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너스가 착잡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케이트가 위로해줬다."
루미너스는 자식으로서 부모를 살해하는, 가장 큰 죄인 패륜을 저질렀다."
하지만 부모로서 자식을 지키기 위해 응당 해야 할 의무를 지켰을 뿐이다. 그 누구도 그를 탓할 이유가 없다."
[고맙구나. 그러나 나의 죄는 너희들이 직접 치르게 해줘야겠지. 난 그때를 기다리마.]"
루미너스 님을 향한 신앙, 그리고 신격이 깎일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일이 알려진다면 루미너스는 더욱 찬양받을 것이다."
비록 지혜를 잃은 나머지 광기에 휘말렸지만,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루미너스는 본인의 자식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비극이란 비극은 몽땅 집어넣은 셈이다."
다만 문제는 제가 살던 신들과 이곳을 연관짓는 건데······""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장 거슬리는 문제점을 언급하자 케이트가 걱정말라는 듯이 말한다. 이에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만, 케이트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부분은 아이작 님의 존재만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아이작 님 덕분에 다른 세상의 존재가 알려졌으니.""
······그걸로 될까요?""
내가 반신반의한 목소리로 묻자 루미너스가 거들어줬다."
[지구의 신들이 우리에게 말하더구나. 지구는 하늘 밖으로 진출했음에도 다른 세상의 존재를 모르는데 이곳은 아니라고 말이다.]"
··· ···""
[지구의 속담으로는 죽 쒀서 개 준 꼴이라고 하더구나.]"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
루미너스와의 대화가 끝나고 아이작은 곧장 예배실 밖으로 나섰다."
다만 케이트는 루미너스가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그대로 공간 속에 남겨뒀다."
루미너스 말로는 케이트의 신성력으로도 약간이나마 유지할 수 있다고. 대신 시간을 느리게 흘러가는 건 힘들다고 말했다."
어찌 됐거나 새하얀 공간 속에는 케이트와 루미너스 단 둘이 남게 됐다."
[계획하던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니?]"
루미너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래를 읽을 수 있음에도 케이트의 계획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뉘앙스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 케이트의 운명은 어느 순간부터 아이작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들은 아이작의 미래를 모른다."
따라서 케이트의 미래는 어느 정도 읽을 수는 있어도 변동이 심해 사실상 무의미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케이트는 루미너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루미너스 님의 비호와 훌륭한 조력자 덕분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그 아이와 언제쯤 이어질 생각이니?]"
그건······""
장난스러운 질문에 케이트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했다. 누가 보아도 사랑에 빠진 여인의 반응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루미너스는 흐뭇해졌다. 예전 같았으면 복잡한 심경이 들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케이트는 아이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 신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두 가지 모두 섞였다고 보면 된다. 그렇기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은혜를 받고 싶지만, 아무래도 체리와 상의해야 되니까요.""
[시기를 맞추기 어렵겠구나.]"
네. 만약 세실리 님께서 먼저 아이를 품으면 모르지만, 최근들어 너무 바빠서 힘듭니다.""
케이트도 마리가 어떤 연유로 임신했는지 알고 있다. 약 같은 건 아이작의 은혜(?)를 막을 수 없었다."
피임도구를 사용하면 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러기가 싫었다."
감히 도구따위가 아이작이 내려준 은혜를 막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것만큼은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이런 면에서는 고집이 세구나.]"
루미너스도 케이트의 황소 고집을 잘 알고 있기에 따로 조언하지 않았다. 이건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아이가 무작정 떼를 쓰는데 부모가 어찌할 도리가 있겠나. 그저 조심하라고 당부할 수밖에 없다."
설령 시간이 오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당장은 서로 바쁠 테니 만날 시간도 없겠죠.""
[그렇겠지.]"
그런데······ 루미너스 님.""
[말하렴.]"
케이트는 약간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저는 루미너스 님의 신앙을 유지한 채로 아이작 님을 보필하고 싶습니다.""
[괜찮단다.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되는 것일 테니. 그리고 너희를 보살피지 않는 것도 아니란다.]"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너희들을 지켜봤단다. 짧은 시간동안 아주 훌륭히 성장했더구나.]"
회환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루미너스. 케이트는 복잡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제 품에서 떠나보낼 때가 됐지. 그리고······]"
루미너스는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단다.]"
******"
많고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모두가 잊지 않은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아이작이 무수한 연참으로 찍어내듯이 작성한 '피와 강철'. 이것 또한 거의 예언서로 취급되는 중이다."
그리고······"
[악마의 화신의 최후. 지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히틀러.]"
악마의 죽음과 동시에 '세상의 파괴자'가 도래할 때가 다가왔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피와 강철의 연재는 중단되지 않았다."
비축분으로 쌓아놓은 원고가 거의 결말에 다다를 정도로 충분했으며 삽화 또한 칼즈의 제자들을 갈아넣었다."
덕분에 히틀러 암살 미수부터 시작해 마켓 가든 작전, 레이테 만 해전, 아르덴 대공세, 이오지마 전투, 마지막으로 베를린 공방전 등등."
큼지막한 전투들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독자들도 점차 감을 잡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끝이 슬슬 보인다고."
[무능한 폭군의 최후. 왕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존중받지 못한 최후를 맞이한 무솔리니.]"
인상 깊은 전투가 연달아 이어졌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최대치로 모은 건 바로 무솔리니의 최후였다."
무솔리니의 최후는 다른 독재자에 비해서도 단연코 압도적이라 할 수 있는데, 총살당한 것도 모자라 시체가 거꾸로 매달렸다."
그것도 특별한 곳도 아니라 주유소에 매달렸다.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마저 어마어마한 충격을 겪고 조용히 최후를 준비했다."
물론 발악할 수 있는대로 발악하는 건 잊지 않았다. 아르덴 대공세가 바로 그 전투였지만 깔끔하게 말아먹었다."
발터 모델이 똥꼬쇼를 했지만 의미가 없다. 나치 독일은 이미 최후를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명령이었다! 공격하라는 건 명령이었다고! 네 놈들이 뭐라고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해?!]"
[모두가 날 속였어! 군대, 정권 모두가 날 속였다고!]"
[내가 어떻게 이 나라를 이끌었는데! 내 어떻게 이 나라를 위대한 나라로 탄생시켰는데! 쓸모없는 자식들!]"
하이라이트는 히틀러의 분노다. 전생에서 다양한 패러디 영상으로도 사용되던 장면을 차용했다."
히틀러의 편집증과 무능함, 마지막으로 최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장면.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많은 생각을 남겼다."
[히틀러의 밑천은 결국 선동가에 지나지 않았다.]"
[나치 독일은 어째서 히틀러에게 빠져들었는가? 광기로 가득찬 세계에 어울리는 인물인가?]"
[만약 프랑스 점령까지만 끝냈다면 히틀러는 영웅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만과 탐욕이 그를 몰락시켰다.]"
위대한 퓌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남탓만 해대며 비참한 최후만을 남겨둔 독재자가 있을 뿐."
피와 강철 초기와 비교했을 때 괴리감이 느껴질만큼 차이가 심했다. 이에 어느 한 평론가가 말했다."
[너무 큰 성공을 거둔 나머지 본인의 역량마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이것이 몰락의 큰 원인이다.]"
여태까지의 빌드업이 꽤 성공했는지 나치 독일이 패배한 근본적인 원인을 짚어냈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6주' 당시 너무 큰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심히 오만해졌다. 그것이 패배의 원인으로 직격된 것이다."
이후로 히틀러는 생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고, 베를린은 함락됐다."
소련은 피의 복수를 이루었으며 연합군 입장에서는 전선 하나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셈이다."
하지만 바다 건너에는 아직 일본 제국이 남아있다. 나치 독일의 완벽한 파트너라 할 수 있는 나라."
홀로코스트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그렇지, 카미카제를 비롯한 다채로운 자살 공격으로 그 나물의 그 밥이라 평가받고 있다."
또한 유능한 장군이 다수 포진된 나치 독일과 다르게 일본 제국은 그것조차 없었다. 정상보다 비정상이 훨씬 많다."
[유럽은 전투가 모두 끝났지만 일본이 건재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쓰러질 것.]"
[오히려 유럽 전선에 보급을 투입할 이유가 없으니 태평양 쪽의 보급이 더 활발해질 것이다.]"
[일본이 발악해도 거인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한 개미일 뿐.]"
나치 독일이 항복한 것처럼 일본 제국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항복할 거라는 기류가 대세였다."
하지만 악랄함은 나치 독일이 뛰어날지는 몰라도, 지독함은 일본 제국이 한 수 위다."
일단 국민들이 전반적으로 세뇌당했다는 것부터가 지독함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나치 독일도 '국민돌격대'를 만들었지만 일본의 '옥쇄'에 비할 바는 아니다."
적어도 나치 독일은 자국민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그걸 거리낌없이 해댔다."
[서로에 대한 무지와 광기, 그리고 세뇌가 조합된 것이 일본 제국이다.]"
심지어 일본 제국은 자국민에게 미국이 얼마나 악랄한지, 또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세뇌시켰다."
그때문인지 남자들은 포로로 잡혔음에도 끝까지 저항하고, 여자들은 욕보이지 않기 위해 자결했다."
이것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였다는 점을 보았을 때 당시 일본 제국이 얼마나 광기에 미쳐있었는지 알 수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발생한 또다른 학살극. 이 학살극의 주체는 미국이 아니라 일본 제국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한 술 더 떴다."
자기 딸과 부인이 미군에게 당하는 걸 막기 위해 자기 손으로 죽일 정도였으니."
정작 미군은 친절하게 대했을 뿐더러 보급까지 줬다는 점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일본 국민을 학살한 건 미군이 아니라 조국이라 평가했을 정도다."
[일본 제국은 약하지 않았다. 하나 같이 지휘관이 문제였을 뿐.]"
[정상적인 지휘관에 정상적인 사단. 그 조합은 굉장했다. 너무 늦었지만.]"
[카미카제는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귀중한 인력만 손실시킨 꼴.]"
옥쇄도 옥쇄지만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제국이 미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전투로도 유명하다."
사무라이 정신 운운하면서 정신력만 강조하는 지휘관이 아니라 현실을 파악하는 데에 능한 지휘관."
실전 경험이 다분한 전투 병력과 더불어 특수한 환경. 이것들이 시너지를 이루어 미국에게 큰 피해를 안겨줬다."
하지만 일단 오키나와를 점령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일본 제국도 오키나와의 중요성을 알고 있어 되는대로 병력을 투입시켰다."
어느덧 진정한 거인으로 성장한 미국 앞에서는 얄짤없었지만. 그래도 미국조차 좌시할 수 없을만큼 큰 피해를 안겨줬다."
[오키나와조차 점령하는데에 큰 피해를 입은 미국. 본토는 과연 어떻게 점령할 것인가?]"
[만약 일본 본토의 국민들이 전부 '옥쇄'한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아플 것.]"
[전차는 기관총을 거뜬히 버티면서 나아가고, 폭격기는 적의 화력을 무마시킨다. 하지만 결국 깃발을 꽂는 건 보병이다.]"
제아무리 일본 본토에 폭격을 하더라도 깃발을 꽂는 건 보병이다. 이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리다."
그러나 일본은 섬이다. 하다못해 나치 독일은 육로라도 있었지, 일본은 무조건 배로 이동해야 된다."
미국으로서는 실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실제로도 일본 본토는 폭격을 받기 전까지 침범받은 적이 거의 없다."
여기서 또다시 언급되는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맨해튼 프로젝트'다. 전세계의 두뇌들이 머리를 맞대며 발명한 세계의 파괴자."
사실상 최초의 원자폭탄이라 칭할 수 있는 '트리니티 실험'이 이어지고, 나는 아주 간략하면서도 효과적인 문장을 적었다."
[작은 태양이 떨어졌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짧고 굵게 설명하는 글귀. 삽화를 넣어 보충하는 건 잊지 않았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이것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명언까지 넣어줬다. 원자폭탄의 위력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원자폭탄까지 등장했겠다, 남은 건 평론가들의 반응이었다. 솔직히 홀로코스트 다음으로 궁금했다."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악이 어느 정도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원자폭탄은 문명의 끝을 보여주는 셈이었으니."
무엇보다 피와 강철 속 세계관, 그러니까 지구의 이야기가 실화라는 건 나를 통해 모두가 아는 상황이다."
과연 어떨지 궁금해서 기사들을 살펴본 결과······"
[인류가 피조물로 하늘을 난다고 했을 때, 나는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인류가 피조물로 드넓은 바다를 항해한다고 했을 때, 나는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류가 작은 태양을 직접 떨어뜨리는 건 불가능하다.]"
[마법도 없이 고작 과학과 기술만으로 저런 위력을 선보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안 믿더라. 마법조차 저런 위력을 내는 건 거의 불가능한데 웃기지 말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실제로 마법으로도 핵폭탄과 같은 파괴력을 내는 건 힘들다. 화력이 강하다는 걸로 알려진 마족조차도."
세실리도 작정하면 산 하나를 날릴 수 있을만큼 강하지만, 말 그대로 작정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준비가 오래 걸릴 뿐더러 마나가 응집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기에 쉽게 대응할 수 있다고."
반면 원자폭탄은 그런 거 없다. 그냥 뚝딱 제작하고 위에서 뚝- 떨어뜨리면 끝이다."
그래서 수많은 평론가가 '저게 가능하냐'라고 비판했지만, 의외의 나라에서 내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알븐하임. 제논이 말한 질량-에너지 동등성이 성립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트리니티 실험에서 선보인 원자폭탄도 효율이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알븐하임 쪽에서 질량-에너지 동등성을 거론하며 나에게 힘을 실어준 것이다."
저 이론을 증명하는데만 해도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만약 증명만 된다면 과학계는 거대한 발전을 이루게 될 터."
이처럼 바깥이 원자폭탄 하나로 시끄러울 때, 바깥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다양한 반응들이 속출했다."
이거 정말 사실이야?""
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