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58)화 (659/763)

 이윽고 최후의 보루였던 검문소의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기적을 행사한 아이작과 그 옆에 당당히 서 있는 백색 갑주의 여인, 케이트."

 그들은 검문소의 문이 열리자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살라는 두 남녀가 걸어오기 시작하자 다급히 방책 아래로 내려갔다."

 마음 같아서는 군대가 정말 물러난 게 맞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아살라가 두 남녀의 뒤를 따르자 다른 사람들도 홀린듯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홀린 것처럼 따라갔다."

 기사 계급에 해당하는 전사들은 물론이요, 급하게나마 총을 쥐고 있던 병사들까지. 여기서도 또 하나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툭- 투둑- 절그럭-"

 기사와 총병 가리지 않고 저마다 무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는 것. 만약을 대비하여 총구마저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렇게 아이작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공교롭게도 소식을 들은 민간인들도 집 밖으로 나왔다."

 저 분은······ 성자님?""

 어떻게 된 일이지? 정말 군대가 물러났나?""

 이, 일단 따라가자.""

 아이작을 보고 홀린듯이 따라가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그냥 따라가는 사람, 군중 심리에 휘말려 따라가는 사람 등등."

 순식간에 아이작의 뒤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럼에도 아이작은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이어 약 5분 정도 걸었을 때쯤. 아이작은 광장 중앙에 설치돼 있는 단상으로 올라섰다."

 원래 아살라가 독립운동을 펼칠 때 사용하던 단상이다. 공교롭다면 공교로운 일이다."

 ··· ···""

 케이트와 함께 단상 위에 선 아이작이 주위를 둘러봤다. 구릿빛 피부에 은색 눈동자를 지닌 민족들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실로 부담스럽다 못해 숨이 막혔겠지. 하지만 아이작은 여유로운 미소를 띄었다."

 ······군대는 물러갔습니다.""

 고요하디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작이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스타비르크 민족이 가장 원하던 결말."

 그 말에 스타비르크민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타비르크는 성자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아이작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는 물러갔지만, 이런 일이 다시 한 번 발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타비르크는 독립을 향한 열망이 강하니까요.""

 뜨겁게 과열되기 직전이었던 분위기에 찬물을 들이붓는 직언. 스타비르크 민족은 그 말을 듣고 침묵했다."

 그의 말이 많다. 비록 아이작이 막아줬다지만 스타비르크는 여전히 독립을 원했다."

 이런 일이 재차 반복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셈이다."

 그렇기에 여러분은 소수의 목소리가 활개치지 않도록 대응하셔야 합니다.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의 목소리에게 묻히도록.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어째서죠? 저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아이작의 말에 한 여인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작디 작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었다."

 억울한 심정이 그녀의 얼굴에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스타비르크가 멸망할 뻔했다."

 저희가 독립을 원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원한 건 아니에요.""

 그, 그렇습니다. 제논 님께서 기적을 행사하셨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순식간에 웅성거리기 시작한 좌중들. 사고를 친 걸 그들인데 어째서 자기가 피해를 입어야 하냐는 억하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실제로 억울한 건 맞다. 그 억울함을 알고 있기에 아이작이 직접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건 아니다. 이에 아이작이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 ···""

 ··· ···""

 ··· ···""

 어라. 이게 되네. 아이작이 손을 내밀자마자 군중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이작은 스스로도 놀랐기에 흠칫했으나 이내 여유를 되찾았다. 선동도 처음이 어렵지 자주 하다 보니까 익숙하다."

 양심이 찔리는 거? 이미 양심 같은 건 팔아먹을대로 팔아먹었는데 더이상 남는 것도 없다."

 더구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니 자기합리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다수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 옆에서 응원만 할 뿐, 시끄러운 소수가 난리를 칠 때 제지하지 않은 것.""

 ··· ···""

 저는 침묵하는 다수가 얼마나 무책임한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습니다. 바로 나치를 통해서 말이죠.""

 다시 시작된 나치 팔아먹기. 나치는 하면 안 되는 것만 쏙쏙 골라서 한 집단이라 이처럼 팔아먹기 편하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느닷없이 나치가 튀어나왔기에 의아해지겠지. 나는 여기서 지체하지 않고 폭탄을 떨어뜨렸다."

 저는 나치 독일이 실존하는 세상에서 왔습니다. 다시 말해 피와 강철은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실제로 제가 살던 곳의 역사죠.""

 예?!""

 말도 안 돼. 피와 강철이 실존하는 세계라니······""

 정말 그런 세상에서 오셨단 말이야?""

 당연하게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이미 '기적'을 체험했다."

 쉽게 믿는다는 뜻이다. 심지어 내 말이 완전히 거짓도 아닌지라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러분께서 제작하신 총. 그 총은 제가 살던 세계의 무기입니다. 마키나에서 발명한 전차. 제가 살던 세계의 강철 병기입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마지막으로 파시즘. 제가 살던 곳의 사상입니다. 저는 신들의 배려 아래에 그런 세상에서 넘어왔습니다.""

 ··· ···""

 나치가 공산주의들을 덮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작은 나치 독일과 연관된 명언 중, 인지도가 가장 높은 금언을 꺼냈다."

 마르틴 니뮐러 목사의 '처음 그들이 왔을 때'. 나치의 만행에 동조하지 않았어도 무관심으로 방조했던 이들을 비판하는 글이다."

 나치가 사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침묵했다. 그들은 사만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그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는, 그들을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운 소수가 절대적인 다수로 변해버린 것이죠.""

 ··· ···""

 억울하십니까? 억울하실 겁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소수와 같은 취급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도 죄악입니다.""

 물론 이번 사태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당초 불이 너무 크게 번졌다."

 나치 독일의 광기에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것처럼, 하마터면 세상이 광기로 휘말릴 뻔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홀릴대로 홀린 군중들은 아이작의 말을 '경고' 및 '예언'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은 기적을 통해 자비를 베풀었으나 다음은 없다라는 식으로. 예언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거라고."

 마키나에서 일어난 공산주의 혁명 전까지 드워프 공장들은 불합리한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일을 겪었습니다. 결국 혁명을 이루어 낸 건 가이스트였죠. 테르스 왕국의 제이로스 혁명 당시에도 혁명을 이끈 건 소수였습니다. 평화로운 다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

 정말로 실수라고 말하고 싶다면, 침묵하는 게 아니라 목소리를 내십시오. 침묵은 곧 암묵적인 동의입니다. 침묵만 고수한다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군주제와 민주주의의 절대적인 차이점이 바로 이것이다. 바로 민중들이 자신들의 힘을 깨달아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다는 것."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고 테르스 왕국의 제이로스 혁명이 그러했다. 하지만 그걸 역으로 이용한 것이 나치 독일이다."

 광기의 시대에 어울리는 광기의 산물.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완전히 불살라버린 집단."

 여러분은 강합니다.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는 약할지 몰라도 다수의 목소리는 매우 강력합니다. 하지만 나치 독일처럼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겠죠. 이에 여러분들께 감히 말씀드립니다.""

 아이작은 잠깐 숨을 골랐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 편히 쉬시면 됩니다.""

 ··· ···""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시다가 목소리가 필요할 때가 다가온다면, 그때 밖으로 나와 외치면 됩니다. 그러면 기적이 다시 한 번 펼쳐질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집으로 돌아가라는 아이작의 권유가 이어졌음에도 그 누구도 돌아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맨 앞에 서 있던 사람부터 시작하여 뒷사람까지 천천히 무릎을 꿇었으니까."

 광장에 우글우글 몰려있던 민중들이 경건하게 무릎을 꿇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해도 부족했다."

 목소리를 낼지어다······""

 목소리를 낼지어다······""

 침묵하지 말지어다······""

 침묵하지 말지어다······""

 심지어 신앙심 가득한 음성으로 구절(?)을 읆조리기까지.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들 스스로가 말한 것이다."

 아이작이 그 광경을 보며 당황하고 있을 때, 옆의 케이트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에 옆을 쳐다보자 케이트도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목소리를 낼지어다······""

 어째서 사람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한 건지 알 것 같다."

 이러다가 진짜 성자가 되는 게 아닌지 두렵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스타비르크민들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나에게 유리한 상황과 적절한 거짓말을 섞어 그럴듯한 말을 지어낸 거지, 이처럼 '숭배'를 받을 정도는 아니다."

 단신으로 군대를 막은 것도 맞고, 다른 세상에서 왔다는 것도 맞고, 나치 독일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왔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이정도일 줄은 나조차 상상도 못했다. 심지어 나를 보호하겠다고 나섰던 케이트는 아예 자기가 먼저 무릎을 꿇었다."

 제 계획대로군요.""

 예?""

 제가 예상했던대로라고 말했습니다. 아이작 님이라면 이런 행동을 하실 거라고 굳게 믿었죠.""

 방금 전에는 계획대로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떨떠름한 마음으로 케이트를 쳐다봤다."

 지구 출신 커밍아웃까지 한 이후,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길은 더욱 강렬해졌다. 언뜻 광기가 엿보인달까."

 분명 눈은 온화하고 맑기 그지 없는데 무서움이 느껴진다. 저런 게 맑은 눈의 광인이라 부르는 것인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나는 케이트와 함께 임시 정부 관저로 향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스타비르크 사람들이 엎드려 절하고 있다."

 담담한 표현이라 와닿지 않겠지만 진짜 엎드려 절하고 있다. 절이 아니라 신앙을 지닌 채 숭배하고 있는 모습."

 하마터면 나라가 송두리째 날아갈 뻔한 걸 간신히 막아줬으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영웅처럼 꽃이라도 흩뿌려줬으면 좋겠다. 고요하다 못해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이 분위기가 내 숨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목소리를 낼지어다······""

 침묵하지 말지어다······""

 지나가면서 구절 아닌 구절을 읊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도대체 내 말을 어떤 식으로 해석한 건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모세마냥 길을 터준 스타비르크 사람들 덕분에 관저까지 이동은 어렵지 않았다."

 곧바로 복귀하기도 그렇고 시간도 시간인지라 하룻밤 정도는 머물어도 충분하다."

 무엇보다 케이트가 옆에서 지켜줄 테니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

 케이트 씨.""

 네. 말씀하세요.""

 그······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암살범들은 용서할 생각은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서 더 문제다. 과연 암살범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졌으니까."

 과거, 악마 숭배자 암살자에게 하마터면 기습을 받을 뻔한 적이 있다. 그때 케이트가 아주 묵사발을 내놨지."

 심지어 자결을 할 수 없도록 치아란 치아는 모두 박살냈다. 그것도 발차기 한 방으로 말이다."

 이번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거죠?""

 피부를 전부 벗기고 소금에 절여버릴 겁니다.""

 ··· ···""

 너무 담담해서 순간 무슨 말을 했는지 헷갈렸다. 마실 나간다는 말투에 가까운데 내용은 살벌하다."

 그러나 현재 여론을 보면 그것조차 부족할 가능성이 높다. 부디 암살 미수범들에게 명복을 빌어주자."

 그럼 동조한 사람들은요? 암살미수범은 그렇다 쳐도 다른 자들은 아니잖아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벌레들은 벌레들답게 처리해야죠.""

 ······처리라함은?""

 화형입니다.""

 그래. 말을 말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참에 극단주의자들도 모조리 박멸시킬 수 있을 테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지."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호구가 아니다. 나를 해하려 한 사람들은 용서할 수 있어도 내 지인은 아니다."

 암살미수범의 원래 목표도 리나였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아니었으면 그냥 넘어갔겠지."

 '내가 넘어가도 다른 사람은 안 넘어갔겠지만.'"

 그리 생각하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관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관저에는 이미 아살라가 도착했기에 수월히 들어갔다."

 이미 내가 하룻밤 정도 머물고 간다는 걸 알고 있다. 내 예측이지만 성대한 환영을 펼치겠지."

 목소리를 낼지어다. 어서 오십시오, 제논 성자님.""

 ··· ···""

 성대한 환영이 아니라 경건한 환영이구나! 나는 알 수 없는 구절을 읊조리며 맞이한 아살라에 당황했다."

 도대체 이들의 머릿속에 내 이미지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설마 전생의 예수님이나 부처님급인 걸까."

 정말 그런 거라면 양심이 찔리다 못해 터질 것이다. 그 분들에 비해서 내가 성자의 자격에 한참 모자라다는 걸 안다."

 신이 될 수 있는 자격? 사실 그건 신앙이라기보다 '과학적인' 방법에 더욱 가까워서 크게 와닿지 않는다."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나는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살라를 보며 어색히 입을 열었다."

 부담스러우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에게 기적을 하사한 성자님께 누가 되지 않겠죠.""

 ··· ···""

 틀렸구나. 나는 아살라의 말을 듣고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여기에 더 압권인 건 케이트가 동조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 흡족한 미소가 악당처럼 느껴졌다."

 더 무서운 건 둘 다 '진심'이라는 것. 점점 두려워진다."

 하룻밤 머물고 가신다고 하셨으니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겠습니다. 케이트 추기경 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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