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7 - 축구(1)
TRPG를 진행하면서 간과한 게 두 가지가 있다.
"혹시 책으로 상대방을 때려도 돼요?"
"어······ 가능합니다."
"이 불경한 자가!! 난 그저 기도문을 잊어버렸을 뿐, 신을 향한 신앙은 변하지 않았다! 라며 불신론자의 머리를 책으로 내려찍을게요."
"··· ···"
아이들의 상상력과 연기력은 무한하다는 것이고.
[흠. 무기와 체술을 이용한다라. 석상 치고는 굉장히 독특한 능력이군. 하지만 석상인만큼 경직된 부분이 있을 거야. 그 점을 노리도록 하지.]
"··· ···"
세상을 구했던 용사의 경험과 노련함은 내 말빨로도 대처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심지어 클라크 할아버지는 지능이 상당히 높은지라 주사위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이처럼 아침에는 아리엘과 아이들의 게임 마스터가 되고, 저녁에는 가족들의 공공재가 되면서 하루하루가 바빠졌다.
그렇다고 매일 붙잡는 건 또 아니었다. 나도 할 일이 있는만큼 가끔 가다가 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게임은 원래 가끔 해야 재미있는 법. 무엇보다 콜 오브 듀티도 있었기에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
'뭔가 독을 뿌린 느낌인데······'
콜 오브 듀티만으로도 상상을 뛰어넘는 흥행을 거두고 있는데 여기에 TRPG까지 퍼뜨린다?
어쩌면 TRPG가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컴퓨터도 없는 세상에 TRPG는 유일한 RPG 게임이라 할 수 있으니.
물론 내가 직접 설정을 짜고 만들지 않는 이상 널리 퍼질 일은 없다. 역할 놀이인만큼 여러모로 힘든 점도 많고.
그래서인지 TRPG보다는 콜 오브 듀티 쪽에 관심이 쏠려있는 상황이다.
또한 영지에 트레이딩샵이 생기면서 예상대로 만남의 광장이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카드를 합의 하에 서로 교환해도 되고, 아니면 그저 평범하게 게임을 해도 된다.
콜 오브 듀티뿐만 아니라 다양한 보드 게임도 있었기에 보드 게임방이라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당부하는 거지만 여기서 도박은 절대 안 됩니다. 하는 순간 바로 폐점할 거예요."
"그럼 카드를 걸고 게임을 하는 건 어떻게 할까요?"
"··· ···"
벌써부터 어둠의 듀얼이 나오는 건가. 아무튼 이것도 도박이라고 지정했다.
카드에 가치가 있으니 걸고 하는 건 도박이지. 다만 애들끼리 장난식으로 하는 건 대충 눈 감아 줬다.
원래 도박의 기준은 금액이다. 100원으로 하는 건 괜찮아도 단위가 만으로 넘어가는 순간 도박이다.
다만 시대가 시대다보니 돈을 걸면 무조건 도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지금은 카드라는 꼼수를 이용해 약간이나마 완화했을 뿐이다.
[점차 문화 도시로 성장하는 마이샬 영지. 제논이 존재하는 이상 독립된 영지나 다름없다.]
가끔 몇몇 사람이 마이샬 영지가 제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는 중이라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다.
문화 도시로 성장하면서 제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고, 곧 있으면 리나와 정략혼까지 맺을 예정이다.
단지 제국의 권력을 초월했을 뿐,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최소 몇 백년은 흘러야 가능하다.
리나와의 정략혼도 스타비르크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장치를 건 것과 같다.
[더 많은 마력 기관차가 필요하다. 공장의 가동으로 석탄의 수요가 폭증하는 중.]
[헬리움. 석유를 이용해 포장도로를 설치할 것. 보다 더 편한 도로가 지어질 예정이다.]
[벨루아 공국. '정거장'의 설치를 제안하다. 미네르바 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가 동의하여······]
[마키나에서 발발한 발명 대결? 비행기와 철갑함 중에 무엇이 더 빠를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빠르게 변화했다. 습득력이 빠른 인간조차 허둥지둥거릴 정도로 빠른 변화다.
대공황으로 빌빌거렸던 미네르바 제국은 공장과 마력 기관차의 재빠른 도입 이후 산업화를 이루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일감이 폭증했다.
대공황 당시에는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아 앞이 캄캄했다면 지금은 거친 파도에 휩쓸려 열심히 헤엄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콜 오브 듀티까지 발매해버렸으니 지도자 입장에서는 나를 십새끼라 칭해도 할 말이 없다.
"그냥 글만 써주면 안 될까?"
지금의 리나처럼. 우아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어딘가 해탈한 얼굴이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콜 오브 듀티가 툭- 하고 튀어나오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겠지.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이번 일은 나도 약간 억울하다. 나는 한 발 떨어져 지켜보는 거지, 전반적으로 머스크의 총괄이다.
"콜 오브 듀티는 내가 아니라 머스크 씨가 한 건데?"
"그래. 네 말대로 머스크 사장이 콜 오브 듀티를 전체적으로 담당하고 있지. 하지만 듣자하니 게임 방식 자체는 네가 주도한 거라며?"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네."
리나는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그것 보라는 듯이 한 쪽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말할 거야. 세상에 뭔가 이상한 일이 있다면 다 너 때문이라고. 동의하지?"
"영국 같은 놈이라고?"
"영국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만 너 같은 국가였다는 건 알겠네. 아무튼 맞아."
이거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다. 지금도 그런 평가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어쩌다가 이런 놈이 튀어나왔을까? 라는 의문이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다. 역사의 흐름을 무시하는 위인이라고.
간혹 가다가 역사의 흐름을 뒤트는, 흔히 'if'에 해당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으로 치자면 이순신이 있겠지.
그러나 나는 역사의 흐름을 뒤트는 수준이 아니라 무시하는 수준이다. 기술과 경험이 쌓여 차곡차곡 발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고 있다.
"신들께서 너를 보호해줘서 망정이지,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어. 악마숭배자가 선동해서 너를 모함하면 어떻게 하려고?"
"어떤 식으로 모함한다는 거야?"
"네가 곧 신들의 방패막이가 된다는 식으로. 실제로 대공황 때문에 너를 욕하는 사람이 많았잖아."
"흠."
일리 있는 말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와 신은 다소 위태위태한 관계로 보이겠지.
하지만 리나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신들조차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
이걸 모르니 신이 나를 방패로 세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운명공통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도 나름의 카드가 있으니까."
"그러면 다행이긴 하다만······ 최근 변화가 너무 급격해서 그래. 네가 두각을 드러낸지 고작 2~3년밖에 되지 않았어. 그런데 세상은? 거의 몇 백년 앞당겨졌다는 평가를 받는 중이야."
"뭘 원하는 건지 말해줄 수 있어?"
"아무렇게나 싸지르지······ 큼큼."
리나가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평소 고귀한 말투를 사용하는 그녀마저 비속어를 쓸 정도면.
잠깐 사고가 있긴 했지만 그녀는 헛기침을 하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에게 부탁했다.
"네 세상에 있던 문화를 퍼뜨리는 건 괜찮아. 좋은 문화를 퍼뜨리면 우리야 좋지. 하지만 조금만 더 신중했으면 좋겠어. 이번에 발매한 콜 오브 듀티도 사행성으로 논란을 낳았잖아?"
"음······"
"내가 말하는 건 건강한 문화야. 콜 오브 듀티처럼 사행성은 일절 없고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문화."
"축구 같은 거?"
나도 모르게 대답이 바로 나왔다. 지난번 루미너스와 대화하면서 축구도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데에는 축구만한 것도 없다. 호불호가 갈리는 다른 게임과 달리 남녀노소 구분 없이 즐기는 문화.
다른 사람에게는 내 전생을 보여주면서 축구를 알고 있지만 리나는 모르고 있다. 이에 그녀가 눈을 깜빡거리면서 말했다.
"······축구? 그건 또 뭐야? 피와 강철에서 몇 번 언급된 건 아는데."
"공놀이의 일종이야. 가끔 가다가 평민들이 동그란 물건을 발로 차면서 놀잖아? 사형수의 머리를 가지고 논다는 소리도 있고."
"그랬던가?"
리나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뭐지 싶었지만 그녀의 직위를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다.
리나는 미네르바 제국의 황녀다. 그것도 국정의 일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실권자 중 한 명.
백성들이 밥을 잘 먹고 다니나, 나라의 국고가 쌓이고 있나 정도만 확인하면 그만이지, 놀이에는 관심이 없을 확률이 높다.
콜 오브 듀티는 나와 머스크가 합심해서 만든 데다가 종교계에서도 경계했기에 관심을 기울인 거지, 그 외의 놀이는 크게 관심 없을 것이다.
'신체를 단련하는 운동이라 해봤자 기사들이 훈련하는 것만 봤을 테니까.'
다시금 리나가 황녀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국정에 이리저리 치이는 공무원임과 동시에 독특한 성벽을 가진 여자인 줄 만 알았다.
"매우 불순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착각이야. 어쨌거나 축구가 어떤 거냐면······"
일단 내가 아는대로 축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줬다. 리나는 내가 살던 곳에서 가장 유명한 운동이라 하니 금새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대략적인 설명이 끝난 후, 리나의 반응은 사뭇 볼만했다.
"재미없을 것 같은데? 고작 공 하나 가지고 서로 싸우는 거잖아."
"그 말을 브라질이라는 나라에서 했다면 총 맞았을 거야."
"정말 그 정도야? 신기하네."
10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낫겠지만 지금은 힘들다. 리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어서 금방 가야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축구에 부정적인 이유는 이미 기사들간의 마상 시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볼거리가 떡하니 있는데 굳이 다른 볼거리를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아니면 말고. 굳이 미네르바 제국이 아니어도······"
"뭐가 필요한지 말해줄 수 있어?"
허나 리나는 이미 나를 지식 보따리로 취급하고 있다. 뭐가 됐던 간에 풀기만 하면 대성공을 이루는 지식 보따리.
하물며 미네르바 제국은 늘 그렇듯이 문화가 매우 고픈 상태다. 마이샬 영지 덕분에 꾸역꾸역 성장하고 있으나 너무 한정적이다.
제논 일대기와 피와 강철로만 먹고 살기에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더군다나 나라는 존재 자체부터 황제를 초월한 수준이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지금 일이 바쁘니까 축구는 천천히 생각해볼게. 여의치 않으면 네가 먼저 퍼뜨려고 되고.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는 문화라는 건 확실해 보이니까."
"알았어."
그로부터 이틀이 흐르고, 피와 강철 신간이 발매되었다.
[유대인의 절멸이 시작되었다. 죽음의 수용소가 가동되다!]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 그들은 동물이 아니라 벌레와도 같은 죽음을 맞이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는 것인가? 최소한 인간으로서 죽을 권리를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청색 작전과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하기 직전 가동된 '가스실'.
차마 인간이 행한 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학살의 현장에 독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잔인한 일을 저질렀다면, 나치 독일은 차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평가다.
[나치 독일을 죽입시다. 나치 독일은 악마의 현신입니다.]
[부디 처절하게 짓밟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과 소련 중에 과연 누가 베를린을 밟을 것인가?]
추축국을 향한 분노가 커지는 건 덤이다.
이후에는 청색 작전과 미드웨이 해전의 전조에 대해 설명했으며 유명한 전투들이 연달아 등장할 예정이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현세에 나타난 지옥,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미국과 일본은 거대한 바다 위에서 펼쳐진 해전과 공중전, 미드웨이 해전을.
[새로이 업데이트 된 콜 오브 듀티. 나치 독일의 하향과 소련의 상향. 일본은 그대로이며 미국은 공군이 상향되었다.]
신간에 맞춰서 콜 오브 듀티 또한 업데이트됐으며.
[밖에 나가서 뛰어놀지 않고 콜 오브 듀티만 하는 아이들. 부모들의 걱정 어린 시선이 늘어나다.]
축구를 일찍 보급할 이유가 생겨버렸다.