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정말로?”
설마 서리스 쪽에서 이런 제안을 먼저 할 거라곤 생각 못 한 듯 도로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서리스는 도로시와 같은 성격을 안다.
이런 타입은 확실하게 승부 짓고 가지 않으면 중요할 때 귀찮아진다.
“이걸로 뭐라 할 일 없으니 걱정 마.”
서리스가 마대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자, 도로시가 입 안 가득 미소를 채웠다.
“진짜지?”
“그래.”
그녀의 눈동자가 사냥개처럼 사나운 기운으로 물들었다.
“저, 저기, 정말로 싸우게?”
“한번 콧대를 눌러 줄 필요가 있을 거 같으니까.”
당황한 서발광의 물음에도 서리스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분명 약속한 거다!”
그 순간 도로시가 바닥을 박찼다.
깔끔한 동작과 함께 그녀의 마대가 서리스의 턱을 노렸다.
타악!
하지만 서리스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공격을 마대로 막았다.
매서운 공방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도로시는 확실히 재능 있었다.
기초에 구애받지 않고 특유의 유연성으로 예상치 못한 공격을 연거푸 날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안 좋았다.
육체적 감으로 싸우는 것에는 타의 추종을 불어 하는 서리스 상대로 러키 펀치가 성공할 리가 없었다.
퍼억!
“꺄악!”
도로시가 하늘을 날았다.
이어 바닥을 나뒹군 그녀의 마대는 동강 나듯 부러졌다.
반면 서리스는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도로시, 언제든 덤벼. 상대해 줄 테니까. 대신 나를 꺾을 때까지는 똑바로 청소해.”
도로시가 양손으로 뒷머리를 감싸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걸로 당분간은 조용하겠지.
“서리스.”
그런 순간 아카펠이 서리스를 불렀다.
그를 돌아보자 아카펠은 도로시를 힐끔 보며 말했다.
“도로시에게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도 저 녀석의 말은 인정해. 우리가 굳이 청소를 도맡아 할 필요가 있어?”
이런 건 사람을 고용하면 끝날 일이다.
그런 의미로 묻는 아카펠을 보며 서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틀린 말은 아니야. 아카펠, 네 말마따나 사람을 고용하면 끝날 일일지도 모르지.”
“그럼.”
“아카펠, 넌 세계 침식 안에 들어가 본 적 있어?”
그리 말하며 서리스는 서발광과 도로시도 돌아보았다.
하지만 셋 중 어느 누구도 가 봤다는 말은 없었다.
“세계 침식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며칠 이상을 보내야 하는 곳도 있어. 그 경우 인간의 스트레스는 생각 이상으로 심해지지.”
서리스는 자기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세계 침식 속 전투는 어디까지나 일부분이다.
“침식 속에서 겪는 대부분의 시간은 언제 전투가 일어날지 몰라 긴장한 상태로 이동하거나, 그런 상황에서 불안하게 취하는 휴식의 반복이야.”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쉼 없이 유지되는 긴장은 결국,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청랑단에 입단할 정도의 실력자들은 가문의 자제들인 경우가 많지.”
즉, 가문별을 새긴 자들의 공통점은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의 해 본 적 없다는 것.
“도로시와 같이 스트레스가 취약한 이들에게는 그에 대한 연습으로 딱이지.”
“그래도 청소에다가 세계 침식을 대입하는 건 그렇지 않아?”
“당연히 경우가 다르긴 하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일들은 집단에 소속되는 데 윤활유 역할을 해.”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 우리 바로 위 기수를 포함한 청랑단 전원이 같은 일을 겪고 자랐으니까.”
같은 경험은 사람을 쉽게 가까워지게 만든다.
학연, 혈연, 지연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냥 차라리 융통성 기르기라고 생각해 둬. 세계 침식 속에서 뒤를 맡길 수 없는 놈 취급을 받는 건 너희도 싫잖아.”
“관례라는 건가.”
아카펠은 한숨을 쉬면서도 마대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 적응해야지! 서리스 말대로 도움이 될 거야!”
서발광 쪽은 서리스에게 감명을 받았다는 듯 맞장구쳤지만.
도로시만이 여전히 이해할 듯하면서도 못한 애매한 표정이었다.
* * *
도로시와의 일이 있은 이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최근 들어 청소 말고도 훈련을 겸하기 시작해서일까.
아카펠은 이제 전혀 불만을 품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도 나름대로 선배 기수들과 꽤 친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서리스를 매일 따라다니던 서발광은 꽤나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원래도 귀여운 외모를 지닌 그였으니, 남녀불문하고 예뻐하기 좋았다.
그리고 서리스 쪽이야 말할 것도 없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지만.
빠악!
오늘도 서리스에게 맞고 바닥을 나뒹군 도로시가 누운 채로 다리와 팔을 팡팡 휘둘렀다.
“또 졌어어!”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만큼은 인정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빨간 머리, 쟤지.”
“응, 여자 쪽 말론 좀 특이하다던데.”
그런 덕분인지 도로시는 선배 기수들에게 애매한 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자유분방한 도로시의 성격은 집단에는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래 보여도 최근 들어 조금은 얌전해지긴 한 편인데 말이지.’
서리스에게 매일같이 깨진 덕분일까.
산짐승 같았던 그녀도 이전보다는 확실히 얌전해졌다.
서열 정리가 되니 서리스의 말은 고분고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때문에 볼 때마다 복수를 꿈꾸며 콧노래를 부르고 계시지만 말이다.
“로시로시, 우리 도로시. 오늘도 이 갈고 있어? 그러다 이 다 부러진다.”
그래도 그런 도로시를 챙겨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참 아래인 동생을 상대하듯 도로시에게 장난을 거는 그녀는 도로시 직속 선배인 52기 애니쉬아였다.
“정말 내 이름은 도로시래도.”
“로시로시라고 부르는 게 귀엽잖아.”
도로시는 애니쉬아가 귀찮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애니쉬아는 그게 재밌다는 듯 깔깔거렸다.
저래 보여도 꽤 친하게 지내는 걸지도 모르겠다.
“서리스, 왔어?”
그런 순간 52기 대표 라파즐리가 서리스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대표라서 고생이 많지?”
신경 쓸 게 많을 거라며 웃는 그를 보고 서리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저냥요.”
“위로해 주고 싶지만 아마 오늘은 더 고생할 거야.”
여기서 더 고생하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위 기수인 청랑단원들도 포함해 다들 운동장에 모이라는 명을 받았다.
그렇기에 서리스가 의문을 품었을 때.
청랑호법 라만 다트론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코를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는 그는 청랑단원들을 보곤 곧바로 말했다.
“오늘은 모의전을 할 거다.”
모의전인가.
라파즐리가 왜 고생할 거라고 말했는지 알겠다.
“팀은 기수별로 짤 거다.”
다트론의 말에 서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리스.”
아카펠이 조용하게 그를 부르자 서리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팀 기수들이 먹잇감을 보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랑단에 어느 정도 스며든 것 같으니, 기수끼리 더 뭉치게 해 줄 속셈이군.’
이번 모의전의 의도를 눈치챈 서리스는 웃음을 흘렸다.
신입 기수 교육이 상당히 잘 짜여있지 않는가.
“오늘 모의전 장소는 숲이다. 세계 침식 역할군과 청랑단 역할군 두 개로 나눌 테니, 대표들은 앞으로 와라.”
서리스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라파즐리도 따라 나왔다.
각 기수의 대표들이기 때문인지.
역시 일반 단원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들은 기수에서 가장 강한 실력자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각자 한 명씩 손을 대라.”
다트론이 들고 있는 수정구 위에 대표들은 차례로 손을 올렸다.
곧이어 마지막 기수인 서리스의 차례가 되고, 수정구 위로 손을 올린 순간 글자가 올라왔다.
[세계 침식 역할]
바로 세계 침식 역할이었다.
“미안, 우린 세계 침식 역할이야.”
“미안할 거까지야.”
“괘, 괜찮아!”
아카펠과 서발광이 괜찮다 해 주긴 했지만, 서리스는 쓰게 웃었다.
누가 보아도 세계 침식 역할이 더 까다로울 것 같기 때문이었다.
“역할 설명을 해줄테니 잘 들어라. 세계 침식 역할은 간단하다.”
아니나 다를까, 다트론의 설명이 이어졌다.
“세계 침식의 주인 역할을 하는 단원을 지켜라. 다른 이들이 생존해도 주인 역할이 죽으면 끝이다.”
주인 역할은 기수 대표가 맡을 거라고 그는 추가로 고했다.
“단, 이렇게 하면 세계 침식 역할 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니 제한 시간을 붙이겠다.”
그나마 다행인 이야기였다.
“1시간 안에 세계 침식의 주인을 쓰러트리지 못하면 청랑단 측의 패배로 간주한다.”
말을 끝마친 다트론은 미리 준비해 둔 포탈을 열었다.
“그럼 가장 아래 기수들부터 시작하겠다. 세계 침식 역할 53기, 청랑단 역할 50기, 입장해라.”
그의 지시의 서리스는 셋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와 함께 포탈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 경치가 바뀌었다.
짹짹.
새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풀 내음이 한껏 느껴지는 숲속이었다.
“서리스, 제한 시간까지 버틸 거냐?”
아카펠의 질문의 서리스는 도로시 쪽을 돌아보았다.
“도로시, 네 생각은 어때?”
이렇게 된 이상 서리스는 이번 기회에 도로시와의 관계를 개선해 보고자 했다.
“나?”
“그래.”
서리스 쪽에서 말을 걸 거라 생각 못 했기 때문일까.
도로시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되물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마치 발표하듯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제한 시간 같은 게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도로시가 배시시 웃었다.
“그냥 우리가 공격하면 되잖아.”
“그래, 굳이 시간 끌 필요는 없지.”
서리스가 의견을 받아들이자 도로시가 자신감 넘치게 등을 곧추세웠다.
지금까지 서리스에게 몇 번이고 패배하며 서열 정리가 된 덕분인지.
자신의 의견을 받아 준 게 묘하게 기뻤다.
그러는 사이 서리스의 발아래에서 그림자 검이 솟구쳤다.
“우리가 직접 부순다.”
서발광과 아카펠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짧은 외침과 함께 청랑단 53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50기 청랑단.
서리스 쪽과 같이 4명으로 이루어진 그들 중에는 서리스와도 면식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자는 다름 아닌 엑포드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서리스에게 패배한 뒤, 선배 기수부터 시작해 동기는 물론 아래 기수까지 얼마나 자신을 조롱했는가.
이제는 패배라는 단어만 들어도 신물이 나는 엑포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드디어 지금까지 쌓아 놓은 울분을 토해 낼 수 있다.
엑포드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서리스는 내가 끝낸다! 너희들은 절대 건들지 마.”
동기들은 서로 돌아보곤 으쓱거렸다.
“엑포드, 원한이 있는 건 알겠는데. 걔가 침식의 주인 역할인 이상, 우리 다 같이 노려야 할 대상이야.”
“애초에 엑포드, 너는 한 번 졌잖아. 또 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어?”
“다, 당연한 소리하지 마!”
그때는 시험관이라는 입장으로서 방심하고 있었기에 진 거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붙었다면 결과는 달랐으리라.
확신 섞인 엑포드의 어조에 50기 대표인 나릴 클로나는 눈웃음을 지었다.
“안될걸.”
클로나의 말에 엑포드가 멈칫하였다.
“클로나, 지금 뭐라고?”
“엑포드로는 안 돼. 걔 진짜배기거든. 몸에서 흘러나오는 별의 기운이 다른 이의 몇 배야.”
기수 대표 간의 회의 자리에서 이미 마주해 본 적 있는 그녀는 금색 빛깔이 인상적인 제 옆머리를 손으로 꼬았다.
“그러니까 내가 상대할래.”
그녀의 눈웃음 사이로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달뜬 미소를 흘렸다.
“클로나, 또 안 좋은 성격 나왔다.”
“쟤는 연하만 보면 눈 돌아가더라.”
다른 동기 둘이서 쑥덕거리자 엑포드가 욱한 듯 소리를 질렀다.
“클로나, 걔 16살이야! 21살이나 처먹고 그러고 싶냐!”
“뭐래. 남녀 사이에 친해질 수도 있는 거 거든? 괜히 네 고백 안 받아줬다고 질투하지 마.”
“너, 너, 그게 언제 적 이야기인데 아직도.”
소리를 내지르던 엑포드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기서 더 말해 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다르단 말이야. 직계에다가, 너보다도 어른스럽고. 완전 내 취향이야.”
즐거운 듯 또다시 눈웃음 흘리는 클로나를 두고 엑포드가 한 소리 하려 했을 때.
그의 고개가 획 하니 돌아갔다.
“……햇병아리들이.”
한번 꺾어 본 선배에게는 겁 따위 하나도 안 먹는다 이건가.
엑포드의 반응과 동시에 그의 동기 오천송이 비수를 던졌다.
교묘하게 날아간 비수는 중간에서 갑자기 갈라지며 수십 발이 되었다.
챙챙챙챙!
그러나 날아든 화살이 정확히 그의 비수를 모두 맞춰 떨어트렸다.
“거침없네.”
클로나의 말 한마디가 울려 퍼졌을 때, 수풀 속에서 서발광과 도로시가 튀어 나왔다.
서리스는 보이지 않았다.
“대표는 두고 너희끼리 해 보려는 속셈이니. 너무 얕보네.”
클로나가 박수를 짝 친 순간 그녀의 발아래 그림자가 솟구쳤다.
그녀는 청림단 때부터 활동해 온 실력파.
청운귀명을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다.
청운귀명도의 최고 장점은 청운귀명을 바탕으로 그려지는 수많은 분파. 즉, 유연성에 있다.
대가문 펜타니엄의 가문별의 가치가 높은 이유는 바로 이 청운귀명이 가진 자유로움 덕분이었다.
청운귀명마(淸雲晷銘魔)
청운귀수(淸雲鬼手)
그림자 속에서 솟구친 두 개의 손이 도로시와 서발광의 허리를 동시에 낚아챘다.
그러곤 그 둘을 들어 올려 그대로 내리꽂으려던 찰나.
“얕볼 리가 있겠습니까.”
53기수의 등 뒤에서 나지막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가 고개를 뒤로 돌렸을 때.
아카펠의 선록화로 몸을 숨겼던 서리스가 하늘 높이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금강잔월(金强虥狘)
박살(撲殺)
그리고 숲 일대가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