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청랑호법 후보 시험이 끝마치고.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세계 침식과 맞서고자 오늘도 훈련을 하는 청랑단원이나.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배우고 있는 이들 등.
청랑단원들은 여러 일들을 하며 하루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어제 청랑호법 후보 시험을 치렀던 서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가부좌를 튼 채 조용하게 별을 몸 깊숙이 스며들게 하던 그는 곧 천천히 눈을 떴다.
기분 좋은 봄바람이 그의 코를 간질이고 지나갔다.
살짝 따스함이 담긴 것이, 얼마 뒤 여름이 다가올 것 같았다.
“서리스.”
서발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그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서리스가 눈을 뜨자 거기에는 미소 지은 그가 서 있었다.
“하다크 님이 부르셔.”
청랑단주의 부름에 서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방 밖으로 걸어 나오자 거기에는 아카펠, 도로시도 같이 서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긴 했지만 아쉽네.”
“직계님, 또 혼자 멋대로 앞서가고 있어.”
아카펠의 쓴웃음 소리와 도로시의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을 보고 서리스는 어깨를 으쓱이었다.
“딱히 멀리 가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아직 후보고.”
물론 정식으로 청랑호법이 된다면 기숙사를 나가게 되긴 하겠다마는.
“후보라도 활동하는 게 달라질 거잖아. 그래서 그래.”
옆에 선 서발광도 아쉽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난 53기수 출신이야. 그건 달라지지 않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다들 살짝 웃었다.
“갔다 올게.”
그리 말하고 서리스는 청랑단주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랑단에서 1년.
드웨이진의 말마따나 청랑단에 들어 온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몰랐어.’
청운귀명도의 수많은 변형.
그걸 보고 얼마나 많은 걸 터득 했던가.
청랑단에서의 생활은 서리스에게 덧없이 큰 의미였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20살이 오기까지 앞으로 3년.
3년 뒤에는 워너힐 아카데미로 가야 하는 만큼 남은 시간은 그 정도뿐이다.
워너힐 아카데미는 진짜 대륙의 강자들만이 모인다.
오직 세계 침식을 위해 정상에 서는 자들.
그런 녀석들과 어울리려면 계속해서 강해져야 할 것이다.
3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겠지만.
서리스는 청랑단에서 최선을 다해보고 싶었다.
똑똑.
“들어오세요.”
서리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하다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늘도 점잖게 집무를 보고 있던 그가 서리스를 바라보았다.
“서리스, 왔습니까.”
“예,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앉으시죠. 제가 왜 불렀을지는 아실 겁니다.”
윌리엄과 같이 오랫동안 함께한 이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존대를 사용하는 하다크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앞에 놓인 의자에 서리스가 앉자 하다크는 집무를 잠시 멈추고 보던 것을 치워 두었다.
“후보 패는 가져 왔겠죠.”
서리스는 품에 있던 후보 패를 꺼내 보였다.
원래는 네 조각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하나가 된 후보 패.
레가놀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서리스는 끝내 승리한 것이다.
마지막 서로의 전력을 담은 일격.
그 일격을 앞두고 레가놀과 서리스는 웃었다.
어느 누가 청랑호법이 된다 한들 인정할 수 있을 그럴 싸움이었기에.
그렇기에 패배한 레가놀은 서리스에게 직접 호패를 건네주었다.
‘너에게라면 져도 괜찮겠지.’
인정 넘치는 말이었다.
‘언젠가 레가놀은 펜타니엄을 지탱해 주는 사람 중 한 명이 되겠지.’
서리스가 더듬은 과거에 기억 속 레가놀이 떠올랐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기억이 지금과 똑같이 이어질 리는 없겠지만.
그 기억 속 레가놀은 분명 청랑단주 후보로서 하다크 옆에 있었다.
언젠가 청랑단주가 될지도 모를 그와의 이러한 관계는 서리스에게도 가장 좋은 끝맺음이었다.
이리하여 서리스는 청랑호법 후보가 되었다.
그것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그런 후보가.
“말했듯이 서리스는 청랑호법 후보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후보는 후보. 언제든 철회할 수 있습니다.”
서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식으로 청랑호법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가 더 있다고 했다.
시험은 그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규격.
서리스는 이제 1차를 통과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정식 청랑호법이 되기 전에 또 얼마나 많은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때.
“하지만 서리스라면 문제없겠죠.”
하다크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아만다가 은퇴하면 바로 정식으로 등록할 예정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세계 침식을 막고자 누구보다 노력하는 이에게 무슨 절차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모두가 동의한 일입니다.”
서리스는 살짝 울컥한 기분을 느꼈다.
끝없는 초롱을 상대로 세계를 지켜내고자 평생토록 싸워 왔던 그였지만.
어느 누구도 인정받지 못했던 서리스였다.
그의 인생에서 무시와 멸시는 떼어 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는 인정받고 있었다.
하다크뿐만이 아니라 청랑단 모두에게 말이다.
그의 노력은 헛된 게 아니었다.
그것이 무어라 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럼 그 전에 서리스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괜찮다는 듯 답하며 서리스는 하다크를 바라보았다.
“서리스는 펜타니엄의 가주가 되기를 원합니까?”
그 물음에 서리스가 잠깐 눈을 깜빡거렸다.
서리스는 분명 펜타니엄 가주를 딱히 목표로 잡고 있지 않았다.
강해지는 것은 좋다.
서리스의 오랜 꿈이었기도 하고.
하지만 펜타니엄 대가문의 가주는 어떨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확실하게 정해 두지 않았다.
너무 남의 일 같기도 했고.
“하지만 천상사성까지 확실하게 올라갈 겁니다.”
“높은 경지에 오르면 자리는 알아서 따라오는 법입니다.”
하다크가 웃었다.
“기대하겠습니다.”
꽤나 부담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이런 기대를 받는 건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랑단주의 신임은 서리스에게도 큰 것이었다.
“아, 그리고 오를레 쪽에 지원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가라는 거군요.”
“아만다의 은퇴식 전에 출발 예정입니다. 팀 구성은 5명 정도, 팀원 선정은 서리스에게 맡기죠.”
“알겠습니다.”
명을 받은 서리스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팀을 짜라, 라.’
5명을 짠다 하면 일단 53기수를 다 데려가고, 나머지 한 명은 따로 더 알아봐야 할 듯싶었다.
“서리스 후배님.”
그런 생각을 품으며 복도를 걷고 있었을까.
서리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클로나가 서 있었고, 그녀는 미소와 함께 서리스 옆으로 다가왔다.
“아만다 씨께서 부르셔.”
“아만다 님께서요?”
청랑호법 후보가 되었으니 인수인계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따라와. 안내해 줄게.”
클로나의 말에 감사 인사를 하며 서리스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청랑호법은 일이 무척이나 많다고 했었으니, 인수인계도 이것저것 많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리스는 클로나가 가는 방향이 어딘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아만다의 집무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클로나 선배님?”
“쉿, 서리스 후배님, 이럴 때는 너무 눈치 빠르게 굴지 않는 게 좋아.”
서리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여기는 식당 앞이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안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자, 서리스 후배님.”
그런 순간 그녀는 서리스를 당겨 앞세우곤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청랑단식 축하를 받을 시간이야.”
그 말과 함께 클로나는 문을 활짝 열며 서리스를 밀어 넣었다.
“서리스 떴다!”
“퍼부어!”
그 순간 온갖 케익들이 서리스에게 쏟아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케이크 세례에 당황한 서리스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클로나가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런 거였나.
서리스는 쓰게 웃곤 항복의 의사로 양손을 든 채 케이크 폭격에 당해 주었다.
서리스의 청랑호법을 축하해 주는 자리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케이크 범벅이 된 서리스는 모두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케이크를 한입 먹었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진한 단맛이었다.
청랑단 모두의 얼굴이 보였다.
그동안 동고동락하며 함께해 온 이들이 모여 서리스가 청랑호법이 된 것을 축하 해주고 있었다.
“젠장, 결국 됐네.”
“그래도 청랑호법에게 패배한 거니 됐지 않아?”
엑포드의 한숨 소리에 그의 동기가 낄낄거렸다.
“서리스, 축하해.”
“이야, 최연소 청랑호법이라니. 대단하네요.”
라파즐리와 델리티드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직계님, 꼴 좀 봐.”
“아하핫, 서리스, 잘 어울린다.”
“여기 손수건.”
도로시와 아카펠, 서발광이 서리스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 왔다.
그런 그들을 보며 서리스는 다시금 청랑단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 *
축하를 꽤나 거칠게 받은 다음 날.
서리스는 아침부터 준비를 마치고 마차 앞에 서 있었다.
하다크에게서 받았던 오를레 건을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서발광, 다른 애들은?”
“저기 오고 있어.”
마차 상태를 점검한 서리스가 돌아보자 아카펠과 도로시가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 뒤로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제로였다.
서리스와 함께 가는 것이 들뜬 듯 그의 눈은 초롱초롱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제로, 너 짐이 대체 몇 개야.”
보다 못한 서리스가 한마디 하자 모두가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53기는 벌써 몇 번이고 출전한 적이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물건들은 현장 조달이 기본이며 최소한의 생필품만을 챙겼다.
하지만 웬걸.
제로는 꽉꽉 눌러 넣은 가방을 무려 다섯 개나 가져왔다.
“어? 다 필요한 건데.”
“직계님, 얘, 친동생 맞아?”
하는 짓이 전혀 안 닮았다는 듯 도로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도로시나 아카펠도 같은 귀족이지만, 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다.
‘제로가 오냐오냐 자라기는 했긴 한데.’
펜타니엄 가문에 막내.
샬롯의 존재와 늘 비교당하다 못해 관심 밖으로 밀려난 데다가, 기대도 받지 않아서일까.
그동안 제로의 행동을 바로잡을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나를 졸졸 따르고 있으니.’
서리스는 터벅터벅 걸어가 제로의 가방을 빼앗았다.
“어, 어.”
그러곤 가방 중 4개를 던지고, 나머지 한 개도 필요 없는 걸 죄다 털어 냈다.
“형, 그건, 그건 진짜 필요해!”
“아니, 필요 없다.”
“필요하다니까! 이거 없으면 나 못 자!”
“자지 마라 그냥.”
제로의 가방이 가벼워질 때까지 털어 낸 서리스는 그 가방을 제로에게 던져 주었다.
제로는 울상을 지었지만, 서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들 가자.”
서리스의 청랑호법으로서 첫 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