나? 그거 저 아래에 쏠 수 있겠어?”
서리스가 알들을 가리키며 말하자 데이지는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그러곤 알들을 보더니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에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으응, 일단 해 보겠습니다!”
“부족한 건 내가 채울 테니. 일단 해 봐.”
“네엡!”
데이지는 마치 지금이 인정받을 기회라는 양 별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데이지가 직계인 모리 가문은 특이하게도 식물을 다루는 가문이라고 한다.
식물에 씨앗의 별을 부어 넣어 강제 개화를 하는 식으로 능력을 썼는데.
그래서인지 데이지는 항상 씨앗을 챙겨 다녔고, 지금처럼 무언가 하기 전에는 농부처럼 씨앗을 바닥에 뿌렸다.
저렇게 보고 있으니 귀족보다는 시골 소녀 느낌에 더 가까웠다.
데이지의 별을 머금은 화염 꽃들 수십 다발이 바닥에서 자라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서리스의 키 반 정도 되는 크기의 꽃들은 자라나자마자 모두 광장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이어 화염 폭우를 알들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화력은 그럭저럭.
한 번에 처리하기에는 부족하긴 하나, 시간만 들인다면 충분할듯싶었다.
1차를 통과한 만큼 데이지의 별이 모자라 보이지도 않았고 말이다.
쿵!
그러던 순간이었다.
아까 전 서리스가 감지했던 거대한 기척이 다시금 느껴진 것이.
서리스가 눈썹을 좁힌 순간, 알 아래 바닥이라 생각한 것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 허억! 저, 저게 무엇이야?!”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놀란 갈렌이 기겁하며 외치자, 사구룡이 서둘러 그에게 조용해야 한다고 신호를 줬다.
그러자 흠칫한 갈렌이 자기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방금까지 알이 군집한 광장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곧 무언가가 실체를 드러냈다.
알이 가득 자리한 바닥의 정체는 바로 거대한 거미의 등이었고.
그 괴수는 다름 아닌 세계 침식의 주인이었다.
“기이이이익!”
자신의 알들이 불탄다는 소리에 화가 난 거대 거미가 소리를 내지르며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꺄아악!?”
“무, 무너진다아!”
그 탓에 광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데이지와 갈렌은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서, 서리스 님.”
사구룡 또한 이 상황에는 별수 없는 듯 서리스를 바라보자, 그가 하는 수 없이 바닥을 쿠웅 발로 찍었다.
후우웅!
그러자 바닥에서 솟아 나온 그림자가 서리스와 세 사람이 있던 벽과 천장, 바닥 전부를 에워쌌다.
곧이어 네 사람의 공간은 다른 차원으로 분리된 것처럼, 정신없이 무너지고 있는 바깥과 달리 흔들림 하나 느껴지지 않는 안전한 장소가 되었다.
“와아.”
사구룡이 감탄사를 내뱉는 동안 서리스는 아래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했다.
거대 거미는 벌써 서리스 팀의 존재를 눈치챘다.
지금의 난동도 수월하게 공격을 하려고 일부러 광장을 무너트리며 공간을 확보하는 걸 테다.
저놈이 더 설치게 뒀다간 광장이 전부 무너진다.
서리스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화염 꽃의 불꽃에서 살아남은 사람만 한 거미들이 하나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서리스가 빠져나가면 그림자가 자신을 따라와 동굴이 무너질 거다.
팀 단위의 시험인 이상 저 혼자 살아남는다는 건 어불성설.
“악스판시온, 내 그림자를 먹어라.”
하는 수 없이 서리스는 꺼내려 하지 않았던 악스판시온을 뽑았다.
녀석은 인공 세계 침식이 더 탐나는 듯하였지만, 서리스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었다.
꿀럭꿀럭.
그림자를 삼킨 악스판시온을 바닥에 박아 넣자, 그 검이 서리스 대신 그림자 공간을 유지했다.
그걸 확인한 서리스는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셋 다 잘 들어. 나는 주인을 처치할 거다. 대신 셋은 그동안 거미 마수들을 상대해야 해.”
“백, 백 마리는 되어 보이는데요?!”
부화한 거미들을 보며 데이지가 걱정스레 말하자, 서리스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 부화한 놈들이야. 보유한 별도 많지 않고 크기만 크다. 데이지, 너는 원거리에서 최대한 수를 줄여. 갈렌은 입구 쪽에서 네 가문비기로 최대한 버텨 줘. 근접해 오는 거미 마수들은 사구룡, 네가 처리해 줘야 해.”
대략적인 지시와 함께 서리스는 돌발 상황에 따른 대처 방법도 넌지시 던져 주었다.
이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셋 다 알았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서리스는 미덥지 않은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걱정 마.”
이내 그를 중심으로 끈적하면서 미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묘한 공포감을 일으키는 바람 속에서 서리스는 손아귀에 한 자루의 그림자 검을 쥐었고.
아직도 날뛰고 있는 거대 거미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 걸리지 않을 테니까.”
그 말을 남기고 서리스는 벽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발과 벽 사이를 이어 붙여 내달리는 서리스에게 새끼 거미 마수들이 달려들었지만, 그의 질주를 조금도 막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의 그림자 검에 깃든 그림자는 점차 더 진한 어둠을 흘리기 시작했고.
서리스의 목덜미에 깃든 두 개의 별은 그림자와 대비되듯 강렬한 빛을 토해 내었다.
검은별을 쓸 필요도 없다.
‘우선 크게 한 방.’
큰놈을 상대하는 거야 세계 침식에서 늘 상 있는 일이다.
서리스의 두 눈동자가 번뜩이고, 그의 팔 근육이 거칠게 부풀어 오른 순간.
서리스는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금강귀명도(金强晷銘刀)
이식(二式)
반월박살(半月撲殺)
콰가가가강!
“끼이이이이이익!”
몰아친 그림자 검격 앞에 터져 나오는 거대 거미의 비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