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서리스가 검을 휘두르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대체 얼마나 별과 힘을 쏟아 부운 것인지, 중심을 잃은 50기 전원의 몸이 공중으로 부웅 떴을 때.
도로시와 서발광은 이미 청운귀수에서 빠져나와 도약하고 있었다.
채엥!
도로시와 서발광의 검이 엑포드의 다리와 그의 동기 마란의 검과 부딪쳤다.
예기치 못한 공격으로 자세가 무너진 만큼 밀린 것은 엑포드와 마란이었다.
병장기 소리가 울리는 사이로 아카펠의 화살이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화살이 닿기 전 하늘을 수놓은 그림자 비수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화살들을 튕겨 냈다.
“쯧.”
상대도 후방 지원이 가능한 사람이 있었다.
이를 알아챈 아카펠이 혀를 차며 선록화와 함께 풍경에 스며드는 동안 서리스는 검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그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로나였다.
대표끼리의 만남.
클로나는 짧게 눈웃음을 흘리더니 비스듬히 섰다.
한 손은 허리로, 다른 한 손은 서리스에게 겨눈 그녀는 이 상황이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대담하네. 주인 역할까지 직접 올 줄이야.”
“숨어 있기만 하는 건 저희 취향이 아니라서요.”
“확실히 그런 건 재미없지.”
가볍게 동의한 순간 서리스가 바닥을 박찼다.
“하지만 단순무식 했던 건 변하지 않아.”
탄환처럼 돌진한 서리스가 검을 휘둘렀을 때.
클로나는 마치 흐르는 물같이 자연스럽게 서리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그의 옷깃을 손으로 잡아 틀어쥐더니 그대로 엎어뜨려 버렸다.
게다가 클로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리스가 엎어질 장소에 청운귀명으로 펼쳐진 그림자가 마치 송곳과 같이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대로 엎어지는 순간 그림자 송곳에 꿰뚫려 죽을 판.
서리스는 호락호락 당할 생각은 없는 듯 허공에서 검을 휘둘렀다.
후웅!
그 순간 강렬한 검의 풍압과 함께 서리스와 클로나가 동시에 튕겨 날아올랐다.
둘 다 공중제비를 돌며 착지하자 클로나 쪽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난 세계 침식보다 대인전 특화거든.”
다시 아까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클로나를 보며 서리스도 자세를 되잡았다.
‘이 사람 확실히 강하네.’
시험관이었던 엑포드가 그녀에게 눌려 대표 자리를 내어 줄 만하다.
그녀가 청운귀명을 다루는 솜씨는 눈으로만 보아도 배울 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짧긴 하지만, 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청운귀명을 다루는 건 꽤 보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예 부대인 청랑단은 역시 다르다 이건가.
들어오길 잘했다.
배울 점이 많지 않은가.
서리스가 기묘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강함에 대한 강렬한 갈망.
전생에서는 평생을 육체적 한계로 인해 헛되게 보내야만 했던 서리스에게 그 갈망은 채워질 수 없는 욕구였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이 더없이 즐거웠다.
그의 웃음에 클로나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을 때, 서리스가 다시금 바닥을 박찼다.
처음 돌진한 것과 똑같은 모습.
자포자기일 리는 없다.
서리스가 노리는 바가 있음을 깨달았지만, 클로나는 어울려 주기로 했다.
서리스와는 적이기 이전에 같은 청랑단 동료다.
‘새로 들어온 막내 기수가 성장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울려 줘야 하지 않겠는가.
곧 서리스의 검이 들어오고, 클로나는 처음과 같이 그의 옷깃을 휘어잡았다.
뒤이어 서리스의 몸이 업어치기당해 공중에 붕 뜬 순간 그가 우뚝 멈춰 섰다.
“하하.”
클로나의 짧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이 처음에 사용한 청운귀수를 그대로 따라 하여 제 몸을 공중에서 잡았기 때문이다.
“잠깐 보고 그걸 따라 해?”
서리스는 본인이 너무 쉽게 하고 있기에 자각 못 했지만, 그의 청운귀명은 남달랐다.
별의 출력이 높다는 건 그만큼 청운귀명 또한 폭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러나 서리스는 처음 검의 형태를 잡는 데만 고생했을 뿐.
그 이후부터 단 한 번도 청운귀명이 폭주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천재.’
그에 대한 해답은 클로나가 가볍게 정의해 주었다.
소드란 시절에는 별을 다룰 수 없는 육체였기에 아무 가치를 보이지 못했던 재능이.
지금에 와서 꽃이 개화하듯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떡잎은 자라나 언젠가 거목이 된다.
서리스의 끝없는 각성에 클로나도 불이 붙었다.
“재밌네! 더 해 봐, 서리스!”
서리스와 클로나가 본격적으로 전투에 몰입할 무렵.
엑포드는 혀를 차고 있었다.
“클로나 녀석 멋대로 불붙기는.”
그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은 53기 서발광.
처음에는 빨리 그를 쓰러트리고 클로나에게 합류할 속셈이었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클로나가 불이 붙었다.
저건 합류해도 도우려 해 봤자 화만 내겠지.
그렇다면 지금은 이쪽에 오롯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세 기수나 차이 나건만.’
눈을 힐끔 돌리니, 도로시와 자신과 같은 기수인 마란이 부딪치고 있었다.
하나는 역으로 또 다른 하나는 정으로 쥔 두 개의 식칼 같은 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모습은 마치 표범과 같았다.
동물적인 감각과 유연함.
중간중간 페이크를 섞는 기술은 감탄사를 내뱉게 할 정도였다.
거기에 아카펠은 어떤가.
선록화를 이용한 위치 선점과 원거리 저격은 물론.
활을 변형한 봉으로 근거리 대응까지도 완벽하게 해내는 그는 뒤를 맡기기에 가장 든든한 아군이였다.
가장 주목할 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50기에 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직 16살인 놈들이 이 정도 실력이라니. 이번 기수는 황금 세대인가.’
휘익!
생각에 잠긴 짧은 틈을 노리고, 서발광의 검이 엑포드의 머리카락을 일부분 자르고 지나갔다.
분명 맹인 검사이건만, 휘두르는 검은 멀쩡한 눈을 가진 이보다 매섭다.
다들 탐나는 재능이다.
하지만 밀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엑포드의 다리가 바닥을 쿠웅 내려찍었다.
그 순간 치솟은 그림자에 서발광이 물러서자 엑포드의 눈빛이 바뀌었다.
“50기!”
짧은 호령.
그 호령이 이어진 순간 개인전을 펼치던 두 사람이 엑포드 곁으로 붙었다.
순식간에 진형을 맞추듯 모인 그들의 앞에 엑포드가 발차기 자세를 취했다.
그 탓에 자연스레 아카펠과 도로시도 서발광 쪽으로 모이게 되었다.
53기는 황금 세대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는 없고, 선배 기수인 엑포드 쪽에게만 있는 것이 있다.
“청랑단의 싸움이 무엇인지 보여 주자.”
이전과 다른 기세가 그들의 눈가에 비쳤다.
* * *
거친 호흡이 이어졌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 공방전이기 때문일까.
서리스는 몸이 피로해진 것을 느끼며, 클로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클로나가 한 대인전이 특기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절묘한 타격과 무술.
거기에 자유자재로 다루는 청운귀명까지.
그 때문에 서리스에게 몇 번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곱게 당해 주지만은 않았다.
당장 마주하고 있는 클로나도 서리스의 공격에 꽤 많은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서로가 눈치챘다.
다음 일격으로 승부가 결정 날 것이란 걸.
“서리스.”
제복 여기저기가 엉망이 된 클로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리스가 그런 클로나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는 땀방울에 젖은 얼굴로 눈웃음 지었다.
“끝나고 카페에서 커피 한잔 같이할까.”
서리스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 타이밍에 잘도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는군.
“질문의 의도가 뭐죠?”
“생각하기 나름.”
“그럼 끝나면 대답하는 걸로 하죠.”
서리스의 대답에 클로나는 도발적인 미소와 함께 발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좋네. 어서 끝내고 대답이나 들어 봐야겠어.”
클로나의 발아래에 드리운 그림자가 부풀어 올랐다.
그 순간 클로나의 청운귀명의 형태가 바뀌었다.
서리스가 청운귀명으로 검을 만들어 내었듯 그녀의 전신 위로 흑색의 갑주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빛조차 반사하는 새까만 투구 사이로 푸른색 불길이 일어났다.
청운귀명마(淸雲晷銘魔)
귀령갑주(鬼令甲胄)
클로나를 중심으로 별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서리스조차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별빛과 함께 클로나가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를 잡았다.
“막아 봐.”
짧게 읊조린 말과 함께 돌풍이 불었다.
콰앙!
바람이 불었다고 생각했을 때 클로나는 이미 부딪쳐 있었다.
그저 돌진일 뿐이었지만, 그 위력은 바위도 뚫을 정도였다.
‘이걸 막아?’
하지만 클로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귀령갑주는 클로나조차 속도 조절이 불가능한 비기다.
그런데 서리스는 오로지 순전히 감만으로 귀령갑주를 막은 것이다.
‘더럽게 아프네.’
그러나 서리스조차 온전히 막은 것이 아니었다.
미처 상쇄 못 한 육체의 강렬한 울림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울림은 서리스에게도 나쁜 게 아니었다.
몸의 온 충격이 전신을 타고 고스란히 검으로 되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잔월(金强虥狘)
반류(反流)
모든 힘의 흐름을 되돌린다.
“으랴아아아!”
기합성과 함께 서리스의 검이 클로나의 일격을 고스란히 담아낸 채 그녀에게 휘둘러졌다.
콰앙!
둔탁한 소리가 이어졌다.
서리스의 검에 맞은 클로나가 갑주째로 하늘 높이 뛰어 올라졌다.
그 순간 서리스는 멈추지 않고 바닥을 박찼다.
쌓인 피로와 방금 전 충격으로 육체가 삐걱거렸다.
그걸 별의 힘으로 강제로 찍어 누르며 서리스는 허공에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건 클로나도 마찬가지였다.
날아간 자세 그대로 공중제비를 돈 그녀가 공중을 박차며 다리를 휘둘러 왔기 때문이다.
둘의 별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청운귀명도(淸雲晷銘刀)
오식(五式)
청운귀참(淸雲晷斬)
서리스의 검이 하늘을 가르고.
청운귀명(淸雲晷銘)
무투식(武闘式)
귀영각(鬼影脚)
클로나의 다리가 대지를 갈랐다.
둘의 공격이 교차하고 거친 소음이 대기를 울렸을 때.
두 사람이 아래로 추락했다.
모락모락, 흙먼지가 일어났다.
흙먼지가 걷혀 가고 있을 때 그 사이로 걸어 나온 것은 다름 아닌 클로나였다.
갑주가 부서져 나가 꼴이 엉망인 그녀는 한 차례 눈웃음을 짓더니.
“아, 하, 하, 아까워라.”
짧은 말과 함께 눈이 풀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서 서리스가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클로나 만큼이나 엉망인 그였지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대표끼리의 싸움은 서리스의 승리였다.
“서리스.”
그런 순간 아카펠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리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에는 아카펠이 입술을 깨문 채 쓰러져 있었다.
“……미안하다.”
아카펠의 사과와 함께 다른 이들도 보였다.
계속 몸을 일으키려 하는 도로시와 나무의 기댄 채 숨을 고르고 있는 서발광.
그리고 그들과 달리 당당히 서 있는 50기 세 명.
“클로나 녀석.”
“아, 대표전은 졌네.”
개인전으로는 비등해 보였는데 팀플레이에서 진 건가.
하긴, 53기수는 최근 선발된 애들이다.
3년 이상 함께했을 그들에게 팀으로서는 상대가 안 되겠지.
‘어쩔 수 없나.’
서리스는 검을 아래로 내렸다.
3대 1인 상황.
심지어 서리스도 클로나와의 싸움으로 많이 지쳤다.
당연한 선택이었다.
50기가 그가 전의를 잃었다고 생각한 순간.
“다 같이 덤비시죠.”
서리스의 별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후광과 같이 떠오른 강렬한 별의 기운에 50기 전원이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저 녀석 진심으로 3대 1을 해볼 속셈이다.
“미친놈.”
엑포드가 중얼거렸다.
패기는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의 패기는 객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왜인지 서리스를 보고 있으니 마음속이 들끓었다.
“해 봐.”
엑포드가 자세를 잡자 나머지 둘도 따라 자세를 잡았다.
다시금 네 사람의 전투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50기, 53기 모의전을 중단한다. 세계 침식 발생이다.]
갑자기 숲 전체에 다트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