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세상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법 (645)화 (646/763)

 괜히 악덕 고용주가 된 느낌이랄까. 다시 되새겨보니 악덕 고용주가 맞구나."

 내가 비정상적인 연재를 하는 바람에 자연히 비정상이 된 상황이다."

 원래라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삽화를 그리면 됐겠지. 확실히 힘들긴 했겠네."

 다 우셨나요?""

 죄송합니다. 추태를 보였군요.""

 칼즈는 여운이 진하게 남아있는 얼굴로 나에게 사과했다. 특유의 마리오 수염은 건재하다."

 어쨌든 해방 아니 독립도 시켰겠다, 그의 계획이 조금 궁금해졌다. 지금도 칼즈의 다음 작품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많은 분들이 칼즈 씨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데.""

 어차피 그 관심도 제가 가만히 있으면 사라지지 않을까요?""

 싱글벙글한 얼굴로 웃는 칼즈가 그리 대답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옆을 바라봤다."

 아델리아도 때마침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표정을 보아하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행복할 때 판단력이 잘 서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 행복은 얼마 가지 않는다고."

 칼즈는 지금껏 나에게 굴려지다보니 현실 감각이 동떨어진 듯했다. 빈말이 아니라 내가 딱 저랬다."

 언제라고 묻는다면 제논 일대기 초창기라고 말하겠다. 그때 얼마나 간이 쫄깃쫄깃했는지."

 음······ 힘들지 않을까요? 칼즈 씨는 문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습니다. 특히 저와 다르게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죠.""

 전 그냥 그림들을 이어그린 겁니다만?""

 칼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드러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지금 그가 저지른 짓은 제논 일대기를 집필했을 당시 나보다 더 큰 폭풍이라 말할 수 있다."

 나는 원래 있던 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다면, 칼즈는 그냥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마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와 같달까. 앞으로 수많은 만화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리 된다면 칼즈 즈바사라는 이름은 반드시 따라붙겠지. 새로운 역사를 쓴 셈이다."

 신중히 생각하셔야 될 문제입니다. 앞으로 칼즈 씨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혹시 저를 붙잡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하시는 건 아니죠? 저 안 믿습니다.""

 ······예?""

 후우······""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하는 동안 칼즈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어서 두어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결연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머지 조언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느닷없이 과장된 몸짓으로 넙죽 엎드렸다."

 저에게 돈과 명예를 선물해주신 성자 제논이시여!!""

 칼즈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얼떨떨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 그는 나를 아이작이라 불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논이라 칭했다."

 그것도 앞에 성자라는 타이틀까지 붙이면서.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오랫동안! 빌어먹게 신세 많이 졌습니다!""

 아니. 저······""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할 말만 하고 쏜살 같이 밖으로 튀어나가는 칼즈다. 얼마나 빠른지 내가 잠시나마 인지하지 못할 정도다."

 보아하니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기 전에 도망가버린 듯했다. 업보라면 업보겠지."

 나는 순식간에 사라진 칼즈에 머리를 긁적거렸다. 동시에 옆의 아델리아가 조용히 물었다."

 잡아올까?""

 아냐. 됐어.""

 자기가 직접 두 발로 간 건데 뭘 어떻게 잡겠다고. 어차피 잡을 생각도 없다."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됐는지 명확히 인지해야 상황 파악이 되겠지.""

 네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그는 자유를 얻었지만."

 조만간 집 앞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책임을 얻게 됐다. 아무런 쾌락이 없는 책임을."

 이제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만."

 근데 앞으로 삽화는 어떻게 할 거야? 다른 사람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일단 당분간 삽화 없이 연재해야지. 삽화가 안 나오는 이유도 설명하고.""

 물론 핵폭탄만큼은 어떻게든 넣을 예정이다."

 이로서 칼즈가 엄연한 만화가로 독립되었으며."

 [제논 일대기 만화화와 피와 강철 만화화를 원하는 독자들이 조금씩 등장해······]"

 [칼즈 즈바사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수많은 지망생이 그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칼즈는 당분간 휴식을 원한다며 나중에 방문할 것을······]"

 고생길이 훤히 열렸다."

 아이작의 마수(?)로부터 벗어난 칼즈. 혹여 그가 다시 목줄을 채우기도 전에 집으로 도망쳤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뭘 했느냐. 놀랍게도 아무것도 안 했다.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

 편의를 위해 아이작이 선물해준 침대에서 뒹굴뒹굴거리거나 맛있는 걸 먹는 등."

 아무것도 안 했지만 최대한 아무것도 안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제논입니다. 현재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는 칼즈 즈바사 씨에 대해 알려드릴 말씀이······(중략)······ 하여 칼즈 즈바사 씨는 더이상 제가 품을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삽화가를 구인할 때까지는 연재분에 삽화는 추가되지 않을 예정이며······]"

 [혹여 칼즈 씨를 위협하시는 분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조치할 예정입니다. 앞으로 쭈욱 친밀한 관계를······]"

 [앞으로 만화가 칼즈 씨에게도 많은 성원과 열정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이작이 칼즈와의 협업이 끝났다는 사실을 밝혔다. 어차피 알려질 거 보호도 할 겸 공지를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칼즈가 독립했다는 사실에 대부분 납득할 수 있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칼즈의 삽화를 피와 강철에서 못 본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삽화를 못 본다면 대신 '만화'를 보면 되지 않은가?"

 아이작이 경고했던 것처럼 '위협'을 주지 않고 적당한 '합의'를 거치면 되지 않은가?"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만화와 관련된 부분은 제가 아닌 칼즈 씨에게 부탁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만화가가 아닌 소설 작가니까요.]"

 그리고 아이작은 여기에 불씨를 떨어뜨렸다. 원래라면 큰 불로 번지지 않을 작디 작은 불씨다."

 문제는 이미 땔감이 훌륭하게 쌓여있었다는 것. 칼즈가 선보인 만화 하나로 수많은 독자들이 기대를 품었다."

 저만한 그림체로 제논 일대기 혹은 피와 강철을 만화화한다면? 그 연출로 눈을 즐겁게 만든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즐거워질까!"

 제논 일대기는 헬리움과 알븐하임이 협업하는 '영화'가 있다. 하지만 영화는 1년에 한 번 꼴로 개봉한다."

 안 그래도 유흥거리가 너무 없다보니 사람들은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제논이 그러했듯이 칼즈 또한 지루한 일상에 활력을 넣어줄 사람이라는 것을."

 하······ 이게 자유구나.""

 정작 본인은 세상 밖에 관심이 없다는 게 흠이다. 칼즈는 그동안의 한을 풀겠다는 듯이 한없이 빈둥거리고 있었다."

 이처럼 여유를 가져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여기에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면 더없이 훌륭하다."

 역시 취미는 취미로 남는 게 가장 훌륭하다. 취미가 일이 되어버리니 속이 콱콱 막히는 느낌이다."

 더이상 그런 일은 없다. 평생 먹고 놀아도 될 돈까지 벌었으니 한량처럼 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자기가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평화로운 일상에 불청객이 난입했다."

 정식 연재······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떻습니까?""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출판사 사장, 머스크가 칼즈를 방문한 것이다."

 아이작과 협업을 했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은 방문을 꺼렸지만, 머스크는 다르다."

 이미 안면을 익힌데다가 아이작 산하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방문이 가능했다."

 현재 칼즈 님은 만화의 선구자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제가요?""

 모르셨습니까?""

 네.""

 칼즈의 대답에 머스크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게 바깥은 난리도 아닌데 정작 본인은 모른다."

 아이작조차 세간의 반응은 꾸준히 확인했다. 그래서 더욱 조심, 또 조심하며 정체를 숨겼지 않았는가."

 그런데 칼즈는 그것도 아니다. 아예 관심조차 없는지 본인이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태풍의 눈. 머스크는 일단 상황부터 상세히 알려주기로 정했다."

 현재 칼즈 씨께서는 문화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난번 공개했던 그 만화 하나로 말이죠.""

 그정도입니까?""

 이제서야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칼즈다. 아무래도 진짜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느라 몰랐던 모양이다."

 머스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좀 더 상세히 설명했다. 칼즈의 만화가 등장한 이후 사람들이 목매어 기다린다는 식으로."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 중 어떤 걸 만화화할 건지는 상관없다. 단지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고 말했다."

 ······제 만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삽화가 아니라?""

 네. 칼즈 씨는 이제 평범한 화가가 아닌 최초의 만화가입니다. 아이작 님과 협업하는 삽화가가 아닌, 독립된 만화가로서 명성을 쌓을 절호의 기회죠.""

 명성······""

 칼즈는 명성이라는 단어를 듣고 작게 중얼거렸다. 취미라고는 하지만 그도 한때 예술가로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비록 특유의 그림체와 의미를 담는 데에 소질이 없어 무산됐을 뿐, 욕심이 아예 없는 건 또 아니다."

 아이작에게 갈려나갔을 때는 그 욕망을 잃어버렸으나 머스크의 설득을 듣고 점점 싹트기 시작했다."

 한 번쯤 독립된 예술가로서의 명예를 얻고 싶다는, 그런 욕심이."

 이에 그는 약간 고민하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유는 보장돼 있습니까?""

 네?""

 아이작 님의 삽화가로 활동했던 때처럼 마감에 쫒기는 게 아닌, 제 개인 시간이 있는지 물어보는 겁니다.""

 ······아.""

 순간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머스크는 곧이어 깨달았다. 살인적인 마감에 쫒기듯이 그렸던 칼즈의 노예 생활을."

 그때는 머스크가 봐도 이건 좀······ 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적어도 본인은 효율을 중요시하기에 아이작처럼 갈아넣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칼즈는 본인의 자유 시간을 원하는 듯했다. 솔직히 이건 정말 쉬운 문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작가가 갑이다. 이건 변하지 않는다."

 물론입니다. 칼즈 님이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휴재를 할 수 있고, 연재도 본인이 원하시는 대로 하면 됩니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자유가 보장되면서 명예까지 얻을 수 있다. 돈이 필요없는 칼즈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다."

 바로 계약해도 되겠습니까? 칼즈 님인만큼 최대한의 편의를 드릴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큰 돈은 필요없습니다. 대신 제 개인 시간만큼은 챙겨주십시오.""

 어우. 그거야 당연하죠.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머스크는 계약서를 들고 오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그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사인을 해야됐으니."

 그동안 칼즈는 여유를 가지며 잠자코 기다렸다. 자유만 보장되면 똥밭에서도 구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말이 있다. 행복할 때 결정하면 큰 코 다친다고."

 자. 여기 있습니다. 원래라면 칼즈 님이 7, 출판사가 3입니다만······ 저희가 4로 해도 되겠습니까?""

 5로 해도 상관없습니다.""

 크흠······!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그러면 제 양심이······""

 괜찮습니다.""

 칼즈는 모처럼 느껴본 자유에 너무 젖어버린 나머지 본인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머스크가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다. 그도 생각이 있는만큼 최대한 칼즈의 편의를 보고 있었으니까."

 단지 계약서의 내용이 사실과 달랐을 뿐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머스크가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다."

 만화는 역시 제논 님의 작품을 선택하실 건가요?""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저만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무리인지라.""

 괜찮습니다. 첫 시작으로 제논 님의 작품만한 것도 없으니까요. 현재 영화로도 제작되는 중이고.""

 머스크는 물론이요 칼즈도 어차피 제논의 작품을 만화화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전에 아이작은 2차 창작 및 그걸 통해 수익을 얻어도 상관없다 했으니까. 저작권을 죄다 풀어버렸다."

 따라서 칼즈가 아무런 작품을 써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다. 훌륭한 소재가 바로 옆에 있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이하 갑(칼즈)은 만화가로서 활동을 시작하겠습니다.]"

 계약서는 대충 저런 내용이다. 칼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계약서에 사인했다."

 설령 머스크가 사기를 쳐도 상관없었다. 곧장 아이작에게 고자질하면 끝이니까."

 머스크도 사기를 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윈윈이나 다름없었다."

 단지 계약서 '안'에 담겨있는 내용이 겉과 조금 달랐을 뿐이지."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칼즈와 머스크는 서로의 이해 속에서 손을 마주잡았다.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모두가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 때, 계약서에 담겨있는 진짜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이하 을(칼즈)은 아이작의 노예가 아닌, 세상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머스크는 결코 사기를 치진 않았다. 세상이 칼즈에게 사기를 쳤을 뿐."

 연재는 언제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그것도 칼즈 님의 마음이죠.""

 하하하! 그거 좋군요!""

 참고로 덫붙여서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 모두 30권이 넘는 분량을 자랑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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