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그 옆에 새로운 게 생겼을 뿐이다. 심지어 코너마저 '만화'라는 이름으로 지어져 있었다."
전에 없던 단어도 단어지만 그 코너에 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번에 나온다는 그 작전 아닌가?'"
제목부터가 피와 강철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청년은 홀린 듯이 잡지 비슷한 책을 집었다."
서서 보기를 방지하기 위함인지 줄로 밀봉돼 있었다. 대신 가격은 그리 비싼 편이 아니었다."
두께도 피와 강철보다 훨씬 얇으니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작가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칼즈 즈바사? 내가 아는 그 칼즈가 맞나?'"
칼즈도 흔히 볼 수 없는 이름이나 성은 더욱 보기 힘들다. 즈바사라는 어원 자체가 고대어에서 따온 거라고 했으니."
다시 말해 이 얇은 책의 저자가 칼즈라는 것이다. 평소 칼즈의 그림을 눈여겨 본 청년으로서는 의문이 차올랐다."
제논과 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한 칼즈의 책. 궁금해서라도 질러야 될 것 같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총 65실버입니다.""
거인과 붉은 군대가 각각 30실버이니 5실버는 칼즈의 책이다. 책의 두께를 고려하면 적당한 가격이다."
뒤이어 청년은 책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서 빨리 칼즈가 무엇을 그렸는지 보고 싶었다."
팔락-"
피와 강철 신간이 아니라 칼즈의 책부터 넘기는 청년. 그러나 청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왜냐하면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온 한 문구 때문이었으니까."
[이 책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피와 강철: 거인(8)을 먼저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피와 강철: 거인 8권을 먼저 읽어달라는 양해문이다. 청년은 그 문구를 읽고 더욱 의아해졌다."
8권은 이번에 발매된 신간이다. 아까 전 세트로 샀던 책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어째서 8권을 먼저 읽어달라 부탁한 걸까."
청년은 의아함도 잠시, 일단 원하는대로 소설부터 읽기로 정했다. 괜스레 문구대로 안 했다가는 손해를 볼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
'와······'"
물론 그렇다 해서 피와 강철이 재미없다는 건 아니었다. 특히 이번에 보여주는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작전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첩보전 및 기만전술부터 시작해서 상륙 직전의 포격과 폭격까지."
이처럼 지원을 빵빵하게 받아 상륙작전은 수월하게 진행됐으나, 딱 한 곳만이 지옥도로 변했다."
훗날 피의 오마하 해변이라고 칭해지는 장소. 이곳은 그야말로 죽음이 총알처럼 스쳐가는 곳이다."
스탈린그라드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죽음이 역병처럼 변했다면, 오마하 해변은 죽음이 파도처럼 세차게 몰아친 격이다."
'어우······'"
너무 적나라한 표현에 청년은 눈쌀을 찌푸렸다. 빠져나오는 내장을 움켜쥐며 엄마라 외치는 병사가 머릿속에 생생히 재생됐다."
이외에 포탄으로 팔다리가 분해되는 병사라던지, 얼굴에 포탄이 정확히 적중하여 함몰된 병사라던지 등등."
어쩜 이렇게 다채로울 수가 있는지 궁금하다. 마치 본인이 직접 그 상황을 경험한 것 같다."
'진짜로 경험했을지도?'"
신이 데려온 성자였으니 비슷하게나마 경험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도 착각이 쌓여간다."
어쨌거나 오마하 해변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마쳤다."
연합군의 수많은 병사들이 정예병으로 탈바꿈됐을 뿐더러 나치 독일의 병사는 모조리 갈려나간 결과."
많은 사람들이 추측했듯이 이번 상륙작전은 추축국의 명줄을 사실상 끊어버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아, 맞다. 이것도 읽으라 했었지?'"
피와 강철: 거인의 신간을 모두 읽은 청년은 문득 칼즈의 작품이 떠올랐다."
동시에 한 가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신간에 '삽화'가 없었다는 것."
매권마다 꼬박꼬박 삽화를 넣는 칼즈인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삽화가 전혀 없었다."
물론 아이작의 능력이 능력이다보니 머릿속으로 상상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너무 적나라해서 문제였지만."
팔락-"
어?""
칼즈의 작품을 넘긴 그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칼즈의 작품인만큼 그림으로 추측하긴 했다."
하지만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칸이 나뉘어져 있을 뿐더러 그 칸마다 그림이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특히 눈에 띄는 건 바로 대사다. 그 안의 인물이 말하는 것처럼 대사칸이 따로 존재했다."
아이작이 봤다면 '말풍선'이라 칭해질 대사칸. 청년에게는 신문물이나 다름없었다."
··· ···""
청년은 말없이 그림을 읽으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전체적인 화풍은 칼즈답게 전체적으로 실사에 가깝다."
무엇보다 가장 돋보이는 건 '연출'이다. 포격이 실패로 돌아가 상륙하자마자 쏟아지는 기관총 세례."
평소 표현력 하나는 기가 막혔던 칼즈였던만큼 '드르륵!' 거리는 효과음도 친히 추가시켰다."
또한 총탄이 관통돼 죽음을 맞이하는 병사나, 포격으로 몸이 붕 떠버린 병사, 화염방사기가 폭발해 불에 휩쓸린 병사."
이중 백미는 쇼크로 멍해진 장교의 시점이다. 장교가 정신이 나가있는 동안 한 컷 한 컷 주변의 상황을 전부 보여줬다."
장교가 고개를 돌리면 팔이 잘린 병사가 서성이고, 또다시 고개를 돌리면 공포에 질린 병사를 보여준다.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까지."
이것들 모두 방금 전 읽은 피와 강철에서 등장하는 장면들이다. 그 장면을 굉장한 '연출'을 통해 전부 표현했다."
평범한 예술가들은 결코 따라하지 못하는, 칼즈만의 개성이 전부 표현된 '예술'이었다."
와아······""
방금 전과 다른 의미로 감탄하는 청년. 그는 끝까지 집중하며 완독했다."
그림으로 전부 표현되는지라 다 읽는 데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생전 처음 맞이한 '만화'의 위력에 여운은 길게 이어졌다. 새로운 문화를 접한 느낌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한 가지."
······설마 이것밖에 없나? 더 안 그리는 건 아니겠지?""
다음 권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이었으며."
[새로운 예술 문화의 등장? 칼즈 즈바사의 그림 모음집, 만화.]"
[피와 강철의 스토리라인을 그대로 이어가지만, 전혀 독립된 문화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하다.]"
[단순히 그림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건 의미가 아닌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다!]"
새로운 거장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만화는 지구에서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는 문화다."
특히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대한민국에서 만화를 한 번도 안 읽은 사람은 없다."
소설은 상상력에 한계를 두지 않지만 아무래도 직관적이지 않고 접근성과 편의성이 떨어진다."
지구의 아이들이 글보다 만화를 선호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만화는 소설처럼 길게 읽을 필요가 없으니까."
솔직히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지구에서도 만화보다 접근성 및 편의성이 뛰어난 문화는 거의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칼즈가 선보인 최초의 만화가 큰 관심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물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보여줬지 않았는가."
[한 장의 그림이 아니라 여러 그림들이 조화를 이루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건 새로운 예술이다. 이야기를 보여주는 그림들이라니,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는가?]"
당연하게도 세상은 칼즈의 만화를 보면서 무수한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평소에 칼즈는 저평가 당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번에 보여준 만화로 모두 역전시켰다."
우선 그림체부터 칼즈 특유의 그림체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전생의 일본 그림체에 가까웠다."
그렇다 해서 안 어울리는 건 아니다. 일단 유혈이 낭자하는 것부터 그림체고 나발이고 의미가 없었다."
일본 그림체는 눈을 크게 그리는 것도 아니고 실사에 가까운 그림. 애당초 그런 기법 자체가 발명되지 않았으니 충분하다."
'애당초 원래부터 이런 그림체였으니까.'"
헥토파스칼 킥부터 시작해서 선물이랍시고 받았던 릴리의 나신 그림이 있다. 속칭 야짤이라 부르는 그림."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칼즈의 그림이 일러스트 및 만화에 아주 잘 어울린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직접 스카우트한 거고."
물론 만화를 그린 건 자기가 알아서 그린 거다. 수 개월이 넘는 시간동안 갈리고 갈리다보니 자기가 알아서 레벨 업을 한 느낌."
[그림 한 장 한 장에 영혼을 갈아넣은 것 같다. 10페이지에 빠져나온 내장을 움켜쥐며 엄마라 외치는 병사를 집중해라. 마치 정말로 내장이 튀어나온 것 같지 않은가?]"
[인체 구조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치 실제 사람이 싸우는 것 같다.]"
만화에서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인체 구조도 칭찬일색이었다."
만화에서 가장 어려운 게 뭔가 하면 그림체 다음으로 인체 구조로 알고 있다."
흔히 말하는 '역동감'을 표현하기 위해 인체 구조를 공부해야 된다는 것이다. 대신 의사마냥 해부학을 전공할 필요는 없다."
어떤 부분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지만 알면 된다. 어딘가의 만화처럼 팔다리가 고무처럼 늘어난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헥토파스칼 킥 및 릴리 야짤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칼즈는 이런 부분도 잘 하는 편이다. 작금의 예술과 거리가 멀 뿐, 실력은 출중했다."
[신기하게도 읽기가 쉽다. 영화처럼 캐릭터의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느낌이다.]"
[대사가 그림을 차지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술술 읽혔다.]"
두 번째로 가독성. 만화에 무슨 가독성이라 할 수 있는데, 가독성도 의외로 중요하다."
전생에서 가끔 읽기 힘든 만화나 웹툰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런 것과 비교하면 훨씬 알아차리기 쉽다."
특히 가독성은 전투씬 즉, 액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칼즈는 무려 뼈와 살이 난무하는 '전쟁'에서 가독성을 챙겼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그가 정말로 시대를 초월한 천재라는 걸 느꼈던 부분."
[이중 단연코 눈에 띄는 건 바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다. 포탄에 맞아 날아가는 시체를 표현한 것을 보아라.]"
[총탄이 투구에 튕기는 묘사가 일품이다. 선으로 총탄이 날아와 튕겼다는 걸 표현했다.]"
그건 바로 '연출'이었다. 정말로 영혼을 갈아넣었는지 연출에 대단히 신경 쓴 티가 팍팍 났다."
만화는 그림체와 해부학도 중요하지만, 그중 단연코 압도적으로 중요한 게 바로 연출이다."
연출이 없으면 그냥 그림이지 만화라 할 수 없다. 칼즈 같은 경우는 '칸' 배분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쉘 쇼크로 인해 멍해진 주인공이 주변을 둘러볼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었다. 우선 칸의 반을 주인공의 얼굴을 그렸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화염에 휩싸인 병사들을, 왼쪽을 보면 상륙정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총탄에 맞는 병사들을."
마지막으로 부하의 외침에 서둘러 정신을 차려 다시 전투에 돌입한다. 이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천재인지 알 수 있다."
'벙커에서 기관총을 쏘는 독일군의 시점도 잘 표현했고······'"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터득한 거다. 그런데도 만화의 골자들은 전부 꽉꽉 담아놓았다."
소위 말하는 불세출의 천재만이 가능한 일. 이걸 일일이 고려했든 안 했든 그가 시대를 한참 뛰어넘었다는 건 변함이 없다."
'이제는 놓아줘야겠네.'"
내가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넘어섰다. 이제는 나만의 작은 일러레가 아닌, 엄연히 독립된 예술가로 성장했다."
그 성장도 내가 강제적으로 시킨 거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더이상 저평가 당할 일도 없으니 좋은 게 좋지 않은가."
그런 의미로-"
여태까지 고생하셨습니다, 칼즈 씨.""
예?""
이제는 제가 품을 수 있는 그릇이 안 될 것 같네요.""
칼즈를 불러서 속마음을 그대로 밝혔다. 칼즈는 내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 그대로 영혼을 갈아넣은 탓에 상당히 초췌해진 칼즈. 그는 내 말을 듣고 떨떠름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은 즉······ 피와 강철의 삽화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겁니까?""
네. 신문 보셨죠?""
보긴 봤습니다만······""
이대로 삽화가로 남기에는 칼즈 씨의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아서요.""
이건 진심이다. 마음 같아서는 '히히. 못 가!'라며 칼즈를 붙잡고 싶다. 어디 가서 그만한 실력자를 찾기는 힘드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를 붙잡는다면 선지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과 같다.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짓은 절대 안 한다."
칼즈는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하기야 그는 휴가를 원했지 독립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
이에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장난식으로 말했다."
저도 칼즈 씨의 작품이 궁금해서요. 피와 강철의 삽화를 그릴 바에야 칼즈 님만의 작품이 낫지 않겠어요?""
아······""
앞으로 잘 챙겨보겠습니다. 만화가 칼즈 씨.""
그 말을 하고나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칼즈의 표정이 점점 격양되기 시작했다."
뒤이어 마치 폭발한 것을 간신히 참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세상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뜨아아아아아!""
개운함과 해방감이 듬뿍 들어있는 외침. 기지개를 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긴 그동안 많이 갈아넣긴 했지. 칼즈가 아니었더라면 마감은커녕 제안조차 못 했을 것이다."
따흐흑. 이제 편히 잘 수 있어. 밥도 제대로 챙겨먹을 수 있다고!""
··· ···""
나는 땅바닥에 엎드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칼즈를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그정도로 갈아넣었던가."
이에 말없이 옆을 쳐다보니 아델리아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칼즈가 저 정도 반응이냐는 얼굴이다."
난 돈은 충분히 지불했어.""
돈으로도 시간은 못 사.""
음.""
저리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지네. 나는 통조림에 익숙해져 시간 개념이 거의 없어졌다지만 칼즈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