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71)화 (672/763)

 어찌 됐든 간에 조금씩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양측의 의견을 물어봐야 된다는 것부터 대단한 성과다."

 루미너스 님께서도 부담감을 안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만물의 아버지라는 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루미너스 님께서 진실을 숨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실을 알려줄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서 그런 거겠죠. 아무런 과정도 없이 밝힌다면 큰 혼란이 오지 않겠습니까?""

 ··· ···""

 설마 저 사람을 나로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말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경위는 말 그대로 '사고'다."

 그 사고로 인해 이 세상의 신들이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지구의 신들이 언제 변심하여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고인물은 썩기 마련입니다. 신들께서는 현명한 대책으로 지금까지 이끌고 오셨지만, 한계는 명확한 법이죠. 그 한계를 부숴줄 사람을 찾고 있던 겁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여기로 넘어온 건 순전히 사고입니다.""

 그 사고를 운명이라고 한다면 되지 않을까요?""

 ··· ···""

 꿈보다 해몽이라고, 이 모든 걸 운명이라 여기는 그녀를 보자니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동시에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구의 신들과 만물의 아버지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이 세상의 신들이 만물의 아버지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한 이유를 단편적으로나마 알 것 같았다."

 ······너무 수동적이지 않아요? 케이트 씨 스스로도 운명을 개척하셔야죠.""

 괜찮습니다. 저는 루미너스 님에게 은총을 받고, 아이작 님에게 은혜를 받은 몸. 평생 갚아도 모자라니 기꺼이 희생할 겁니다.""

 음······""

 보아하니 케이트를 설득하는 건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물론 케이트의 마음가짐이 나쁜 건 아니다."

 부화뇌동이라 비판할 수 있어도 성직자의 본분을 잊지 않았으니. 케이트의 행동이 잘못된 거라면 그 누가 신의 말씀을 따르겠나."

 그렇다면 아이작 님은 신들의 비호를 받는 세상을 원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저도 이 부분은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요. 만물의 아버지가 어째서 동의를 받지 못했는지 의아하기도 하고.""

 만물의 아버지를 샌드백마냥 말로 팬 건 궤변에 궤변을 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에 했던 발언들과 만물의 아버지에게 꺼낸 말들을 비교하면 모순되는 점이 넘쳐난다. 나도 이건 인지하고 있다."

 단지 만물의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신경을 살살 건드린 것뿐이다."

 제가 살던 세상에도 한때 신들의 지배를 받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신화라는 기록으로 남겨졌고, 또 그것이 실제로 있던 역사인지도 불분명하죠. 그런데 신들이 무슨 연유로 인류에게 자유의지를 줬는지 의문이 듭니다. 그 과정에서 왜 세상을 멸망시켰는지도 모르겠고요.""

 아이작 님께서도 신들의 메세지를 해석하고 싶은 거군요.""

 제가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케이트를 바라봤다. 신들의 메세지를 해석하고 싶다는 말이 무언가 거슬렸다."

 예로부터 신탁이 그러했습니다. 신들께서는 알 수 없는 신탁을 내리시고, 저희들은 그것을 해석하기 바빴죠. 최근에는 신탁을 내려주시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어 해석할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 ···""

 신들께서 남기신 메세지는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습니다. 교리가 바로 그런 것이고, 신앙심을 품는 이유죠. 또한 사람마다 깨닫는 이유가 다르듯이 해석도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그렇기에 충돌이 일어나고, 갈등이 발생하며, 서로 발전하는 것이죠.""

 살다 살다 케이트에게 가르침을 받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옛날 같았으면 루미너스의 뜻에 반하는 자, 모두 죽어라! 에 가까웠던 케이트다. 쉽게 말해서 광신도."

 그러한 과격함은 건재했지만 정말로 깨달음이라도 얻었는지 생각이 상당히 열려있다. 듣는 내가 감탄할 정도다."

 여기까지가 제가 깨달은 바입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덕분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에요.""

 나는 피식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케이트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루미너스에게 속박된 게 아니다. 반대로 점점 멀어지면서 독립하는 중이었다."

 신들이 전달한 교리대로 움직이는 게 과연 수동적이라 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그녀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로 봉사하러 가는 신부들의 마음가짐이 이런 거였나?'"

 가끔 종교인들 중에 몰상식한 사람들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어절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다."

 반대로 존경받을만한 종교인도 많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주체적'이라는 것이다."

 각각 해석을 다르게 하는 편이지만 직접적으로 행동한다. 그럼에도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부류가 신들이 가장 원하던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2차 세계 대전이라는 광기 속에서도 종교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잠깐 루미너스 님과 대화를 나눠야 될 것 같습니다. 아, 케이트 씨도 함께 가실래요? 아마 신기한 경험이 될 거예요.""

 네. 예배실은 이곳에 있으니 함께 들어가도록 하죠.""

 역시 교황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케이트여서 그런지 개인방에도 예배실이 따로 마련돼 있다."

 나는 케이트와 함께 예배실로 들어선 후, 무릎을 꿇지 않고 조용히 눈만 감았다. 옆에서 케이트가 무릎을 꿇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니 익숙하디 익숙한 흰색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뜨렴, 아이야.]"

 ······어?""

 내가 아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케이트에게 전달하는 메세지. 케이트는 그 메세지를 따라 눈을 떴다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성력이 막강한 그녀여도 이러한 공간에 들어서는 건 처음이겠지. 당황한 표정이 정말 귀엽다."

 여기는······""

 루미너스 님과 더욱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속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이 말로 대화하면 됩니다.""

 루미너스가 직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 보면 아직 케이트에게도 무리인 것 같다."

 지난번에 모라도 가족들에게 직접적으로 현신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차원에서 추방당해 의식체로 보이고 있지만."

 어쨌거나 나는 케이트가 평정을 찾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케이트도 순간 당황했을 뿐, 예배를 할 때와 다를 게 없다고 판단한 건지 침착을 되찾았다."

 미천한 종이 빛과 희망의 신, 루미너스 님을 뵙습니다.""

 [너에게는 언제나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단다. 귀엽고도 괘씸한 계획을 품은 건 넘어가도록 하마.]"

 귀엽고도 괘씸한 계획? 루미너스가 저런 말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에 의아해졌다."

 이어서 케이트를 쳐다보니 그녀의 반응은 썩 볼만했다. 마치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들킨 것마냥 어버버거리고 있다."

 질 나쁜 계획은 아니었는지 안색이 나빠지거나 그런 건 아니다. 반대로 얼굴색이 지나칠 정도로 붉어졌다는 게 흠이다."

 대충 반응을 보면 나와 연관된 건 확실하다. 단지 그 계획이라는 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

 너, 너무하십니다. 그걸 지금 말씀하시면······""

 [장난이란다. 나도 물심양면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도대체 그 계획이 뭔데요?""

 이 사람들이 나를 두고 무슨 얘기를 나누는 거야. 일단 심상치 않은 계획인 건 알 것 같다."

 아니면 케이트의 개인적 욕심일 수도 있고. 최근 체리와 함께 은혜를 받을 거라니 뭐니 하는 걸 보면 그쪽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고서야 얼굴이 저 정도로 새빨개질리가 없다. 나는 그리 판단했다."

 그, 그런 게 있습니다. 아이작 님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음······ 속아줘도 되는 거죠?""

 [그 정도는 속아주는 게 예의란다.]"

 루미너스가 저런 말을 하니 속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내가 넘어가는 듯하자 케이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오늘따라 다채로운 반응을 보는 것 같다."

 혹시 체리와도 연관이 있는 건가요?""

 ······네.""

 대충 알 것 같네. 다만 건강한 신체를 얻은 이상 주기는 착실히 파악해야 된다."

 안 그러면 마리처럼 과속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세실리마저 호시탐탐 노리고 있더라."

 아무튼 루미너스 님. 제가 하나 질문해도 될까요?""

 [너의 질문이라면 원없이 받아주마.]"

 만물의 아버지가 지구의 사상에 감화되었을 때가 언제였죠?""

 케이트와 상담 아닌 상담을 하면서 깨달은 부분이 있다. 지구의 신과 만물의 아버지의 결정적 차이점."

 루미너스는 내 질문을 듣고 잠깐 침묵을 유지하더니 머지않아 입을 열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제대로 끝나지 않은 시대.]"

 지구의 신들은 전부 성장한 자식을 독립시키기 위해 '자유'를 선사한 반면."

 [신화가 탄생하지 못해 인류의 위협이 건재하던 시대였단다.]"

 만물의 아버지는 '방임'을 선택했다."

 지구와 이 세상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한다면 이 두 개를 꼽을 수 있다. 마나와 몬스터."

 마나와 몬스터는 지구에 있어서 소위 '판타지'라 칭해지는 요소지만, 이 세상은 일상 속에 녹아있다."

 마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주 중요한 에너지이며 몬스터는 인류 최대의 위협이라 여길 정도로 위험한 존재들이다."

 여기서 마나 관련 기술이 발달된 근본적인 이유도 몬스터 때문이다. 마나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아직까지 몬스터와 경쟁하고 있었겠지."

 물론 선천적으로 신체 능력이 몬스터와 비등한 수인이나, 마법을 숨 쉬듯이 사용하는 엘프는 몬스터의 위협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이들조차 오우거 이상의 몬스터는 버겁다. 먼 과거, 수인은 성인식을 치를 때 오우거 3마리의 머리를 따고 오는 문화가 있었다."

 이처럼 태생적으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종족들조차 몬스터는 '위협'으로 남아있다."

 [우리의 이야기가 끝난 시대라면 나도 아버지의 의견을 받아들였겠지. 하지만 그 당시 인류는 약해도 너무 약했단다. 문명을 세우고 전쟁까지 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제대로 된 '나라'라 부르기에는 어려웠지.]"

 그래서 신들이 인류를 도와주고, 그에 따라 숭배를 한 거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인류는 몬스터에게 멸망했을 테니까.]"

 신화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신의 축복 혹은 도움을 받은 인간이 수많은 괴수들을 토벌하는 이야기."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게르만 신화에서는 지크프리트가 있다. 북유럽 신화는 아예 자기들끼리 공멸했다."

 이렇듯 신화에서 다양한 괴수가 등장하며 영웅 혹은 신들이 직접 토벌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 이야기가 숭배받는 건 덤이고."

 부모란 응당 자식의 독립을 도와주는 존재. 그러나 자식이 독립할 '준비'가 될 때까지 부모가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의무다."

 하지만 만물의 아버지는 그것을 간과했는지, 아니면 인류를 너무 믿었는지 몰라도 무작정 방임시켰다."

 진정으로 인류를 사랑하는 신이라면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됐다. 너무 먼 미래를 지켜본 것이다."

 [무엇보다 그때 당시는 신과 인류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던 때란다. 가끔 가다가 신과 인류 사이의 아이가 태어나는 일도 있었지. 혹은 영웅이 신화적인 업적을 이루어 신으로 승천하는 경우도 간간이 있었단다.]"

 평범한 신화 시대였군요. 그런 세상에서 느닷없이 방임을 결정했으니······""

 전쟁이 안 일어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전쟁 중에 이산 가족이 생기는 것조차 큰 비극적인데 이건 윗선의 명령이다."

 무엇보다 당시 인류가 신들의 도움 없이 몬스터, 그것도 드래곤 같은 재앙급 몬스터와 싸워 승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다."

 우리 아버지조차 군대의 도움을 받고 겨우겨우 토벌했음에도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트라우마로 스스로 공적까지 감췄다."

 [많은 신들이 아버지에게 간청했지. 적어도 몇 백년 정도만 지켜봐달라고. 인류는 너무 나약하다고 말이야. 다른 건 몰라도 가족들과 헤어지는 것만큼은 싫었던 신들이 많았단다.]"

 그런데도 강경하게 나선 건가요?""

 [네가 살던 세상, 그러니까 지구의 예시를 들며 묵살했지. 지구는 신들을 부르는 목소리가 많았음에도 대멸망을 진행시켰다는 식으로.]"

 이건 지구의 신들 입장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 우선 대멸망이 일어난 건 거의 확정적이지만 시간대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전에 언급했듯이 로마는 올림푸스 신앙에서 기독교로 넘어갔다. 그 시점을 기준으로 고대에 대홍수가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혹시 이 세상의 인류도 신들을 욕하는 걸 넘어 신격을 깎아내리거나 그랬나요?""

 그딴 미친 사람이······""

 [있었단다. 정말 많이.]"

 내 질문에 케이트가 말도 안 된다고 부정하려던 찰나, 루미너스가 긍정적인 대답을 그렇다."

 신앙심이 충만한 케이트로서는 경악하다 못해 부정하고 싶은 일일 터. 그래서인지 입을 떡 벌린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소에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그녀지만 신과 관련된 일에는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것 같다."

 [대부분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식으로 생각했지. 선을 넘는다면 천벌을 내렸지만 말이다. 너희 세상도 비슷한 일이 많지 않았니?]"

 틈만 나면 신에게 욕설을 뱉거나 깎아내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은 그 인성이 참 볼만하다. 그걸 아는데 깝치는 그리스인들도 대단하다."

 듣는 사람이 없다면 욕하는 게 나랏님이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듣는 사람이 많은데도 신들을 대놓고 폄하했다."

 심지어 어떤 왕은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자기 아들로 국을 끓여 대령했을 정도. 당연하게도 신들은 그 왕에게 천벌을 내렸다."

 그러면 인간의 극악무도함이 도를 지나쳐 멸망시켜야 될 정도였나요?""

 [인류로 치자면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정도였지.]"

 지구의 신들이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대홍수."

 대홍수를 일으킨 원인을 보면 대부분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들의 죄악이 극에 다다라서."

 도대체 얼마나 죄악이 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격인 신들조차 '답이 없다'라 생각한 것이다."

 이후로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대홍수가 지나간 후에 야훼가 말했다. 다시는 물을 이용해 인류를 심판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거지, 다른 방식으로 심판을 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가장 큰 예로 요한 묵시록이 기록돼 있는 종말론이다. 어떤 형태의 종말이 다가올지는 모른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케이트가 약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에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무언가 한참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알아듣기 쉽게 정리했다."

 아이작 님의 세상은 인류의 잔악무도함이 극에 달해 신들께서 눈물을 머금고 멸망시킨 반면, 만물의 아버지는 그런 사정도 모른 채 멸망시키려 들었다는 겁니까?""

 [정리하자면 그렇지. 우리도 지구의 사정은 뒤늦게 알았단다. 사정을 알게 되었을 때는 너무 늦었고.]"

 아이러니한 일이네요. 아이작 님의 세상은 인류가 오만했고, 이 세상은 최고신이라는 작자가 오만에 빠졌으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자 있을 법한 속사정이다. 나는 케이트의 정리를 듣고 괜스레 착잡해졌다."

 부모는 자식이 살인을 해도 감싸줄 존재다. 더 나아가 많은 부모가 자식의 죄의 덮기 위해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구의 신들은 눈물을 머금고 벌을 내린 셈이다. 가슴이 찢어지다 못해 큰 상처로 남게 되는 일이었겠지."

 [지구의 신들은 경험으로 본인들의 방식이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단다. 또한 그들은 이리 말했지. 자신들의 존재가 널리 알려진 이상 피조물들은 또다시 자신들을 찾을 거라고. 자신들은 부모이기에 그들의 부름에 응답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실제로 그랬죠.""

 신화는 사라지지 않고 기록으로 남아 이어졌다. 그리고 인류는 그것을 철학으로 삼고 본인들만의 문화를 만들었다."

 대홍수는 신들이 인류에게 행한 심판임과 동시에 부모로서의 회초리에 가까웠을 것이다."

 반면 만물의 아버지는?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면서 무작정 회초리만 들었다."

 자식이 아직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심판을 내리려 하니 다른 신들로서는 '폭력'에 지나지 않았을 터."

 [만약 아버지가 지구의 사정을 좀 더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 이제는 의미가 없는 가정이구나.]"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루미너스 님. 루미너스 님께서는 할 일을 하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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