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셀링은 미칠 거 같았다.
이바드라가 시선을 끌었고, 광견이 그 뒤를 쫓았다.
광견의 살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살을 발라내는 것처럼 끔찍했고.
그 살기가 오롯이 이바드라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에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셀링, 멈추세요. 셀링!”
그렇기에 그녀의 다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자신으로서는 이바드라와 광견을 쫓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바드라에게 위기의 순간이 온다면.
하다못해 한 번이라도 광견의 공격을 막아 줄 수 있다면.
탁!
그런 생각과 함께 움직이던 다리가 누군가에 의해 제지되었다.
그녀의 팔을 잡은 것은 같은 기사단원인 아즐리였다.
“놔 주세요! 전 가야 합니다!”
“단장님이 기껏 벌어 준 시간이잖아요! 당신이 이러면 단장님이 뭐가 됩니까!”
“이바드라 님이 왜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요? 이깟 기사단보다 이바드라 님이 더!”
“지금 너무 흥분했습니다. 진정하세요.”
“제가 어떻게 진정합니까!”
피를 토하듯 외친 셀링의 눈이 애타게 이바드라를 쫓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미 산을 넘어 숲속으로 사라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밤빛 기사단에도 긴급 연락 마법 스크롤로 연락을 넣어 놨어요. 염호 님이 오시고 있다는 소식도 확실히 전해 들었고요.”
조금 전 그 소식을 듣고 기사단장들에게 전해 두었던 아즐리는 막무가내인 셀링을 말렸다.
그 사실을 들은 셀링의 기세는 조금은 줄어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불안감은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광견을 상대로 아무리 이바드라 님이라도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죠.”
“그건.”
아즐리는 말문이 막혔다.
광견의 실력은 총기사단장인 엘다리트마저 쓰러트릴 만큼 강하다.
그런 자가 이바드라를 전력으로 쫓는다면 솔직하게 말해 도망도 쉬운 일이 아님을 아즐리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친선 대결에서 전력을 쏟느라 무리하게 힘을 많이 소비한 이바드라다.
아직 회복 도중이었던 걸 감안하면 도주는 더더욱 힘들다는 소리와 같았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광견이 자리를 비운 틈을 이용해 망자와 그의 부하들을 뚫고 한시라도 빨리 바르크에 합류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아즐리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이것밖에 없었다.
기사단장도 아니고 하물며 산속에서의 오랜 전투로 정상 컨디션도 아닌 자신들이.
이바드라를 돕기는커녕 발목을 잡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안 돼. 안 된다고요.”
셀링이 울음을 터트리듯 얼굴을 제 손으로 감쌌다.
이바드라를 돕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이 스스로 몸서리칠 정도로 싫었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일반 기사 밖에 안된다는 사실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이바드라를 위해 매일같이 단련을 반복했건만, 그를 위해 목숨조차 던지지 못한다니.
“누가, 누가 제발.”
악마라도 좋다.
세계 침식자라도 좋다.
제발 누군가 이바드라 님을 살려 준다면 뭐든지 바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미칠 것만 같은 감정의 동요를 느낀 순간, 그들은 망자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산 아래, 기사단과 동떨어진 아즐리와 셀링을 노리고 산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셀링!”
“윽.”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킨 셀링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아즐리도 곧바로 검을 뽑고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몰려들 망자를 대비한 순간.
콰광!
커다란 폭발이 일어났다.
깜짝 놀란 아즐리가 설마 또 다른 적습인가 하고 기감을 끌어 올렸을 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남자였다.
제복을 입었음에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근육과 큰 체형.
그의 발아래에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그림자는 어안이 벙벙한 아즐리마저 사내의 정체를 알게끔 했다.
“펜타니엄 서리스 님!”
아즐리가 외친 순간, 셀링도 놀라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외침대로 거기에는 서리스가 있었다.
“아, 다행히 오래 안 헤매고 도착했네요.”
안도하듯 빙그레 웃은 서리스는 그대로 검을 들어 뒤를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그의 그림자 검에서 쏟아져 나온 검격이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망자를 학살했다.
가벼운 휘두름이었다.
그러나 가벼움에 비해 압도적인 위용은, 보고 있는 아즐리조차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하였다.
친선 대결 때도 그렇지만 서리스에게서 흘러나오는 별은 비이상적이었다.
어쩌면 멀리서 보였던 광견조차도 그에 비하면 별이 모자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 만큼.
“펜타니엄 서리스 님!”
그 순간 아즐리를 두고 셀링이 서리스에게 뛰어갔다.
그녀가 이바드라의 곁에 있던 사람임을 눈치챈 서리스가 의문을 보이자 그녀는 곧장 사실을 전했다.
“광견이 이바드라 님을 쫓아갔습니다! 제발 그분을 도와주세요!”
광견, 그 말을 듣자마자 서리스는 인상을 팍 찡그렸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도 그 광견 때문이었으니까.
‘역시 목적은 이바드라였나.’
광견의 일곱별에 대한 집착을 알고 있던 서리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염호가 온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이바드라를 지키기만 하면 된다.
“곧 지원군이 도착할 겁니다. 제가 이바드라와 광견을 쫓을 테니. 기사단 쪽에 합류해 상황을 전해 주십시오.”
셀링에게 지원군 이야기를 전한 서리스는 곧장 바닥을 박찼다.
위치는 기감을 안 써도 알 수 있었다.
검은별의 기운이 산 전역에 풀풀 흘러넘치다 못해 코끝을 아릿하게 만들 정도였는지라.
광견의 위치를 쉽게 특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죽지 마라. 이바드라.’
서리스는 그가 적어도 워너힐 아카데미에서 다시 맞서겠다는 말 정도는 지키길 바라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 * *
장물아비.
광견의 직속 부하인 그는 망자를 되살려 조종하는 망자지기였다.
그런 그가 이상하리만치 집착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을 망자로 만들어 조종하는 것으로, 일종의 정복 욕구였다.
이런 그에게 가장 깊은 소망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대가문 직계를 망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가문 직계들은 망자의 부름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이 무척이나 괴롭고 아쉬웠다.
그렇게 갈 곳 없는 욕망이 이리저리 굴러가고.
그가 세계 침식자에게 힘을 받았을 때.
비로소 그는 소가문 직계를 망자로 일으킬 수 있었다.
그걸 본 그는 전에 없던 희열을 느꼈다.
이 힘이라면 대가문 직계라 할지라도 제 손으로 죽인다면 망자로 일으킬 수 있다.
음습한 욕망을 발현할 능력이 생긴 그에게 거칠 건 없었다.
“오오오옷!”
그리고 지금, 광견을 따라 주홍빛 기사단을 습격했던 그의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붉은색의 머리카락.
자유롭게 풀어진 듯한 표정에도 뚜렷하게 빛나는 화사한 붉은 장미 같은 외모.
그녀는 다름 아닌 제나디아 도로시였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명백하게 느껴지는 별의 힘.
그 별의 힘은 다름 아닌 마왕의 별이었다.
수많은 망자를 다루며 그들과 이어진 별의 존재를 여럿 만져 본 장물아비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무려 천하오장성인 마왕의 딸.
대가문 직계!
그 핏줄이 눈앞에 있었다.
“아, 아아아아!”
저걸 망자로 만들고 제 마음대로 다루면 그 쾌감은 어떨까.
예전이라면 가문별 탓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겠지만.
세계 침식자의 힘이 있는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별문신을 검은별로 가리면 끝이니까!
그의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가지고 싶다.
저걸 가지고 싶다.
광견에게 받은 명령은 자리를 지키며 주홍빛 기사단과 앞으로 올 지원을 망자로 시간을 벌어라 였으나.
이미 돌아간 그의 눈은 명령마저 잊어버렸다.
그가 움직이자 수많은 망자들이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이상 증세를 알아차린 것은 청랑단도 마찬가지였다.
“정지.”
먼저 간 서리스와 윌리엄을 대신하여 대표를 맡은 레가놀이 모두를 멈춰 세우곤 감각을 곤두세웠다.
산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떠도는 망자들을 처리하며 이동해 온 만큼 경계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느껴진 감각은 망자들과는 달랐다.
마치 거대한 살의가 똘똘 뭉쳐 이쪽으로 쏟아져 내려오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레가놀 선배님!”
그 순간 클로나가 한 방향을 가리키며 외쳤다.
그 외침을 따라 레가놀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는 황당한 것을 보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는 거대한 사람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있었다.
크기는 15미터쯤 될까.
웬만한 건물보다도 거대한 거인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수없이 많은 망자였다.
자기들끼리 몸을 이어 붙여 만들어진 거인은, 망자가 쥔 병장기들을 전신에 두른 채.
이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두 눈을 의심케 할 광경에 멍하니 있던 레가놀이었지만, 그는 곧 그게 적습인 걸 깨닫고 명령을 내렸다.
“전원 전투 준비! 원거리가 가능한 자들은 바로 요격해라!”
망자 거인이 이대로 이곳으로 진격하게 둘 마음은 없다.
그 순간 망자 거인의 머리가 폭발했다.
깜짝 놀란 모두가 시선을 옮겼을 때, 활을 든 아카펠이 몰려든 이목에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 요격하래서 했습니다만.”
“잘했어! 아카펠 후배님! 다들 마구 쏴!”
클로나가 빙그레 웃어 주며 외치자마자, 여기저기서 폭격이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건 아카펠이었다.
펜타니엄 내에서 원거리 요격으로는 최고라 손꼽히는 칸빌레의 이름답게.
아카펠의 화력은 망자 거인조차 주춤거리게 할 정도였다.
‘서리스만이 아니라 이건가.’
아카펠의 극폭시가 연달아 망자 거인을 두드리자, 레가놀은 옅게 미소 지었다.
과연 황금 기수 취급당할 만하다.
그사이 망자 거인 아래 도달한 단원들이 너무 큰 망자 거인을 올려다보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다.
망자 거인을 이루고 있는 망자들은 전부 병장기를 쥐고 있기에.
섣불리 다가가면 오히려 병장기에 얻어맞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가겠습니다.”
모두가 고민에 빠졌을 때, 이미 움직인 서발광이 망자 거인에게 파고들었다.
그는 날아드는 망자들의 병장기를 모조리 피함과 함께 칼집을 바닥에 투웅 두드리듯 검을 뽑았다.
금강비섬류(金强怌閃類)
이식(二式)
형섬발도(螢閃拔刀)
반월 형태로 이루어진 검이 발검한 순간, 망자들이 찢겨 나가며 망자 거인 다리가 일부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금방 다른 망자들이 그 자리를 메꾸며 망자 거인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우리도 몰아친다!”
50기 엑포드가 발에 모은 그림자를 던지며 외치자 모두가 달려들었다.
그런 순간이었다.
망자들을 또 한 차례 베고 바닥을 끌 듯 선 서발광이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
‘도로시는?’
왜인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악!”
그런 순간 갑자기 성대를 갈아 버리기라도 한 듯 쇳소리가 담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서발광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생각했다.
‘저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